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서문│고승현 展 / 자연과의 호흡 - 고승현의 자연미술

김성호

자연과의 호흡 - 고승현의 자연미술 

김성호(미술평론가, Kim, Sung-Ho)


 
프롤로그
자연미술가 고승현은 이번 개인전을 통해서 청년기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40년 동안의 자연미술 작품을 회고전의 형식으로 선보인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자연 속에서 호흡하면서 실천했던 과거의 자연미술 작품을 아카이브 속에서 사진과 영상으로 소환하고, 최근작들과 함께 총체적인 개인전을 선보인다. 
고승현은 1981년 ‘야외현장미술연구회’라는 이름으로 출범한 ‘야투(野投, YATOO)의 초기 구성원으로, 1995년 ‘한국자연미술가협회 야투’로 이름을 바꾸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연미술 운동의 중심에 있는 작가이다. 2004년부터 시작한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의 운영위원장을 맡으며 국제 행사를 진두지휘해 올 때도 그는 언제나 야투 본연의 활동인 자연미술에 대한 초심을 견지해 왔다. 그가 젊은 시절부터 현재까지 선보여 왔던 ‘자연미술의 초심’이 과연 무엇인지 살펴보기 위해서, 그가 ‘초대하는 자연’으로 성큼 들어가 본다. 





I. 되기 - 자연에 몸을 던지다 
야투의 ‘자연 속에서 행하는 자연미술’이란 무엇이며 고승현이 초심을 지켜온 자연미술은 어떤 것인가? 그의 자연미술은, ‘야투’의 한자적 의미의 실천, 즉 ‘자연에 빈 몸으로 들어가 자연과 교감하는 미술’을 지향하고 지속한다. 따라서 그의 자연미술은 ‘자연 속 예술 개입’이자 ‘자연 되기’를 실천하는 명상으로 정의될 수 있겠다. 그런데 ‘자연 되기’란 무슨 말인가? “자연 속에서의 나의 작업은 내 자존감의 회복이며 정체성의 확인 과정이다. 나는 자연 속에서 사람들의 논리가 아닌 자연의 섭리와 그 순리를 쫓아 순응하고자 노력한다”는 고승현의 작가 노트의 내용처럼, 그의 ‘자연 되기’는 철저히 자연 중심주의에 거한다. 그가 인식하고 있는 자연이란 인간의 지배와 정복의 대상으로서의 자연이기보다 인간을 품고 있는 대자연으로 상정된다.
우리가 미술 창작을 기본적으로 ‘자연에 대항하는 인공적 행위’라 정의할 때, 고승현의 미술 창작이란 역설적으로, 이러한 인공성으로부터 부단히 탈주하고 ‘스스로 존재한다’는 자연의 속성에 천착하는 무엇이라 하겠다. 미술 창작 행위가 자연에 덧붙이거나 자연을 변형하는 것인데 어떻게 이러한 반인공적이고 자연적인 미술 행위가 가능한 것일까? 그의 미술 창작인 ‘자연 되기’는 “사람의 힘이 더해지지 아니하고 세상에 스스로 존재하거나 우주에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자연에 대한 정의에 부합하는 관점을 실천한다. 즉 그의 ‘자연 되기’라는 자연미술은, 그의 말처럼 “자연은 더할 것도 더 뺄 것도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가운데서 생성되고 실천된다. 달리 말해 그의 ‘자연 되기’의 미술 창작은 ‘인간-미술-자연’의 관계 탐구에 있어서 20세기 중반, ‘인간’에 방점이 찍힌 관점으로부터 ‘자연’에 방점이 찍힌 관점으로 이동한다. 들뢰즈와 가타리(Gilles Deleuze & Félix Guattari) 철학의 메타포인 ‘되기(devenir)’의 철학을 실천하는 셈이다. 여기서 되기란 ‘한 주체가 스스로 다른 것으로 되어 가는 과정’이자. ‘되려는 지향점에 주체를 투사하는 것’이다. 
그의 작품들을 보자. 그의 ‘자연 되기’는 ‘자연 안에 빈 몸으로 들어가는 것’ 자체로 시작된다. 자연미술의 초기 시절, 해가 지고 있는 강변에 벗은 몸으로 드러누워 석양을 받고 있거나, 1988년 가뭄으로 갈라진 천장호수 바닥에 알몸으로 누워 퍼포먼스를 벌이면서 ‘자연 되기’를 실천하고 있는 작품들은 대표적인 예가 된다. 이 두 작품은 마치 자신이 그곳(자연)에 원래부터 있었던 것처럼, 자신의 몸이 본디 자연이었다는 메시지를 조용히 전한다. 물론 이 작품들은 자연에 던져진 몸이 반응하는 여러 가지 행위를 단순하게 반복하거나 지속하는 가운데서 즉흥적이고 자연스럽게 연출된 것이다. 자연 속에서 자연과 대면하면서 무계획 중 나온 예술적 행위의 실천인 셈이다. 




