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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임미량 / 바람이 몰고 온 그림

김성호

바람이 몰고 온 그림 



김성호(Sung-Ho KIM, 미술평론가)



1. 프롤로그
임미량의 작업은 ‘바람이 몰고 온 무엇’이다. 그것은 지난날 그녀가 자연의 풍광에 경도하고 그것을 예술의 이름으로 늘 표현하고 싶었던 무엇이자, 오늘날 그 자연의 깊은 본성으로부터 발원한 채 어느새 그녀의 그림에 자리한 보이지 않는 무엇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임미량의 작업이 드러내고 있는 조형의 특성과 그것이 함유한 미학은 어떠한 지향성 안에 자리하는가?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으로 시작한다. 



임미량


II. 자연을 닮은 회화, 자연을 품은 추상. 
임미량의 회화에서 자연은 어디에 있는가? 푸르른 하늘과 맞닿은 황금빛 들판과 같은 풍경? 싱그런 녹음이 우거진 숲속의 연못과 같은 풍경? 하늘을 나는 새들이 보고 있는 듯한 부감법의 드넓은 녹색 수풀? 아니면 솔방울이나 나무 열매 혹은 나뭇잎처럼 보이는 무엇이거나 화려한 원색을 입은 새의 깃털 혹은 날개처럼 보이는 무엇? 그것이 아니라면 꽃잎이나 동물의 피부 위에 자라난 작고 가느다란 융털이 가득한 무엇? 그녀의 회화에서 자연은 피상적으로 그렇게 존재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 이미지’는 그녀의 회화를 대면하는 감상자가 자연의 외관이 지닌 유사성으로부터 견인하는 ‘자연에 관한 심미적 풍경’일 따름이다. 관자에 따라 달리 보이는 ‘자연에 관한 풍경 아닌 풍경’인 셈이다. 가히 ‘자연을 닮은 회화, 자연을 품은 추상’이라고 할 만하다. 
자연이란 사전적 정의로, “사람의 힘이 더해지지 아니하고 세상에 스스로 존재하거나 우주에 저절로 이루어지는 모든 존재나 상태”를 지칭한다는 점에서, 그 존재가 자연의 풍경으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자연이란 인공적이지 않은 모든 상태를 가리킨다. 그것은 인류가 오염시키기 이전의 ‘세계’에 대한 다른 표현이자, 인류가 훼손시키기 이전의 ‘생태’와 다를 바 없다. 그것은 우리가 체험하지 못했으나 지식으로 알고 있는 지구 밖 ‘우주’와 연동되는 큰 개념이기도 하다. 
이러한 자연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할 때, 우리는 임미량의 회화를 ‘소산적 자연(natura naturata)을 닮은 회화, 능산적 자연(natura naturans)을 품은 추상’으로 재정의할 수 있다. 풀어 말하면, 나무와 숲, 하늘과 벌판, 꽃과 새의 깃털과 같은 구체적인 양태로서의 자연인 ‘소산적 자연’을 닮은 회화이자, 무한한 생산 본질로서의 자연인 ‘능산적 자연’을 품은 추상화라고 할 수 있겠다.   
15세기 초기 르네상스 시대 ‘회화론’으로 저명한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가 “예술이란 자연의 외관보다 자연의 법칙을 모방하는 것”이라고 했던가? 르네상스 회화가 그저 보이는 대로 자연의 외관을 모방해서 그리기보다 관자의 시점(視點)과 대상의 상관성을 연구하면서 선원근법, 공기원근법을 발견하여 자연의 법칙을 모방하고자 했지만, 여전히 ‘소산적 자연을 닮은 회화’를 위한 재현의 언어에 집중했던 시기였음을 유념하자. 재현의 기술을 사진기가 가져간 19세기에는 자연의 법칙보다 자연을 대면한 화가의 상황과 주관을 더욱 중시하면서 인상주의 이래 자연은 점차 심적 대상으로 변주했다. 20세기에는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추상주의의 언어 속에서 자연의 외관이나 법칙뿐만 아니라 ‘능산적 자연’ 혹은 자연의 본성을 저마다의 조형 언어로 탐구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다원주의 미술을 열어젖힌 21세기의 시대에 추상의 언어로 소산적 자연과 능산적 자연을 함께 품은 임미량의 회화란 무엇인가? 관람자가 그녀의 작품에서 자연을 발견했을 때 그것은 대개 자연의 개체나 풍경처럼 보이는 외형적 유사성에 기인한 것이지만, 흥미로운 점은 그녀가 그 속에서 미처 간파하기 쉽지 않은 자연의 본질을 탐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이 품은 비인위, 생성소멸, 순환, 공생과 같은 본성의 추상적 메타포이다. 


