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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강묘수展 / 빛의 숭고와 무위자연을 향한 여정

김성호

빛의 숭고와 무위자연을 향한 여정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작가 강묘수의 작업은 숭고를 화두로 한 채, 전통과 현대, 서구와 동양 그리고 공간과 시간을 자연주의의 미학 속에서 ‘공존’이라는 이름으로 서로 맞부딪히게 함으로써 이항 대립의 주체들에게 화해를 주선하고, 세계를 대면하는 작가 자신에게는 치유의 제스처를 건넨다. 그러한 차원에서 강묘수의 이번 전시는 ‘화해와 치유를 위한 공존’을 지향한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한편 그의 전시에서 주목할 것은, 숭고의 개념을 현대적으로 계승하는 ‘빛’을 심층적으로 탐구함으로써 ‘빛의 숭고’와 ‘무위자연’의 미학을 조형적으로 실천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과연 무엇인가? 
 
I. 숭고로부터 
강묘수는 2000년대 초, 낯선 이론으로 만났던 '숭고(sublime)'의 개념이 자신의 작업의 바탕에 흐르는 근원적 미학이었음을 자각하게 되면서 작품 세계의 새로운 전환점으로 삼는다. 숭고란 흔히 ‘인간을 압도하여 도취를 야기하는 순간적인 미적 경험’을 지칭한다. 이 용어는 1세기 경 롱기누스(Longinus)의 ‘말의 힘’과 연관되는 수사학 이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지만, 이후 잘 사용되지 않고 있다가 18세기 영국의 철학자 버크(E. Burke)에 의해 논의가 본격화된 것이다. 버크에게선 어둡고, 불확실한 분위기의 공포와 전율을 불러일으키는 대규모의 건축이나 자연으로, 칸트(E. Kant)에게선 파괴적 위력의 화산이나 거대한 홍수와 같은 자연 현상과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인간의 정서로 그리고 쉴러(F. Schiller)에게선 비극이 야기한 도덕적 신념으로, 헤겔(G.  W. F. Hegel)에게선 변증법적인 종교적 신비주의와 같은 의미로 고찰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숭고는 유쾌, 불쾌의 감정이 혼합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일련의 공포를 동반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오늘날 숭고의 개념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 이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의식이 정지 상황에 직면했을 때 생성되는 고양된 감정과 정서로 변용되어 이해되고 있다.    
강묘수의 작업에서 숭고란 엄밀하게 말해 버크와 칸트 이후의 미학 즉 거대한 자연을 대면하면서 야기된 작가 내면의 감정과 정서의 고양 상태와 같은 것으로부터 야기되는 것이면서도 그 무게감을 한층 비워낸 것이다. 그래서일까? 한 때 작가에게는 “(숭고의) 개념의 중압감 속에서 자연의 모습을 물상화하여 함축적으로 표현했던 시기”가 있었지만 최근에는 “서정적인 따스함을 덧입히고자” 시도하는 새로운 해석을 선보인다. 즉 숭고의 대상보다 숭고를 인식하는 주체의 ‘감정이입’이라는 경험 상태에 보다 더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강묘수가 대면하는 “숭고 속의 자연, 그 거대함과 마주할 때의 찰나적 순간”은 위압적이거나 두려운 순간이기보다 조용하고 신비로운 상태이다. 그녀가 숭고 자체를 “정중동에 내재한 고요 속 평화”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II. 숭고와 공존 
