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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김두리 / 시간을 직조하는 ‘이음-공간 회화’

김성호

시간을 직조하는 ‘이음-공간 회화’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작가 김두리는 천들을 이어 평면 작품을 만든다. 옛날 천과 현대 천을 바느질과 붓질로 연결하고 완성한 그녀의 작품은 가히 ‘이음-공간’ 혹은 ‘이음-공간 회화’라 부를 만하다. 아니 그것은 하나의 공간이 또 다른 공간들과 만나 이룬 ‘시간의 직조(織造)’! 그것이 과연 무엇이고 그녀의 작품은 어떠한 메시지를 품는 것일까? 


김두리 작



I. ‘천 잇기’라는 예술 텍스트  
김두리의 작업에서 천은 모든 재료의 출발점이다. 천은 “실로 짠, 옷이나 이부자리 따위의 감이 되는 물건”을 지칭한다는 점에서 ‘무엇인가를 완성하기 이전에 그 무엇의 바탕이 되는 사물’이다. 따라서 “아직 끊지 아니한 베, 무명, 비단 따위의 천을 통틀어 이르는 말”인 ‘피륙’과 개념상으로 “씨실과 날실을 직기에 걸어 짠 물건을 통틀어 이르는 말”인 ‘직물’과 방법론상 동의어가 된다. 
흥미로운 것은 피륙, 직물과 공유하는 김두리의 ‘천’ 작업은 ‘잇기’라는 만남의 언어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실-천-염색-회화’를 아우른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섬유 예술’이다. 섬유 예술이 무엇인가? 가로와 세로로 실을 교차시키고 씨줄과 날줄을 이어 나가는 ‘실 잇기’를 거쳐 만들어진 ‘섬유(textile)를 ‘천 잇기’를 통해서 ‘쓰임새를 전제로 하지 않는 무엇’을 만드는 활동이다. 실용적이지 않은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예술의 속성상 그것은 대개 우리의 일상에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유용하지 않은 것들일 수 있다. ‘의복을 위한 옷감’으로 혹은 ‘다른 용도의 천감’으로 사용되지 않고 ‘무용한 예술’을 위한 소재로 사용되면서 김두리의 ‘천 작업’은 섬유 예술의 질감(texture)을 드러내는 효과에 집중된다. 
한편, 그녀의 작업은 섬유 예술이라는 공예적 속성으로부터 순수 회화의 영역으로 전개되어 나간다는 점에서 위상적으로 ‘현대 미술’을 지향한다. 쓰임새를 버리고 ‘무용한 순수 예술’의 세계에 잠입하는 그녀의 ‘천 작업’, 달리 말해 ‘천 잇기 작업’은 ‘실과 실’, ‘천과 천’의 만남을 지속적으로 중계하고 주선한다는 점에서 여러 요소들이 맞부딪혀 만드는 ‘조화(texture)’를 가시화한다. 그것은 분명 '천들의 이미지(image)'이지만, 동종이형의 천들이 이루는 만남의 미학을 성찰하게 한다는 점에서 하나의 메시지이자 ‘텍스트(text)’가 된다. 
특히 바르트(R. Barthes)의 언술에 기대어 말한다면, 김두리의 ‘천 잇기 작업’은 만질 수 있는 물리적 사물로서의 전통적인 작품(oeuvre, work)의 위상을 넘어서 ‘이음-공간’의 시공간적 조우에 관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차라리 텍스트(texte, text)라 칭할 만하다. 바르트의 말대로 ‘텍스트’는 하나의 기의로 닫히는 ‘작품’의 위상을 넘어, 여러 기의로 확장하는 존재이다. 상식(doxa)의 경계선을 넘어 역설(paradoxal)로 나가는 무엇이다. ‘공간 잇기’를 통해서 확정되지 않는 공간을 지속적으로 증식시키면서 불확정성을 향해 달려 나가는 그녀의 작업은 옛것과 새것의 잇기를 병행하면서 시간마저 증식시킨다. 달리 말해 그녀의 작업은 ‘무용한 천 잇기’로부터 ‘거시적 시공간 잇기’를 두루 횡단한다는 점에서 가히 '예술 텍스트(texte artistique)라 할 것이다. 