임미량, '고잉(GOING) 79'. 캔버스에 아크릴릭, 오일, 112x162.2cm. 2022

III. 능산적 자연을 품은 바람 회화   
임미량이 회화의 언어로 탐구하고 있는 능산적 자연은 어디에 있는가? 〈My Forest〉, 〈Fairy of the Forest〉, 〈The Performance of Wind〉 등 그녀의 연작에 담긴 작품명에서 우리는 자연의 이름을 발견하고, 그 이미지에서 자연의 흔적과 유사한 외관을 읽기도 하지만, 더 본질적으로는 비인위와 공생 그리고 생성소멸과 순환과 같은 능산적 자연의 속성을 캔버스의 속살에 묻어 두고 그것을 다시 표피 위로 길어 올리는 그녀의 ‘바람 회화’로 불릴 만한 조형 세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바람 회화’라니? 그녀는 《Colors of the Wind》라는 이름으로 2023년 봄에 열었던 개인전의 카탈로그에서 다음처럼 언급한 바 있다: 바람은 내게 한낱 바람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형태를 바꾸고 다짐과 포부를 품게 하는 힘이 있다.” 
임미량에게서 바람은 자연의 것(Wind)만이 아니라 인간의 것(Wish)이 함께한 주제어로, 자연과 인간이 어우러진 메타포인 셈이다. 여기서 생각해 보자. 자연의 그리스 어원인 퓌지스(ϕύσις, physis)가 “성장의 근원으로서의 자연”을 의미하는 한편, “인공, 인위에 대하여 인간의 개입을 허락하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자연은 근원적 개념은 인위를 가하지 않고 본래 상태를 의미하는 동양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의미와 공유한다. 그런데 임미량은 자연에 인위를 왜 뒤섞는가?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퓌지스를 ‘물질적 자연’을 가리키기보다 ‘전체 안에서의 존재자(das Seiende im Ganzen)’, 더 구체적으로, ‘전체 안에서의 존재자 그 자체(das Seiende als solches im Ganzen)’를 의미하는 것으로 풀이한다. 하이데거의 풀이에 근거할 때, 원래 고향이었던 자연을 버리고 떠나, 문명을 만들면서 자연을 구속하고 훼손했던 인간 역시 ‘자연이라는 전체 안에서의 존재자’였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자연은 인간을 품어 안는 대자연(Mother Nature)으로 존재한다. 오늘날의 사회생태학(Social ecology)이 이전에 혐오했던 인간의 이성을 다시 불러와 자연과 인간 모두를 위해 더욱 진보시켜야 할 도구로 삼았다는 점에서 자연에서의 인간은 더 이상 거부되어야 할 존재가 아니라, 공생을 도모할 자연의 적극적인 동반자가 된다.   
임미량은 자신의 회화 안에 자연의 바람과 인간의 바람을 한데 견인하면서 비인위와 인위 그리고 공생의 의미를 공유한 능산적 자연을 탐구한다. 보이지 않는 바람이 깃발과 수풀을 흔들며 지나가면서 자신의 존재를 우리에게 알려주듯이 그녀의 그림 속 바람은 도처에서 일렁인다. 융털과 같은 작은 모듈이 군집을 이룬 채 크기, 모양, 방향을 달리하면서 표현된 운동성의 이미지는 자연 속 바람의 방향과 속도를 한꺼번에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또는 한 방향으로 퍼지며 번져나간 물감 이미지는 마치 바람을 가득 안은 수풀이 흔들리거나 바닷가 풍랑(風浪)이 넘실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바람을 가득 안은 자연의 형상을 유추하게 만드는 임미량의 추상화는 실제로 바람과 관계하는 것이기도 하다. 캔버스 위에 올린 엷은 농도의 아크릴 물감을 작가가 만든 특수 장치를 통해서 불기(blowing)를 실행하면서, 수많은 ‘공기의 움직임’을 창작 과정 안에 무수히 집적한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융털처럼 생긴 모듈이 군집한 멀티플의 형상은 그렇게 태어났다. 
공기의 움직임이 흔적을 남긴 수많은 융털의 군집에서 우리는 생성소멸, 순환과 같은 능산적 자연의 속성을 읽는다. 보라! 융털과 같은 수많은 모듈은 수분을 가득 먹은 안료가 캔버스 위에 얹히면서 채움이라는 생성을 실현하고 공기를 불어 넣은 바람에 길을 내주면서 비워짐이라는 소멸을 실현한다. 바람에 하얗게 길을 내준 융털 형상의 모듈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물감을 비워진 공간에 다시 미세하게 채움으로써 순환이라는 자연의 속성을 덧입히기도 한다. 가히 ‘능산적 자연을 품은 바람 회화’라고 할 만하다. 


