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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안│창원 특강_한국조각계의 거장들 / 최종태(1932~ )의 종교 조각

김성호

2020창원조각비엔날레 Pre-Biennale 강좌 -한국 조각계의 거장들 
최종태(1932~ )의 종교 조각


김성호(2020창원조각비엔날레 총감독)




I. 들어가는 말
한국 조각계의 거장들을 살펴보는 이번 강좌 시리즈의 마지막은 조각가 최종태의 작품 세계를 조명한다. 강연 제목은 ‘최종태의 종교 조각’이다. 이전 다른 강사들의 강의에서 살펴보았던 김복진(1901-1940), 김종영(1915-1982), 김정숙(1917-1991), 권진규(1922-1973), 문신(1923-1995), 송영수(1930-1970)와 같은 거장들의 뒤를 잇는 생존 작가 최종태(1932- )의 작품 세계를 살펴본다. 특히 이 글은 최종태의 인터뷰와 글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해 나가면서 필자의 비평적 평가를 중간마다 개입시키는 방식으로 글을 작성한다. 청중께서는 이처럼 생생한 작가의 언술을 듣는 방식을 통해서, 이번 강좌에 왜 생존 작가가 포함되었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게 될 것이다.    

II. 최종태는 누구인가?!  
조각가 최종태는 종교 조각, 특히 성조각, 교회 조각이라 불리는 가톨릭 조각에 있어서 매우 주요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의 간단한 이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는 1932년 대전에서 대대로 농업을 가업으로 잇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부터 붓글씨를 배웠을 뿐 아니라 그림을 일찍부터 배웠다. 회덕초등학교 졸업하고 수재들이 다닌다던 사범학교를 거쳐, 서울대 미대 조소과를 졸업했다. 이후 고향으로 내려와 결혼과 함께 여러 학교에서 교편  생활을 지속했다. 28세에 국전에 ‘서 있는 여인’으로 문교부 장관상을 받으면서 조각계의 현장에서 이름을 알렸다. 그는 공주교육대와 이화여대 교수를 거쳐 서울대 교수로 임용한 후 은퇴하기까지 줄곧 교육자와 조각가로서 활동해 왔다. 김종영미술관 관장, 장욱진미술문화재단 이사,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이사를 역임했고,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있다.  
학창 시절부터 글에 재능을 가졌던 최종태는 그간 다수의 미술에세이를 통해 자신의 종교 조각 혹은 교회 조각에 관한 예술관을 밝혀 왔다. 특히 가톨릭미술가협회 회장직을 맡았던 만큼, 평소의 예술 활동에 있어서 가톨릭 조각은 그의 작품 세계에서 거의 모든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41세에 절두산 성지에 〈순교자를 위한 기념상〉(1973), 48세에 한강 성당에 〈십자가의 길〉(1980)을 그리고 바로오 수녀원, 명동 성당, 연희동 성당 등 20여 곳에 다양한 종교 조각을 설치한 바 있다.   
조각가 최종태와 그의 작품 세계를 조각가 홍순모는 다음처럼 표현한다: “(최종태는 자신의 작품을) 자기의 재능이 아닌 하느님이 주신 선물로 믿는다. 그래서 그는 교회 조각을 피할 수 없고, 피하고 싶지 않은 자기의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아울러 당시 미술평론가 정병관은 다음처럼 그의 종교 조각이 가지는 특성을 다음처럼 분석했다: “결론적으로 최종태는 보수적이며 고전주의적 성향을 조각과 그림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발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중략) 과거에 연결되는 전통적인 요소와 함께 입체주의에서 시작된 그의 현대적 조형은 기하적 추상과 1960, 70년대의 감축주의적 형태의 단순화를 통하여 옛것과 현재를 결합시켰다.” 이처럼 최종태는 가톨릭 신자로서의 신실한 신앙에 기초하면서도 교회 조각의 도상학적 규범을 탈주하는 현대적 조형을 통해서 종교 조각에 천착해 왔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최종태의 작품에 나타난 조형적 특성은 “감축주의적 형태의 단순화”를 꾀하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 “옛것과 현재를 결합”하는 시도를 감행한다. 그렇다면 그것이 과연 무엇인가? 