  
김두리, Untitled, 캔버스에 앤티크 패브릭, 48 × 104.5cm-2010


II. 네모의 변주와 ‘이음-공간’ 
작가 김두리의 ‘천 잇기 작업’은 ”전통 보자기를 어떻게 회화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라고 하는 고민을 가시화한 결과물이다. 즉 전통 보자기의 문법을 고스란히 계승하면서 ‘이음-공간’을 창출하는 ‘이음-공간 회화’라고 할 것이다. 주지하듯이 ‘보자기’는 한자어 보자(褓子)가 지시하듯이, 포대기나 지지체와 같은 존재로, “물건을 싸서 들고 다닐 수 있도록 네모지게 만든 작은 천”을 뜻한다. 
우리는 네모의 변주가 야기하는 전통적인 보자기의 미학을 잘 안다. 서구의 가방 혹은 박스(box)는 담을 수 있는 사물의 크기와 용량에 제한을 받는 ‘네모’이지만, 한국의 보자기는 그렇지 않다. 담기는 사물의 크기와 용량에 스스로의 몸을 맞추어 변주하는 ‘네모’이다. 적거나 작은 대로, 많거나 큰 대로, 둥글거나 모난 대로, 포장되어야 할 사물의 용량과 크기 그리고 모양에 자신의 몸을 맞추어 사각의 모서리를 서로 이으면서 변주하는 ‘네모’인 것이다. 게다가 이 ‘네모의 천’은 사물의 보관과 이동뿐 아니라, 덮고, 가리고, 받치고, 꾸미는 등 다종다양한 기능을 한 몸으로 실현함으로써 마치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역할을 찾아 다하는 전천후의 존재임을 증명한다.         
보자기가 지닌 ‘네모의 변주’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자신의 몸 자체가 이미 ‘네모들의 무수한 변주’를 품은 복합체이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한국 전통의 보자기는 조각보로 대별된다. 처음부터 ‘커다란 네모로 재단된 천’ 위에 아름다운 자수를 놓아 품위를 드높인 보자기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는 ‘자투리 천을 작은 네모로 이어 붙여 만든 조각보’이다. 버려진 것들이 귀환해서 창출하는 네모의 변주! 조각보는 이미 그 자체로 ‘이음-공간’을 구현한 존재라 할 것이다. 
작가 김두리는 한 발 더 나아가 이러한 네모의 변주를 여러 만남으로 확장한다. 작가 노트를 보자: “나의 작업은 천/패브릭으로 한 작업이며 고유의 천 즉, 옛 천과 현대 천을 염색하고 다듬어서 바느질과 붓질을 하여 이루어지는 작업이다. 나의 작업은 공간을 만들어 붙이면 또 다른 공간이 생기고 더 확장되어 나아간다. 공간에 공간을 이어가면 한 색상 또는 다양한 색상이 어우러지면서 또 다른 이음이 이어진다. 시간, 즉 큐브에서 오는 공간은 서로 맞물려 각자 고유의 형태, 맛이 함께 어우러져 더 깊은 공간들이 만들어진다.” 
우리는 작가의 진술에서, 대비되는 단어들이 조합을 이루는 ‘만남의 쌍’을 찾아볼 수 있다. ‘옛 천/현대 천, 염색/재단, 바느질/붓질, 공간/(다른)공간, 색상/(다른)색상’과 같은 쌍이 그것이다. 이러한 이항 대립(二項 對立)과 동항 병치(同項 竝置)의 쌍은 ‘이음-공간’이라는 동일한 주제에 오랫동안 천착해 온 김두리의 작업의 전모를 알 수 있는 표현이 된다. 게다가 작가의 이러한 진술은 이 글이 집중하는 ‘이음-공간 회화’를 반증하는 증언이 되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김두리의 ‘천-잇기 작업’에는 시인 김춘수가 노래하는 한국 전통 보자기가 품은 ‘다양한 만남의 미학’이 흠뻑 담겨 있다. 
“독특한 문화유산 / 우리의 보자기에는 몬드리안이 있고 / 폴 끌레도 있다. / 현대적 조형 감각을 / 유럽을 훨씬 앞질러 드러내고 있다. (중략) 거기에는 기하학적 구도와 / 선이 있고 / 콜라주의 기법이 있다. / 가장 먼 거리에 있는 것들끼리의 결합, / 쉬르리얼리즘이 있다. / 그러나 그것은 또한 가장 기능적이고 / 실용적이다. / 그렇다. / 그것은 또한 가장 격조 높은 / 미니멀 아트가 되고 있다.”
김두리의 천-잇기 작업이 함유하는 만남의 미학에는 김춘수가 노래한 보자기의 미학을 고스란히 품는다. 즉 몬드리안과 미니멀 아트가 오가는 네모의 변주와 더불어 폴 클레와 초현실주의가 오가는 이미지의 변용을 품을 뿐 아니라 ‘이음-공간’이라는 회화 속에 엣 것으로부터 미래로 가는 시간성에 대한 화두마저 품는 것이다. 

