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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심영철 / 춤추는 정원 (화집 1부)

김성호




춤추는 정원 - ‘현실화된 유토피아’에서의 사랑 (1부) 



김성호(미술평론가)




I.  프롤로그 

설치미술가 심영철은 미국 유학 이후인 1980년대 말부터 미디어아트와 설치미술의 조형 언어를 실험해 오면서 한국의 미술 현장에서 테크놀로지와 예술을 접목한 미디어아트 영역에서 선구적 역할을 견인해 왔다. 1993년 ‘일렉트로닉 가든(대전엑스포)’은 당시 그룹전에서 돋보이는 작품으로 손꼽히면서 미디어 아트의 장에서 그녀의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리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후 그녀의 작업에서 새로운 주제로 변곡점을 마련했던 개인전들만 언급하면 2002년 ‘환경을 위한 모뉴멘탈 가든(인사아트센터)’, 2009년 ‘시크릿 가든(선화랑)’ 2012년 ‘매트릭스 가든(한국미술관)’ 2014년 ‘블리스플 가든(제주현대미술관)’ 그리고 2023년 《춤추는 정원(Dancing Garden)》이라는 한영을 병기한 이름으로 선보였던 ‘댄싱 가든(선화랑)’을 꼽을 수 있겠다. 1983년 전통 조각전이지만 후에 가든 연작에 큰 영향을 미친 첫 개인전을 포함하여 2023년 댄싱 가든에 이르기까지, 어느새 개인전이 52회에 이르고 단체전이 수백 회에 이르는 만큼, 작가 심영철은 우리에게 괄목할 만한 작업을 선보여 왔다.  


심영철은 가든이라는 일관된 키워드 아래, 다양한 내용과 형식의 실험을 모색해 왔다. 그녀가 이름을 달리 한 여러 가든 연작에 천착해 온 까닭은 무엇인가? 각 가든 연작이란 무엇이며 그  특징은 무엇인가? 


‘일렉트로닉 가든’에서부터 ‘댄싱 가든’에 이르기까지 심영철이 탐구했던 가든 연작은 내용과 형식 차원에서 크게 다음의 세 범주에서 전개되어 온 것으로 분석해 볼 수 있다: 1) 현실화된 유토피아, 2) 예술, 테크놀로지, 멀티미디어 연금술, 3) 인간과 자연환경의 공존/공생. 


이 글은 심영철의 전 작업을 관통하는 가든 연작을 중심으로, 관련한 주요 개인전과 단체전을 분석하면서 그녀의 작업 안에 담긴 미학적 함의와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해설하고 그 예술적 가치를 평가한다. 글의 전반에서는 1993년에 시작되고 2023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가든 연작을 위의 세 범주로 나누어 분석하면서 미술사적 의미를 정리하고, 이 글의 뒷부분은 2023년의 ‘댄싱 가든’을 중점적으로 분석하면서 이전의 가든 연작과 공유하거나 차별화된 미학적 함의와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비평적으로 살펴본다. 그렇게 함으로써 지금까지의 심영철의 작업에 드러난 미학을 종합적으로 정리하고, 최근 그녀의 작업에 대한 고민과 관심이 어느 지점을 향해 전개되고 있는지도 예견해 본다. 아울러 이 글이 한국 현대 미술계에서 미디어 아티스트로 차지하고 있는 설치미술가 심영철의 미술사적 위상을 재정립하는데 일정 부분 기여하길 바란다.       