III. 소녀 혹은 소녀상으로부터  
작가 최종태의 종교 조각의 특성과 더불어 감축주의적 형태와 그것의 단순화에 대한 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소녀’에 관한 그의 이야기부터 들어본다: “언제부터인지 나는 소녀들을 바라보는 습성을 지니게 되었다. 길을 걷거나 차를 타거나 어디에 앉으나 나의 눈은 소녀들을 좇는다.” 아! 이러한 습성이 종교 조각과 무슨 상관인가? 그의 글을 더 살펴보자: “그들의 몸매와 차림새와 표정을 읽은데 몇 년 몇 날을 바라보아도 좋기만 하다. 티 없이 맑고 꿈으로 가득 찬, 신록 같기도 하고 봄의 새 풀 같기도 한 소녀는 나의 어린 날 고향 풍경 같기도 해서 더욱 애틋한 것일까.” 
작가에게 영감을 주는 소녀! 그렇다. 소녀는 가톨릭 성서 속 동정녀로 예수를 잉태한 성모 마리아로 확장되는 존재이다: “나는 평생 조각 일을 했는데 소녀상만 만들었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모른다. 예수상 빼놓고는 그림도 그렇고 조각도 그렇고 소녀상밖에는 한 일이 없다. 내가 성모상을 만들게 되는 데에는 그런 사정이 있다.” 아래의 글 또한 이러한 사유를 더 없이 잘 보여주는 진술이다: “나는 소녀상을 그려왔다. 더없이 맑은 그 얼굴이 좋아서 계속해서 기십 년을 그려왔다. 그러다가 좋은 얼굴을 만들고 싶었다. 어떻게 된 얼굴이 좋은 얼굴인가. 그러면서 요다음 차례는 훌륭한 얼굴을 그리는 거라고 생각했다. 훌륭한 얼굴을 생각하다 보니 그것은 큰 도인의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성인의 얼굴이었다. 그것은 성스러움이었다. 아름다움의 끝자리는 성스러움이 아닐까?” 그의 글을 따라 읽다 보면 “소녀-소녀상-좋은 얼굴-훌륭한 얼굴-큰 도인의 얼굴- 성인의 얼굴-성스러움”이고 ‘성스러움은 곧 아름다움’이라는 논리적 사유의 전개를 잘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소녀-성모상’으로 전개되는 축 위에 ‘관음상’이라는 불교 조각의 영역으로, 그것도 여성으로 표현되고 있는 관음상으로 확장되고 있는 것도 잘 살펴볼 수 있다: “관음상은 여성상으로 표현되어 왔다. 상징하는 바가 마음에 꼭 든다. 세상의 어려움을 어루만져 감싸주는 영원의 어머니다. 일본 범륭사에 있는 백제 관음에 심취한 것도 한 연유다. 어쨌든 나는 꼭 관음상을 만들어야 할 사람인 것이다. 그것이 이루어진 것이다.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가.” 그는 실제로 여러 교회 조각뿐 아니라 불교 조각까지 만들었는데 그의 소녀 혹은 소녀상이 이러한 범종교적 영역으로 확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성모상과 관음상은 영원한 어머니로서 영원토록 이 세상에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앞의 진술은 ‘소녀-성모상-관음상(여성으로 표현된)’으로 이어지는 종교 조각의 세계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특히 소녀상을 만드는데 있어서 모델을 특별히 두지 않은 채로, 작업한다는 점에서 소녀는 가톨릭과 불교와 같은 종교성 안에 잠재하고 있는 하나의 이상형이라 할 것이다. 