김두리 작


III. 시간을 직조하는 ‘이음-공간 회화’
김두리의 ‘천-잇기’ 작업에는 청아한 쪽빛과 짙붉은 홍화 그리고 침잠한 회백의 흙빛이 만드는 네모들이 서로의 몸을 꿰어 맞춘 채 자리한다. 천연으로 염색된 옛 천들과 산뜻한 인공의 현대 천들이 이룬 기하학적 추상! 
흥미로운 것은, 김두리의 이러한 기하학적 추상에는 ‘천-잇기’라는 만남의 관계학이 마치 옛 성벽의 축성술처럼 구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돌을 다듬어 일견 H형처럼 쌓아올린 옛 성벽은 자세히 보면 그것이 바둑판무늬와 같은 획일적인 격자의 틀 속에 자리하는 것이 아니라, 안정성과 견고한 보존성을 위해서 ‘품(品)’자 모양처럼 엇갈리게 쌓여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김두리의 작품 속 네모들의 만남 역시 이와 유사하다. 마치 옛 축성술처럼, 각기 다른 네모들이 서로의 몸을 꿰맞추기 위해 ‘품’자 모양으로 어긋난 만남을 순차적으로 이어가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것은 하나의 네모가 또 다른 네모들과 이웃하고 있는 정겨운 풍광을 만든다. 이러한 조형 언어는 ‘버려진 짜투리 천을 이어 붙인 조각보의 조형 언어’를 계승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치 옛 건축술에서 ‘모양이 제각각인 건축 부재를 서로 맞대어 면을 맞추는 그랭이 기법’을 응용한 것처럼 김두리의 ‘천-잇기 작업’은 길이와 폭이 다른 동종이형의 네모들을 이리 저리 배치하여 하나의 네모가 여러 네모를 이웃하게 만든다. 마치 고구려 축성술에서 발견되는 ‘육합 쌓기’, 즉 성돌 하나가 다른 돌 여섯 개와 맞물리도록 쌓는 방식처럼 김두리의 작품 속 네모 하나는 때로는 서넛의 네모와 만나고 때로는 그 이상의 네모와 맞물리면서 친구들과 이웃을 만든다. 한 인간 주체와 또 다른 타자들과 만남을 이루어 인간 사회를 구성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면에서 김두리의 ‘이음-공간 회화’는 우리 인간 사회에 대한 하나의 은유처럼 자리한다. 아니 만남의 관계학을 보다 더 확장하여, 세계 전체에 대한 은유로 읽어볼 수도 있겠다. 동양 철학에서 “우주 만유일체의 사물이 서로 무한한 관계를 가지고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연기법이, 곧 우주를 은유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해 보라.  또는 비물리적인 모나드 개체의 연결을 통해 불생불멸의 세상이 구성되어 있음을 증명하는 라이프니츠(G. W. Leibniz)의 ‘모나드(Monad) 이론’에서의 만남의 형이상학적 철학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우리는 안다. 공간 속 또 다른 공간의 연쇄적 만남으로 가득한 이 세계는 언제나 시간성에 관한 문제의식을 이끌어 내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베르그송(H. Bergson)은 ‘시간’을 정의하는 개념어로 ‘지속(Durée)’을 주창하는데, 그것은 ‘공간과 완전히 섞여 있는 순수한 시간(temps purifié de tour mélange avec l'espace)’을 의미한다. 언제나 공간은 홀로 존재하지 않고 시간과 함께 존재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공간의 만남은 시간 속에서 펼쳐진다. 
김두리의 ‘천-잇기’ 작업은 이러한 점에서 ‘시공간적 상호개입의 시간(temps comme l'interdépendance spatio-temporelle)’이 점유하는 작업이며, 공간-잇기와 시간-잇기를 하나로 품는 작업이라 하겠다. 달리 말해, 공간의 만남을 통해 시간을 직조하는 ‘이음-공간 회화’이자 ‘이음-시공간 회화’이라 할 것이다. 작가 노트를 보자: “사각의 단색, 즉 색상에서는 단색조의 회화성을 표현하고자 한다. 이음은 또 다른 이음으로 넓혀져 가면서 시간, 공간들을 엮어 나아가는, 한 공간에 또 다른 공간, 또 이어지는 공간들, 이에 이어지는 이음에 우리들의 시간성을 표현한다. 이음은 이어나간다는 의미에 시간들의 축적이 흘러가기도 하고 쌓이기도 하는 공간들이며 이음에 이음을 ‘이음’되어지는 형태들이 무심히 확장되며 변화한다. 나의 작업은 나의 과거, 현재, 미래가 표현되기도 한다.” 


