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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박지현 전 / 인다라망 - ‘즉(卽)’을 통해 관계를 맺는 ‘빛 무늬’ 회화

김성호

인다라망 - ‘즉(卽)’을 통해 관계를 맺는 ‘빛 무늬’ 회화
 
김성호(미술평론가, Kim, Sung-Ho)


칠흑 같은 전시장을 밝히는 것은 작가 박지현의 ‘빛 무늬’ 회화이다. 열세 개의 ‘빛 무늬’ 패널이 각이 진 병풍처럼 둘러쳐진 그녀의 전시는, 다수의 개별 작품들이 빛을 발하던 이전의 개인전보다 한껏 주제 의식의 심층으로 한층 내려앉은 모습이다. 열세 개의 작품이 한 덩어리로 묶인 채 서로의 관계 맺음에 대해서 조형적 미학을 성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I. 빛 무늬 회화 
작가 박지현이 작명한 ‘빛 무늬’ 혹은 ‘빛 무늬 화법’이란 사전에 없는 말이다. 우선 ‘빛 무늬’라는 용어는 우리가 ‘푸른빛 무늬’처럼 ‘형용사 + 빛 무늬’의 방식으로 사용하는 용어를 작가가 단순화시킨 것이다. 이 용어는 먼저 색을 결여한 무색(無色)의 존재를 선언한다. 이 무색은 우리에게 “모든 것의 근본이자 곧 본질로서의 바탕”이라는 ‘무색이현색(無色而現色)’의 의미를 성찰하게 만든다. 따라서 이 무색은 ‘결여’의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모든 색을 함축하는 ‘충만’의 존재가 된다. 즉 있음과 없음의 경계를 모두 품은 장인 셈이다.
한편 박지현의 ‘빛 무늬’는 빛이 만드는 모든 무늬를 함유한다. 아침 햇살을 받아 창문 위에 어른거리는 뜰아래 여린 식물의 잎사귀들, 비 온 뒤에 한낮의 태양이 드리운 영롱한 무지개, 석양이 호수의 잔잔한 물결 위에 반영하는 반짝이는 노을빛은 모두 그녀의 ‘빛 무늬’ 안에 포섭된다. 그런 면에서 박지현의 ‘빛 무늬’는 빛과 색의 물리적 현상을 통섭하는 환유임과 동시에 자신의 ‘빛 무늬 회화’를 둘러싸고 펼쳐지는 일련의 관계를 은유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박지현의 작품에서 빛을 머물게 하거나 운반하는 장(場)인 한지(韓紙)는 ‘무색으로 비어 있지만, 색을 발하는 빛 무늬의 바탕’이 된다. 그러니까 빛 무늬는 개념적으로 빛과 반투명성의 한지가 함께 만나 창출하는 결과인 셈이다. 박지현의 ‘빛 무늬 회화’는 구체적으로 반투명한 한지를 패널 위에 유기적인 식물 형상으로 오려서 여러 겹으로 포개어 집적하는 콜라주의 한 방식으로 구성된다. 대개 한지로 꽃이나 잎의 형상을 오려낸 후, 하나의 판본으로부터 나온 여러 장을 엇갈려 붙여 중첩함으로써 콜라주의 변주 형식을 취한다. 개별 종이들을 최소한의 접착제만 사용한 채, 겹겹이 쌓아 올린 까닭에 그녀의 콜라주는 패널 지지대 위에 발끝만 살짝 대고 막 비상하려는 무용수의 포즈를 닮았다. 즉 겹겹의 종이 속에서 자신의 몸의 공간을 찾는 각각의 종이들이 중력에 순응한 채 지지대와 표면 사이에서 살짝 들려 있기 때문이다. 
패널 위에 공기를 품은 채 중첩된 종이 콜라주들을 관객과 만나게 하는 것은 단연코 그 위를 마지막으로 덮은 얇은 순지(純至) 한 장이다. 그것이 한 작품을 완성하는 표면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복잡다기함을 낱낱이 드러냈던 낱장들의 복수 이미지를 반투명의 세계 안에 포섭하면서 흐릿한 단수 이미지의 정체성으로 급변시키는 화룡점정의 무엇’임과 동시에 “종이 콜라주의 집적 흔적을 작품 밖에서 투과해서 보게 만드는 반투명의 창(窓)이자 인터페이스(interface)”가 된다. 그런 면에서 순지 한 장은 그 아래 무수한 노동력이 담긴 작품의 면면을  현현(顯現)하는 장이자 순지 위와 아래를 서로 잇는 매개체가 된다. 얇은 순지 한 장이 전체를 가리고 ‘은폐’를 행함으로써 역으로 그 전체를 드러내고, 그것을 관객의 눈앞에 현시시키는 것이다. 관객은 얇은 반투명의 순지 안으로 보이는 종이 콜라주가 공기를 품은 채 빛을 받아 만드는 흐릿하고도 모호한 표정을 들여다보면서 저마다의 생리적이고 심리적인 지각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관객은 박지현이 만드는 ‘빛 무늬 회화’가 발현시키는 관계 맺음의 의미를 성찰하기에 이른다. 