임미량, '고잉(GOING) 83'. 캔버스에 아크릴릭, 오일, 112.1x162.2cm. 2022

IV. 비가시성의 가시화 - 자연의 에너지를 품은 실험 회화    
바람은 움직인다. 공기의 압력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차가운 공기가 가득한 곳에서 따뜻한 공기가 자리를 비운 곳으로, 드넓은 곳에서 건물 사이처럼 틈새를 남긴 건물로 바람은 움직인다.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자기가 지나는 주변의 것들을 움직이게 해서 자기 존재를 드러낸다. 
임미량은 이러한 바람의 정체성을 품고 작업한다. 작가 노트를 보자: “(나의 작업은) 소리, 음성, 분노, 기쁨 같은 무형의 존재에 아이덴티티를 부여하여 의미를 시각적인 형식으로 전달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인식시키려 한다.” 바람의 정체성이란 바람과 같은 비가시성의 무형 존재를 가시화하는 작업에 대한 메타포인 셈이다. 그것은 자연 속 에너지와 같은 것이다. 그녀가  ‘관련이 없을 것 같은 곳에서 패턴, 운동감, 속도감 같은 무형의 것들을 발견’한다고 언급했던 작가 노트는 그녀의 작업이 일종의 에너지를 형상화한 작업임을 간파하게 한다. 운동이나 속도는 모두 단위 시간 동안 공간 위치가 이동한 벡터의 변위를 수치화하여 계량할 수 있다. 그것은 물리적 공간에서 위치 에너지와 운동 에너지로 변환된다. 
임미량은 이러한 에너지를 가시화하는 방식을 위해서 회화 안에서 다양한 실험을 거듭했다: “끓여도 보고, 긁어도 보고, 밀가루를 던져 보기도 하고, 건조하기도 하고, 입에 물감을 넣고 뱉어도 보고, 퍼포먼스도 해 보고, 온갖 시도 끝에 변하지 않는 나만의 기법을 찾은 것이 지금의 스타일이에요.” 그것은 그녀가 시행착오 끝에 만든 특수 장치가 견인하는 일련의 ‘바람 불기’의 효과와 관계한다. 그것은 캔버스 표면에 물감을 묻힌 붓을 움직여 바람을 표현하기보다 직접 작은 양의 물감을 붓고 바람을 일으켜 바람의 길을 만들고 그것을 무수히 집적하는 방식뿐만 아니라 층을 이루도록 캔버스 표면 위에 얹은 여러 색의 물감을 일시에 바람을 일으켜 바람을 따라 이동하게 만든 제작 방식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이 글이 ‘바람 회화’ 또는 ‘바람이 몰고 온 그림’이라고 작명해 부르는 그녀의 작업은, 특수 장치를 통해 바람을 일으켜 물감 속에서 바람의 길을 만드는 제작 방식을 통해서 바람의 정체성과 위상을 고스란히 계승한다. 차가운 공기가 가득한 고기압에서 따뜻한 공기가 자리를 비운 저기압으로 이동하는 대자연의 순환 질서 속에 몸을 맡긴 채 생성소멸을 지속하는 바람처럼 임미량은 자연의 대우주적 질서 속에 자신을 맡기고 작위와 무작위 그리고 필연과 우연 사이를 오간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방식은 나는 손만 빌려주고 다른 어떤 존재가 이끄는 대로 감정이입을 시켜 그 흐름을 따라 움직인다.”

그렇다. 캔버스 바탕에 밑칠하고 그 위에 물감을 올릴 때 작품은 그녀의 조형 의지와 욕망으로 시작되지만, 그 위에 조심스럽게 바람길을 내고 그 변화를 묵묵히 지켜볼 때는 그녀는 잠시나마 자연으로부터 건너온 우연성에 작품을 맡긴 채 멈춤의 시간을 반복한다. 그녀가 물감에 물리력을 가한 후 질료가 중력에 순응한 채 생기는 변화를 기다리는 것은 그녀가 작위와 필연 속에서 자연의 무작위와 우연성을 맞이하는 순간이다. 피상적으로, 융털의 모듈이 작가의 치밀한 계획에 따라 멀티플 아트로 자리한 듯한 조형 안에서 생성되는 예측 불가능한 우연이다. 이러한 결과는 번지기의 효과가 낳은 수초를 닮은 형상에서 더욱더 극대화된다. 핑크, 블루, 옐로우와 같은 원색이나 엄바와 같은 중간색조 위에 화이트를 머금은 색층이 미세하게 번져나간 채 뒤섞인 그것은 농묵과 담묵이 뒤섞이는 동양 수묵의 옅은 번지기 효과나 서양 물감의 미세한 마블링의 효과가 혼재하면서 얇은 재질의 식물성 혹은 동물성의 껍질들이 겹겹이 쌓아 올려진 것 같은 이미지를 창출한다. 보는 이에 따라 그것은 날짐승의 날개처럼 보이거나 식물의 꽃잎 혹은 수초 또는 이파리를 매달고 있는 나뭇가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형식 안에 내용을 담는다고 했던가? 시행착오를 거듭했던 임미량의 회화 실험이 안착한 이러한 조형 형식은 바람과 같은 비가시성의 자연 이미지와 자연의 본성적 위상을 담아내기에 족해 보인다. 그것은 작가 임미량과 대자연의 무엇이 함께한 것이자, 의지와 비의지가, 필연과 우연이 한데 맞물린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비가시성을 가시화하는 그녀의 작업을 ‘자연의 에너지를 품은 실험 회화’라고 족히 부를 만하다.   




