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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녹원 박앵전 /심매의 여흥과 문기

김성호

심매의 여흥과 문기 - 녹원 박앵전의 근작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I. 프롤로그 
문인화가인 녹원(綠元) 박앵전은 일 년 내내 칩거하면서 매진했던 매화(梅花) 그림으로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이른 봄 우리를 찾아왔다. 이른 봄의 추위를 무릅쓰고 제일 먼저 꽃을 피운다는 매화가 난초, 국화, 대나무와 함께 사군자(四君子)로 불린다는 것을 화가가 우리에게 새삼스레 일깨워주려는 것일까? 
화가 박앵전의 매화도 안에는, 사대부 여기 화가(餘技畫家)들이 눈이 덮여 있는 곳에서 개화(開花)를 시작한 매화를 찾아 나서는 ‘심매(尋梅)의 여흥(餘興)’으로 가득하다. 그곳에서 문기(文氣)를 고취하고 문향(文香)을 향유하기 위한 ‘심매의 여흥’ 말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의 이번 개인전 출품작들에는 문인화의 다양한 필법이 충만하게 펼쳐진다. 그것이 무엇이고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전하는 것인지 천천히 살펴본다. 





II. 심매의 여흥 - 현대적 구구소한도
주지하듯이, ‘심매’는 “한사(閑士)를 자처하는 선비들이 이른 봄 매화나무 가지에 처음 피는 꽃을 찾아 눈길을 나서는 풍습”을 가리킨다. 탐매행(探梅行)이라고 불리기도 했던 이러한 풍습은 민중에 유행되는 민속이라고 간주하기보다 대개 은사(隱士)나 시인 묵객들의 고매(高邁)한 풍류(風流) 행사였던 관계로 고상(高尙)하고 한아(閒雅)한 취미로 간주되어 온 것 또한 사실이다. 
박앵전에게 있어 심매란 이른 봄, 매화의 개화를 목도하려고 직접 찾아나서는 물리적 여행이이기보다 매화가 피는 봄을 기다리는 심리적 여행에 가깝다. 필자가 박앵전의 근작 개인전을 위한 평문에 ‘심매의 여흥’이라 제목을 단 이유는 그녀가 올 봄의 개인전을 위해서 근 일 년 동안 매화를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려왔던 까닭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그녀가 매화를 그리던 그간의 ‘심매의 여정’을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의 마음’으로 비유해 볼 수 있겠다. 이 ‘구구소한도’는 중국 화북(華北)지방에서 유래한 봄맞이 그림을 지칭하는데, 두 가지의 유래가 있다. 하나는 “동지(冬至)로부터 봄까지 81일 동안의 날씨를 관측하여, 그 해 농사의 풍흉(豐凶)을 예측하던 도표(圖表)”를 의미한다. 또 하나는 “동짓날에 81장의 꽃잎을 가진 흰 매화 한 가지를 그려 놓고 다음날부터 매일 한 잎씩 다른 빛깔로 칠해나가는 민속적 풍습”이다. 두 가지 모두 ‘겨울 동안(九九)’, ‘추위를 견디면서(消寒)’, 봄을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을 잘 드러내는 봄맞이 그림이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후자의 매화 그림은 81개 꽃송이가 모두 칠해졌을 때에 어느덧 봄이 무르익게 된다는 점에서, 화가 박앵전이 올해 매화 그림을 그리면서 3월의 개인전을 기다려온 ‘심매의 여정’과 무척이나 닮아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차원에서, 우리는 박앵전이 이번 개인전에 선보인 작품들을 가히 ‘현대적 구구소한도’라 부를 만하다.
간절한 기다림으로 매화를 찾아나서는 ‘심매의 여정’ 끝에는 여흥이 있다. 인고(忍苦)의 세월과 학수고대(鶴首苦待)의 시간 뒤에 흐드러진 매화를 발견하고 매향(梅香)을 만끽하는 흥취(興趣)의 시간이 우리를 기다린다. 옛 여인들이 머리에 매화꽃으로 치장을 했다는 ‘매화장(梅花粧)’을 따라 하는 마음으로, 우리 모두 화가 박앵전이 자신의 매화 그림으로 안내하는 ‘심매의 여흥’으로 함께 들어가 보자. 