오늘날 자연 안에 내포한 ‘숭고’는 인간을 압도하는 ‘크기’와 두려울 정도의 ‘힘’에서만 발현되지 않는다. 버크의 근대 미학이 ‘숭고(공포)’와 ‘미(아름다움)’의 경우처럼 쾌(快)를 유발하는 동인(動因)에 의해서 양자를 분별하고 칸트의 미학이 숭고 자체를 ‘수학적 숭고(크기)’와 ‘역학적 숭고(힘)’로 구분했다면, 오늘날 리오타르(J.-F. Lyotard)에게서 숭고는 인식의 주체가 ‘보이지 않는 신성한 무엇이 내재함을 여기, 지금에서 관조’하는 가운데서 발현된다. 한편으로는 숭고의 크기와 힘을 양분하는 칸트를 거부하면서도, 또 한편으로 자연을 무관심성으로 대면하면서 인간 내면에 집중하는 칸트를 계승하는 리오타르의 숭고를 우리가 ‘관조적 미학’으로 규정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리오타르가 미국의 화가 뉴먼(B. Newman)의 ‘대상을 재현하지 않는 색면 추상’에서 숭고를 언급했던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흥미롭게도 작가 강묘수는 리오타르의 숭고 개념을 계승하면서도, 자연/환경 안에서 자연/환경을 재현하지 않는 방식으로 자신이 처한 ‘여기, 지금’에서 숭고의 미학을 시각화한다. 즉 보이지 않는 많은 것을 함유한 자연/환경을 ‘재현적 회화의 바탕 위에서 비재현의 방법’으로 담아냄으로써 숭고를 실천하려는 것이 그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강묘수의 최근의 사진 작품 〈공존〉(2019)을 보자. 이 작품은 교회의 붉은 십자가가 보이는 밤거리의 건물 풍경을 근접해서 촬영한 사진 위에 검은 물감으로 굵은 세로줄을 단순하게 올려 그린 작품이다. 자연/환경을 피사체로 끌어들이고 회화적 진술을 가한 이 작품은, ‘지퍼(zips)로 불리는 수직선’을 한두 개 그리곤 했던 ‘뉴먼’의 추상 회화를 연상케 한다. 물론 ‘자연/환경 속 공존’을 맥락화한 강묘수의 사진 작업과 ‘신비적 숭고’를 개념화한 뉴먼의 추상회화가 지향하는 구체적인 미학은 상이하지만, 양 작품 모두 리오타르 식의 관조적 미학에 기초한 숭고의 개념을 공유한다.   
강묘수의 숭고 개념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연/환경을 맥락화한 상황 속에서의 ‘공존’이라는 주제 의식과 연동되면서 발현된다. 작가의 초기작부터 최근작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공존과 연동된 숭고의 미학은 도처에서 나타난다. 무엇과 무엇의 공존인가? 자연주의가 내포하는 모든 것들의 공존이자, 자연 속 ‘보이는 것’ 주변에서 ‘보이지 않는 것’의 공존이다. 생성/소멸, 삶/죽음, 양/음, 공간/시간, 현재/과거 등 대립적 존재가 자연의 장에서 공존하듯이, 강묘수의 작업 안에서
자연/인공, 전통/현대, 동양/서구 그리고 원작/해석은 상호간 만남을 거듭하면서 공존한다. 

Kang-myosu. hommage, red light, acrylic on canvas. 193.9x130.3cm. 2017~2018.