II. 가든 연작 - 현실화된 유토피아에서  

1) 현실화된 유토피아

심영철의 가든 신화의 공간 에덴동산(Garden of Eden)에 기인한다. 그녀의 가든은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가 지냈던 복된 처소인 ‘과거의 낙원’(樂園, paradise)을 그리워하는 것이자, 인간이 야훼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취하는 범죄를 저지른 뒤 떠나야 했던 ‘현재의 실낙원’에 대한 애통의 마음을 담은 것이기도 하다. 실천신학에서 에덴동산이 회개한 인간이 마지막 날 이르게 될 최종 목적지인 천국(Heaven) 혹은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로 비유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미래의 낙원’이기도 하다. 그것은 마치 플라톤 철학이 ‘감각 세계의 너머에 있는 실재’로 살피고 있는 이데아(Idea)의 세계와 닮아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현재의 실낙원’이라는 점에서 토마스 모어가 현실에는 결코 '없는(ou-)', '장소(toppos)'라는 의미에서 작명했던 유토피아(utopia)의 세계이기도 하다. 즉 완벽하지만 실제로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인 유토피아는 인간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렇다면, 실제 현실계에 유사(類似) 혹은 의사(擬似) 유토피아는 없는 것일까? 혹여 그러한 개념이 일부라도 실행되고 있는 공간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 푸코(M. Foucault)는 그러한 가능성의 세계를 현실에서 찾아 ‘헤테로토피아(hétérotopies)’로 명명한 바 있다. 이 용어는 다른(hétéros)과 장소(topos)가 결합한 용어로 푸코에 의하면 ‘현실에 분명히 존재하는 장소이지만, 기존의 공간들에 이의 제기를 하고 그것들을 전도시키는 장소’로서, 개념적으로 다른 곳을 가리키거나 모든 장소의 바깥을 지칭한다. 달리 말해 헤테로토피아는 현실에 있지만, 실재하는 장소의 바깥에 있는 ‘또 다른 공간’, ‘온갖 장소들 가운데 절대적으로 다른 공간’ 또는 ‘반공간(contre-espace)’으로 표상된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푸코는 헤테로토피아를 ‘실제의 유토피아’ 혹은 ‘국지화된 유토피아(utopies localisées)’로 더 간단히 ‘현실화된 유토피아’로 풀이한다.  


심영철이 탐구하는 가든 연작은 ‘현실화된 유토피아’라고 할 만하다. 왜 그러한가? 신화 속 에덴동산 혹은 실존하지 않는 유토피아의 세계를 오랫동안 상상의 언어로 소환해서 자신의 조형 언어로 추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헤테로토피아의 현실 속 구체적인 양상은 무엇인가?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는 푸코가 언급하는 헤테로토피아의 특징과 그것과 관련한 현실의 모델은 어떠한 것들인지 살펴본다. 관련하여 순서를 임의대로 정리해 보자. 


첫째, 헤테로토피아는 인간 현실계에 존재한다. 둘째, 헤테로토피아의 존재 양태와 방식은 역사적으로 변화한다. 거주지 내부와 외부 그리고 삶과 죽음 사이 경계에 얹은 묘지도 그러했고, 모든 과거의 시간을 한 장소에 축적하여 아카이브를 만든 박물관이나 도서관도 그러했다. 셋째, 헤테로토피아는 전통적인 시간과 단절하고 헤테로크로니아(hétérochronie)로 불리는 ‘새로운 시간대 출현’을 이끌기도 한다. 과거의 순차적인 시간을 한 장소에 모으고 박물관이나 현실의 시간을 망각하게 만든 휴양지처럼 말이다. 넷째, 헤테로토피아는 열림과 닫힘의 체계를 갖는다. 마치 여행자를 위해 안과 밖이 수시로 열리고 닫히는 미국식 모텔처럼 말이다. 그것은 열려 있는 동시에 닫혀 있는 체계라고 하겠다. 


다섯째, 헤테로토피아는 한 장소에 둘 이상의 여러 공간이 겹친 것이다. 무대와 객석이 하나의 장에 마주하고 있는 극장도 그러하고 인공과 자연의 대립적 양식과 요소들이 혼성된 페르시아 정원도 그러한 것이라 하겠다. 천연의 자연 요소(땅, 하늘, 물, 식물)와 기하학적 인공 요소(건축물, 파빌리온, 벽, 4분화된 관개 시설)가 한데 맞물려 만들어진 페르시아 정원은 당시 현실 속 낙원 혹은 '현실화된 유토피'아였다. 


