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1950-90년대 미술단체 흐름, 그 실상을 보다

김달진

1950-90년대 미술단체 흐름, 그 실상을 보다

김달진(김달진미술연구소장,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장)

 

 

 

Ⅰ. 미술단체의 이모 저모

Ⅱ. 장르별 미술단체

1. 한국화

2. 서양화

2-1. 사실, 구상계열

2-2. 추상, 설치미술

3. 조각

4. 공예, 디자인

5. 서예

Ⅲ. 미술단체 공모전, 후원회원

Ⅳ. 미술단체 간행물

Ⅴ.이념 부재의 미술단체

 

미술전시회 활동은 크게 개인전과 단체전으로 구분한다. 개인전은 작가 한사람의 작품을 보여주는 전시회이고 단체전은 여러 명의 작품으로 이루어진 전시를 말한다. 단체전은 미술관, 화랑, 큐레이터 등의 기획에 의해 한번으로 끝나는 전시와 연례적으로 거듭되는 전시가 있다. 여기서 언급하는 미술단체는 연례적 또는 정기적으로 작품발표를 위한 회원전을 갖는 모임을 말한다. 이 미술단체의 성격을 보면 주로 출신학교, 지역, 장르, 작품 성향으로 이루어진다. ○○대학 ○○학과 졸업동기, ○○학과 출신의 범동문전, ○○교육원 출신, ○○제자 모임 등 주로 학연으로 뭉치는 경우가 많으며 지역 모임 또는 ○○지역 출신작가, 같은 경향의 작업을 하는 작가, 또는 여성작가끼리 모여 단체를 만들어 1년에 한번 이상 씩 전시를 갖게 된다.

 

Ⅰ. 미술단체의 이모 저모

한국의 미술단체는 얼마나 될까? 정확한 통계자료가 없다. 단체라고 불리우는 것은 같지만 적게는 10명 이하의 학과 졸업동기 모임에서 많게는 1천명 이상의 회원을 가진 단체도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예술정책과에 등록된 사단법인 단체들로는 <한국프로사진협회>, <한국미술협회>, <한국사진작가협회>,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한국청소년미술협회>, <한국일요화가회>, <현대미술관회>, <국제서법예술연합한국본부>, <한국화랑협회>,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한국서예협회>, <한국서가협회>, <목우회>, <전국서화예술인협회>, <국미회>, <한국판화사진진흥협의회>, <대한산업미술가협회>, <동양서예연구회>, <한가람회>, <한국전업미술가협회>, <동양서화문화교류협회>, <한국서화협회>, <한국서화작가협회>, <민족사진가협회>, <구상전>, <민족미술인협회>, <21C청년작가협회>, <한국서각협회>, <유여서법학회>, <21세기문화예술진흥회>, <환경미술협회>, <한국미술창작협회>, <지구촌미술협회>, <한국서도협회>, <한국장식문화예술진흥협회>, <한국문인화협회>, <녹미미술문화협회>, <한국사립미술관협회>, <갈물한글서회>, <실험예술가협회>, <비영리전시공간협의회>, <미술인회의>, <세계수채화연맹>, <한국기초조형학회>, <한국서예진흥협회>, <한국민화작가협회>, <한국미술정보연구소>, <한국현대문화미술협회>, <대한민국수채화작가협회>, <예문와>, <한국디지털사진작가협회>, <사진가신낙균선생기념사업회>, <한국석조각예술협회>, <대한민국한지그림협회>, <한국누드사진협회>(문화체육관광부 법인현황 2012에서 예술정책과에 등록된 82개처에서 미술관련 단체를 연번 순서로 나열)가 있다. 이중에는 활동이 이미 중단된 단체, 대표자가 타계했는데도 그대로 변경조차 안된 단체도 있었다.

 

<한국미술협회> 산하단체로 등록된 단체는 1996년 104개였고, 2013년 현재 128개 단체가 있다. 여기서 43년전 미협의 조직을 참고로 보면(1970년 미술개관-한국예술지 6권 85쪽) 당시 미협에는 서울회원은 동양화 145명, 서양화 276명, 조각 78명, 공예 39명, 서예 48명, 판화 5명으로 591명의 회원이 있었고 지역은 14개지부의 521명을 더하여 회원은 모두 1,112명이었다. 미협의 산하단체로는 <동방연서회>, <백양회>, <신기회>, <창미회>, <한국판화회>, <신상회>, <2.9동인회>, <산미회>,<한국화회>, <대성서예원>, <악뚜엘>, <벽미술가회>, <한국미술교육회>, <원형회>, <현대공간회>, <낙우회>, <이원작가회>, <신수회> 등 18개의 단체가 기록되어 있다. 2013년 8월19일 현재 미협은 한국화 4,914명, 서양화 11,355명, 판화 274명, 수채화 798명, 조각 2,020명, 현대공예 2,788명, 전통공예 725명, 디자인 1,225명, 서예 4,037명, 문인화 1,672명, 미디어아트 87명, 평론․학술 74명, 전시기획․미술행정 43명, 에니메이션 5명, 패션 13명으로 모두 30,030명이다. 총 미협회원 30,030명 중 서울회원이 38.8%인 11,649명, 지역이 61.2%인 18,381명이다. 1970년과 비교해 43년 사이에 분과는 6개 분과가 15개 분과로 늘어났고 회원은 27배로 증가하였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산하 단체로 가입하려면 등록신청비 5만원과 연회비 5만원납부로 규정되어 있지만 실제로 등록신청비 납부로 끝나버리는 모임이 많고 활동이 중단된 단체도 있다. 미협에 등록되면 행사후원이나 행정서비스 등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한때는 미술인의 국내활동은 미협과 관계없이 이루어질 수 있어도 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미술인의 국외활동은 반드시 미협을 거쳐야만 했었다. 예를 들어 해외에서의 전시나 공식적인 여행은 반드시 미협의 추천이 있어야만 했다.


