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서문│김연식 / 스왑 - 무작위의 작의를 실현하는 전환의 미학

김성호

스왑 - 무작위의 작의를 실현하는 전환의 미학



김성호(Sung-Ho KIM, 미술평론가)



I. 프롤로그  
정산 김연식은 인디라망(因陀羅網)이라고 하는 거대 화제(畫題) 아래 올해 5개의 연작 전시를 마치 여러 악장으로 구성된 교향곡처럼 선보인다. 그는 한자어 인다라망을 산스크리트 원어에 가까운 발음인 ‘인드라(Indra)’로 표기함으로써 이 화제에 담긴 원의(原意)를 강조한다. 그것은 다음처럼 구성된다: 제1악장 컵 속의 무한세상(5월), 제2악장 파동과 입자의 드라이브(6월), 제3악장 스왑(9~10월), 제4악장 달과 바람과 그리고 구름(11~12월). 정산은 제3악장으로 대별하는 이번 전시의 테마를 ‘스왑(swap)’으로 제시했다. 스왑은 흔히 “(어떤 것을 주고 그 대신 다른 것으로) 바꾸다, (이야기 등을) 나누다” 혹은 “(일을 서로 바꿔 가면서) 교대로 하다”라는 사전적 정의를 지닌 말이다. 전환(轉換), 공유, 교감, 교환과 같은 의미를 함축한 ‘스왑’은 정산의 근작을 이해하는 출발점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파동과 입자의 드라이브-41, (38x38), 캔버스에 아크릴 Ⓒ 김연식


II. 스왑 – ‘채움에서 비움으로의 전환’ 혹은 공유 
정산이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추상 회화 작업의 면모는 다양하다. 그의 추상화는 번짐과 마블링 효과가 극대화된 표현주의 추상, 물감의 마티에르가 화면을 휘감고 있는 앵포르멜 추상, 캔버스의 표면 위에 드문드문 기포를 남기면서 엷게 물감을 포진시키거나 빠른 필획과 같은 넓은 선을 남긴 모노크롬 추상으로 다양하게 불러봄 직하다. 
유념할 것은, 그의 다양한 유형의 추상화에는 일련의 공유 지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스왑’이라고 명명한 회화 창작 태도와 그것에 따른 다양한 창작 방법론이다. 그에게 스왑은 ‘전환’이나 ‘공유’로 표상된다. 즉 일련의 창작 행위 속에 대면하고 있는 캔버스와의 교감, 공유와 더불어 그 캔버스의 변화를 지속해서 이끄는 전환을 실천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미디엄을 섞어 걸쭉하게 만든 아크릴 물감을 캔버스 위에 쏟아붓듯이 올려 ‘채움’을 실행하고 난 후, 다시 그것을 다양한 매개체를 사용해서 지우거나, 찍어 내거나, 덜어내거나 닦아냄으로써 ‘비움’을 실현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구체화된다. 
여기서 매개체란 정산이 붓 대신 사용한 회화 도구로서 종이 명함, 플라스틱 카드, 버터나이프와 같은 것뿐만 아니라 비닐, 얇은 순지와 같은 것까지 아우른다. 통상적으로 얇은 두께의 이 판형(板形) 오브제들은 어떤 것들은 견고하고 어떤 것은 유연한 재질의 것이지만, 동일하게 물감을 덜어내거나, 닦아내는 식의 빼기, 즉 비움의 미학을 실현한다. 
서로 다른 색들이 굴곡진 경계를 중심으로 똬리를 틀거나 화면 속에 마루와 골을 만드는 회화는 대개 종이 명함이나 플라스틱 카드 혹은 버터나이프로 물감의 길을 만들어 화면의 변화를 꾀한 것이다. 이러한 회화의 창작 방식은 마치 뜨거운 마그마가 두꺼운 땅의 지층을 뚫고 용암길을 내는 것처럼 이글거리는 화면을 만들거나 계곡으로부터 떨어지는 폭포수가 단단한 바위를 만나 물길을 가르며 떨어지는 것처럼 장쾌한 화면을 형성하기도 한다. 
또 다른 유형으로, 화면 중심으로부터 데칼코마니처럼 상하, 좌우 양쪽으로 물감 획의 흔적을 남긴 작품은 대개 얇은 순지를 물감이 덜 마른 화면 위에 올려놓았다가 이내 중심의 밖으로 당겨낼 때 물감이 닦이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넓은 필획을 남긴 모노크롬 추상은 또 어떠한가? 그것은 덜 마른 물감이 놓인 캔버스 표면 위를 비닐로 훔치듯이 닦아낸 것이다. 
정산의 작업은 한편으로 지우면서 동시에 흔적을 남긴 것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채움’으로부터 ‘비움’으로 전환하는 것이자, 그 과정에서 ‘어떤 것을 주고 다른 것으로 바꾸는 스왑’처럼 캔버스와 대면하면서 교감과 공유의 미학을 실현하는 것이다. 



