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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현대미술 전시자료의 변천

김달진

한국근현대미술 전시자료의 변천

 

- 팸플릿을 중심으로


                                                                   2012. 12. 20 - 2013.3.30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우리는 연극, 무용, 음악회, 전시회 등 문화행사의 안내책자, 식순까지도 카탈로그라 부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카탈로그 Catalogue를 네이버 사전에서 찾아보았더니 ‘선전을 목적으로 그림과 설명을 덧붙여 작은 책 모양으로 꾸민 상품의 안내서’로 팸플릿 Pamphlet은 ‘설명이나 광고 선전 따위를 위하여 얄팍하게 맨 작은 책자’로 설명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팸플릿은 어떤 특별 상품의 선전물을 생각하는 카탈로그란 말 대신에 팸플릿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이 좋고 흔히 사용하는 ‘팜플렛’이란 말은 국어 맞춤법에 틀려 팸플릿으로 표기한다.

미술은 주로 전시회를 통해서 그 내용을 사회에 알리게 된다. 이를 위해서 팸플릿, 화집, 도록, 리플릿, 포스터, 초대장 등이 만들어진다. 본고에서는 전시회를 알리는데 가장 많이 만들어지는 팸플릿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1920-1940년대

먼저 해방 이전의 자료를 살펴보면, 우리나라의 근대미술 도입 이후 본격적인 미술전시회는 1916년 동경미술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10회 文展(일본 문부성주최 신인공모전)에서 특선을 차지하고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와 12월 금의환향 축제 속에 열린 김관호개인전을 비롯하여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인 나혜석이 1921년 경성일보사에서 개최한 개인전, 1921년부터 열렸던 서화협회전(1918년 조석진 안중식 고희동 13인이 조직한 최초의 미술단체 회원전), 그리고 1922년부터 조선총독부가 만든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 등을 들 수 있다. 하지만 현존하는 당시의 팸플릿은 구해 보기가 힘든 편이다.

다행이 본인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근무하던 1984년 한국근대미술자료전에서 실무자로 일했던 시절 많은 자료를 접해보았다. 이 전시는 일본에서 대여해온 도쿄미술학교 졸업생들의 자화상 및 작품, 전시관련 자료, 신문기사의 확대복사 판넬 등 다양한 자료들이 모아졌는데 간단한 팸플릿만 만들고 도록이나 자료집을 만들지 않아 큰 아쉬움으로 남았다.

 

이때 팸플릿으로

1927년 서동진수채화전

1928년 서동진화백작품전

1936-38년 1, 2, 3회 녹과전

1938년 임군홍양화소품전

1939년 김혜일 임군홍 2인전

1938-40년 1, 2, 3회 재동경미술 학생종합전 (2회부터 재동경미술협회전)

1941-44년 20, 21, 22, 23회 선전목록

1943년 3회 신미술가협회전

등이 나왔다.

 

해방이전 20여 종의 팸플릿을 살펴보면 한 장 또는 한 번 접게 되어 있는 형식에다 기본사항인 전시회명, 시일(연도가 빠진 것이 많고), 장소, 작품 제목의 내용, 이외는 지금처럼 작품 사진이나 작가사진, 경력사항 등은 실려져 있지 않다.

그중 조금 예외적으로 만들어진 1927년 서동진수채화전 팸플릿을 보면 크기는 세로 21cm×가로 28.5cm로 중간을 한번 접을 수 있게 되어 있으며 세로쓰기로 앞쪽에, “서동진수채화전람회 주최 : 동아일보대구지국, 시일 : 6.11-13일, 장소 : 조양회관”이 수록되어 있다. 이 외에도 입장무료와 고려양조장, 달서양화점 광고가 들어 있으며 특이할만한 것은, “피로, 권태 언제나 ‘새 삶’을 잡으려나 ‘아ㄹ트’는 인간의 조화성 모든 것을 초월한 조화성”으로 시작되는 4단 자작시(?)가 있고 뒷면에는 작가가 앉아 있는 전람회장 광경사진과 45점의 작품제목 및 ‘가격표는 계원에게 문의 하시요.’가 인쇄되어 있다.

