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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도시오감전 / 다섯 도시의 다중심 네트워크

김성호

다섯 도시의 다중심 네트워크 - 도시오감전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프롤로그 
《2019 지역교류전: 도시5감》은 권역별 5개 지역의 ‘도시 네트워크’전이다. 경기도 오산(김혜경, 현희동), 경상도 경주(김영진, 차규선, 최수환), 전라도 익산(이승희, 육근병, 신승엽), 충청도 천안(유충목, 정치영), 강원도 춘천(김대영, 정해민) 등 다섯 지역의 작가 12명이 5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이 전시는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가 주최하는 ‘2019문예회관이 함께 하는 방방곡곡 문화 공감 사업’으로 진행되었고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후원을 받았다. 사업비의 일부를 문예진흥기금으로 지원 받아 진행된 만큼, 지역 주민의 문화, 예술 향유권을 최대한 고려한 점이 눈에 띈다. 오산문화재단, (재)경주문화재단, 익산예술의전당, 춘천시문화재단이 공동 주관한 《도시5감》전은 지역민을 위한 문화예술 기관의 공공적 역할과 책무 그리고 그 과제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성찰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아울러 다섯 도시의 네트워크가 오늘날 지역 도시의 문화예술 행정에서 가지는 의미 또한 곱씹어 보게 만들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예술가의 역할과 그 예술 활동에 대한 공공기관의 지원이 지역의 문화예술 발전에 어떠한 기여를 하고 있는지를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 역시 마련하였다.
  




I. 수도권과 대도시 문화중심주의 그리고 지역 도시 
《도시5감》전을 공동 주관하는 5개 기관이 위치한 오산, 경주, 익산, 천안, 춘천은 대도시가 아니다. 이 도시들은 서울, 부산, 인천에 비해 작은 규모의 중소 도시들로 국내 5개 권역에 있는 여러 도시 중 하나일 따름이다. 더 간단히 말해 ‘지역의 중소 도시’라 말할 수 있겠다.  
지역 도시? 도시 앞에 왜 지역이라는 말이 붙는가? 지역이 과연 무엇인가? 지역의 원래의 개념은 물리적 공간을 군집화시켜 지칭하는 분류 체계에 의한 평등적 용어이다. 즉 중앙마저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지역’이라는 개별지(個別地)로 지칭할 수 있는 분류 체계에 근거한 평등적 개념 체계인 것이다. 따라서 서울 지역, 부산 지역, 인천 지역, 울산 지역뿐 아니라, 오산 지역, 경주 지역, 익산 지역, 천안 지역, 춘천 지역처럼 주체적 지위를 부여하는 지칭이 된다. 
그러나 현실에서 ‘지역’이란 용어는 달리 사용된다. ‘중앙으로부터 별리된 지방’을 의미하는 객체화된 용어로 관습적으로 사용되어 온 것이다. 수도권 지역이 아닌 곳에 살고 있는 거주자들이 관습적으로 지칭, 사용하는 용어 ‘지역’은 서울 혹은 수도권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변방, 지방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곤 한다. 비수도권 공간에서 삶을 영위하는 주체가 그들의 물리적 공간을 지칭하며 정체화한 용어로 자리매김해 온 것이다. ‘지역’은 단지 분류 체계에 근거한 평등적 용어임에도 서울 지역, 수도권 지역이라는 중앙 개념에 대항하는 비서울, 비수도권을 통칭하는 용어로 정초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 새로이 정초된, 지역이란 용어가 내포하는 정체성은 그런 까닭에 소외의 분위기를 태생적으로 담고 있다. 무슨 소외인가? 형식과 내용이 그 틀을 이상적으로 세우지 못한 상태이거나 군데군데 비어있어 구멍이 숭숭 뚫린 결여의 차원이다. 권력의 결여는 물론이거니와 제도의 수혜로부터 비켜 서 있는 ‘없음의 차원’이다. 1970-80년대 서울과 수도권에 집중된 개발과 성장 논리에서 귀결된 결여인 것이다. 
그렇다면 지역의 문화는 어떠한가? 문화는 컬쳐(culture)의 어원이 ‘경작’(耕作)을 포함하고 있듯이, 집단 내외에서 생산하고 경작해 내는 유무형의 기호 체계를 통칭한다. 문화의 생산과 소비의 체계를 공유하는 집단 내 구성원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문화는 공유의 다접점을 마련하면서 분화되어 나간다. 이에 가세하는 공통의 취향, 합의 혹은 교육이라는 질서 짓기의 차원이 구성원들의 공유 체계와 인식을 구조화하면서 유무형의 기호체계의 덩치를 키워낸다. 그런 면에서 문화예술의 흐름은 향유와 소비의 주체들이 많을 때 활성화된다고 할 수 있겠다. 소비의 체계가 방만한 집단과 집단이 결속한 곳에서 예술은 적극적으로 소비되기 때문이다. 뉴욕, 파리, 런던, 로마, 도쿄, 북경, 상하이, 서울 등, 수도 혹은 대도시에서 문화는 대량 소비되고 그로부터 글로벌의 양상으로 전파된다. 대도시의 문화 미술 지형도는 동시대의 바람직한 모델이 아니라 할지라도 ‘역시 이만큼은 되어야지’라는 기대치를 충족한다. 이러한 수도권과 대도시 문화 중심주의의 상황 속에서 밀려난 ‘지역 도시의 문화예술 환경’은 언제나 열악하다. 문화예술의 생산과 향유, 소비의 문제도 그러하다. 
다만, 수도권 과밀화 해소와 국가 균형 발전, 지방분권화를 선도하기 위해 세종시 행정수도가 출범하고 최근 중앙행정기관의 이전을 가속화하면서 수도권 문화 중심주의를 탈주하고 문하예술 지도의 재편을 기대하고 있는 상황이다. 아직까지는 기대에 못 미치고 있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기대는 긍정적 기대를 낳는다.    