III. 매향 속 문향 - 문기의 매화도 
녹원 박앵전의 근작 개인전을 둘러보자. 배접으로 깔끔하게 정리된 그녀의 매화도는 정방형에 가까운 패널과 액자 속 그림도 있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특별하게 좁고 기다란 액자와 족자에 올린 그림들이 우리의 주목을 끈다. 작가는 이러한 기다란 화폭 안에 매화의 전체상을 담기보다 부분들을 담아 매화의 이미지를 극대화한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좁고 긴 화폭 위에 힘차게 올라간 굵고도 굴곡진 매화나무 둥치를 대각선으로 잘라낸 과감한 절지법(折枝法)의 화면 구도가 출품작 전반에 펼쳐진다. 오늘날 클로즈업이라 부를 만한 이러한 절지 구도는 조선 중기, 어몽룡(魚夢龍), 허목(許穆), 오달제(吳疸濟)와 같은 문인화가들이 즐겨 사용하는 구도였다. 어몽룡의 <월매도(月梅圖)>에서는 둥근 달 아래 선비의 기개를 닮은 듯 허리를 꼿꼿이 세운 매화 줄기가 화면 아래 잘린 굵은 둥치로부터 자라고, 오달제의 <묵매도(墨梅圖)>에서도 굵은 나무가 휘어진 듯 화면을 대각선으로 가르면서 둥치가 잘려 있다.  
박앵전의 기다란 화폭 속 매화도는 조선 중기 문인화가들이 즐겨 사용했던 절지 구도를 계승하면서도 그것을 더욱 극대화한다. 그녀의 좁고 기다란 화폭 안에는 구불거리며 휘어진 굵은 줄기 일부만 보이거나 아예 밑둥치는 보이지 않고 잔가지들만 보이는 것도 있다. 매화의 꽃송이들은 화면 가득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심매의 여정’ 속에서 발견한 매화를 관객에게 한가득 선보이려는 마음일까? 그림의 위와 아래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줄기가 절단된 화면 속에는 매화 꽃송이들이 가득 피어 있다. 무수한 꽃들이 산포(散布)하는 매향이 절로 느껴질 만하다. 
화가 박앵전은 매향이 가득하고, 문기로 충만한 자신의 매화도 안으로 관객을 인도한다. 필법(筆法)이 서체(書體)를 닮아 문인들이 즐겨 그렸다는 사군자의 조형적 특성을 계승하듯이, 박앵전은 나무 둥치를 표현할 때, 갈필(渴筆)의 예서(隸書)를 닮은 필법을 구사하고, 매화 꽃송이나 꽃술을 표현할 때, 정치(定置)한 해서(楷書)나 작은 흘림체의 행서(行書)를 닮은 필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작품을 보자. 나무의 거친 피부를 붓자국 사이사이에 흰 공간이 드러나게 표현한 비백법(飛白法)은 갈필의 예서를 닮았다. 사연 많은 자잘한 가시를 품고 있는 가지들에 화려하게 자태를 뽐내고 있는 백매, 홍매, 청매를 윤곽선 없이 수묵 채색으로만 표현한 몰골법(沒骨法)은 어떠한가? 또 매화꽃의 꽃술을 축축하게 젖은 윤묵(潤墨)의 태점(苔點)으로 찍은 필법은 어떠한가? 마치 해서나 행서의 필법을 닮은 것 같지 않은가? 
서체를 필법으로 살려낸 박앵전의 손의 기술(技術)은 화폭 곳곳에서 감지된다. 그것은 신묘(神妙)에 가까운 기술이지만, 박앵전은 이러한 묘법(描法)을 자랑스레 드러내기보다 이러한 필법 속에 담긴 문기를 드러내는 것에 관심을 더 기울인다. 그녀가 화폭 우측이나 좌측의 상단에 행서 혹은 초서체로 흘려 쓴 한글로 된 화제(畵題)는 한 편의 짧은 시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2014년 개인전 당시에 박앵전은 난초를 그린 작품에 “자색꽃 봉오리 솟아오를 때 따라 이는 맑은 향기”라고 썼고, 국화를 그린 작품에는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라고 썼었다. 한편 매화도에는 “추위를 업신여겨 홀로 피었네”라는 화제를 쓰기도 했다. 올해는 낙관과 서명만 있는 작품이 특별히 많은 편이지만, 몇몇 작품에는 이러한 시심(詩心) 가득한 화제가 적혀 있기도 하다. 
시(詩), 서(書), 화(畵)를 사대부의 교양으로 간주하던 조선의 문인화를 계승한 구한말 시대 조선화를 우리가 ‘서화(書畫)’라고 불렀던 것을 상기한다면, 박앵전의 현대적 문인묵화(文人墨畫)에서 문기가 얼마나 주요하게 간주되고 있는지를 어렵지 않게 알게 될 것이다. 박앵전의 문기는 묵향(墨香)과 문향(文香) 그리고 매향(梅香) 사이에서 오간다. 관객은 화가 박앵전이 이끄는 이른 봄 매화의 향연에 초대를 받아 짙은 묵향과 매향 사이를 배회하면서 난세의 시름을 잠시 잊고 예술의 향취에 흠뻑 젖는 시간을 맞이할 것이다. 