가장 오래된 단체로는 <후소회>, <연진회>, <대한산업미술가협회> 등을 꼽을 수 있다. <후소회>는 이당 김은호의 제자 모임으로 1936년 창립되어 해방후 한동안 중단되기도 했으나, 신진작가도 받아들이고 84년부터 90년까지 공모전도 몇차례 가졌으며 1996년 5월에는 예술의 전당에서 60주년 기념전을 가졌다. <연진회>는 1938년 의재 허백련의 제자들과 동호인들이 광주에서 모여 창립한 단체로 1996년 1월 서울에서 40회 작품전을 가졌다. 이 <후소회>와 <연진회>는 우리 한국화단에 큰 줄기를 이루고 있다.

 

<대한산업미술가협회>는 해방후 1946년 <조선산업미술가협회>로 발족하여 이후 개칭한 단체로 시각디자인부와 공예부로 구성되어 있다. 65년부터 공모전을 실시했었으며 한일교류전 개최 등의 활동도 해왔다. 1950년대 들어서 55년에 부산의 <군록회>, 57년에 <창작미술협회>, 58년에 자연주의적 사실을 지향하는 단체였던 <목우회>, 미술교사 모임으로 출발한 <신기회>, 서예가 김충현 제자 모임으로 <동방연서회>, 여성 한글서예가 이철경 제자 모임인 <갈물한글서회> 등이 활동을 시작했다. 60년대 들어서는 출신학교별 모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서울대의 63년 <낙우회>, 67년 <한국화회>, 68년 <현대공간회>와 홍익대의 63년 <신수회>, 63년 <오리진>, 69년 <한국현대조각회> 등이 결성되었다. 또한 61년 <앙가주망>, 63년 <청토회>, 65년 <한국서예가협회>, 66년 <한국기독교미술인협회>, 68년 <한국현대판화가협회>도 오랜 연륜을 가진 단체들이다. 이밖에도 부산지역에서는 63년 <혁동인전>, 69년 <공간전>, 광주에서는 64년 <현대작가에뽀크> 등이 나타났다. 70년대에는 여류작가들만의 모임도 나타나 73년 <한국여류화가회>, 74년 <한국여류조각가회>, 77년 <한국여류서예가협회>가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1984년 <한국여류시각디자이너협회>, 99년 <한국화여성작가회> 창립으로 이어졌다.

 

Ⅱ. 장르별 미술단체

1. 한국화

해방 후 미술단체의 흐름을 장르별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한국화에서는 해방 후 1945년 <단구미술원>이 창립되어 일본화풍을 배격하고 새로운 수묵 채색화를 주장하며 김영기, 배렴, 이유태, 이응노, 장우성, 조중현 등이 모여 1946, 47년 2회의 전시를 가졌다. 1957년 <백양회>는 한국화의 낡은 방식을 벗어나 현대적인 작품을 위해 김영기, 이유태, 조중현, 김기창, 김정현, 박래현 등이 창립하여 지역 또는 해외에서 전시도 했다. 1960년 서울대 미대 출신들이 전통을 탈피하여 비구상 계열의 새로운 감각을 보여준 <묵림회>가 창립되었으며 민경갑, 서세옥, 안동숙, 전영화, 정탁영 등이 출품했다.

1963년 홍익대 출신들이 전통에 바탕을 두면서도 항상 새나무처럼 새롭게 창조한다는 의미로 <신수회>를 김동수, 오태학, 유지원, 이경수, 이용휘, 조평휘, 최재종, 하태진, 홍석창, 홍용선 등이 창립하여 홍익대 주요단체로 자리 잡았다. 같은 해 출신학교 구별없이 김옥진, 박노수, 송수남, 안상철, 이열모, 이영찬, 이인실, 장선백 등이 <청토회>를 창립하였다. 1967년 <묵림회>를 모체로 서울대 출신들인 김원세, 송영방, 신영상, 이규선, 정치환, 정탁영 등이 <한국화회>를 창립하여 주축을 이루었다.

1972년 홍익대 출신이 시간성과 공간성의 극복과 한국화의 실존적 가치를 내세우며 변상봉, 송형근, 이경수, 정하경, 홍용선이 <시공회>를 창립하였다. 1973년 서라벌예대 출신들이 <창림회>, 1975년 홍익대 출신들이 <창조회>를 창립했다. 1975년 한국적 채색화의 전통을 수용하며 현대회화의 매체로서 가능성을 내세우며 유지원, 이숙자, 이승은, 조복순 4명이 창립한 <춘추회>는 홍대 출신 모임에서 벗어나 대규모로 발전하였다.

1976년 서울대 출신 박주영, 이길원, 정종해, 한풍열, 황창배 5명이 창립한 <일연회>는 전통과 현대의 만남을 표방하면서도 각기 다른 개성을 보여주었다. 같은 해 창립한 <현대차원회>는 서라벌예대, 성신여대 출신들이 한국화에 콜라주, 오브제를 도입하는 등 입체작업을 도입하였다. 1979년 이화여대 대학원 동문인 박용자, 오숙환, 이신호, 이화자, 홍순주 등이 <이원전>을 창립하였다.