1938년으로 조사된 임군홍양화소품전 팸플릿은 4쪽으로 1쪽에 林群鴻洋畵小品展 제목과 7月 30日-8月3日 기간만 표시되어 있다. 2-3쪽 양면에는 21점의 목록으로 제목과 그림 호수만 표기되어있다. 4쪽에는 茶苑オアシス(오아시스다방) 주소와 전화번호가 있다.

 

조선총독부가 문화회유정책의 일환으로 창설했던 선전도 1회에서 19회까지는 도록으로 만들었으나 제2차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20-23회까지는 물자절약을 위해 팸플릿으로 만들어지고 도록이 없다.

이 선전목록은 세로 13cm×가로 19cm로 표지는 동양화 컷이 그려져 있고, 다음 쪽에는 회장평면도가 그려져 있으며 1·2·3부로 나누어 번호, 명제 매가(금액 또는 비매), 주소(도로표시), 아호, 성명 등이 실려져 있는데 팸플릿에 작품 가격이 나와 있는 경우는 1949년 1회 국전목록, 1949년 1회 미술전람회 목록(서울특별시 대한미술협회 공동주최)등 이외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1회 국전을 보면 비매품, 미정, 가격표시로 구분되는데 동양화에서는 최우석 추천작가「명인인물도」380,000원, 서양화는 김종하「풍경」300,000원, 김흥수 특선「壺」300,000원, 조각은 가격 표시가 한점도 없고, 공예는 박철주 문교부장관상「건칠화병쌍」8,000,000원, 지순택「화각문고」1,000,000원, 서예는 정현복「행서당시일률」100,000원, 김기승 문교부장관상「고시행서 2폭」이 20,000원 등으로 표시되어 있다.

 

포스터는 미술전시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홍보하는데 그동안 보아온 포스터 중 연대가 오래된 1939년 만주 신경(지금의 중국 장춘) 열린 김혜일 임군홍 양화2인전은 세로 70cm×가로 50cm 크기이며 전체적으로 팔레트 형태에 전시명, 장소, 기간, 후원, 두 작가의 얼굴사진 등이 표시되어 있다. 1949년 국립미술관에서 열린 1회 국전 포스터는 세로 54.5cm×가로 79.5cm 크기로 1이라는 숫자가 기둥처럼 뚫고 올라오는 힘을 강조하고 있다. 1957년 국립박물관에서 열린 미국현대회화조각8인작가전은 세로 74cm×가로 45cm로 한문과 영문의 타이포그래피로 만들어졌다. 특이할 만한 것은 3종 모두가 연도가 없고 날짜 기간만 표시되어 있다.

 

        

 

 

해방이후-1950년대

해방이 되면서 개인전, 동인전, 단체전, 초대전 등 다양한 형태의 미술활동이 일어나면서 팸플릿 또한 전시회의 기본적인 기록사항 외에 초대말씀, 작가의 인사말씀, 문화계 인사의 글, 작품사진, 전시회명 및 작품명, 영문표기, 판매광고, 후원자 등이 등장한다. 개인전 팸플릿 이인성양화전 하나를 예로 들어 보면 크기는 세로 26.7cm×가로 14.5cm 4면으로 만들어졌으며,

1쪽: 회기 - 1948.6.8-16, 회장 - 서울 동화화랑(구 삼월), 후원 - 자유신문사의 영문표기와 작품사진 1점

2쪽: ‘새로운 문명의 창조는 그 나라의 모태일 것이다. 현대적 정신과 신생활의 활동을 더욱 대담하게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은, 즉 미술이라고 믿는다.’는 작가의 말과 화실에서의 작가사진, 그리고 40점의 작품명제록이 영문표기와 함께

실려 있다.