II. 인다라망 - 빛의 그물 
박지현의 ‘빛 무늬 회화’는 한지로 창출하는 ‘빛의 그물’ 즉 인다라망(因陀羅網)의 미학을 시각화함으로써 관계 맺음의 의미를 깊게 성찰한다. 산스크리트어 인드라얄라(indrjala)의 한자 표기인 ‘인다라망’은 고대 인도 신화 속 '인드라(Indra)' 신(神)의 거주지인 선견성(善見城)의 위를 덮고 있는 거대한 그물을 가리킨다. 이 그물은 “그물코마다 보배 구슬이 박혀 있고 거기에서 나오는 빛들이 무수히 겹치며 신비한 세계를 만들어 낸다.” 이 인다라망의 세계에는 각 구슬의 빛이 서로를 반사하고, 그 반사 빛이 서로에게 끝없이 작용하면서 어우러지는 장엄한 ‘빛의 그물’을 펼침으로써 이 우주 만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가르침을 전한다. 
박지현의 이번 전시는 전시장 전체를 열세 개의 ‘빛 무늬’ 패널로 연결하여 만든 하나의 작품으로 구성했다는 점에서 이러한 ‘빛 무늬 연결체’인 인다라망의 미학을 유감없이 실현한다. 중앙에 3개의 ‘빛 무늬’ 패널을 중심으로 좌우에 각각 5개의 패널을 배치했는데, 각진 부채꼴 형식으로 배열된 전체 작품은 빈틈 하나 없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마치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Musée de l'Orangerie)의 벽면을 가득 채운 모네(C. Monet)의 ‘수련 시리즈’처럼, 혹은 미국 휴스턴의 ‘로스코 채플(Rothko Chapel)’ 내벽을 둘러싼 로스코(M. Rothko)의 먹먹한 추상 회화처럼 공간 자체가 작품으로 편입되어 들어온 양상이다. 특히 박지현은 전시장 모든 벽면을 검은색으로 마감하여 전시장 안에서 ‘빛 무늬 회화’만 밝게 보이도록 공간 연출을 도모한 점은 인드라망이라는 주제 의식의 구현 차원에서 주목할 만하다.  
보라! 작품의 좌측부터 우측에 이르기까지 각 패널의 이미지들은 ‘어둠으로부터-밝음으로-다시 어둠으로’ 이어지는 식물 이미지로 가득한 신비로운 자연 혹은 정원의 풍경을 선보인다. ‘빛 무늬 연결체’인 전체 작품은 시공간을 넘나드는 빛의 파노라마와 더불어 사색적인 철학의 내러티브를 함께 뒤섞는다. 관객은 그곳에서 ‘아침으로부터 저녁’ 혹은 ‘봄으로부터 겨울’에 이르는 자연의 시공간과 더불어 관계와 연동되는 존재와 부재의 철학을 만난다.   
‘빛의 그물망’을 연상케 하는 박지현의 작품 앞에서 혹자는 은은한 촛불의 빛 앞에서 몽상의 의식을 붙들고 존재와 부재를 성찰하는 바슐라르(G. Bachelard)의 ‘촛불의 미학’과 같은 구성주의 인식론을 떠올리거나, 어떤 이는 비물리적인 모나드 개체의 연결을 통해 불생불멸의 세상이 구성되어 있음을 증명하는 라이프니츠(G. W. Leibniz)의 ‘모나드(Monad) 이론’에서의 형이상학적 철학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또는 어떤 이는 모든 것이 수평적 연결을 이루고 있다는 들뢰즈(G. Deleuze)와 가타리(F. Guattari)의 리좀(Rhizome) 이론을, 또 다른 이는 모든 것이 종국에는 하나로 귀결된다는 윌슨(E. O. Wilson)의 통섭(Consilience) 이론을 살펴볼 수도 있겠다. 그도 저도 아니라면 작품과 관객 사이의 네트워크를 강조하는 부리오(N. Bourriaud)의 관계의 미학(Esthétique relationnelle)을 떠올려 볼 수도 있겠다. 이처럼, 박지현의 빛 무늬 회화가 재론하는 '인다라망'의 개념은 다수의 네트워크의 미학을 우리에게 되뇌게 한다. 
그러나, 박지현의 작품 속 인다라망의 개념은 그 출발만큼이나 동양적인 철학 사유에 기초한다. '인다라망경계문(因陀羅網境界門)'이라는 말이 불교에서 ‘부처가 온 세상 곳곳에 머물고 있음’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듯이, 작가의 작품 속 인다라망의 개념은 불교 화엄 철학의 ‘연기(緣起)’의 법칙으로부터 기원한다. ‘인연생기(因緣生起, pratītya-samutpād)’를 약칭한 ‘연기’란 “현상의 사물인 유위(有爲)는 모두 원인(因: hetu)과 조건(緣: pratyaya)의 상호 관계 속에서 성립된다”고 보는 ‘생성과 소멸의 상호 관계성의 법칙’을 전한다. 즉 “모든 현상과 사물은 홀로 존재하지 않고 상호 의존 관계를 벗어날 수 없어 생성과 소멸은 항상 관계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마치 박지현의 ‘빛 무늬 회화’가 반투명의 한지를 통해서 ‘빛/색’, ‘빛/매체’를 매개하고 인다라망의 메타포 속에서 ‘개별 작품/전체 작품’, ‘작품/관객’을 매개하면서 서로를 연결하고 있듯이 말이다.  