김두리 작,





IV. 만남의 기하학적 추상 - 인간 세계의 은유 
작가의 언급에서 살펴보듯이 ‘우리들의 시간성’은 김두리의 순연한 ’기하학적 추상 회화’가 실상은 ‘인간 세계’를 은유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처럼 작가 김두리의 섬유 예술, 더 나아가 현대 미술의 언어는 ‘천-잇기’라는 ‘공간 만남의 관계학’을 통해서 시간의 의미를 되묻고 인간의 존재 의미를 성찰한다. 그것은 소외되거나 고립된 인간 존재의 문제를 떠나 누구 혹은 무엇과의 만남을 지속하는 사회적 인간의 존재를 은유한다. 
이미 천연의 질료로 염색된 옛 천을 가져와 인공의 현대 천과의 만남을 바느질로 주선하거나 그 위에 붓질로 물감을 입혀 전통의 현대적 계승을 도모하는 김두리의 작업은 이제 변모를 거듭하는 중이다. 최근작은 이전의 다양한 색상의 만남의 관계학을 탐구하던 것으로부터 벗어나  단색조의 화면을 구사하고 있는 중이다. 보자기 혹은 조각보의 옛 전통을 현대적 언어로 계승하는 작업을 보다 더 극대화하는 지점이라 하겠다. 그곳에는 씨줄과 날줄, 옛 천과 현대 천, 바느질과 붓질, 가로와 세로, 구조와 구조, 공간과 공간, 공간과 시간, 전통과 현대, 주체와 타자, 진술과 해석이 맞물리는 만남의 관계학이 펼쳐진다. 그 만남이 작위적이지 않은 까닭은 다양한 공간의 만남이 창출하는 추상의 세계가 언제나 ‘인간의 복잡다기한 세계’를 은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러 프레임 안에 반듯하게 자리한 작품도 있지만 대개 천 자체를 늘어진 채로 벽에 거치하는 방식으로 연출하는 까닭도 자연스러운 만남의 관계를 훼손하지 않으려는 작가의 조형 태도로부터 기인한다. 마치 인간의 모습 자체가 그러하듯이 말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천-잇기’를 통해 만남의 관계학을 창출하는 김두리의 ‘기하학적 추상 회화’는 예술과 인간을 잇는 하나의 ‘사이 존재(inter-etre) 또는 인터메쪼(intermezzo)’처럼 읽힌다. ●

출전/
김성호, 「시간을 직조하는 ‘이음-공간 회화’」, 『김두리』, 전시 카탈로그,
(김두리展- 이음-공간, 2020.07.06.-07.15, 갤러리 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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