3쪽: ‘역량을 갖는 군은 우리 화단에 너무나 공적이 많아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해방 이후 작품을 보이지 않고 침묵 중에서 미술계를 위하여 꾸준히 노력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군은 과거 연소한 약관으로서 우리 화단은 물론 동경화단까지에도 진출하여 다년간 황토색의 특이성이 강하게 표현된 대작을 무수히 발표하여 조선작가의 기질성을 뚜렷하게 보이고 말썽많은 파문을 일으킨 것은 사실이다…(이하 생략)’ 한쪽을 가득채운 추천의 글과 작품사진 1점이 실려 있다.

4쪽: 작품사진 2점과 자신이 지도하는 국화회화연구소와 전문가양화자재 자미당 광고가 들어 있다.

 

정부가 수립된 후 문화정책 중 미술분야의 시책으로 1949년 문교부고시 제1호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가 창설되었는데 1회에서 5회까지는 도록이 발간되지 못하고 팸플릿으로 대신했다. 1회 국전목록은 세로 19cm×가로 12.8cm로 표지에는 이인성의 컷이 그려져 있고 뒷면에 심사원방명록(주소록)이 실려져 있으며 1쪽에서 16쪽까지 세로 쓰기로 5부 서예, 1부 동양화, 4부 공예, 3부 조각, 2부 서양화 순으로 번호, 명제, 특선 또는 기타 자격 주소 아호 성명이 나와 있고 뒤표지 앞쪽에 대한민국 제1회 미술전람회 추천인방명록(명단)이 실려져 있다. 국전도록은 6회 도록(1957년에 열렸고 발간은 58년)에 국전규정 및 1-5회까지 입상자들이 수록되었으며 7회 도록은 미발간되었고 8-30회까지 발간되었다.

6·25 한국전쟁의 혼란 속에서 부산을 중심으로 1950 제6회 종군화가단전쟁미전, 1952 후반기전, 1952 기조전, 1953 토벽동인전, 1953 현대미술작가 초대전 등 기억될만한 중요한 전시회들이 열렸는데 이 무렵 팸플릿을 보면 인쇄도 못하고 갱지를 사용한 프린트물까지 만들어 사용했다. 그 크기를 살펴 보면 세로 14cm×가로 10cm 이내의 소형 팸플릿에는 이순석도안전(1949. 5), 2회 신사실파미술전(1949. 11), 3회 신사실파미술전(1953. 5), 백영수미술전(1953. 9)이 있고 대형으로는 세로 30.5cm×가로 19.5cm의 3회 문신전(1953. 3) 팸플릿이 눈에 띄었다. 팸플릿이란 만들어진 후에는 자료로 남아 역사가 되는 것이므로 이를 통해 당시의 시대상황까지를 엿볼 수가 있는데 그 예로 다음 세 가지를 알아본다.

 

투쟁하는 30대 내가 가장 존경하는 화우들이 모여 ‘후반기’를 만들었다. 그들은 똑같이 먹을 것이 없고 방이 없고 제작 재료까지 없다. 그러나 아무 소리 없이 그들에게서 작품이 나온다. 그들의 예술제작은 하나의 무서운 ‘투쟁’이다. 이 위험한 현실과 맞붙어서 싸우는 것이다.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지키자는 것이다.

1952 제11회 후반기전 김환기의 격려문에서

 

제작은 우리들에게 부과된 지상의 명령이다. 붓이 문질어지면 손가락으로 문대기도 하며 판자조각을 주어서는 화포를 대용해가면서도 우리들은 제작의 의의를 느낀다……(이하 생략)

1953 제11회 토벽동인전에서

 

중섭 형의 그림을 보면 예술이라는 것은 타고난 것이 없이는 하기 힘들다는 것이 절실히 느껴진다. 중섭 형은 참용한 것을 가지고 있다. 어떻게 그러한 것을 생각해내고 또 그렇게 용한 표현을 하는지 그런 것이 정말 개성이요 민족예술인 것같다. 중섭형은 내가 가장 존경하는 미술가의 한사람이다.