V. 회화 실험으로 실천하는 현상학적 환원에 관한 질문 
임미량의 회화 실험의 결과는, ‘바람길’을 품은 원색의 융털이 만개한 날개 혹은 번짐의 효과가 가득한 수초나 나뭇잎과 같은 형상이 화면 위에 가득히 자리한 채 역동적인 움직임을 선보인다. 그것은 어찌 보면 마티에르 가득한 화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바람이 물감을 엷게 펼쳐 만든 일루전의 결과다. 그녀의 일루전을 품은 추상은 무수한 색점이 집적하여 세포 분열을 거듭하고 있는 가상의 생명체처럼 자리하거나 동물 촉수 혹은 수초나 나뭇가지처럼 뻗어나간 자연 생명체처럼 움직임을 지속한다. 
그녀가 실험을 거듭한 작품은 옵아트처럼 패턴화된 이미지로 인해 강렬한 운동감을 선보인다. 실제 화면은 움직이지 않으나 마치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잠재적 운동체로서 말이다. 베르그송(Henri Bergson)과 들뢰즈(Gilles Deleuze)의 이미지론에서 언급하는 잠재태(virtualité)로서의 존재란 보이는 것으로 현실화되지 않았을 뿐 보이지 않은 것으로 현실에 존재하는 엄연한 실재(real existence)다. 마치 주름 뒤에 숨어 보이지 않는 커튼 직물처럼 말이다. 
임미량의 작품은 분명히, 20세기 미학자 수리오(Etienne Souriau)가 간파했던 ‘실재 또는 사물 존재(l'existence réique ou chosale)’이면서 동시에 현상 존재(l'existence phénoménale)의 무엇으로 풀이된다. 그녀가 많은 화가가 사용하는 캔버스와 안료라는 사물 존재 위에서 자신만의 조형 실험을 통해서 바람과 같은 비가시성의 존재 미학에 관한 독자적 해석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되묻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녀의 예술 태도와 회화 실험은 우리에게 ‘순수한 의식 체험으로서의 세계 존재에 대한 탐구’를 제기하는 후설(Edmund Husserl)의 현상학적 환원(Phänomenologische Reduktion)에 관한 질문을 떠올리게 만든다. 후설의 현상학적 환원이라는 것이 “자연적 일상적 태도에 담긴 기존 관념에 대한 부정과 파괴를 통해서 확신에 가까운 통념들을 배제하거나 괄호를 침으로써 모든 신념을 무너뜨리는 창조적인 파괴를 시도한다”는 점에서 임미량의 작업 역시 ‘주관에 남아 있는 모든 편견이나 선입관으로부터 해방된 순수의식’을 잔여물로 남기는 긍정적 기획을 미술의 언어로 지속해서 실천한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임미량의 ‘바람 회화’ 혹은 ‘바람이 몰고 온 그림’은 능산적 자연을 함유한 추상의 언어로, 바람과 같은 비가시성의 자연 에너지를 가시화하고 그 안에 자신만의 독창적인 미학을 담기 위해서 오늘도 실험에 실험을 거듭하는 중이다. 어찌 보면 그것은 회화의 언어로 찾아가는 현상학이라는 철학의 여정처럼 보인다. 그녀의 향후 행보를 기대하며, 그녀의 작업이 함유한 현상학적 질문을 다음의 작가 노트로 대신하면서 글을 마친다. 

”그리는 것 외에 모든 것이 부질없다며 다른 것들은 거부하는 철부지인가. 세월이 내게 준 건 꾸준함이었다. 자유로움과 에너지 그리고 자연에 대한 사랑, 애초에 없는 고정 관념, 이 전시가 끝난 후 나는 또 설렘을 안고 캔버스를 마주할 것이다. (중략) 내 그림을 보는 모든 이가 나의 작품에서 나의 시선에 따라 얻어지는 에너지를 온전히 흡수하길 바란다.”

(20230501)


출전 /
김성호, 「바람이 몰고 온 그림」, 『임미량』, 카탈로그 서문,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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