III. 빛의 숭고
강묘수에게 자연/환경이란 인간이 극복할 대상이기보다 인간을 포용하는 주체로 인식되는 만큼, 그것은 엄밀히 말해 버크와 칸트의 공포와 경외를 동반하는 숭고이기보다 오늘날 리오타르의 ‘관조적 미학’을 동반하는 숭고 개념으로 수용된다. 주목할 만한 것은, 자연/환경과 전통/현대의 소통을 ‘재현적 회화의 바탕 위에서 비재현의 방법’으로 접근하는 강묘수의 회화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숭고 개념의 재해석이 ‘빛’을 통해서 보다 구체화된다는 것이다. 점묘법으로 빛을 명멸하게 하고 빛을 희미하게 산포하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강묘수의 조형 언어는 숭고의 미학과 함께 자주 거론되는 미술사 속 여러 작품들의 경향과는 다른 차원에서 작동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자. 미술사에서 빛을 숭고의 개념으로 접근한 미술가들의 작품은 대개 빛을 어둠과 대비하면서 접근한 것들이었다. 희미한 빛을 하늘과 바다가 잠겨 있는 깊은 어둠으로부터 끌어올리는 영국 낭만주의 화가 터너(J. M. W. Turner)의 장엄한 풍경화는 물론이고, 명암의 극명한 교차를 통해 빛의 가치를 전면에 내세운 바로크 시대의 화가 카라밧지([M. Caravaggio)나 렘브란트(Rembrandt H. van R)의 역사화와 인물화들은 그러한 예들이다. 버크가 ”어둠이 빛보다 숭고한 느낌을 더 많이 가져다 준다“고 진술하고 있듯이, 숭고는 본질적으로 빛보다 어둠에 가깝다. '빛이 숭고의 원인이 되려면 다른 대상들을 보여주는 빛의 원래 기능 외에도 여러 가지 다른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는 버크의 주장은 그래서 곱씹어볼 만하다. 빛은 일상 속에 너무 흔한 평범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각을 압도하는 태양빛과 같은 경우, 강렬한 숭고를 야기한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겠다. 이러한 빛의 충만과 강렬함은 우리의 감각 기관에 일시적으로 빛의 부재인 어둠의 효과를 전하기 때문이다. 빛의 과도함이 역설적으로 어둠의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런데 유념할 것은, 버크가 지적하고 있듯이, 약한 빛이라도 빠른 움직임과 변화를 선보일 때, 숭고에 관한 효과는 배가한다. 어둠과 빛이 교차하는 빛의 점멸과 운동성이 그러한 대표적 예들이다. 예를 들어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 속 빛을 그리려 했던 인상주의의 조형 언어나, 색점의 시각적 병치를 통해 빛을 과학적 접근으로 변주했던 신인상주의 조형 언어가 그것이었다. 
작가 강묘수는 버크가 숭고의 개념에서 부차적으로 언급했던 ‘빛의 빠른 움직임’을 자신의 주요한 조형 언어로 삼으면서 숭고의 개념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다. 이른바 리오타르의 ‘관조적 미학’으로서의 숭고 개념을 원용하고, 버크가 언급했던 숭고에 관한 미미한 범주를 오히려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오랜 전통의 ‘숭고의 미학’을 현대화 혹은 현재화시키고 있다고 할 것이다. 강묘수는 여러 실험과 시행착오를 거쳐 발견한 특유의 점묘법과 희미한 빛의 효과 그리고 칠하기와 지우기를 거듭하는 조형 언어를 통해서 이것과 저것 사이의 경계면을 지우면서 ‘재현의 바탕 위에서 재현의 언어를 탈주’한다. 
강묘수의 작품 〈moonlight〉(2016-2017)은 달 항아리와 정선의 인왕제색도를 겹쳐 “빛이 넘쳐 비워진 달”을 표상한 것이다. 정선의 〈금강전도〉(1734)와 마그리트의 〈Le Château des Pyrénées〉(1959)를 오버랩한 작품 〈Hommage-red light〉(2017-2018)이나 정선의 〈인왕제색도〉(1751)와 나뭇잎을 형상화한 마그리트의 회화와 겹쳐 놓은 작품인 〈Blue Night〉(2018)는 은은한 달빛이 어둠과 밝음의 미묘한 대비를 이루면서 빛의 숭고를 효과적으로 시각화한다. 또한 동일 유형을 변형한 작품인 〈Sublime-마주보는 푸른 달〉(2018)과 〈Sublime-산책(散茦)〉(2018)은 제목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빛의 숭고’를 탐구하기 위해서 어떠한 조형적 실천을 도모해야 하는지를 성찰하는 작업이라고 하겠다. 