‘자연 되기’를 체험하려면, 먼저 자연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풀잎을 입에 문 채, 얕은 냇물 위에 죽은 듯 오랫동안 누워 있던 그의 퍼포먼스는 자신의 몸을 자연의 일부로 스스로 간주한 명상의 자연미술이라 할 것이다. 마치 라파엘 전파의 대표 화가인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의 작품 오필리아(Ophelia)에서 볼 수 있는 비극적 여인 오필리아의 강물 속 죽음의 이미지가 연상되는 이 작품은 관객에게 삶과 죽음,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성찰하게 만든다. 풀잎을 물고 누워있거나 나뭇가지를 입에 문 채 나무에 기대에 서 있던 또 다른 퍼포먼스 작품들은 또한 어떠한가? 이 작품은 자신을 스스로 식물 혹은 그것의 터전인 땅이 되고자 했거나, 나무가 되려는 소망을 잠시나마 실천한다. 입에 풀잎을 물고 낙타와 그것을 나누고자 했던 2016년 남아프리카에서의 퍼포먼스는 그가 젊은 시절 풀잎을 입에 물고 송아지와 그것을 나누려고 시도했던 이전의 퍼포먼스에 대한 오마주 작업이자 새로운 버전의 작업이라 하겠다. 이처럼 ‘나무 되기’, ‘동물 되기’를 통해서 나무의 마음을 읽고 낙타나 송아지의 마음을 읽고자 한 순수한 예술적 실험은 매우 상징적이다. 복잡다기한 오늘날 시대의 사회를 자연 속에서 성찰하는 은유의 메시지를 함께 담고 있기 때문이다.   






II. 잇기 - 자연과 소통하다
우리는 앞서 ‘자연 되기를 체험하려면, 먼저 자연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피력했다. 그렇다면 자연 밖에서는 그것이 정녕 불가능한가? 고승현의 한 작품은 이러한 질문에 답을 남긴다. 
이 작품은 보도블록 위에 얕게 쌓인 하얀 눈 위에 손바닥의 흔적을 남긴 장면을 흑백 사진으로 기록한 것이다. 도시(보도블록) 속에 잠입한 자연(눈) 위에 손바닥(인간)의 흔적! 그것은 도시 문명 속에서 여전히 자연미술의 실천이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한편, 자연미술이라는 것이 인간이 문명과 자연 사이를 잇고, 매개하는 일련의 소통 행위임을 전한다. 
우리는 안다. 구석기인이 동굴 속에 남긴 ‘손바닥의 각인’(전기 구석기 오리냐크시대)이 자연에 인간의 흔적을 남기고자 했던 예술의 ‘유희적 충동의 기원’을 증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흔적(trace)은 기호학에서 지표(index)로 간주한다. 지표는 표상하는 사물과 의미 사이의 인과 관계와 상관성을 드러내는 기호이다. 고승현의 매우 단순한 이 작품은 단지 유희적인 차원의 미술 언어만이 아닌 자연-인간-사회에 대한 관계와 소통에 대해 성찰하는 진지한 자연미학을 함유한다.    



‘자연의 안/밖’에 몸을 던지는 고승현의 자연미술은 자연에 흔적을 남기는 지표이자, 자연의 안/밖을 연결하는 소통의 매개 행위를 지향한다. 그가 “나는 자신의 몸과 자연의 일부분을 하나의 선으로 연결하기를 즐겨한다”고 작가 노트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의 작품 곳곳에는 인간과 자연을 잇는 선의 흔적들이 발견된다. 그는 커다란 바위에 나신으로 서 있는 퍼포먼스를 통해 ‘자연에 몸을 던지고, 자연 되기’의 자연미술을 실천하면서도 바위(자연)와 작가(인간)를 잇고 소통하려는 메시지를 잊지 않는다. 바위의 갈라진 ‘틈’이 만든 유기적인 선들을 자신의 몸 위에 펜으로 연장해서 긋고 양자 사이의 화해와 소통을 상징적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암벽 위에 드러눕거나 단순히 손을 그 위에 놓는 방식의 퍼포먼스에서도 그는 자연에 새겨진 흔적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몸 안’으로 연장해서 자연과 인간 사이의 연결과 소통을 부단히 시도한다. 예를 들어 그는 동굴 안으로 들어가 천장에 고드름 모양으로 매달린 종유석의 이미지를 자신의 상반신에 그려 ‘종유석 되기’를 실천하고, 풀잎 이미지를 얼굴에 그린 채 수풀 속에 얼굴을 눕혀 ‘수풀 되기’를 실천하면서 자연과 대화를 시도한다. 종유석 이미지를 피부에 가득 새긴 채, 눈을 감고 명상하는 이 퍼포먼스는 자연-미술 사이의 관계를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성찰하게 만든다. 그는 암벽의 ‘틈’을 자신에게 연장하는 방식으로 ‘몸 위에 펜으로 선 그리기’를 할 뿐만 아니라 또 다른 방식으로 ‘흔적 연결하기’를 시도한다. 팔꿈치 안쪽의 주름과 손목 위 주름 혹은 손바닥의 손금과 같은 ‘몸 안에 이미 남겨진 흔적’을 활용하는 것이 그것이다. 바위의 갈라진 틈이 자연의 시공간적 흐름 속에서 만들어졌듯이, 인간의 몸 위에 뚜렷하게 남은 주름은 세월의 흔적을 중첩한다.    
 