김영진, 봄 여름(+)그리고 가을 겨울(-) 외 


김혜경, 맑은 개울을 꿈꾸다. 



II. 지역 도시의 다중심 네트워크와 《도시5감》전  
《도시5감》전이 무대로 삼고 있는 5개의 지역 도시는 수도권 문화중심주의 탈주를 천명하면서 네트워크를 도모한다. 이 연대는 2019년 6월 전라도 익산에서 출발해서 경상도 경주, 경기도 오산, 충청도 천안을 거쳐 올해 12월 마지막 종착지인 강원도 춘천에서 종결하는 방식으로, 중심을 지속적으로 이동시키는 노마디즘의 전략을 취한다. ‘중심의 전이’를 지속하는 공동의 아트 프로젝트인 《도시5감》전은 이러한 차원에서 특별한 중심이 존재하지 않는 다중심의 네트워크를 지향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섯 지역 도시가 표방하는 탈중심과 다중심의 네트워크는 그 중심 콘텐츠에 예술을 담아냄으로써 매우 유연한 결속에 이르게 한다. 예술은 근본적으로 전통적 기존 세계관의 질서에 편입되지 않는 자유로움을 그 특권으로 하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객관적 질서와 구조안의 행위를 강요하는 세계 안에서 늘 자유롭기를 희망하는 예술의 기본 속성은 탈중심주의를 출발부터 내정한다. 예술은 집단 내의 공유의 차원으로 잉태하는 문화의 차원과는 매우 다른 속성을 태생부터 내포한다. 즉 하나의 예술 작품은 특정한 한 예술가 주체의 성장 과정과 체험 그리고 학습한 지식들로부터 형성되는 지극히 개인적 소산이다. 달리 말해 집단과 집단의 전이를 시도하는 문화와 달리 예술은 예술가 개인 주체가 대면하는 세계관을 드러낸다. 예술의 기본적 속성은 문화의 그것과 공유의 폭이 매우 넓음에도 진정한 정체성은 매우 다른 것이다. 따라서 예술이란 지극히 개인적인 한 주체의 생산 활동으로부터 출발해서 타자 혹은 사회의 이름으로 세계와 대화하며 자리매김 되는 존재라 할 것이다. 
예술을 화두로 네트워크를 도모한 《도시5감》전이 표방하는 탈문화중심주의와 중심의 전이는 개개 예술가의 정체성 속으로 산재되고 편재된다. 한 예술가가 다른 예술가와 그 이념을 같이하고 그들과 연대하여 ‘같은 지역 작가’로 평가받는다 할지라도 그 정체성은 개별체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출품작을 통해서 살펴본다.
오산 지역 작가로 김혜경과 현희동이 초대되었다. 김혜경(1964~ )은 오산의 대표적 문화재인 독산성 세마대, 죽미공원, 오산천 등을 민화의 형식을 빌려 표현한 〈오산 사계시리즈〉를 출품했는데, 지역에 기초한 전통적 명소에 내재한 스토리텔링을 자신의 독특한 조형 언어를 통해 풀어낸 작품으로 평가할 만하다. 현희동(1981~ )은 전입과 전출이 다반사로 일어나는 오늘날 도시민의 애환 가득한 삶을 이사용 포장 박스인 단프라시트를 활용해 만든 오색의 앵무새를 통해 은유한다. 작품 〈오색 앵무〉는 이주민과 다문화 인구가 팽배하고 있는 오늘날의 오산을 이해하기에 더없이 좋은 가이드처럼 보인다. 