심영철의 가든 연작 역시 복수의 공간이 겹친 페르시아 정원을 닮아 있다. 그녀의 일렉트로닉 가든이나 모뉴멘탈 가든 그리고 시크릿 가든이 전통의 시공간과 미래적 시공간을 뒤섞고  현실과 가상을 아우르며, 퍼포먼스, 설치, 조각, 건축이 겹친 무엇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의 가든 연작은 페르시아 정원처럼 나무, 흙, 돌, 소금, 물, 불 등 ‘자연 요소’와 함께 폴리, 스테인리스 스틸, 브론즈와 같은 ‘인공 요소’를 혼성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테크놀로지’가 어우러진 혼성체임을 선언한다. 

여섯째, 헤테로토피아는 당연하게 실존하고 있는 공간의 질서에 이의제기하고 그것을 무너뜨리고 신기루처럼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질서의 체계를 이탈하는 상상의 공간이자 새로운 질서를 재조직하는 공간인 셈이다. 마치 그것은 익숙한 현실 공간을 다르게 보는 방식을 불러온다. 이러한 특징은 앞서 언급했던 헤테로토피아에 관한 여러 특징을 하나로 잠식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심영철의 가든 연작은, 여러 공간이 겹치고 자연과 인공이 혼성된 공간으로 예시된 페르시아 정원뿐만 아니라 위에 언급한 다양한 헤테로토피아의 양상과 공유한다. 특히 전통과 현대의 시간이 한 장소에서 겹쳐지는 풍경은 심영철의 작업 전반에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성이다. 신화의 시공간과 시원의 자연과 무속적 전통, 그리고 동시대의 기술, 과학이 맞물리는 ‘의사 고고학적 풍경’이 그것이다. 순차적인 연대기가 와해된 채 한 공간에서 재조립된 헤테로크로니아의 시간관은 그녀의 작업을 헤테로토피아의 공간으로 만들기에 족하다. 그녀가 만든 풍경은 일렉트로닉 가든에서는 전통의 삶과 신앙관이 맞물린 무속의 공간이 되기도 하고, 모뉴멘탈 가든에서는 신에게 제례를 바치는 거룩한 성전이 되기도 하고, 시크릿 가든에서는 어머니와 여성의 내면 공간으로 깊이 들어온 심적 위안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한편 그것은 매트릭스 가든에서처럼 동양의 전통적 공간과 서구의 첨단 과학 사유가 만나 만든 우주의 시공간이 되기도 한다. 거시 세계에서는 파동 현상과 입자가 만들어내는 현상이 명확하게 구별되나, 미시 세계에서는 파동과 입자의 특성이 함께 작동하는 ‘파동-입자 이중성(wave-particle duality)’의 세계 그리고 불확정성의 원리를 그녀의 매트릭스 가든 연작은 유감없이 선보인다. 그것은 열림과 닫힘이 동시에 부딪히는 공간이다. 입자 혹은 소우주를 상징하는 스테인리스 스틸 구슬과 파동 혹은 대우주를 상징하는 집합된 구슬들이 형성하는 멀티플 아트(Multiple art)인 그녀의 매트릭스 가든은 우주의 질서와 세계를 재편하는 듯한 웅장한 스케일을 선보인다. 게다가 메탈의 차가운 외형에 자연의 따스한 이미지를 겹쳐 올려 관객으로 하여금 쏟아져 내리는 폭포의 이미지나, 비상하는 날개의 형상을 유추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첨단의 테크놀로지를 통해서 관객을 현실과 상상의 접점이 혼성된 가상현실의 시공간을 체험하게 만드는 심영철의 관객 참여형 작품들은 이러한 헤테로토피아의 개념을 궁극적으로 완성하게 만든다. 인피니티 미로, 센서 그리고 터치스크린과 같은 기술적 장치를 통해 관객의 참여를 우연과 의도 속에 견인하는 그녀의 작품은 보드리야르가 언급했던 시뮬라시옹의 세계를 헤테로토피아의 장으로 현실화한다.      


이처럼, 푸코의 헤테로토피아나 심영철의 가든 연작이 공히 ‘전통적인 시간의 단절과 중첩, 겹친 복수의 공간, 열림과 닫힘의 체계’ 등과 관계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녀의 가든 연작을 가히 ‘현실화된 유토피아’ ‘또 다른 헤테로토피아’라고 정의하고 부를 만하다. 