IV. 에필로그 - 붓 여행길
화가 박앵전은 근작 개인전에서 문인화의 전통적이고도 흔한 소재인 매화를 자신만의 독자적 언어로 해석하면서, 추운 날씨 속 굳은 기개로 꽃을 피우고 매향을 흩날리는 매화의 기품 가득한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마치 매화의 꽃말인 ‘고격(高格), 기품(氣品)’을 품되 절대로 오만하지 않으며 자신의 작업 과정을 늘 ‘답을 찾아 가는 여정’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화가 박앵전은 오늘도 천천히 답을 찾는 마음으로 수련을 지속하면서 스스로 ‘붓 여행길’이라 칭한 문인묵화의 길을 걷고 있다. 
화가 박앵전은 매화를 탐구하는 이번 개인전에서 유일하게 대나무 숲을 그린 한 점의 대작을 이번 전시의 ‘에필로그’ 섹션에서 선보인다. 매화, 대나무, 소나무를 아우르는 ‘세한삼우(歲寒三友)’의 기개를 다음 개인전에서 묵죽화(墨竹畫)를 통해서 선보일 것을 예고하는 셈이다. 박앵전의 에필로그 섹션에서의 묵죽화는 자신의 화업을 서두르지 않고 찾아가는 ‘붓 여행길’로 정의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새삼 떠올리게 만든다.
화가 박앵전은 남천 정연교 스승께 사사하고, 화업에 입문하였다. 스승인 남천 정연교가 그녀의 작품을 “순수함과 순결함이 내재한 세계”라 평한 바 있듯이, 향후의 개인전도 분명 그러할 것이다. 특히 박앵전은 스승 남천의 전통적 문인화의 방식을 체화(體化)하고 자신의 독자적인 조형 언어를 통해 문인묵화를 현대적으로 변주하는 가능성에 대한 실험을 현재까지도 거듭하고 있다. 장기적 계획 속에서 마련될 그녀의 향후의 개인전에 대해 우리가 기대를 거는 까닭이다.  ●

출전/
김성호, 「심매의 여흥과 문기」, 『녹원 박앵전』, 전시 카탈로그, 2020
(박앵전 개인전, 2020. 4. 22~ 4. 28, 인사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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