이처럼 자연미술가로서 고승현은 자신의 ‘빈 몸’을 자연 속으로 지속해서 개입시킨다. 때로는 나신으로, 때로는 평상복으로, 때로는 진지한 성찰로, 때로는 가벼운 유희로 자연과 잇기와 소통을 시도하는 것이다. 산길 옆 마른 물길 위에 자신의 몸을 뉜 채 끊긴 이쪽과 저쪽의 물길을 연결하려고 소망하거나, 들판에 흐드러지게 핀 들꽃들을 한 손으로 한 움큼 쥐었다 놓기를 거듭하면서 자연에 내재한 생명력의 기를 받고 자신의 보살핌의 마음을 주기도 한다.  
생태학자 모통(Morton)의 “생태학적 사유는 상호연관성을 사고하는 것”이라는 언급처럼 고승현의 자연미술은 자연-인간의 관계를 성찰하면서 지속적으로 양자를 잇고 소통하려고 시도한다. 이러한 주제 의식과 관련하여 매우 흥미로운 작품이 하나 있다. 젊은 시절 그는 낮은 사다리를 올라타고 두 손으로 기다란 사다리를 하늘 위로 높이 쳐들고 있는 퍼포먼스를 벌인 적이 있다. 마치 그를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영매(靈媒)처럼 보이게 만드는 이 작품은 매우 상징적이고 개념적이다. 현실 속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성찰뿐만 아니라 땅과 하늘에 담긴 삶과 죽음의 문제, 그리고 소우주와 대우주의 담론을 잇고 있는 이미지로 보이는 까닭이다. 






III. 숨쉬기 - 자연으로부터 배우다
번잡한 일상을 사는 현대인에게, 자연은 일시적으로 숨통을 틔워주는 쉘터(shelter), 즉 임시적 안식처 혹은 도피처로 인식된다, 현대인의 번민을 해소하고 낙망한 마음을 위로하는 존재로 간주되는 셈이다. 그도 그럴 것이, 신화의 세계에서부터 자연은 인간에게 ‘잃어버린 낙원(Lost Paradise)’이자 언젠가는 돌아갈 근원적 고향인 피지스(physis)로 마음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근원적인 관점에서 자연은 인간이 태어난 곳이었으니 돌아갈 곳이며, 우리는 실제로 타자의 죽음의 사건을 통해서 그 사실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면서 살고 있다. 
자연미술가 고승현은 그가 행하는 자연미술을 통해서 이러한 숭고하고도 영적인 곳으로서의 자연을 늘 대면한다. 그가 자연미술을 통해서 자연에 몸을 던지는 까닭도, 자연-인간의 상호 연결주의에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이는 까닭도 ‘근원적인 고향으로서의 자연’을 늘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승현의 자연미술은 생태철학자 캐롤린 머천트(Carolyn Merchant)의 관점에서 언급한다면, 초기의 ‘야외현장미술연구회’ 시절의 심층생태학(Deep ecology) 차원과 야외현장미술연구회 활동 이후의 정신생태학(Spiritual ecology) 차원을 공유한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전자가 자연에 대한 ‘인간중심주의 환경결정론’을 반대하면서 ‘자연과 인간의 공생과 통합’을 지향한다면, 후자는 ‘전체 우주의 상호 연관성, 지구에 대한 경외심, 모든 창조물에 대한 인식’과 같은 자연에 대한 종교적, 영적, 정신적 인식에 기초한 윤리적 생태학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의 작가 노트를 보자: 

“하나님이 창조한 자연은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완전한 것이다. 그러한 자연 가운데서의 나는 누구인가? 옛 선인들이 그렇게 살아왔듯이 나 또한 자연 안에서 의미를 생각해 보며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찾아보았다. 자연 속에서 호흡은 곧 나의 기도이며 그 시간은 나의 신앙생활이다. 자연에 나의 논리를 적용하기보다는 자연의 섭리와 그 순리를 따라 나는 순응하고자 하였다.” 