2) 예술, 테크놀로지, 멀티미디어 연금술 

심영철은 ‘현실화된 유토피아’를 미술의 언어로 구현하기 위해 미술 외부의 첨단 미디어를 작품 안으로 적극적으로 가져온다. 철, 스테인리스스틸, 유리, FRP 등 미술의 기본적 미디어뿐만 아니라 항아리, 촛불, 동전 등 다양한 오브제 그리고 당시에는 첨단 미디어라 여겨졌던 비디오 모니터, 전기, 전자 장치, 광섬유, 네온, 홀로그램, 레이저, 터치스크린, 워터 스크린, 심지어 인조 피부까지 작품 안으로 가져온다. 


심영철에게 있어 예술에 테크놀로지를 도입한 미디어 실험과 설치적 언어는 조각 위주의 전시를 했던 첫 개인전에서부터 단초를 보인다. 1983년 1회 개인전 《빗의 단계적 표상》에서 전통적 조각의 양상에 천착하면서도 사물의 조각화를 시도하는 ‘조각적 설치’를 선보였다. 여성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빗’의 조각과 그것의 설치적 방식의 모색은 하이데거(M. Heidegger)가 언급한 ‘세계-내-존재(In der Welt-sein)'라고 하는 존재론적 위상을 여성성에 기초하여 탐구하게 만든다. 그녀의 첫 개인전은 오랫동안 전시 준비를 하면서 자연으로부터 받았던 감흥을 담아낸 것이었다. 한강 호수에 햇빛이 비쳐 수면에 만들어진 윤슬을 시각화했을 뿐만 아니라 전시를 위해 톱질해 두었던 나무빗살 하나하나에 드리워진 음영을 보고 받았던 감흥을 최종적으로 ‘빗의 조각’ 안에 담아낸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1983년 개인전은 향후에 그녀가 라이트 아트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첫 장이자 그녀가 탐구하는 설치미술의 근원적 출발점이 된다. 


이후,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개최한 1989년 2회 개인전 《Jesus love you》에서 심영철은 여성의 특수성으로부터 인간의 보편성으로 자리 이동하면서 ‘인간-신’의 관계에 대해 탐색하는 종교 예술을 선보인다. 2회 개인전부터 자연물과 네온을 활용한 미디어 테크놀로지가 만나는 작업이 가시화되었다는 점에서 그녀의 미디어 실험을 통한 설치미술은 유학 이후부터 비롯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겠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이 있다. 한국에선, 1956년 현대미술가협회가 결성된 후, 1957년 모던아트협회가 결성되고 조선일보사 주최의 《현대작가초대전》 등이 열린 1957년을 현대미술의 출발점으로 보고 있듯이, 설치미술이나 미디어 아트의 시작은 그 뒤의 일이다. 국내에서 설치미술의 시작은 196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비디오아트를 포함한 미디어아트의 시작은 그보다 10년 뒤인 1970년대 중후반부터로 보는 것이 일반론이다. 


먼저 설치미술의 경우, 1962년 《악뛰엘전》에서 일부 소개가 되었으나 평면 위주의 작업에 오브제를 도입하는 정도였고, 본격적인 설치는, 설치, 퍼포먼스, 테크놀로지아트 등 실험미술의 절정을 알린 1967년 《청년작가연립전》에서부터였다. 그런 점에서 서구에서 등장했던 1950년대 말 네오다다의 오브제 미술, 같은 시기에 등장한 일본의 ‘구타이(Gutai) 그룹’의 퍼포먼스와 연동한 설치 미술, 그리고 1960년대 중반 개념미술과 연동했던 설치 작업을 비교해 본다면, 서구와 한국의 설치미술 등장에 있어서, 그 차이는 10년이 채 되지 않는 편이다.  