경주에서는 김영진, 차규선, 최수환 세 명의 작가가 출품했다. 김영진(1946~ )은 오래전 전입해살고 있는 경주의 사계절 풍경을 채집한 사진 설치 작품 〈봄, 여름(+) 그리고 가을 겨울(-)〉과 원형의 건물 형상으로 사진을 설치한 〈첨성대〉를 출품했다. 특히 캐스팅을 거쳐 만든 불상의 표면을 현대적인 채색으로 변주한 작품은 경주에서 발원한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차규선(1968~ )은 고향 경주의 풍경을 백자토가 덧입혀진 캔버스 위에 빠른 필치로 그린 추상 풍경 〈경주〉를 출품했다. 투박한 질감으로 표현된 경주, 남산의 불상과 더불어 붉은빛으로만 표현된 계림의 노을은 경주에 대한 작가의 심상 풍경인 셈이다. 경주에서 태어난 최수환(1972~ )은 검정 플렉시글라스나 라미네이트판에 크고 작은 구멍을 뚫어서 추상 패턴의 식물 문양과 같은 이미지를 표현하고 배면에서 인공조명을 투과시키는 작품 〈공허-봄〉을 출품했다. 무수한 구멍을 통해서 어둠을 뚫고 새어 나오는 환상적인 빛은 경주의 왕릉에 숨겨진 보물을 상상하기에 족하다.  
익산 지역에서는 육근병, 이승희, 신승엽 세 작가를 초대했다. 육근병(1957~)은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봉분 속 커다란 눈을 형상화한 작품 〈풍경의 소리+터를 위한 눈〉을 선보인다. 부재의 공간 속에 자리한 영혼과 정신의 세계를 탐구하는 이 작품은 관객에게 삶과 죽음 사이의 문제를 성찰하도록 인도한다. 이승희(1980~ )는 영상 설치 작품 〈불편한 그러나 외면할 수 없는〉을 통해서 ‘같은 공간에 대한 서로 다른 진술’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이 작품에서 ‘하나의 사건’을 대면하는 도시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각자 다른 욕망으로 ‘기억’을 위장하고 진실을 왜곡하는 해석의 아이러니를 곰곰이 곱씹어 볼 수 있다. 신승엽(1984-)은 사진 연작인 〈진정한 장소〉를 통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떠났던 익산으로 되돌아와 정착하면서 오랫동안 생활했던 해외에서의 묵은 기억들을 하나둘 소환해서 기억의 장소들을 콜라주한다. 그의 작품은 각기 다른 국가와 도시 사이에서 노마디즘의 시간을 보내는 오늘날 현대인의 삶을 은유한다. 
천안에서는 유충목, 정치영 작가를 초대했다. 유충목(1977~)은 유리 조형 설치작 〈아름다운 변이〉를 선보인다. 기다란 봉의 형상으로 뽑아낸 유리를 금속과 결합하여 만든 별 모양의 추상 조각은 맑은 밤하늘을 보기 어려운 도시민의 잃어버린 시심을 넉넉하게 일깨운다. 정치영(1972~ )은 일상적인 모습이나 사건의 국면을 부드러운 파스텔 톤의 하이퍼리얼리즘 회화로 재현해 냄으로써 현실과 환상 사이의 경계를 넘나든다. 작품 〈기념비〉 등 다양한 작품을 통해서 그가 드러내는 사물의 세부나 찰나의 순간은 도시의 시공간적 파편 이미지인 셈이다. 
춘천에서는 참여 작가로 김대영과 정해민이 초대되었다. 김대영(1959~ )은 정교하고 치밀한 점묘의 방식으로 역사적 소재를 탐구하는 회화를 선보인다. 오방색 점들의 집적을 통해서 바이칼, 백두대간, 강원의 산수를 두루 탐구하는 그의 회화는 작품 〈중도_사상누각〉에서 볼 수 있듯이, 오늘날 실낙원의 현실을 사는 현대인에게 상상의 유토피아를 꿈꾸게 만들기에 족하다. 정해민(1982~ )은 태블릿 PC를 도구로 가상의 디지털 공간에서 창출한 ‘붓질 가득한 회화’인 〈육면체로 무엇을 하는 여성들〉을 커다란 규모로 프린트하여 세상에 선보인다.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만든 정교함과 아날로그적 감성이 교차하는 그의 ‘회화 아닌 회화’는 프린팅이 담긴 두루마리에서 현실과 환영이 교차하며 너울거리는 풍경을 펼쳐낸다.  