IV. 가톨릭 신앙에의 귀의  
조각가 최종태는 실제로 불교 철학으로부터 기독교로 다시 가톨릭으로 오랜 성찰을 통해서 천천히 횡단해 왔다. 그는 대학 때 불경 공부를 하면서 견성, 해탈, 열반, 극락의 세계관에 감화를 받았다. 대학 졸업 후 절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고 대안으로 교회를 이곳저곳 찾아다니며 종교성에 대한 열망을 채우기 위해 애썼지만 그 당시 그는 늘 낙심했다고 밝히고 있다. 개신교의 실제와 성서의 교훈이 엇나가는 장면을 보았던 것일까? 
그러던 중 그는 훗날 우연히 성당에 들렸다가 해방된 기분을 만끽한다. 성서에 있었던 ‘기적’의 기록, 즉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소경이 눈을 뜨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과 같은 일은 그에게 일어나지 않았다. 계속 찾기를 거듭하다 종국에 그것을 ‘포기하는 지점’에서 그의 신앙은 무럭무럭 자라기 시작한다. 
신에 대한 기적이나 증거를 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1984년 개최된 현대종교국제미술전 도록에 게재된 김수환 추기경의 축사에서 조각가 최종태는 감명을 받는다. 거기에는 “일찍이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는 요한복음서 서문이 인용되어 있었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던가? 신을 본 자가 어디 있으리. 단지 그 가능성이 있다면 ‘영성 체험’과 같은 것이리라. 1982년, 최종태는 이러한 영성 체험을 통해 하느님을 만난다. 아내와 대화하던 중에 찬란한 빛 속에서 신의 임재를 체험한다. 그는 이러한 체험 속에서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고 죄 사함을 받았다는 믿음 아래 회개와 기쁨의 눈물을 펑펑 쏟았다. 다음의 성경 구절에 대한 고백과 같은 마음이었다고 하겠다: “그가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으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느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름은 우리의 허물로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으로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으로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었도다. (이사야 53, 4-5) 이 사건 이후 그는 희열과 평안을 누릴 수 있었다고 한다.  
강렬한 영적 체험을 통해서 ‘신실한 가톨릭 신자’가 된 이후 최종태는 명동 성당 내부에 작품 〈십자가의 길〉을 설치한다. 작은 사각형의 부조 작업일 따름이지만, 그곳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모습이 생생하게 각인되어 있다. 그래서일까? 그는 〈십자가의 길〉을 만들 때, 그리스도의 고난이 전하는 복음을 생각하면서 환희에 넘치는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처럼 작품 속 고난의 감정을 창작자가 주고받으면서 작품을 제작하는 일은 쉽지 않다. 창작자의 진을 다 빼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이 〈십자가의 길〉을 만들 당시의 고충과 어려움에 대해서 토로한다. 
그런데 그것은 고난의 감정 이입과 창작의 즐거움 사이를 오가는 것이다. 그의 진술을 보자: “이 더할 수 없는 고난의 역정을 만들면서도 나는 지금 일이 즐거운데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옳겠습니까?” 그가 도대체 어떻게 작품을 만들었는데 이처럼 그에게 창작의 희열을 안겨준 것일까? 조각가 홍순모는 최종태의 〈십자가의 길〉이란 작품을 다음처럼 묘사한다: '공간을 장악하는 구조력, 형태에 밀도와 탄력을 주는 치밀한 구성, 극적 효과를 위한 과감한 생략과 변형, 현장성을 리얼하게 드러내는 기호적이며 암시적인 인물 표정의 조형적 처리.'  작은 사각형의 구조 안에 이 다양한 형식과 기법이 나타나게 했다면 정녕 창작의 과정은 힘든 여정이었겠으나 그 속에서 경험할 수 있었던 창작의 희열은 또 다른 과실이었으리라. 조각가 박갑성은 최종태의 〈십자가의 길〉을 ‘최종태 예술의 종합체’라고 평가하기까지 한다. 예수는 주역이자 초자연이고 성모는 조연이자 자연이라는 말도 부기한다. 