한편, 비디오아트의 경우, 1963년 독일 부퍼탈의 파르나스(Parnass)갤러리에서의 백남준의 개인전 그리고 같은 해 두 달 뒤에 뉴욕의 스몰린(Smolin)갤러리에서 열린 포스텔(Wolf Vostell)의 개인전을 그 출발점으로 본다. 한국에서 비디오아트가 대략 1970년대 김구림, 박현기, 김영진 등 몇 작가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서구와 한국의 비디오아트 등장은 차이가 10년 남짓 된다. 박현기로부터 본격화된 1970년대 비디오아트가 대개 실재와 재현,  시간성과 연계한 개념적 비디오아트였다고 한다면, 심영철 외 작가들이 선보였던 1980~1990년대의 비디오아트는 장치적인 비디오 조각이 다양하게 전개되는 시기였다. 특히 심영철이 선보인 1989년 2회 개인전과 1990년대 3회 개인전은 국내의 비디오 아트 및 미디어 설치 현장에 있어 그녀를 주요 작가로 등극하게 한 시발점이 되었다. 


1989년 2회 개인전에서 선보였던 작업은 의미심장하다. 첫 개인전으로 발화하고, 유학 기간 중 체험했던 라스베이거스의 네온 간판이 이룬 불야성의 풍경이 남긴 감흥을 구체화한 그녀의 멀티미디어가 본격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2회 개인전은 이전의 고민이었던 ‘조각의 유연한 변화’를 실천하는 장이자 다양한 미디어 실험을 본격적으로 선보이는 장이었다. 이 전시에서 그녀는 네온과 홀로그램, 레이저, 광섬유를 설치한 ‘라이트 아트’와 더불어 자연물과 인공물이 조화를 이룬 ‘설치 미술’을 함께 선보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벽면에 8미터에 이르는 붉은 벨벳 천을 두르고 가시면류관을 설치하여 2미터 높이로 성경책을 배치하는 등 다양한 설치 조형을 선보였는데, 이러한 설치는 바닥, 벽뿐만 아니라 중앙의 허공까지도 전시 공간으로 활용한 ‘공간 연출’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1990년 3회 개인전에서 심영철은, 다양한 오브제 설치와 더불어 장치적인 비디오 조각 또는 개념적 비디오 설치를 선보였다. 여기서도 공간 전체를 하나의 스토리텔링으로 묶어 시도한 ‘공간 연출’이 시도되었다. 전시 공간 전체를 신의 공간과 인간의 공간 그리고 신을 향한 인간의 실존적 고민을 담은 방 등 세 범주로 구획해서 스토리텔링을 선보인 작업이 바로 그것이다. 이 전시에는 동물 박제, 폐오브제, 가스 불, 홀로그램, 네온, 비디오를 아우르는 멀티미디어와 함께 다양한 오브제를 조형화한 설치와 1,500권의 성경책을 집적하여 만든 대규모 설치 작품들이 선보였다. 이 전시에서 관객에게 성경책을 나누어주는 퍼포먼스를 통해 관객의 참여와 소통을 시도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또한 관객이 모래 위를 걸어가게 만든 ‘관객 참여형 비디오아트’는 훗날 1980-90년대 한국의 ‘장치적인 비디오 조각’ 또는 ‘개념적 비디오 설치 작품’을 견인하는 주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이 3회 개인전을 통해 심영철은 당시 예술평론가협회로부터 최우수예술가 상을 받음으로써 주요한 미디어 아티스트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른다. 