1955 이중섭작품전에 김환기의 추천글에서

 

이 이중섭전 팸플릿 같은 면에 시인 김광균의 추천글이 있으며 이중섭보다 나이가 세 살 위인 김환기가 이중섭을 형이라 부르며 가장 존경하는 미술가로 평가하고 있다.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까지는 세로 20cm×가로 14cm 규격의 팸플릿이 많은데 어떤 것은 한쪽을 크거나 작게도 만들었고 한번 접은 카드식 또는 두 번 접게 되어 있었다. 작품사진을 찍어 팸플릿에 붙인 것에는 윤중식작품전(1954. 6), 한봉덕유화전(1954. 10)이 있고 별지로 컬러인쇄된 작품사진을 붙인 이세득개인전(1958. 5), 박영선체불작품전(1958. 10), 이준개인전(1959. 5) 등의 팸플릿도 보게 된다.

 

우리나라 단체전 형식의 전시회는 출신학교가 같다든지, 출신도가 같다든지, 같은 학교에 재직 중이라든지, 같은 여성이라든지 등의 친목적인 성격이 특징인데 다음과 같이 이념을 앞세우며 선언을 내세웠던 그룹도 찾아 볼 수 있다.

현대란 무엇이냐?

창조는 무엇이냐?

이 제제는 우리들의 과제다……<중간 생략>

1. 우리들은 민족미술의 창조적 전통성을 계승한다.

2. 우리는 현대미술의 새로운 창조탐구에 전념한다.

3. 우리들은 현대미술의 생활화에 직접 행동한다.

1957. 6 신조형파


 


          
              

 

1960년대 이후 커다란 변모

6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인 우리의 미술도 국제전에 진출하고 외국과의 교류도 활발하게 벌어지면서 70년대부터 경제성장과 더불어 본격적인 상업화랑의 등장과 미술작품의 상품화가 이루어졌다. 팸플릿에도 만은 변화를 보여 갱지에서 벗어나 아트지 등 질 좋은 종이에 컬러 작품사진을 수록하며 작가 자신의 글, 전시회 주관자의 초대말씀 등이 중심이 되던 것이 국내외 전문 비평가들의 글, 전시를 초대한 화랑주의 글과 함께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도록은 일반적으로 공모전의 입상작품, 미술관의 소장품, 블록버스터 전시 작품 등을 엮어 수록한 볼륨있는 책자이다. 작가의 개인화집은 전시를 앞두고 또는 본인의 작품을 망라하여 한권의 책으로 엮게 된다. 1938년에 발간된 오지호 김주경 2인화집은 국내 최초의 원색도판으로 의미가 크다. 당시 국내에 서양의 인상주의를 국내에 정착시킨 두 작가 작품과 오지호의 ‘순수회화론’ 김주경의 ‘미와 예술’등이 실려 있다. 1960년 발행된 박영선체불작품집은 박영선이 1955-58년 파리에서 체류하며 제작한 작품과 에세이가 수록되었으며 쟝□알베르 깔띠에즈 씨의 평이 있다. 1962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가 발행한 김흥수유화집은 18절의 대형 컬러도판과 이경성, Jeon Chabanon의 평문이 실려 있다. 1994년 발행된 운보 김기창 전작도록 5권은 위원회가 구성되어 1권에서 4권까지 연대별로 작품을 모으고 5권은 자료집으로 꾸민 프로젝트로 국내 최대 규모의 화집이다.