V. 가톨릭 조각과 교회 조각의 토착화  
모든 종교가 또 다른 세계에 전해질 경우 종교의 토착화는 당연한 귀결이다. 종교 조각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특히 “내가 한국성을 탐구한 것과 한국 종교미술이 당면한 토착화 문제는 서로 상관이 있었다”라고 쓰고 있듯이 당시 한국성을 탐구하던 한국에서의 조각의 과제는 자연스럽게 ‘토착화’의 문제와 연동된다. 
예를 들어 최종태는 한복을 입은 예수와 동정녀 마리아, 또는 반가사유상을 연상시키는 예수의 얼굴을 제작하기도 했다. 당시 그는 교단의 정형화된 인식 때문에 가톨릭 조각 제작 당시 어려움에 처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예수의 모습, 성모의 모습이 왜 그러하냐”는 반문에 매번 휩싸인 것이다. 그러한 까닭은 위와 같은 가톨릭 조각이 서양의 성상 조각에 기초로 한 도상학적 규범에서 명백하는 일탈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음 사례를 들면서 이러한 당시 교단 일단의 지적에 대해서 반문한다. 바로 미국 흑인 인권 운동가 말컴 엑스가 어떤 대학에서 한 “예수는 백인이 아니다”라는 연설을 사례로 언급하면서 반론을 제기한 것이다. 실제로 이스라엘 태생이었던 예수는 서구 유럽의 백인이 아니다. 기독교를 수용한 서구 유럽이 예수의 얼굴을 근 6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서구 유럽인의 얼굴로 표상화시켜 관성화함으로써 서구식의 토착화를 진행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 토착화는 예술가 개인의 예술혼 속에서 해석되는 종교 미술과 연동되는 것이기도 하다. 보라 미켈란젤로가 토착화한 예수, 루오가 토착화한 예수를 말이다. “토착화라는 말에는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뜻이 있다. 제자리에 선다는 뜻이다. 진리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예술은 진실을 바탕으로 한다. 예술은 아름다움을 구현하려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하느님의 한쪽 모습이라 한다. 진정한 미가 현현되었다면 거기에 하느님의 목소리가 있을 것이다”라는 최종태의 말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겠다. 그가 만든 ‘생각하는 소녀’ 형상의 조각은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과 달리 한국의 ‘반가사유상’을 닮아 있는 까닭에 고뇌보다 해탈에 가까운 내용으로 해석되는 것도 이러한 토착화 혹은 한국적 변용이 한국적 미학의 함의 안에 자리를 함께 한다.   
한국적 토착화를 도모했던 최종태의 조각에 대한 일각의 비판이 있었을 때 그는 다음처럼 항변했다: “교회 조각은 작가의 믿음과 예술적 역량의 산물로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하느님의 영광의 도구로 인식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의 기도와 관심이 필요하다. 또한 믿음의 내용은 절대적 불변의 진리이지만, 믿음의 표현은 다면성과 복합성을 가진 보편적 가치임을 알아야 한다. 이러할 때 작품은 개성의 독자성, 민족의 다양성, 시대의 특수성이 투영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교회 조각의 토착적 의미는 역사적, 지리적 토양에서 그 모습을 자유롭게 드러내고, 자연스레 받아들여질 것이다.” 교회 조각뿐 아니라 모든 예술이 특수한 맥락 속에서 창작을 실행하는 작가의 개인 내면과 대화하는 가운데 토착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최종태의 가톨릭 조각이 토착화를 통해 이루고자 했던 모습은 어떠한 것이었나? 홍순모는 그의 토착화에 골몰하는 조각적 특징을 다음처럼 범주화하여 기술한다: “1) 자유분방하게 만들어진 것, 2) 극도로 절제된 표현 방식, 3) 효율적으로 조율된 형태,” 홍순모는 첫째 항목에 해당하는 작품을 〈순교자를 위한 기념상〉과 〈성 바울로상〉을 꼽는다. 둘째 항목에는 〈예수상〉을 그리고 마지막 항목에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상〉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최종태가 1970년대 초 절두산의 〈순교자를 위한 기념상〉을 의뢰 받아 제작할 당시 신부는 “마음대로 만들어 보시라”고 주문했다. 바오로 수녀원 내부에 있는 〈성 바울로상〉 제작에도 이러한 자유분방한 방식으로 제작에 임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몸의 자세와 표정은 도상학에서 유지해 온 형식과는 달리 어눌하고 고졸하지만 그곳에는 노자의 ‘대교저졸(大巧著拙)’과 같은 동양적 미학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즉 “가장 기교가 있는 것은 가장 졸렬한 듯하다”는 의미를 실천하듯이 그의 〈성 바울로상〉은 비움과 채움 사이의 어떠한 영역에 자리한다. 