1993년 대전 엑스포의 전시 《테크노 아트》도 주목할 만한다. ‘일렉트로닉 가든’ 연작이 이 전시에서 첫선을 보이고 같은 해 선화랑과 다음 해인 1994년 현대백화점에서 개인전으로 선보이면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 연작에서 비디오, 네온, 홀로그램뿐 아니라 카이스트와 협업하여 당시에는 획기적이라 여겨졌던 미디어인 터치스크린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도입하고 방향제를 사용하는 등 오감에 반응하는 관객 참여형 예술을 실험했다. 당시 그녀의 ‘일렉트로닉 가든’은 멀티미디어와 함께 자연물을 함께 전시하여 인공과 자연, 시간과 공간 등이 맞물리고 다원화된 미디어와 거시적인 메시지가 병존할 뿐만 아니라 작품과 관람객이 소통하는 전시였다. 주지하듯이, 국내에서 1990년대는 다큐멘터리 비디오아트, 퍼포먼스 비디오, 비디오 스컬프쳐, 비디오 설치, 비디오 키네틱, 멀티채널 비디오 등 다원주의 경향의 비디오아트 실험이 다른 미디어와 혼성된 채 활발하게 펼쳐진 시대였다. 따라서 이 전시는 그녀의 2회, 3회 개인전과 함께 1990년대 초중반의 한국 미술 현장에서 활성화되기 시작한 복합 미디어 혹은 다원주의 미디어에 대한 실험을 대대적으로 선보인 전시이자, 작가 심영철이 당시의 복합 미디어의 장에서 선구적인 위치를 확고하게 다지게 했던 아트 이벤트였다고 하겠다. 


이후 그녀는 1997년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홀로그램을 중심으로 한 개인전을 개최했고, 2001년에 지하철 6호선의 전동차를 무대로 복합 미디어 세계를 펼친 개인전 《달리는 디지털 영상미술관》을 선보이기도 했다. 


한편, 2002년 인사아트센터에서 개최한 ‘환경을 위한 모뉴멘탈 가든’ 이후 여러 차례 발표된 모뉴멘탈 가든 연작은 이전의 일렉트로닉 가든 연작에서 이미 시도했던 다양한 미디어 실험을 가속하면서도 더욱더 기념비적인 양상으로 그 덩치를 키우거나 실내뿐 아니라 야외의 영역으로 뛰쳐나간다. 당시 시도했던 거대한 유리 조형이나 빛에 관한 실험은 성스러운 종교적 주제 의식을 숭고의 미학 개념으로 가시화하기에 족한 것이었다. 심영철은 2009년 선화랑에서 석주미술상 수상 기념전으로 개최되었던 시크릿 가든 연작에서 자수정, 옥, 크리스털과 같은 보석류를 작품 안으로 가져와 친환경적인 도색 방식을 접목하면서 비밀스러운 자연의 형상을 펼쳐 보이기도 했다.  


이처럼, 심영철은 다원화된 미디어의 결합과 실험을 통해, 그녀가 말하는 ‘복합 채널’의 설치 조형 언어를 완성해 나간다: “나는 복합채널을 통해 소통을 극대화하는 작가이다. 복합채널을 사용한다는 것은 매체를 다양하게 사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매체가 달라지면 메시지도 달라진다는 마셜 매클루언(H. Marshal Mcluhan, 1911~1980)의 가정 속에서 독자적인 메시지를 개발해 오고 있다.” 그렇다. 미디어가 달라지면, 그 미디어가 실어 나르는 메시지도 달라지고, 그것을 해석하는 인간의 인식도 달라진다는 차원에서 미디어 자체가 곧 메시지라고 단언한 마샬 맥루한의 언급처럼, 그녀는 동시대에 부합하는 메시지를 담기 위해 새로운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작업 안에 끌어들인다. 


여기서 살펴볼 것이 있다. 하나는 2000년대 초반에 테크놀로지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세계로 급변하던 시기였다는 점을 상기할 때, 심영철이 구사하는 멀티미디어가 아날로그에 머물지 않고 아날로그와 디지털 세계를 혼성하는 양상으로 전개되어 왔다는 점에서, 그녀는 기술적 변화를 끊임없이 예술에 적용하는 흔치 않은 예술가로 자리매김해 왔다는 것이다.  


살펴볼 것 또 하나는, 심영철의 가든 연작에서 드러나는 ‘복합 채널’이라는 것이 미술 밖 재료로 간주되었던 인공의 다원화 미디어를 작업 안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면서도 천연의 자연 요소를 함께 배치하면서 구성한다는 것이다. 물, 불, 흙 나무, 돌, 모래, 소금, 풀과 같은 자연 재료가 그것으로 그녀는 이러한 자연 재료와 인공 재료 그리고 테크놀로지의 결합 위에 동시대에 부합하는 새로운 메시지를 올려 담는다. 이러한 차원에서 우리는 그녀의 가든 연작을 예술과 테크놀로지의 만남을 실험하는 ‘멀티미디어 연금술(鍊金術)’로 부르기로 한다. 