 

1981년 민족미술의 창조적 계승을 내세우고 당시 동양화 대신 한국화란 호칭을 강조하며 <현대한국화협회>가 세종문화회관에서 36여 명이 창립전을 가졌다. 1983년 국전 출신으로 여성 한국화의 중심에 있던 심경자, 원문자, 이숙자, 이인실, 주민숙 5명이 <가락지회>를 창립하였다. 1984년 홍익대 출신 한국화가 40여 명이 현대적 수묵 정신의 발현과 먹의 물리적인 다양한 효과를 추구하는 <신묵회>를 송계일, 이건걸, 이정신, 조평휘, 하태진 등이 창립했다. 1984년 서울대 출신인 권기윤, 김병종, 김호득, 박남철, 배성환, 이영석, 이종목, 조순호, 한정수가 <묵조회>를 창립하여 한국화의 전통과 현대의 단절을 창조적으로 극복한다는 가치관을 내세웠다. 1985년 서라벌예대, 중앙대 출신들이 <오늘과 하제를 위한 모색전>을 창립하여 채색의 현대화를 추구하였다. 이 단체의 ‘하제’는 ‘내일’의 우리말 고어이며 김선두, 김진관, 김학배, 박완용, 서정태 등이 창립했다.

 

2. 서양화

우리나라에서 1957년은 주요한 단체들이 많이 창립된 한국 현대미술 출발의 해이다. 해방과 한국전쟁의 혼란기를 거쳐 <모던아트협회>, <현대미술가협회>, <창작미술가협회>, <신조형파> 등이 창립했고 조선일보주최 《현대작가초대전》이 시작되었다. <모던아트협회>는 국전의 일방적인 방법론을 반대하고 새로운 모더니즘을 표방하며 일본에서 유학했던 박고석, 유영국, 이규상, 한묵, 황염수가 창립하여 회원 변동을 가지며 1960년 6회전까지 활동하였다. <신조형파>는 순수미술 이외 건축, 디자인 전공자들이 현대미술이 생활화에도 참여한다며 김관현, 변영원, 변희천, 손계풍, 이상순, 조병현, 황규백이 창립하여 59년 3회전으로 중단되었다. <창작미술협회>는 특정한 경향이나 이념을 표방하지 않고 순수한 창작의지를 내세운 고화흠, 박창돈, 박항섭 유경채, 이준, 장리석, 최영림, 황유엽이 창립하였다. 그 후 창립회원 중 고화흠, 유경채가 남아 일본 <이과회>와 교류전도 열기도 했으며 변화를 보이며 현존하는 단체이다.

 

2-1. 사실, 구상 계열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인 사실 구상 미술 단체를 표방한 것은 1958년 창립된 <목우회>를 꼽을 수 있다. 이 단체는 주로 자연주의적인 사실을 지향하는 원로, 중견 작가들인 이종우, 이병규, 도상봉, 이동훈, 조병덕, 손응성, 임직순, 김종하, 김형구, 심형구, 김인승, 박득순, 박상옥, 이종무, 최덕휴, 박희만, 나희균, 박광진 등이 창립하였다. 이들은 우리 사실미술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가들이기도 하다. 처음에 서양화가 모임이었으나 조각가도 참여했고, 63년부터 공모전을 개최해왔다. 초기부터 한국적인 아카데미즘을 계승하고 사실주의 집결체로서 뿌리를 내려 가장 규모가 큰 사실작가들의 단체로 성장했으며, 국전 서양화부 심사위원을 독차지하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69년에는 이마동, 김원 등을 제외한 회원이 탈퇴하여 만든 <한국사실작가회>와 분열되었다. 그 후 프랑스 르살롱에도 진출하여 수상하는 성과를 높였고 공모전에 한국화, 문인화 부문도 추가하였다.

1969년 <한국사실작가회>는 <목우회>에서 탈퇴한 원로회원들이 중심으로 김숙진, 김인승, 김창락, 박득순, 박영선, 손응성, 이병규, 이의주, 이종우, 장리석 10명이 창립했다. 2회 때 <한국사실화가회>로 개칭하였지만 한국적 아카데미를 주장했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73년 해체되었다.

1974년 <한국사실작가회>와 <청파전> 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최대회장 박득순, 총무 김숙진 등 26명이 <한국신미술회>를 창립했다. 한국 사실계열 주요 단체로 1986년 <신미술회>로 개칭했다. 1977년 구상계열 작가들이 창립한 <상형전>은 장두건을 초대회장으로 강우문, 신금례, 이림, 이종무, 조병덕, 허계 등 20 여 명이 참가했다. 1984년 <이형회>는 <상형전>에서 탈퇴한 회원과 새로운 작가들인 김수익, 박복규, 이규호, 장두건, 허계 등이 창립했다. 다른 사실계열 중견작가들의 모임으로 1971년 <서울아카데미회>, 1982년 <선과색>, 1986년 <신작전> 등이 창립하였다.