정해민, 플레이 그라운드 


현희동, 파파고


이승희, 불편한 그러나 외면할 수 없는 




III. 지역 도시 문화 공간의 역할 - 문화 매개의 연대와 예술 창작의 탈연대     
‘중심의 전이’와 ‘다중심’을 표방한 다섯 도시의 지역 네트워크 프로젝트인 《도시5감》전은 수도권 문화중심주의를 탈주하고 지역 도시 사이의 연대감을 고취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다섯 도시 사이의 물리적 거리와 심리적 거리마저 줄이는 계기를 마련했다. 예술을 화두로 한 채, 지역 도시의 문화 연대를 구현한 셈이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지역 도시 문화 공간들의 문화 매개적 네트워크가 결속될수록 예술가의 고유한 창작이 일정한 범주 속에서 규정화되고 고정화될 위험성을 노출한다는 것이다. 문화예술 매개 기관은 네트워크의 과제 앞에서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창작을 뜻하지 않게 구속하는 일이 없도록 늘 유념할 필요가 있겠다. 생각해 보자. 예술가들은 언제나 자유로운 영혼에 근거하고 고정체계나 권력에 태생적으로 무심하다. 따라서 그들이 사는 지역과 문화 환경을 이야기하고 예술가의 역할을 이야기하는 과정에 있어서도 ‘그들이 거주하는 도시의 지역성’과 같은 고정된 하나의 이념으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특히 오늘날 잡종문화가 번식하는 다원화의 체계 속에서 가치와 몰가치에 대한 판단의 불가능성, 혹은 무가치의 예술론이 팽배하는 가운데 예술가들의 지역에 대한 이해와 관심은 저마다 제각각이다. 그렇지만 예술가들 스스로 안다. 예술은 문화 안에 다리를 걸치고 그 정체의 폭을 무한히 확장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제 문화 속에 침투한 예술을 구별 짓고 찾아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진 현실에서 주요한 것은 삶의 터, 삶의 장, 그 속에서 몸담고 예술을 생성해내야 하는 개체 예술가들의 고민이 교류하는 마당이다. 다시금 브르디외(Pierre Bourdieu) 식의 장(champ)이 주요해진 것이다. 즉, 연대의 과정들이 주요해진 것이다. 
대도시 중심주의로부터 힘을 지역으로 실어오는 탈중심주의를 위한 연대는 경기도 오산, 경상도 경주, 전라도 익산, 충청도 천안, 강원도 춘천이라는 다섯 지역 도시의 네트워크 프로젝트인 이번 《도시5감》전에서 그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이러한 문화 기관의 매개적 연대는 매우 주요하다. 
다만 우리의 논의는 도시권력의 위상을 지향하면서 지역의 문화와 예술을 그에 버금가게 맞추려 하는 연대의 노력들이 태생적으로 자유로운 개개의 예술을 동질화시켜 내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다. 기존 질서 체제의 모순을 타파하고 중심주의의 폭력에 대항하는 좌파적 연대는 가상의 네트워크가 실현하는 탈중심주의를 물리적 지역의 틀에서도 성취할 수 있다는 이상을 간직하고 있다. 지역끼리의 연대, 혹은 소도시끼리의 연대 같은 모양을 시도하면서, 중심의 폭력을 와해시키고 중심의 독점을 전이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예술가가 벌이는 ‘탈중심화를 꾀하는 이러한 연대의식’은 근본적으로 자유로운 예술의 다양성을 연대의 목적 아래 동질성의 차원으로 묶어두기 십상이다. 연대의 목적에 부합하는 작품만이 거론되고 환영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대를 시도하는 주체는 매개자 혹은 매개 기관의 연대에만 초점을 매어 두어야 할 것이다. 개별 예술가들의 예술관은 자유롭게 풀어두면서 말이다. 공유체계를 인식하는 연대의식으로 인해 개별예술가들의 작품세계관의 동질화를 빈번히 드러낸다면 실패한 연대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문화예술 기관에 혹은 문화예술 매개자에게 남겨진 의무는 매개체적 활동으로 연대하고 예술가의 자유로운 창조적 활동으로 탈연대하기를 함께 수행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도시5감》전은 이러한 ‘문화 매개 기관의 연대’와 ‘예술가들의 탈연대’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향후의 네트워크 프로젝트를 고민했다. 전시 연계 프로그램으로 미술평론가와 지역 작가들을 한 자리에 모은 ‘아트 토크’와 관객과 기획자 사이의 소통을 도모했던 ‘큐레이터 토크’와 같은 프로그램을 마련했던 것도 그러한 고민의 일단이라 할 것이다. 지역 도시의 문화 공간의 역할은 지대하다. 이제 출발의 발걸음을 떼었으니 이번 《도시5감》전을 계기로 향후에도 지역 도시 네트워크가 보다 더 활성화되기를 기대한다. ●


출전/
김성호,  「다섯 도시의 다중심 네트워크 - 도시오감전」,  전시 카탈로그, 2019
(도시오감展, 2019. 오산문화재단, (재)경주문화재단, 익산예술의전당, 춘천시문화재단)
《2019문예회관이 함께 하는 방방곡곡 문화 공감 사업》,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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