III. ‘즉(卽)’ - 빛 무늬 회화의 조형 관계학  
박지현의 이번 개인전의 부제인 ‘빛 무늬 - 卽’은 인다라망에 관한 미학이 ‘즉(卽)’이라는 관계 속에서 가능함을 시각화한다. 부제 중에서 '즉‘은 그녀가 조형적 측면에서 ‘세로로 면을 분할해서 화면을 구성한 것’을 의미화한 용어이다. 이 세로의 면은, 개별 작품에서 창호 문을 닮아있는 격자형 문양으로, 작가가 정방형의 타일을 붙여 만든 작업대에서 식물 형상의 종이들을 프로타쥬(frottage) 기법으로 문지르는 과정에서 우연히 편입되어 들어온 것이다. 이것은 전체/부분, 빛/색과 같은 대립 항을 끌어안은 작가 자신의 작업 안으로 자연스럽게 편입된 ‘우연/필연’의 조합이었다. 또한 이러한 세로 면은 열세 개 패널의 ‘빛 무늬 회화’를 하나의 작품으로 통섭하는 이번 전시의 ‘인다라망’ 개념의 공간 연출 속에서도 잘 드러난다. 작품과 작품이 이어지는 틈 혹은 사이 공간에서 형성된 세로 면은, 개별 작품 속의 세로 면처럼, ‘즉’의 이념을 자연스럽게 가시화한다.     
‘즉’이란 고승 의상이 화엄경을 요약한 법성게 제7-8구인 ‘일중일체다중일 일즉일체다즉일(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에서 가져온 개념이다. 전자가 ‘하나 속에 전체가 들어 있고 전체 속에 하나가 들어 있다’는 중(中)의 의미라면 후자는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하나’라는 즉(卽)의 의미를 드러낸다. 따라서 즉은 “다시 말하여,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곧”이라는 의미를 함유하는 ‘즉’은 단어 앞뒤의 관계를 같음(=)으로 묶는 부사로 작동한다. 예를 들어, 박지현의 전시에서 13개의 ‘빛 무늬 회화’ 패널을 A, B, C... M 등의 기호로 임시 호칭할 때, B의 앞뒤는 ‘즉/곧’ 혹은 ‘같음(=)’의 의미 속에서 서로를 잇는다. B는 ‘즉’ A이자 ‘즉’ C(A=B=C)이기도 한 것이다. 이것은 최종 M이 최초 A와 하등 다를 바 없음(M=A)을 드러내고 또한 최종 M으로부터의 역순의 동등 가능성(M=L=K)마저 함께 선보인다. 
한편, ‘즉’이 통합하는 전체 작품을 T라고 할 때, 전체와 부분의 동등성(T=A=B=C) 또한 어렵지 않게 확인된다. 이러한 차원에서 박지현의 전시에서 좌측부터 우측까지 순서대로 배열된 작품들을 만약에 뒤섞어 놓는다고 할지라도 전시의 의미는 그다지 달라지지 않음을 우리는 유추해 볼 수 있게 된다. 작가의 개별 ‘빛 무늬 회화’가 “우주만유 일체의 사물이 서로 무한한 관계를 가지고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연기법으로 얽혀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들의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즉’의 이러한 개념은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의 사용 범례처럼 극명하게 대립하고 있는 반대항마저 사이를 두고 만나게 한다.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라니! ‘즉’이 이끄는 앞뒤의 같음은 ‘색(=)공, 물질(=)비물질’을 차원에서 생사불이(生死不異) 혹은 생사일여(生死一如)의 경우처럼 삶과 죽음마저 하나의 개념으로 묶어내면서 존재와 부재의 철학을 전개한다. 
생각해 볼 것이 있다. 박지현이 작가 노트에서 언급하는 ‘인다라망, 연기, 중중무진, 즉’의 개념은 대개 불교의 화엄 철학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이러한 용어 선택을 통해 그녀가 종교적 신념을 강조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실제로 박지현은 특정한 종교를 지니고 있지 않다. 박지현의 작품을 주해하는 이러한 키워드는 실상 ‘이원론’에 기초한 서구의 근대적 사유보다 ‘일원론’에 뿌리를 두고 있는 동양의 사유에 매료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일단이라 하겠다. 그런 면에서 박지현의 이번 개인전은 불교 철학뿐 아니라 음양오행(陰陽五行)과 십이지(十二支)와 같은 익숙한 동양적 사유는 물론이고 ‘석삼극무진본(析三極無盡本)’이나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처럼 삼(三)으로 대별되는 한국의 천부경(天符經)과 같은 사유마저 담고 있다. 실제로 전시장 정면에 자리한 세 개의 패널을 중심으로 각각 다섯 개의 패널이 좌우로 자리하고 있는 공간 연출 방식은 이러한 해석을 유추하게 만든다. 한편 이번 설치 작품은 우리나라 실학자 최한기(崔漢綺)에 의한 천인합일에 의한 ‘천인지분(天人之分)’과 같은 일원론적 한국 철학의 관계적 맥락과도 닿아 있기도 하다. 이번 개인전에 대한 해석의 관건은 작가 박지현의 작품이 이원론에 뿌리를 둔 서구적 사유보다 일원론에 기초한 동양적 사유에 보다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자명한 사실에 관한 것이다.   