파동과 입자의 드라이브-43(32x41), 캔버스에 아크릴. Ⓒ 김연식


 III. 필연과 우연이 교차하는 ‘무작위의 작의’
정산의 스왑 연작은 대개 불덩이가 타오르거나 파도가 넘실거리는 격렬한 화면 속 충만을 품고 있지만, 더러는 잔잔한 호수의 표면을 응시하게 만드는 정적의 분위기를 함유하거나 메마른 대지를 연상하게 만드는 결여를 품고 있기도 하다. 충만과 결여가 혼성된 이미지 덩어리인 셈이다. 피상적으로 그것은 기의(signifié) 없는 기표(signifiant)라는 불구적 기호(signe)로서의 텍스트처럼 읽힌다. 또한 그것은 텍스트의 흐릿한 자취만을 남기는 정체 미상의 흔적들이기도 하다. 그것은 읽기의 효용성을 망실한 유령이자 이미지로 변신한 환영의 판타즈마(phantasma)이기도 하다. 이러한 혼성의 이미지 덩어리는 관객에게 무슨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품게 만드는 동인(動因)이다.  
그의 작품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가독성을 담보할 수 없는 이미지 덩어리가 만드는 마블링이 가득한 ‘충만’에서도 비움으로의 ‘전환’이 실현되고 있고, 단색조의 모노크롬과 같은 회화 안에서도 이러한 전환이 실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울러 그의 스왑 연작에서는 끊임없는 필연과 우연이 교차하는 생성, 변화, 운동의 과정이 지속된다. 붓 대신 그의 창작에 개입하는 순지, 비닐과 같은 매개체는 회화의 변화를 우연성으로 견인한다. 순지나 비닐을 화면 위를 훔치듯 물감을 닦아낼 때, 그것이 최종적으로 남기는 흔적은 예측 불가능하다. 바람이 가득 든 풍선을 덜 마른 화면 위에 밀착했다가 떨어뜨릴 때 남겨지는 물감의 흔적 또한 그러하다. 작가가 이러한 매체를 붓 대신 사용할 때 나타난 우연한 결과는 도처에 있다. 
그의 작업에서 우연은 필연과 맞물려 출현한다. 작가가 매체를 결정하고 작품에 사용하는 필연, 작가의 최소한의 개입으로 만든 우연, 물감과 매체가 운동으로 만난 예측 불가능성이 남긴 우연, 물질이 과학적 반작용으로 남긴 필연 등 정산의 작업 안에는 필연과 우연이 교차하되 그것은 순차적이기보다 동시다발적으로 생성, 변화, 운동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우리는 그의 회화를 들뢰즈의 입장으로 '~이다'(être)의 공간이기보다는 '~되기(devenir)'의 공간으로 부를 만하다. 이러한 되기는 끊임없이 우리의 존재를 확정적인 것으로부터 미루어 둔다. 언제나 우리의 존재를 우리가 겪는 사건들을 불확정의 운동, 전환의 변화와 생성의 운동으로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그의 작의(作意)가 읽힌다. 즉 정산이 스왑 연작을 통해서 나타내고자 하는 뜻은 무엇일까? 그것은 “일부러 꾸미거나 뜻을 더하지 아니함”을 의미하는 무작위(無作爲)를 지향한다. 그것은 화가와 매체가 벌이는 놀이 혹은 명상과 같은 창작 행위를 통해 우연의 길을 열어 주고 필연을 드러내는 것이다. 정산은 자신의 작업에 있어서 주인으로서 자리하기보다 작업에 대한 최소한의 개입을 통해서 마치 우주의 질서 속 조력자가 되려는 것처럼 한 발짝 물러난 채 자신의 작업에 동참한다. 달리 말해 ‘무작위의 작의’를 실천하는 셈이다. 