 

1962년 <신상회>는 과거의 그룹 활동에서 보여준 개인주의적 행동을 지향하고 한국 미술문화 창조의 역군을 내세우며 박석호, 임완규, 유영국, 이대원, 이봉상, 임완규, 장욱진 등이 창립했다. 조각부, 디자인부를 신설하며 공모전도 개최했으며 1968년까지 활동하였다. 이어 60년대를 대표하는 새로운 단체로 67년 <구상전>이 있다. 이 단체는 새로운 의미의 구상을 지향한다는 이념 아래 모였으며 69년부터 공모전을 개최해 오고 있다. 창립은 추상미술의 범람에 따른 반발로 구상 계열의 화풍을 진작시키며 입지를 마련하기 위해 출발한 집단이었다. 추상미술과 아카데미즘 미술이 한국 미술계를 양분하고 있을 즈음 한국적 정서와 자유로운 형식을 추구하려던 작가들이 모였다. <모던아트협회>, <창작미술협회>, <신조형파>에 가담했던 중견들과 신예들로 강우문, 김영덕, 박고석, 박석호, 박성환, 박창돈, 박항섭, 이봉상, 전상수, 정건모, 정규, 최영림, 홍종명 19명 창립했다. 그들은 종래의 고식적이며 진부한 사실주의 양식의 틀을 벗어나 구상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 새로운 화풍을 창출하였다. 자연이나 사물형태, 인간 이야기를 왜곡과 변형을 통해 얻은 심상적인 풍경을 화면에 드러냈다. 나중에 회원으로 배동신, 장리석, 황유엽 등이 합류했다. 1981년 <구상전> 회원 일부가 탈퇴하여 새롭게 김영덕, 김종휘, 김충선, 박창돈, 오세열, 이청운, 정건모 등이 <제작전>을 창립하였다.

우리 구상 미술에서 1970년대 중반에 큰 흐름의 변화가 있었다. 흔히 극사실주의로 말하는 하이퍼리얼리즘으로 1976년경부터 화단에 나타났다. 1970년 전후 미국에서 일어난 운동으로 일상적인 현실을 극히 사실적으로 완벽하게 묘사하는 특징을 보여주었다.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그룹은 <사실과 현실>, <시각의 메시지>가 있었다. <사실과 현실>을 1978년 홍익대 졸업동기 8명이 모여 82년까지 5회전을 가졌는데 몇 명의 변동은 있었지만 8명 선을 유지하였다. <시각의 메시지>는 홍대 출신의 신예 4명이 1981년 창립하여 84년까지 5회전을 가졌는데 동인이 늘어나 해체 무렵에는 10명이 출품했다.

그 후 80년대 중반에 운동으로 열기가 식고 작가들의 작품도 많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대상 그 자체를 기술적 숙련과 더불어 치밀하게 재현하였지만 감정이 개입되지 않아 유형화되고 생명력을 잃어갔다. 그 하이퍼리얼리즘의 상당수가 1986년 서울대, 홍대 출신의 서양화가, 조각가 모임인 <현․상>에 참가하였다.

 

1980년대 들어 한국미술계는 커다란 변혁을 맞았다. 미술의 순수주의와 형식주의를 비판하면서 미술이 현실에 대한 관심과 발언을 갖기 시작했다. 1980년 10월 미술회관에서 창립회를 열려던 <현실과 발언>은 당국의 압력으로 대관이 취소되어 26일 뒤에 동산방화랑에서 김건희, 신경호, 김정수, 김정헌, 오윤, 민정기, 백수남, 성완경, 임옥상, 김용태, 주재환, 노원희, 손장섭, 13명이 출품했다. 이 <현실과 발언>은 기존의 미술이 유한층의 속물적인 취향에 아첨하고 있거나 고답적인 관념의 유희를 고집함으로써 이웃의 현실로부터 소외되고 심지어는 자신의 내면적 진실조차 제대로 발견해내지 못해왔던 것을 반성했다. 오늘의 시대와 사회 속에서 미술의 참되고 적극적인 기능과 참신하고도 굳건한 조형이념을 형성하기 위한 공동의 작업과 이론화를 도모하자는 목표로 출발하였다. 따가운 시비와 오해의 시선을 겪으면서도 제 몫을 지킨 힘 있는 단체로 도시와 시각, 행복의 모습, 6.25 등 주제전도 가졌고, 80년대 새로운 미술운동의 리더로 평가받았다.

중앙대 출신을 중심으로 <임술년 구만 팔천구백구십이에서 전>은 임술년(1982년)이란 시간성과 우리나라의 총면적 수치의 장소성을 포함한 즉 ‘지금, 여기서’라는 발언으로 출발하였다. 창립 회원은 박흥순, 송창, 이명복, 이종구, 전준엽, 천광호, 황재형 7명이었다. 그들의 시각은 시대의 노출된 현실이거나 감추어진 진실을 형상화하기에 노력하였다. <미술동인 두렁>은 대중과 함께하며 살아있는 미술을 지향하며 1982년 발족하여 83년 창립예행전, 84년 경인미술관에서 창립전을 가졌다. 이어 1983년 <실천그룹전>, <시대정신전>, 1984년 <푸른깃발전>, 1986년 <인간시대전> 등이 속속 창립되었다.

 

2-2. 추상, 설치미술

1957년 <현대미술가협회>는 반국전을 내걸고 결성 김창열, 장성순, 하인두 등 8명이 창립하여 2회부터 박서보 등이 참가했는데 60년까지 1년 1-2번 회원전을 가지며 6회전 후 1961년 <60년미술가협회>와 연립전을 가진 후 <악뚜엘>로 재출발했다.

1960년 들어 <60년미술가협회>는 김봉태, 김종학, 박재곤, 윤명로, 이주영, 최관도 등 대학을 갓 나온 신예작가들이 덕수궁 담벼락에다 전시회를 열었는데 2회전 후 61년 <현대미술가협회>과 연립전 후 해체되었다. <벽동인전>은 서울대 출신의 김익수, 김형대, 박병욱, 박홍도, 유병수, 유황, 이동진, 이정수 등이 창립했었다. 1962년 <악뚜엘>은 61년 현대미술가협회와 연립전 후 해체되며 만들어져 미술계에 표현주의적 추상운동을 확대하였다.