명동 성당 입구에 있는 〈예수상〉은 앞서 설명한 작품들과는 다르다. 감성적 긴장과 절제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작품을 제작했던 1980년대 당시는 군사 독재 시절의 강압적 분위기가 팽배했던 시절이다. 최종태의 스승 김종영이 탑골 공원에 세웠던 작품 ‘삼일 독립선언탑’이 철거되었던 시대일 정도니까 말이다. 최종태는 스승의 작품 복원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끝내 복원은 실행되지 못했다. 이러한 엄혹한 시대를 상기시켜 주는 듯, 그의 〈예수상〉은 불의의 세력을 저지하는 듯한 수평적인 팔의 자세를 유지한다. 홍순모는 이러한 형상이 마치 악한 세력을 막고 교회를 보호하려는 의지의 표징처럼 읽힌다고 분석한다.  
위의 두 경향과 달리 작품이 조형면에서 효율적으로 조율된 예도 있다. 비교적 종교적 성상의 범례에서 자유로웠던 작품 〈성 김대건 안드레아상〉이 바로 그것이다. 이 작품에는 최종태의  개성적 조형이 돋보인다. 홍순모는 이 작품을 다음처럼 매우 다양한 조형적 범례들이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분석한다: “기하학적 삼각구도 위에 배치된 원통형의 두상, 원뿔형의 몸통, 몸통 안에서 나오는 팔의 덩어리는 점이에 의한 덩어리의 크기 변화로 시선을 끌어 다닌다. 원통 구조로 엮인 건축물 같다. 또 허공에서 부채살처럼 퍼져 있는 열 개의 손가락은 섬뜩할 정도의 시각적 충격을 준다. 차가운 이지적 구도가 뜨거운 내면적 감성에 녹아 있다”  
덧붙여 생각해 볼 것은 그의 가톨릭 조각 혹은 교회 조각이 다른 종교와의 연관성 속에서도 토착화가 실행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불교와의 관계에서 그러했는데 그의 가톨릭 조각에 나타난 종교적 초월을 통한 명상 추구, 구도적 자세 등은 불교의 도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 부분은 뒷부분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VI. 한국 가톨릭 조각의 이콘의 수용과 최종태 작품의 조형적 특성    
최종태의 가톨릭 조각의 조형적 특성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기 위해서 여기서는 먼저 한국 가톨릭 종교조각에서 드러나는 이콘 수용에 따른 형식적 특징을 검토할 필요가 있겠다. 그것은 대개 4가지의 범주로 설명될 수 있다. 1)공공미술로서의 교회 미술, 2)이콘의 표현으로서의 형상 조각, 3)신앙 고백으로서의 추상 조각, 4)설치형 다원주의 조각. 
이콘(icon)은 에이콘(εἰκών, eikon)이라는 고대 그리스어를 어원으로 삼는데, 중세 이후부터 이콘으로 불리었다. 이콘은 간략히 말해 형상(image)으로 정리되며, 아울러 ‘초상’, ‘유사한 모습’, ‘마음에 그리는 상’ 등으로 대별된다. 구체적으로 이콘은 목판에 그린 그림, 프레스코화, 모자이크, 복음서 세밀화 등 다양했는데 주로 예수 그리스도나 마리아, 성인과 순교자 등과 성경, 교리의 내용을 소재로 그린 성화, 성상들이었다. 
초대교회에서는 헬라어로 기록된 성경을 모르는 문맹자와 이방 민족들에게 가톨릭 종교를 온전하게 전하기 위해서 글보다 그림이 필요했는데, 교리의 내용을 묘사하고 이미지로 담은 회화와 조각 즉 이콘을 구상하게 되었다. 이콘은 AD 313년 그리스도교가 국교로 공인된 이후부터 신성의 성육신을 모토로 가시화되었다는 점에서 비잔틴 미술에서 매우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이 이콘은 1054년 교회가 ‘로마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로 동서의 분열의 있기까지는 함께 공유했던 전통이었으나, 로마 가톨릭은 민족의 변화를 수용하면서 변화했으나 동방 교회는 이콘의 전통을 그대로 간직하게 되면서 점차 동방 정교회 신앙의 중심적 존재로 자리 잡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이콘은 시대별, 가톨릭과 정교회의 차이에 따라 다양한 묶음으로 존재했는데, 본고는 그것을 다음처럼 주제에 따른 7가지 유형으로 정리한다: 
1) 그리스도 이콘, 
2) 성모 마리아 이콘, 
3) 아기 예수와 성모 마리아 이콘 
4) 성가족 이콘 
5) 피에타 이콘 
6) 삼위일체 이콘, 
7) 성인 이콘. 
이 중에서 역사적으로 주요하게 간주된 것은 물론 그리스도 이콘이었다. 특히 전통적으로 가장 주요한 위상을 차지한 것은 그리스도의 삶을 형상화한 이콘이었다. 이것 역시 다양한 묶음들이 존재하는데, 우리는 이것을 다음처럼 11개의 이콘 묶음으로 정리한다: 
1) 수태고지(Annonciation), 
2) 그리스도 탄생(Nativité), 
3) 그리스도 성전 현시(Présentation au Temple), 
4) 그리스도의 세례(Baptême), 
5) 라자로의 부활(Résurrection de Lazare), 
6) 그리스도의 변용(Transfiguration), 
7)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Entrée dans Jérusalem), 
8) 십자가 책형/십자가 강하(Crucifixion / Descente de la Croix), 
9) 부활(Résurrection), 
10) 그리스도 승천(Assomption), 
11) 성령 강림(Pentecôte)
우리는 전통적인 이콘의 특성이 한국 가톨릭 종교조각에 어떻게 토착화, 변용되어 나타났는지를 분석하기 위해서 최근의 한 전시를 중심으로 다양한 작품들을 선별해서 검토해 본다.