생각해 보자. 연금술은 중세부터 18세기에 이르기까지 금속이나 기타 물질을 통해 금을 발견해내는 것을 목적으로 했던 상상의 기술이었다. 연금술이란, 기실 끝내 찾을 수 없었던 이른바 ‘현자의 돌’(Philosopher's Stone)을 발견하고자 했던 노력처럼 무모한 것이기도 하다. 동양에서 제기되었던 불로초, 불사약을 찾는 노력처럼 말이다. 그런 면에서 연금술이란 근대 이전까지 과학이 도모하는 궁극적 정수라 할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오늘날 연금술을 통해 읽어내는 미학이란, ‘어떠한 물질에 내재한 특정 형상을 제거하고 원래의 물질을 파괴함으로써 다른 특정 형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마그누스(Albertus  Magnus, 1206~1280)의 연금술에 관한 ‘끝없는 변성에 대한 철학적 사유’와 관계한다. 즉 물질 속에 내포된 내면적 발전과 같은 ‘영적 인식과 진화’에 대한 깊은 철학을 사유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1884-1962) 식으로 말하면 형태적 이마쥬(image formelle)를 벗고 되찾은 물질적 이마쥬(image matérielle)와 관계하는 것이다. 바슐라르에 의하면 대상의 표면에 머무르는 형태적 상상력’(imagination formelle)이란 얼음의 외형처럼 고정화된 것일 뿐이고 대상의 표면과 내면이 함께 침투하는 물질적 상상력(imagination matérielle)이란 얼음, 물, 수증기처럼 변화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심영철의 작품에서 읽어내는 ‘멀티미디어 연금술’이란 이처럼 자연과 인공의 각기 다른 물질들이 품은 물질적 상상력과 그것에 관한 철학적 사유를 통해 ‘현실화된 유토피아’의 영적 세계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것은 정지해 있지 않고 변화를 내포하며 늘 움직이는 무엇이다. 그것은 유토피아를 현실의 장에서 구현하려는 공생, 공존이라는 당면한 과제를 실천해야만 하는 인간 존재에 관한 활유적 메타포가 된다. 



3) 인간과 자연환경의 공존/공생

심영철은 ‘현실화된 유토피아’의 세계를 멀티미디어 설치미술을 통해서 현실의 지평에 매개하려는 연금술사이기를 자처한다. 그것은 미술의 언어로 인간과 자연환경의 공존과 공생을 도모하는 일에 나서는 것이다. ‘현실화된 유토피아’의 세계는 현실의 지평 위에 인간과 자연환경의 공존과 공생을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계와 폭력이 없는 모두가 평등한 유토피아의 세계를 현실 위에 어떻게 올려놓을 것인가? 심영철은 신이 준 인간의 과제를 오늘날 전쟁, 환경오염과 질병이 난무하는 재난의 시대에서 성찰한다. 1990년 3회 개인전 《인간,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에 있다가 어디로 가는가?》는 후기 인상주의 화가 고갱(P. Gauguin)의 한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D'où venons-nous? Qui sommes-nous? Où allons-nous ?)〉(1897)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고갱이 인생 최대의 고빗길에서 창작에 매진했던 것으로,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철학적 질문으로 넘실댄다. 이러한 주제 의식을 설치 미술의 언어로 풀어낸 심영철의 이 전시는 신을 대면한 인간의 존재에 관한 성찰에 집중한 것이었다. 반면에 1993년 일렉트로닉 가든 연작이나 2002년 ‘환경을 위한 모뉴멘탈 가든’에서 선보인 모뉴멘탈 가든 연작은 신과 인간의 관계 재정립의 문제뿐만 아니라 자연환경 속 인간의 존재에 관한 현실적 문제에도 집중한 것이었다. 