 

1970년대는 <AG(한국아방가르드협회)>로 시작되었다. <AG>는 “전위예술에의 강한 의식을 전제로 비전 빈곤의 한국화단에 새로운 조형질서를 모색 창조하여 한국미술문화 발전에 기여한다.”는 이념을 내걸고 곽훈, 김구림, 김차섭, 김한, 박석원, 박종배, 서승원, 이승조, 최명영, 하종현과 평론가 이일, 오광수, 김인환이 창립했는데 학회지도 69-71년 4호를 발간했다. AG는 70년 《확장과 환원의 역학》, 71년《현실과 실현》, 72년 《탈관념의 세계》3번의 주제전을 갖고 74년 《1회 서울비엔날레》를 주최하고 해체되었다. 70년 서울대 출신들이 <신체제>를 창립하여 추상표현주의 극복을 내세우며 1년에 2번까지 전시회를 하며 76년 11회로 끝났다. 1971년 <ST>전은 Space와 Time의 약자로 전시와 토론회 등 다양한 활동을 벌이다가 80년 7회까지 이어졌다. <AG> 회원들이 한국의 전위미술을 리더했고 <ST>는 그보다 젊고 새로운 작가들로 이건용이 이끌어 갔다.

1980년대 들어 추상미술 단체의 창립은 뜸해졌는데 80년<프로세스>는 김창진, 이주영, 최상철, 하동철 4명이 창립했었고, 1989년 서양화 중견작가들이 모여 <ABSTRACT전>을 창립하여 오수환, 우제길, 이주영, 장선영, 장화진, 최상철, 하동철 등이 출품하며 몇 년 지속되었다. 그러나 추상은 1960-70년대 위세보다 많이 주춤해졌고 다양한 현대미술 사조에 기인한다고 하겠다.

 

80년대 중반에 새로 일어난 민중미술전이 “단순히 비리나 하층의 표면만을 저급하게 표상하여 회화의 본질적인 순수함이 왜곡되고 70년대 화단에 던진 평면의 모더니즘이 이제와서는 생명력을 잃은 장식적인 되풀이로써 진부함을 드러낸다.”고 반발해 홍대출신의 젊은 작가들은 모여 탈모던 단체로 <난지도>, <메타복스(METAVOX)>를 창립해 오브제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난지도>는 85년 2월 김홍년, 박방영, 신영성, 윤명재, 이상석이 “개념에 얽매이지 않고 실질적인 우리의 생활에서 회화의 실재를 이끌어 내어 호흡을 같이 하여 회화공간에서 사물 자체의 인식과 부정을 내포한 해석을 의미한다.”고 같은 해 9월 <메타복스>는 김찬동, 안원찬, 오상길, 하민수, 홍승일이 “종래의 물성의 자기실현이라는 목적론적 오브제”를 제안했다. 난지도는 8년 3회 전시 이후 중단된 데 비해, 메타복스는 85년부터 89년까지 5회전을 개최하며 《87문제작가작품》에 그룹으로 초대되었으며 《엑소도스》(86), 《한국 현대미술의 최선전전》(87), 《해빙전》(87), 《상하전》(87)을 기획, 확산시켰으며 공식적으로 해체전을 치렀다. 그 후 89년부터 <후기미술작가협회>에 의해 이 활동은 이어져 있다.

 

80년대 말부터 전환기에 들어서서 기존의 그림이나 조각은 급속히 변화하는 현대사회의 미감을 제대로 소화하기 어렵게 되어 작가들은 새로운 매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특히 90년대에는 탈장르, 매체확산, 대중문화적 요소들이 다원주의 양상과 다양한 표현욕구의 분출로 젊은작가들이 <뮤지엄(Museum)>, <액트(Act)>, <황금사과(Gold Apple)>, <서브 클럽(Sub Club)>, <커피 코크(Coffee-coke)>, <후 이즈 후(Who is Who)>, <오프와 온(Off and On)> 등 외국어 단체명칭에서 풍기듯이 또 다른 신세대 미술운동을 펼쳐보였다.

<뮤지엄>은 “우리는 작업실을 온통 형식의 실험실로 만들고 싶다. 재료나 기법은 다양하게 구사하며 이런 것들이 자체의 자족적인 의미로 완결되기 보다는 서로 긴밀하게 통합을 이루어 표현을 위한 소도구로 썼다. ”며 87년 창립전후 88년 《UAO》와 90년 《선데이서울》을 기획했다. 여기에 <서브 클럽>은 어떤 지향점을 가진 단체는 아니지만 전시회 때마다 작업의 주제와 형식을 의논한 뒤 제작하는 형태로 익명을 내세우며 90년 《Under-Ground》, 91년《Natura Naturans》와《Made in Korea》, 92년《Sub-document》를 열었다. <황금사과>는 90년 한 해 동안 《황금사과》,《황금사과 2전》, 다른 그룹과《채집전》을 열며 예술적 순발력을 보였다.

 

3. 조각

본격적인 조각단체는 <원형회>가 새로운 조형행동의 전위조각을 표방하며 김영중, 김영학, 김찬식, 이운식, 전상범, 최기원이 1963년 창립전을 갖고, 64년 전시 이후 66년 덕수궁 야외조각전에서 김영중, 김영학, 이종각, 전상범 4인전을 갖고 아쉽게 해체되었다. 같은 63년 서울대 출신인 김봉구, 송계상, 신석필, 황교영 6명이 <낙우회>를 창립하였다. 1968년에 서울대 출신 남천 오종욱, 이정갑, 주해준, 최병상, 최종태, 최충웅 등이 진부한 작가적 양심과 방황하는 정신적 풍토 개선을 선언하며 <현대공간회>를 창립하였다.