20번 이상의 덧칠과 벗겨냄을 반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겹층을 이룬 화면 위에 올라선 희뿌옇거나 명료하지 않은 강묘수의 점묘들은 ‘빛의 숭고’라는 화두를 조형적으로 드러내기에 제격이다. 강렬하지 않으면서도 잔잔한 빛의 점멸을 시각화함으로써 몽환적인 ‘빛의 숭고’를 스스로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 강묘수는 이러한 조형 언어를 통해서, ‘자연의 위압과 공포를 함유하는 오래된 숭고의 미학’을 ‘여기, 지금’에 현재화한다. 즉 버크가 숭고의 범주에서 주요하게 다루지 않았던 ‘빛의 움직임과 명멸’의 시각화를 극대화하고, 리오타르의 ‘관조적 미학’을 원용하면서 ‘경계 위 빛의 산포, 혹은 희미한 빛’을 통해서 ‘평온과 고요의 숭고’라는 그녀의 독특한 숭고의 미학을 창출하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우리는 그녀의 작품 속에 내재한 몽환적이고도 신비로운 숭고의 미학을 가히 ‘빛의 숭고’라 명명할 만하다.    

IV. 무위자연 
강묘수의 ‘빛의 숭고’는 ‘여기, 지금’의 자연/풍경을 맥락화면서 시도된다. 그것은 때로는 인공의 환경이 구체화된 채 나타나기도 하지만, 대개는 자연의 환경이 많은 범주를 차지한다. 즉 그녀의 작업에서 형식은 자연/환경의 맥락을 지니고 있지만, 그 내용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 평가할 만하다. 
‘무위자연’이란 “인위적인 손길이 가해지지 않은 자연”이다. “스스로 그러하다”는 자연의 사전적 정의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동양의 자연관인 것이다. 이러한 무위자연은 인간에게 ‘자연에 거스르지 않고 순응하는 태도’를 지속적으로 요청한다. 도가(道家)와 노장(老莊) 사상에서 강조하듯이, 무엇을 억지로 하지 않고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것! 그것이 무위자연이 표방하는 내재적 질서인 것이다. 
특유의 점묘법으로 완성된 강묘수의 작품들인 〈신세한도I〉, 〈신세한도II〉(2017)를 보자. 이 작품들은,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 유배 시절 무위자연을 체득하며 그렸던 사의(寫意)적 산수화를, 그녀가 자신만의 점묘의 방식과 현대적 화면 구성을 통해서 새롭게 재해석한 것이다. 전자의 작품은 작가에 따르면, “달빛 아래 비추어진 세월의 흐름을 새로운 조형적 언어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원작에 없는 이미지를 통해서 전통의 원전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이자, 그녀가 천착하는 ‘빛의 숭고’라는 특유의 미학을 ‘무위자연’ 속에서 시도한 것이다. 후자의 작품에서도 이러한 ‘빛의 숭고’와 ‘무위자연’은 발견된다. 작고 소박한 집 한 채를 은은히 비추는 달빛 너머 뒤편에 태양을 배치한 이 작품은 태양과 달이 함께 있는 무위자연의 비현실적 풍경을 통해서 ‘빛의 숭고’라는 미학에 어떻게 접근할 수 있을지를 조형적으로 실험한 것이라 하겠다. 
김정희의 〈세한도〉가 유배지에 있는 자신의 처지와, 자신을 대면하는 제자 이상적(李尙迪)의 변함없는 인품을 혹한에도 시들지 않는 푸른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에 비유하면서 자연의 순리에 감복하고 있듯이, 강묘수의 〈신세한도〉 시리즈 또한 전통화를 지금, 여기에 재해석하면서 무위자연의 세계에 경외와 찬탄을 보내는 것이라 하겠다. 특히 강묘수는 김정희의 ‘세한도’라는 화제(畵題)를 잔시의 작품 속에 마치 ‘산포하는 빛’처럼 흩뿌려 놓음으로써 ‘빛의 숭고’와 ‘전통의 현대화’를 실험한다. 