[그림 1] 한국 가톨릭 종교조각의 이콘에 따른 분석과 범주화

위의 표에서 드러나듯이, 한국 가톨릭 종교조각의 대표 작가들의 작품을 전반적으로 분석하면서 해당하는 서구의 이콘의 범주에 맞추는 작업은 일정 부분 한계가 있음에도, 이콘 담론에 근거한 가톨릭 조각에서의 이미지의 인식론을 파악하는데 매우 유효한 작업이 된다. 특히 한국 가톨릭 종교조각의 이콘의 토착화와 변용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가늠하는 매우 효과적인 분석의 토대가 된다 
우리는 위의 표를 토대로, 최종태 조각의 항목을 살펴보면서 그의 이콘 분석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보자. 먼저 그리스도 항목에서 14처에는 〈14처/11〉(십자가 책형), 〈14차/13〉(십자가 강하), 〈14차/1〉0(그 외)(1989)이 제작되었고, 그리스도상에는 〈예수상〉(1987)이 그리고 그 외로 그리스도의 〈손〉(2002)이 제작되었다. 성모 항목에는 〈성모상〉(2015)이 성모자 항목에는 〈성모자상〉(2008)만 이 글에서 제시하고 있지만, 실제 이 항목에 해당하는 작품은 무수히 많다. 성가족 항목에는 〈요셉과 아기 예수〉(2000)와 피에타 항목에는 〈피에타〉(1987), 그리고 성인 항목에는 〈순교자를 위한 기념상〉(1973)이 제작되었다. 
위의 표에서 드러나고 있듯이, 비교 분석 작가 9인 중에서 최종태의 작품은 거의 모든 항목에서 이콘의 활용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최종태 작품의 이콘을 활용한 가톨릭 조각의 조형적 특성은 간단히 언급해 비례, 균제감, 조화, 대비, 단순성, 정면성, 고졸, 평면성, 부조적인 개념과 연동된다. 
일례로 바오로 수녀원에 있는 〈성모상〉은 ‘비례와 의한 균제감과 공간 분할’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전체와 부분의 조화, 면과 면의 유기적 결합 등이 그것이다. 또한 ‘대비적 속성’에는  마산 양덕성당에 있는 〈성 가족상〉이 대표적이다. 얼굴의 둥근 곡선에 나타난 눈, 코 입의 기호적 직선과 비대칭적인 선, 면, 덩어리의 관계가 주목되는 작품이다. 이러한 분석은 작품 이미지를 보면서 실제 강의에서 구체적으로 분석해 보기로 한다. 
 