1969년 현대조각에 신선한 시각과 의욕적인 조각개념을 확산하자는 취지로 홍익대 출신 김찬식, 박석원, 박종배, 이승택, 최기원 5명이 <한국현대조각회>를 창립하고 일본 후쿠오카 현대조각가 집단과 교류전을 열며 주요 조각단체로 자리 잡았다. 부산에서 권달순, 김청정, 신봉섭, 이기주, 장상만 등이 <공간전>을 창립했다. 1971년 홍익대 조소과 범 동문회 모임인 <홍익조각회>, 1977년 홍익대 출신 구상계열 작가들의 모임으로 <한국구상조각회>가 창립하여 타 대학 출신들도 합류하여 전국 규모로 확대되며 《MBC한국구상조각대전》, 세미나, 워크숍도 가졌다. 1980년 이화여대 조소과 범 동문인 <이상전(이화조각회)>, 1981년 서울대 조소과 범 동문인 <서울조각회>가 출발하였다. 1985년 서울 중심에서 벗어나 지역의 조각예술 활성화를 내세우며 <제3조각가협회>가 출발하여 나중에 <전국조각가협회>로 개칭하였다. 1991년에는 홍익대 출신 단체인 1977년 창립했던 <시형조각회>와 78년 창립했던 <후기조각회>가 합쳐 <조각그룹 광장>으로 나타났다.

 

4. 공예, 디자인

1946년 사회적인 혼란속에서 산업미술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조선산업미술가협회> 창립하여 <대한산업미술가협회>로 개칭하고 회원전, 교류전, 공모전을 가지며 시각디자이너회와 공예가회로 구성되어 있다.

1970년 홍익대 출신들이 <현대디자인실험작가협회>, 1972년 권명광, 김교만, 김영기, 양승춘, 정시화, 조영제 등 교수들이 <한국시각디자인협회>, 같은 해 한국디자인학의 정립을 위하여 <한국디자이너협의회>는 시각디자이너협회, 공예디자이너협회, 공업디자이너협회로 구성하여 출발하였다. 1974년 대학교에 재직중인 작가 9명이 모여 <한국공예가협회>를 창립하여 최대 공예단체로 성장했다. 현재 금속공예, 도자공예, 목칠공예, 섬유공예, 유리공예, 5분과를 두고 도지부가 있다. 1978년 창립한 <한국도예가회>는 그후 <한국현대도예가회>로 개칭하며 대형 단체로 비약했다. 1978년 창립한 <현대공예창작회>는 학연과 장르에 관계없이 모여 의욕적인 활동을 보여주었다. 1979년 <한국귀금속디자인연구회>로 출발하여 <한국장신구디자인협회>로 확대되며 공모전으로 《한국현대장신구전》도 개최했다.

1983년 오랜 전통과 역사를 지닌 칠보의 향상을 위해 <한국칠보작가협회>, 1984년 섬유미술가들이 <한국섬유미술가회>를 만들어 격년제로 전시를 가지며 섬유미술의 위상을 높혀가고 있다. 같은 해 <한국그래픽디자이너협회>도 창립했다. 1990년대 들어 홍익대 출신들의 <한국도작가회>, <도상회>, <후기도예가회>와 <홍익도예가회>가 합쳐 <홍익도작가회>를 결성하였다. 1994년 대학교수, 칠공예가들이 <한국칠예가회>를 창립했다.

 

5. 서예

1957년 서예연구와 신예 발굴을 위해 <동방연서회>가 창립되어 서예강좌, 학술지 서통 발간, 국제 서법학술대회, 해외교류전 등에 앞장서며 1991년 재단법인화 되었다. 1965년 한국 서예의 주요작가들이 서예발전을 위해 <한국서예가협회>, 1973년 서단의 각 계파를 탈피하고 서울과 지역 중견급 작가들이 <근역서가회>, 1974년 전각가들 모임인 <한국전각협회>, 1978년 서예계 원로 중진들이 모여 <청림전>을 창립했다.

서단의 분열은 한국미협 김서봉 이사장 시절, 당초 서예분과를 미협으로부터 분리 독립을 내걸었던 선거공약이 지켜지지 않아 미협 서예분과에서 탈퇴한 서예가들이 민주적이과 자율적인 서단, 정직하고 참신한 서단, 창조하고 화합하는 서단의 기치를 내걸고 1989년 4월 <한국서예협회>를 창립하고 9월에 《대한민국서예대전》을 개최했다. 여기에 맞서 미협은 10월 같은 명칭의 《대한민국서예대전》을 개최하였다. 이 불똥은 1991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주관하는 《 91현대미술초대전》에서 초대작가가 확정되자 시비가 일었다. 서협소속 서예가들이 초대 대상에서 제외시켰다고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항의 집회까지 가졌다. 여기서 서단의 풍토를 바로잡고 화합하고자 한국서단화합추진위원회(일명 서화추)가 92년 선언대회 및 회합을 가지며 당초 '서단의 화합을 위해 전력을 기울일 것이며 절대로 별도의 단체를 결성, 서단의 분열을 가속화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었다. 그러나 통합은 실패하고 이 서화추는 <한국서가협회>를 만들어 《대한민국서예전람회》를 시작했던 것이다. 이로써 한국 서단에는 미협서예분과와 한국서예협회, 한국서가협회 등 비슷한 수의 회원을 거느린 세개의 별개 단체가 존재하게 되면서, 공모전을 만들고 사단법인 등록에 서로 시비하며 춘추전국시대로 변질되었다.