그렇다. 헤테로토피아를 현실 속에서 탐구하는 심영철의 가든 연작이나 모뉴멘탈 가든 연작, 시크릿 가든 연작은 ‘인간과 자연환경의 공존과 공생’이라는 현실의 지평을 가늠하게 만든다. 심영철에게 이러한 인간의 공존과 공생은 특별히 버섯으로 은유된다. 버섯이 군집해 있는 풍경의 실내 전시 작품을 〈아름다운 그 임〉(1996)이라 작명하고, 거대한 버섯 군집 풍경을 야외에 설치한 작품을 〈유토피아〉(2003)이라고 작명한 까닭은, 그녀가 자연환경에 순응하는 버섯의 군집 서식을 인간 존재의 이상적인 모델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버섯은 홀로 있기보다 무리 지어 살아간다. 버섯의 포자는 바람에 실려 날아가 알맞은 환경을 만나면 싹을 트고 어린 버섯으로 자라나 어른 버섯이 된다. 나무의 그루터기나 쓰러진 나무에 기대어 숨죽이듯 살아가는 버섯의 생리, 이 모습을 통해 인간의 모습을 본다. 연인의 사랑, 가족의 사랑, 등 돌린 사랑의 아픔, 또다시 조우하는 사랑..., 사랑과 신앙의 두 세계를 아우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인고의 시간과 아픔의 늪에 머물렀던가? 절대자의 앞에서 늘 부족하고 모자란 피조물로서의 인간은 너무나 버섯과 닮아있는 것 같다.” 


작가 노트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심영철에게 있어 버섯은 공존, 공생하는 인간에 대한 메타포로 자리한다. 혹자들은 그녀의 버섯을 남성의 상징으로 해설하는 일에 집중하기도 하지만, 그녀에게 버섯은 에로스의 대상인 남성을 넘어 신의 피조물인 인간, 특히 사회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공생하는 인간에 대한 메타포로 확장된 것이다. 나룻배 위에 발기한 남근처럼 서 있는 무수한 버섯들을 형상화한 작품 〈노아의 방주〉(1996)는 이러한 관점을 여실히 드러낸다. 홍수로 멸망한 인류 가운데 구원을 받은 노아의 방주 속 인간 군상은 심영철에게 있어 공존과 공생을 실천하는 사회적 인간의 이상적 원형인 셈이다.  


공생(共生, symbiosis)은 인간이 자연을 혹은 또 다른 인간을 대상화하고 구속, 억압, 폭력을 행했던 것에 대한 자연과 또 다른 인간의 응답이자 피드백이다. 심영철은 자연의 심정을 안고 우리에게 공생을 제안한다. 공생이 “서로 다른 종의 개체들이 밀접한 관련을 맺고 살아가는 것”을 가리킨다고 할 때, 늘 인간의 종속 대상이자 피해자였던 식물의 마음으로 인간에게 제안하는 공생이란 생각처럼 쉽지 않다. 공생에는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상리공생(相利共生)만 있는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심영철은 한쪽에만 이익이 되는 편리공생(片利共生)이나 한쪽이 늘 손해를 보는 편해공생(片害共生)의 입장에 있을지라도 자연의 마음으로 인간에게 공생을 제안한다. 자연이란 가해자 인간을 한없이 용서하고 치유, 화해, 공생을 제안하는 존재이니까 말이다. 


심영철은 2010년 스테인리스 스틸 구(球) 모듈을 멀티플 아트의 유형으로 집적하는 매트릭스 가든 연작을 통해서 이러한 공생의 메시지를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이 연작에서 하나가 둘과 셋으로 모여 조화의 세계를 만드는 스틸 구 모듈은 공생하는 인간에 대한 메타포가 되기에 족하다. 2014년 제주현대미술관에서 세미 회고전 형식으로 개최했던 블리스풀 가든은 이전까지의 일렉트로닉 가든, 모뉴멘탈 가든, 시크릿 가든, 메트릭스 가든을 모두 아우르는 종합전이었다는 점에서 이러한 공생의 미학을 더욱더 풍요롭게 선보였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 2부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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