파동과 입자의 드라이브-12(60.5x60.5), 캔버스에 아크릴. Ⓒ 김연식



파동과 입자의 드라이브-46, (32x32), 캔버스에 아크릴 Ⓒ 김연식



IV. 인다라망 –모든 것의 연(緣) 
정산 김연식이 이번 전시에서 ‘채움에서 비움으로의 전환’ 혹은 공유를 선보이고 필연과 우연이 교차하는 ‘무작위의 작의’를 선보이는 스왑 연작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모색하려는 바는 무엇일까? 그가 올해 5개의 연작 전시를 교향곡처럼 구성하면서 제시하는 테마는 인다라망에 집결한다. 
산스크리트어 인드라얄라(indrjala)의 한자 표기인 ‘인다라망’은 고대 인도 신화 속 인드라(Indra) 신(神)의 거주지인 선견성(善見城)의 위를 덮고 있는 거대한 그물을 가리킨다. 이 그물은 “그물코마다 보배 구슬이 박혀 있고 거기에서 나오는 빛들이 무수히 겹치며 신비한 세계를 만든다.” '인다라망경계문(因陀羅網境界門)'이라는 말이 불교에서 ‘부처가 온 세상 곳곳에 머물고 있음’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듯이, 작가의 작품 속 인다라망의 개념은 우주 만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가르침을 전한다. 
그것은 불교 화엄 철학의 ‘연기(緣起)’의 법칙으로부터 기원한다. ‘인연생기(因緣生起, pratītya-samutpād)’를 약칭한 ‘연기’란 “현상의 사물인 유위(有爲)는 모두 원인(因: hetu)과 조건(緣: pratyaya)의 상호 관계 속에서 성립된다”고 보는 ‘생성과 소멸의 상호 관계성의 법칙’을 전한다. 즉 “모든 현상과 사물은 홀로 존재하지 않고 상호 의존 관계를 벗어날 수 없어 생성과 소멸은 항상 관계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마치 정산 김연식의 작업이 채움/비움, 우연/필연을 매개하고 서로 연결하고 있듯이 말이다. 인다라망이 함유한 연기의 법칙은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생사불이(生死不異)’ 혹은 ‘생사일여(生死一如)’의 경우처럼 ‘색/공, 생/사’로 극명하게 대립하는 반대항마저 하나의 개념으로 묶어내면서 존재와 부재의 철학을 전개한다. 그렇다. 불교 철학에서 모든 존재는 “우주 만유 일체의 사물이 서로 무한한 관계로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연기법으로 얽혀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의 연(緣)’을 품은 인다라망의 진리를 성찰하면서 펼치는 스왑 연작을 통해서 정산 김연식은 그의 교향곡 3악장을 완성하고 앞으로 남겨진 4악장을 선보일 예정이다. 앞선 연작전과 더불어 이번 전시는 그것이 무엇이고 어떠할지 기대하게 만드는 주된 동인이라고 할 만하다. ●


출전 /
김성호, 「비순수의 시대에서 성찰하는 순수의 미감」, 『정연식-제3악장 스왑』, 카탈로그 서문, 2023.
(정연식-제3악장 스왑전, 2023. 09. 28 ~ 2023. 10. 07, 갤러리모나리자산촌)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