1991년 젊은 서예가들이 전통서예의 한계를 직시하고 <한국현대조형서예협회>를 창립하여 《대한민국현대서예대전》 을 개최하였다. 1997년 전통화법과 현대서예를 넘어서 물파주의 예술을 주창하며 손병철이 주동이 되어 <물파>가 창립되었다.

 

Ⅲ. 미술단체 공모전, 후원회원

미술단체 공모전이 등장한 것은 1960년대 들어 62년 <신상회>를 시작으로 63년 <목우회>, 64년 <백양회>, 65년 <대한산업미술가협회>, 69년 <구상전>이 공모전을 시작했다. 1976년 <창작미술협회>, 1981년 <한국현대판화가협회>, 82년 <신조회>, 83년 <한국미술청년작가회>, 84년 <후소회>, 85년 <한국수채화협회> 등이 유행처럼 줄줄이 이어졌다. 1회로 막을 내린 신미술회공모전, 한국화공모전(현대한국화협회)도 있었다. 단체 공모전은 한국화, 수채화, 판화, 섬유조형, 일러스트레이션, 전각 등 종합 공모전에서 소홀히 다루고 있는 장르를 특색있게 이끌어가면서 자기 단체의 세력 확장에 이용되기도 한다. 자신의 작품 경향에 맞는 공모전을 선택하고 입상을 통해 회우, 회원으로 가입, 자기 성장의 발판을 굳혀갈 수 있다. 권위있는 공모전에 비교하여 수준에 못미치는 작품들도 모여들지만, 이를 통해 회원으로 가입하여 연례적인 발표 기회를 얻고 화단의 선배들도 사귀며 또 그 덕을 보기도 한다. 선배가 더 큰 공모전에 심사위원으로 선정되면 우선 같은 회원을 배려한다. 지금은 없어진 단체 공모전에서 수상했던 당시 신인들이 지금은 중진작가, 대가로 활약하고 있다. 신상회 공모전에서 1회 이주영, 2회 하종현, 7회 이두식, 백양회 공모전에서 1회 송계일, 2회 이영수, 5회 김철성, 6회 최응규, 7회 정하경, 8회 김보희, 11회 박영대가 각각 최고상을 수상했다.

 

미술단체의 활동을 경제적 측면에서 후원하는 명예회원제가 작가와 미술애호가의 연결고리로서 자리매김을 하면서 점차 확산되고 있다. 이들 명예회원은 각 미술단체의 작가들이 경제적 여유가 있는 미술애호가들을 주대상으로 하여 추천하며 대부분 의사나 변호사 등 전문직 종사자, 자영사업가, 기업체 간부들로 이루어져 있다. 일반적으로 1인당 연 50-100만원의 후원금으로 정기그룹전 개최시 재정보조 등의 역할을 하며 더러는 후원단체의 작품을 구입하기도 한다. 이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서 각 단체들은 정기전 또는 소품전때 작가들이 10호 내외의 작품을 1점씩 출품하여 추첨을 통해 명예회원들에게 기증하는 것이 관례화되고 있다. 이처럼 명예회원제가 긍정적 반응을 얻고 있기는 하지만 일부에서는 따가운 시선을 보내는 경우도 없지 않다. 투자대상으로서의 미술품에 대한 인식변화와 함께 작가를 후원한다는 당초 취지보다는 싼값에 그림얻기식으로 잿밥에 더 신경을 쓴다는 비판이 일기도 한다. 이 명예회원제는 <구상전>, <신기회>, <현대한국화협회>, <영토회>, <신묵회>, <선과색>, <한유회>, <신조미술협회> 등의 단체에서 운영되고 중단되기도 했다.

미술단체중에는 단순히 전시회를 여는 것에 활동을 국한하지 않고 평론상을 공모해 시상하기도 한다. <구상전>에서 공모한 평론상에는 김진엽(93년), 김영호(94년), 이수균(95년), 최형순(98년)이 수상하였고 <한국구상조각회>는 한국구상조각평론상을 제정하여 최태만(92년), 조은정(94년), 고여송(97년)을 각각 선정하였다. <구상전>, <이형회>, <한국구상조각회>, <한국공예가협회>, <전국조각가협회> 등에서는 회원시상제를 도입하여 상을 주기도 한다.

 

Ⅳ. 미술단체 간행물

미술단체에서는 학술지나 회보 등을 주기적으로 발행하였다. 창작활동 외에 연구를 통해 학술적 이론을 도모하고 회원들의 소식들을 서로 나누었다. <서회협회>에서 1921년 서화협회보를 창간하여 2호까지 발간하였다. 1호에 김돈희: 창간사, 이도영: 동양화의 연원, 고희동: 서양화의 연원, 서도연구의 요점, 이도영: 동양화의 강구, 고희동: 서양화를 연구하는 길, 본 협회의 연혁과 상황 2호의 내용은 1호와 큰 차이가 없으며 회보 2권은 새롭게 등장한 동양화, 서양화, 서예 장르를 각 전문가들이 계몽적인 글을 소개했다.

1946년 <조선미술동맹>에서 발행한 조형예술에는 윤희순: 조형예술의 역사성, 김기창: 해방과 동양화의 진로, 정현웅: 양화감상법, 이쾌대: 해방기념과 조형예술동맹전, 8․15 이후의 미술계의 정세보고 등이 수록되었다. 1965년 논꼴의 동인지 논꼴아트는 이경성: 신세대 형상의 의의, 박서보: 한국 현대미술의 전망, 유준상: 결산과 창조의 기점에서, 오광수: 신세대의 조형이념 외에 문학인인 김동리: 구상성․추상성, 문덕수: 이마쥬의 미적 주권 글이 실려 있다.