IV. 비판적 에필로그   
박지현의 이번 개인전은 개별 작품에 집중하던 이전 개인전과 달리 ‘관계에 관한 사유’를 종횡으로 오간다. 개별 작품인 ‘빛 무늬 회화’ 안에서는 물론이고 전시를 통해서 군집형으로 선보이는 ‘회화적 설치’의 방식에서도 그러하다. 그러한 까닭일까? 이전 전시에서 선보였던 미묘하고도 자연스러운 작품 속 색조 변화보다 단순한 흑백의 맞물림 속에서 보다 풍부한 깊이를 찾고자 한 의욕이 앞서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개별 작품보다 전체를 조망하는 이번 전시에서 자연스럽게 귀결된 현상이겠지만, 적으나마, 개별 작품 하나하나에 대한 미세한 조형적 완결에 대한 관심이 아쉬운 대목이다. 필자가 이미 작가와 논의한 바 있지만, 작품을 최종적으로 덮는 한 꺼풀의 얇은 순지의 마감이 작가 박지현의 작품에서 화룡점점의 역할을 온전히 실천하기에는 무언가 충족되지 않은 아쉬움이 느껴지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


출전/
김성호, 「인다라망 - ‘즉(卽)’을 통해 관계를 맺는 ‘빛 무늬’ 회화」, 전시 카탈로그, 『박지현』, 2019. 
(박지현 展, 2019. 2019. 5. 4 - 26, 실험공간 U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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