강묘수의 또 다른 작품 시리즈인 〈無爲自然- New 夢遊-圖〉(2019)는 안견의 〈몽유도원도〉(1447)을 차용하여 '여기, 지금‘의 맥락을 비튼 비현실적 시공간적 위상 위에 올려 놓음으로써 몽유도원도를 새롭게 재해석할 뿐만 아니라, 무위자연의 오늘날 의미를 되새긴다. 그 뿐 아니라 현실과 비현실을 하나로 끌어안은 〈Hommage-마그리트를 위하여〉(2017-2018), 〈염원(念願)〉(2018)와 같은 작품들 역시 초현실적 풍경 속에 정선의 〈금강전도〉(1734)를 차용하여 동양 전통의 무위자연의 의미를 되묻는다. 특히 이 작품 속에 드러난 문, 책, 또 다른 작품인 〈Sublime〉(2018-2019) 시리즈에 나타난 나비, 사과와 같은 상징적 이미지는 전통을 여기, 지금에서 어떻게 수용하고 해석할 것인지를 묻는 작가의 문제의식이 시각화된 것이라는 점에서, 그녀의 이번 전시를 ’여기, 지금에서 무위자연을 향해 떠나는 여정‘이라고 칭할 만하다. 

V. 빛의 숭고와 무위자연을 향한 여정  
필자는 작가 강묘수의 개인전을 해설하는 이 글에서 ‘빛의 숭고와 무위자연을 향한 여정’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전통적 미학 용어인 ‘숭고’를 ‘빛의 숭고’라는 개념으로 오늘날 새롭게 해석하면서 무위자연의 본향을 지향하는 강묘수의 작업은, 현재까지 완성이 아니다. 아마도 그것은 끝내 완성을 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녀의 작품에서 완성을 향한 여정 자체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한다. 모든 작가의 작품 세계가 그러하듯이, 자신만의 특유의 미학을 부단히 실험하면서 찾아나서는 여정 자체가 주요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그녀는 오늘도, 여러 신작들에 대한 조형적 실험을 통해서 변주되는 숭고의 개념과 더불어 그녀에게 체화된 무위자연의 개념을 모색하는 여정에 나선다. 이 여정에서 주목할 것이 있다.  빛의 숭고와 무위자연을 향한 여정’이 궁극적으로 타자를 위한 화해와 자신을 위한 치유를 궁극적으로 도모하고 있다는 점이다. 빛이 산포하는 ‘빛의 숭고’ 속에서 그리고 무의의 도(道) 그리고 무위자연에서 만물이 탄생해 유전하다가 무의에 복귀한다는 노자와 장자의 ‘무위자연철학’에서 우리는 화해와 치유를 경험한다. 그것은 전통/환경, 동양/서구, 음/양, 죽음/삶과 같은 대립의 주체가 상호간 꾀하는 화해이며, 이러한 세계를 대면하고 있는 작가 강묘수가 경험하는 치유이다. 작가는 어린 시절 혼자의 시간 속에서 나무와 자연을 일상으로 대면하는 경험을 하면서, ‘여기, 지금’에 소환하는 과거 속 자신을 통해 현재의 자아를 치유하고, 현재의 타자들을 위로하고 화해시킨다.  
이러한 차원에서 최근작에서 선보이고 있는 ‘여기, 지금’의 맥락이 상존하는 화면의 분할 방식 그리고 문, 책, 사과, 나비 등 상징이 강한 도상들은 그녀의 주제 의식을 천착해 나가는데 있어서 하나의 관건일 수 있다. 화면 분할과 더불어 상징 이미지들을 병치하는 조형 방식은 그녀가 천착하고 있는‘ 화해와 치유’를 매우 잘 드러내면서도 ‘빛의 숭고와 무위자연’이라는 주제 의식을 초현실주의적 언어로 오인하게 만들 여지 또한 없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새로운 관건은 늘 새로운 가능태이자 희망이다. 그녀의 최근작에서 발현되는 이러한 일련의 변화는 지금까지의 주제 의식을 점검하는 새로운 차원의 과제로 자리 잡을 것으로 보인다. 작가 강묘수가 이러한 어려운 과제를 어떠한 조형 세계로 풀어 나가고 우리를 이끌고 나갈 것인지를 관심 있게 지켜볼 일이다. ●

출전 /
김성호, 「빛의 숭고와 무위자연을 향한 여정」, 카탈로그 서문, 2019 
(강묘수 개인전, 2019. 7. 31 ~ 8. 12, 유나이티드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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