<한국아방가르드협회>는 A․G를 1969-71년 4회 발행하였다. 이 학회지에는 이일: 전위미술론, 미셀라공: 새로운 예술의 탄생, 이일: 공간역할에서 시간역학으로. 이경성: 한국 현대미술의 특수여건, 이우환 : 만남의 형상학 서설, 김인환: 오브제와 작가의식, 김복영: still 미학 이후 등이 수록되어 제대로 미술잡지가 적었던 시대에 미술이론을 이끌었다.

<한국미술청년작가회>도 회원들의 연구논문과 외부 인사들의 글을 모인 청년미술을 1976년부터 94년까지 18권을 발행했다. 한국화에서 <신묵회>는 신묵(한국회화연구)을 1987년부터 97년까지 10권을 하태진이 주동이 되어 발간하였다. <한국구상조각회>는 1991년 구상조각을, <목우회>는 2001년 목우회보를 <현대작가에뽀끄>는 2003년 현대미술 에뽀크를 각각 창간했다. 내용은 특집, 논단, 수필, 부록 등으로 꾸몄다.

 

Ⅴ.이념 부재의 미술단체

미술단체의 이름도 각양각색이다. 90년대 중반 미술단체를 살펴보니 동덕여대 93년 졸업동문들의 <낯설어지기전>, 이대 동양화과 87학번의 <자기초대전>, 이대 섬유예술과 동문들의 <3F> (Forms Fiber & Fabric), 추계예술학교 출신들이 만든 하나님의 권세 축복이란 뜻의 <엑소우시아>, 한성대 동문으로 바흐틴의 도스토엡스키의 시학문제(1929)로부터 차용한 <뽈리포니>, 외에도 <거북이와 두루미>, <기리는 소리>, <마감뉴스>, <사람전>, <얘기안해>, <어떤 시각의 만남전>, <열린 손끝>, <자기로부터의 출발전>, <파가파가> … 등등 대부분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도 알 수 없고 미술단체의 이름과는 거리가 먼 듯한 언어의 유희가 난무하고 있다.

하물며 2012년 문화체육관광부에 등록된 사단법인 중에서도 <국제서법예술연합한국본부>, <한국서예협회>, <한국서가협회>, <전국서화예술인협회>, <동양서예연구회>, <동양서화문화교류협회>, <한국서화협회>, <한국서화작가협회>, <한국서각협회>, <유여서법학회>, <한국서도협회>, <한국서예진흥협회> 등 엇비슷한 단체가 많다. 어떤 창작 목표보다는 권익과 친목을 위해 단체가 조직되는 현실이다.

 

미술대학을 갓 졸업하고 미술판에 뛰어들기는 아직은 벽이 두터운 것이 현실이다. 작품발표 기회를 얻기 위해서 선배들의 대열에 줄을 서고 또는 자기들끼리 뭉쳐 단체가 지속되기도 한다. 여기저기 4-5개에 단체에 가입해서 활동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예전과 달리 지금의 단체전은 미술계에서 주목받기가 어렵다. 단체전보다는 개인전이나 미술관, 큐레이터, 화랑에 의해 만들어진 기획전에 관심이 더 모아진다. 또 단체 계보에 매달릴 필요도 상실되었고 오늘날 개성화, 다양화를 추구하는 작업들에서는 동질성을 찾기도 어려워졌다. 처음엔 같이 모였다가 화단에서 인정받고 잘 나가는 회원은 미련없이 단체를 떠나기도 한다. 같은 이념으로 뭉쳐서 우리 현대미술의 흐름을 이끌었던 1950년대의 <현대미술가협회>, 60년대의 <벽동인전>, <60년미술가협회>, <악뚜엘>, 70년대의 <AG>, <ST>, 80년대의 <현실과 발언>, <메타복스>, 90년대 <뮤지엄>, <서브클럽> 등의 성격을 가진 단체활동을 만나기는 매우 힘들어졌다.

1990년대 들어 탈장르, 매체 확산, 다원화 되면서 단체보다는 개인별 활동에 집중되었다. 각 단체만의 성격이 없고 이념부재에 자기들만의 잔치나 동문들의 단합대회로 끝나간다. 심한 경우는 의무적으로 반복되는 연례행사에 타성이 붙어 아예 작품 출품마저도 대리인을 통하고 작가는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결국 시대 상황과 맞물려 관람객에게도 외면당하는 미술단체 활동은 빛을 잃어 가고 있다. 현재도 미술단체의 전시는 이어지지만 이념을 주창하지 못하고 타성에 젖어 전시를 가졌다는 전시경력 기록만을 남긴다.

 

 

- 이 글은 필자가 가나아트 1996년 5.6월호에 기고했던 ‘미술단체 650여개 실상을 진단한다’를 토대로 시대와 장르를 확장하고 보완하였다.

 

주1) 한국예술지 6권, 1970년 미술개관, 대한민국예술원 85p

2) 법인현황, 문화체육관광부, 2012 258p

3) 한국미술협회 회원통계, 2013년 8월19일 이메일

 

참고문헌

김달진, 한국의 추상미술 35년 1957-1991, 현대미술, 1991 겨울호

    ..    ,  새로운 매체, 새로운 미술운동 26년 1967-1992, 가나아트, 1993 1.2

    ..    ,  한국의 극사실주의 소사 1978-1984, 가인화랑, 1994

     ..   ,   미술단체 650여개, 실상을 진단한다, 가나아트 1995 5.6

     ..   ,  한국 구상미술의 어제와 오늘, 미술세계, 1998 10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