2001년 장욱진 카탈로그레조네는 유화 720여점의 작품을 수록했다. Catalogue Raisonné는 ‘분석적작품총서’로 번역하며 총 작품집(Complete works)과 작품분석 (Analytical works)을 합친 개념이다. 기존의 도록이나 화집과 달리 작가 사후에 그가 남긴 작품을 가능한 모두 수록하며 작품의 기본적인 정보와 함께 각각의 소장 전시 내력을 조사 기록하고 작품 하나하나에 해당하는 참고문헌을 모두 파악하여 제공한다. 이 카탈로그레조네는 작가의 작품 진위판단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수많은 개인화집들을 일일이 설명할 수 없으나, 화집은 작가의 입장에서는 본인의 작품은 창작되어 전시 후에는 작품이 흩어지게 되는데 한권의 책으로 엮는다. 미술평론가 등을 통해 작가론을 추천받고 약력을 통해 본인을 기록하고 세상에 남기는 것이다. 여기에는 그동안 받아왔던 평론글, 지인의 소개글, 본인의 일생관련 사진 등도 수록된다.

그러나 팸플릿에 2인 이상의 평론가를 동원시키기도 하고 영문 더러는 일문까지도 번역해 놓고 그동안 평문이나 외국잡지에 실렸던 글을 다시 보여 주기도 하는데, 올바른 비평보다는 작가에 대한 지나친 치사, 때로는 작품보다도 더 어려운 문구의 나열 등이 지적되며 의례적인 주례사 등이 문제점으로 지적되어 왔다. 여기에 컬러 작품과 평론가의 글, 작가사진, 즐비한 약력 등으로 호화롭게 꾸며 사람의 시선을 끌지만 많은 문제점이 있음을 간과할 수 는 없다.

 

그 내용에서 자기선전에 급급하여 과장된 표현, 거짓 약력, 사실의 오기, 그룹전에서 출품되지 않은 작가 또는 작품 사진 등이 실려지기도 하고 이런 것들이 신문이나 잡지에 사실처럼 보도되기도 한다. 이 문제점은 이미 계간 선미술 1985년 겨울호에 ‘관람객은 속고 있다 - 정확한 기록과 자료보존을 위한 제언’으로 발표한 바 있다. 한번 전시회가 끝이 나면 작품이 다시는 한자리에 모이기는 불가능하며 팸플릿만이 당시의 상황을 증명해 준다. “전시를 하면 팸플릿만 남는다”라는 말도 있지만 젊은 작가들까지 경쟁으로 호화 팸플릿을 만들어 경제적 부담을 지고 간다. 외국에서는 간단한 엽서로 전시회를 알리는데, 이제는 자원 낭비에 보는 사람조차 부담스럽다. 또한 별난 판형의 크기는 보존에도 문제가 되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외에도 초대장은 두꺼운 종이를 만들거나 홀로그램 등 특별한 재료로 만들고 비디오, CD, DVD도 제작한다.

팸플릿은 일반적으로 1,000부 안팎으로 찍어 홍보에 한계가 있어 잡지의 광고로 확산되고 있다. 또한 인터넷의 생활화에 따른 온라인 광고, 메일진 발송, 핸드폰 송신, SNS를 활용한 방법 등 다양해졌다. 최근에 전시를 앞두고 배포되는 보도자료들은 자세한 설명문, 대표작품 이미지, 초대권 등도 좋은 전시자료로 남는다. 팸플릿과 화집도 이제 시대가 많이 급변하므로 미리 사전에 충분한 준비를 하여 정확한 기록과 자료 가치가 창출되도록 신경을 써야 하겠다.

팸플릿을 비롯 각종 자료들은 처음에는 홍보를 목적으로 만들어지지만 세월이 흐르면 중요한 사료가 되는 것이다. 시대의 산업화에 따라 점차 의례적인 것에서 벗어나 질적 향상을 가져온 전시자료의 변천사를 고찰함으로써 이것이 문화의 한 영역으로서 가지는 역사적 의미를 알아보고자 한 것이 전시의 취지이다.

 

- 이 글은 1986년 9월12일 성심대학보에 ‘전시회 카탈로그 변천사’로 기고했던 글을 보완하고 확장하였다.

- 한문을 부분적으로 한글로 바꾸고 맞춤법을 현대 표기로 변경한 부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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