그렇다. 이 정신생태학이 범종교, 다종교를 아우르는 차원의 것이지만, 고승현은 기독교인으로서 ‘기도이자 신앙생활’과 다름 아닌 정신생태학 차원의 영적이고 윤리적인 자연미술을 실천한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여기에선 자연을 절대자의 창조 세계로 바라보는 깊은 이해를 요청한다. 이러한 관점이 잘 드러난 작품은 대개 시간이 투여되는 과정예술(process art)로서의 퍼포먼스 작업과 같은 것들이다. 즉 이전에 살펴보았던 작품들이 대개 시간을 동반한 퍼포먼스이면서도 특정한 순간의 이미지가 주요했던 반면에 지금 살펴볼 작품들은 대개 과정 자체를 주요하게 고려하는 작품이라 하겠다. 
예를 들면, 파도가 치는 해변 모래사장 위에 발자국을 남기면서 지나가고 이내 손가락으로 줄을 그으면서 뒷걸음치는 퍼포먼스를 기록한 비디오 영상은 파도가 넘실대며 작가가 만든 드로잉의 흔적을 지워가는 시간을 오랫동안 보여준다. 이 퍼포먼스는 작가의 창작에 화답하는 파도의 움직임을 작품 속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면서 완성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일종의 자연과의 협업인 셈이다. 1987년 삽시도 해변에서 벌인 또 다른 퍼포먼스 또한 작가의 창작과 자연의 화답이 어우러진 작품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작은 고동을 해변 위에 삼각형이나 원형으로 줄지어 올려놓고 그것들이 스스로 이동하면서 도형을 깨트리는 모습을 연속 사진으로 기록했다. 이 작품 또한 작가의 창작과 자연의 화답이 어우러진 협업 작업으로 평가할 만하다. 우리는 두 자연미술 작품에서, ‘인간이 만든 노고를 무너뜨리면서도 새롭고도 놀라운 세계로 인도하는 절대자(자연)의 은총(섭리)’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대면하고 있는 작가 고승현의 모습을 엿보게 된다.  
이러한 차원에서 고승현의 자연미술은 가히 ‘자연 안(혹은 밖)에서의 숨쉬기’라 할 만하다. 그의 자연미술은, 창작의 문을 열어 ‘조형의 흔적’을 던져둔 채, 그것을 변형, 소멸시키는 자연의 반향을 기다리고 수용하면서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가 1983년 안면도 해변에서 햇볕의 방향에 따라 조약돌을 줄지어 놓은 설치 퍼포먼스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그의 의도에 따라 조약돌(자연의 실재)이 만든 그림자(자연의 시뮬라크르)가 서로를 연결하면서 맺은 ‘직선의 연결 관계’는 태양이 이동하면서 이내 어긋나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의 자연미술에는 자연으로부터 의미 있는 지혜를 배우는 과정으로 가득하다. 










에필로그 
이 글은 자연미술가 고승현의 자연 친화적이고 생태적인 미술을 ‘되기-잇기-숨쉬기’의 소제목들로 살펴보았다. 특히 이 글은 자연과 만남과 소통을 도모하는 그룹 ‘야투’의 초심을 견지하면서 그가 선보여 왔던 ‘자연으로부터 배우기’의 작업 태도에 주목했다. 자연의 ‘안팎’에서 자연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면서, 자연의 지혜를 진지하게 모색하는 ‘영적 실천(Spiritual practice)’이 바로 그것이다. 오늘도 그의 자연미술은 생성과 소멸, 순환과 지속, 자연과 인간 사이에서 제기되는 여러 문제를 ‘작은 몸짓으로, 진지하게’ 성찰한다. 잔잔하면서도 묵직한 주제 의식을 담고 있는 그의 이번 전시가 자연의 ‘참 목소리’를 듣고 자연과의 대화에 기쁘게 나서기를 기대하는 많은 관객과 예술가에게 크나큰 영감을 주기를 기대한다. ●


출전/
김성호, 「자연과의 호흡 - 고승현의 자연미술」, 『고승현 자연미술전』, 전시 카탈로그, 2019. (고승현 자연미술展, 2019. 6. 22~7. 6, 금강자연미술센터)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