VI. 타종교와 소통하는 최종태의 가톨릭 조각 
타종교? 최종태는 대학 시절 법경을 공부했던 경험과 여러 종교에 대한 체험 그리고 가톨릭 조각의 토착화의 과정에서 만난 불교 미학이 그의 작업에 두루 적용한다. 그는 실제로 “조각예술에 있어서 그 의미와 그 아름다움이 최상으로 어우러져 있는 곳이 경주의 석굴암”으로 보았다. 최종태가 법정 스님의 요청에 따라 길상사에 관세음보살상을 세웠던 것은 그의 가톨릭 조각이 지향하는 범종교적 소통과 포용의 미학을 잘 드러낸다. 관음상을 설치했을 당시의 법정 스님의 연기문은 다음과 같다: “이 관세음보살상은 길상사의 뜻과 만든 이의 예술혼이 시절 인연을 만나 이 도량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 모습을 보는 이마다 대자대비한 관세음보살의 원력으로 이 세상 온갖 고통과 재난에서 벗어날지이다. 나무관세음보살. 2000년 4월 28일 세우다. 한 노년의 가톨릭 신자인 조각가가 빚어낸 종교 화합의 메시지를 기리는 연기문인 셈이다. 이것에 대한 최종태는 감화는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는 다음처럼 화답했다: “이 일이 비록 작은 일이기는 하지만 결코 자은 일만은 아니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나의 모든 생각과 바람을 이 형태에 다 부어넣었습니다. 그 모든 이야기는 형태가 말할 것입니다. 지난날 우리 조상들의 위대한 불상예술이 다시 새롭게 꽃피는 시절이 오길 바랍니다.” 
우리는 안다. 그가 실제로 1958년 가톨릭 영세를 받았지만 그 두 해 전에 4개월간 불경 공부를 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대학 졸업 당시 학점 없는 논문을 제출했는데 불경을 기조로 한 자신의 예술론을 작성한 것도 이러한 영향이었다. 천주교 신자가 만든 관음보살상이어서였을까? 그가 길상사에 관음보살상을 세우고 난 뒤, 다수의 신문은 ‘성모님을 닮은 관음보살상’이라는 표현으로 이 소식을 전했다. 그의 가톨릭 조각이 지향하는 범종교적 소통의 미학을 잘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 조각가 최종태는 여전히 ‘가톨릭 조각의 확산’을 탐색하는 현역이자, ‘한국 조각계의 생존하는 거장’이라 하겠다.  ●

* 주석 생략 

출전/
김성호.  「최종태(1932~ )의 종교 조각」, 『2020창원조각비엔날레 Pre-Biennale 강좌 - 한국 조각계의 거장들』, 자료집, 2019. 12. 21. 창원문화재단 성산아트홀 

김성호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과, 중앙대 서양화과, 동 예술대학원 문화예술학과, 파리 10대학교 철학과 DEA를 졸업하고, 파리1대학교에서 미학 전공으로 미학예술학 박사를 취득했다. 
모란미술관 큐레이터, 미술세계 편집장, 쿤스트독미술연구소장, 성남문화재단 전문위원, 중앙대학교 겸임교수, 2008창원아시아술제 전시감독, 2014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 전시총감독, 2015바다미술제 전시감독, 2016순천만국제자연환경미술제 총감독, 2018다카르비엔날레 한국특별전 예술감독으로 일했고 울산과학기술원 박사후연구원을 역임했다. 저서로 『큐레이터 이원일 평전』 (사문난적, 2015) 등 5권의 미술평론집을 출간했다.
현재 2020창원조각비엔날레 총감독, 여주미술관 관장,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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