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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론│은숙 /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에 대한 사유

김성호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에 대한 사유
 
김성호(미술평론가, Kim, Sung-Ho) 






1. 익숙한 기호 - 공평하게 주어진 것 
은숙은 이번 전시에서 개념적 설치를 감행한다. 그녀의 이번 전시는 마치 어떤 ‘패키지 디자인(package design)’의 전개도를 들여다보는 것 같은 풍경을 관객에게 안긴다. 바닥면, 앞면, 뒷면, 윗면이 나뉘어 디자인이 된 패키지의 단면들처럼, 그녀가 탐구하는 과거, 현재, 미래가 단면들로 분할된 채 전시장에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직육면체의 전시 공간을 대각선으로 대면하고 있는 입구와 출구도 그러하거니와 과거의 뒷면(초록색)과 미래의 앞면(흰색)이 현재라는 몸통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방식으로 배치되어 있는 것도 그녀의 전시를 하나의 전개도로 바라보는 관점을 허락한다.  
한 작가의 전시에 있어서 그 작가를 기억하게 만드는 ‘조형적인 전형성과 그것에 덧붙여진 적당한 변주’에 익숙한 관객으로서는 은숙의 전시 앞에서 적잖이 당황할 수도 있겠다. 은숙의 전시라고 특정할 특유의 조형 언어가 무엇인지 간파하기 쉽지 않은 까닭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이번 전시는 관객이 일상적으로 목도하는 흔하디흔한 이미지들로 채워져 있다. 구체적으로 전시장에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소비해 온 다이어그램과 픽토그램 그리고 익숙한 사물과 기호의 실루엣 이미지들이 가득하다. 최소한의 형상마저 색을 빼고 묘사를 생략한 채, 상징적인 도상(symbolic icon)과 기표적 기호(Indexical sign)로 변환되어 선보이는 그녀의 이미지는 모두 작가 은숙의 것이자 오래전에 이미 우리의 것이기도 했다. 
우리는 안다. 작가 은숙이 만드는 이미지가 ‘공평하게 주어진 것’에 대해 예술적으로 사유하는 작가의 주제 의식과 연동되는 하나의 결과와 같은 것임을 말이다. 즉 은숙의 전시는 그녀가 이미지를 독점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이미지를 이미 공유하고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그녀는 이번 전시에서, 일상의 기호와 같은 이미지를 통해서 ‘우리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것, 그러나 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친절하게도 단위별로, 하나하나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2. 시간 - 공평하게 거저 주어진 것
그녀는 어떠한 메시지를 이 전시 안에서 선보이고 있는가? 그녀는 말한다. “지구의 자전축이 있듯이 자신만의 축을 조금은 다른 각도로 이동시켜 전체적인 작업을 관람할 수 있기를 바라며, 공평하게 주어진 인간의 삶의 요소 안에서 수평적인 관점으로 천천히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기를...” 
그녀의 언술에 드러난, ‘공평하게 주어진 인간의 삶의 요소’란 무엇인가? 사회학에서 ‘인간 생활의 세 가지 기본 요소’로 언급하는 의식주(衣食住)인가? 아서라! 누구에게나 의식주는 공평하지 않다. 그것은 자본의 유무나 정도에 따라 각기 다르게 주어진다. 은숙이 말하는 그것은 시간이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을 우리는 그것조차 각자가 잘 사용하고 활용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이번 전시와 연동되어 있음을 작가는 말한다. 인간에게 거저 주어진 공기, 햇볕과 같은 맥락적 요소처럼, 시간은 ‘모든 인간에게 거저 주어진 비가역적이고 통시적(通時的) 요소’이다. 때로는 모든 개인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에 대한 ‘소유와 통제’가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발생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시간’이란 모든 이들의 소유라 할 것이다. 즉 시간이란 모든 인간에게 더 나아가 모든 생물에게 ‘공평하게 거저 주어진 것’이다. 
은숙의 작가 노트를 보자: “과거, 현재, 미래는 시간의 3차원으로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자본금이다. 우리는 예전에도 지금도 다음에도 덤덤하게 주어진 풍경을 안다. 하지만 마음이 흘러가는 모양, 속도, 질감을 확신하지 못한다. 다만 우리가 직면한 어떤 상황 속에서 알 수 없는 힘을 달래기 위해 동원하는 내재된 사고를 통해 정확한 방식이 아닌 유용한 방식을 택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은 ‘공평하게 주어진 것들을 활용하는 정도에 따라 시간을 상대화’하기 때문이다. 즉 인간에게 ‘공평하게 거저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배분해서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시간을 상대화하면서 시간의 다른 가치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그녀의 전시는 “기억이 어떻게 과거, 현재, 미래를 만들어내는지” 시각예술의 언어로 살펴보고자 한다.  





3. 한 덩어리의 시간 - 미래를 대면하는 방법
은숙이 구성하는 전시장은 과거, 현재, 미래의 섹션들이 단면처럼 분절된다. 입구로 들어와 전시장에 서서 볼 때, 좌측의 벽면이 과거, 입구 쪽 벽면이 현재, 그리고 과거와 마주보고 있는 오른쪽의 벽면과 함께 출구 쪽 벽면이 미래의 영역으로 설정되어 있다.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로 가는 순차적인 시간의 흐름에 따른 섹션별 구성이 내러티브의 전개와 함께 맞물려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먼저 과거의 범주에서 선보이는 작품들이다.
과거 섹션의 첫 작품은 〈정해 준 기억〉이다. 그것은 그녀가 과거의 어린 시절에 동그라미 안에 24시간을 쪼개어 자신이 실천할 생활 계획을 ‘스스로에게 정하여 주고  준비했던 생활계획표’이다. 커다란 녹색 벽면 위에 그녀는 몇 개의 범주로 분할된 어린 시절 자신의 생활계획표를 텍스트 없이 그대로 옮겨 놓았다. 흥미로운 것은 거기에는 아침, 점심, 저녁 시간과 더불어 취침 시간의 범주가 ‘유년기의 관습’처럼 고정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과거의 어린 그녀가 선택하기 이전에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듯이 누군가 ‘정해 준 생활계획표의 거시적 틀’이었던 셈이다. 두 번째 작품은 〈새긴 행동언어〉이다. 이 작품은 도색한 '에코보드 CNC‘ 위에 다양한 덫의 이미지들을 패턴화한 후, 첫 번째 작품이 설치된 벽면의 걸레받이 위에 설치한 작업이다. 이 작품에 있어서 관건은, 덫의 형상이 있는 에코보드를 바닥면의 색깔과 유사하게 맞춰 그 덫의 형상이 눈에 잘 띄지 않게 설치하는 것이다. 마치 실제의 덫이 자연 속에 은폐되어 있는 것처럼, 구성한 작품이라 하겠다. 세 번째 작품은 〈TIME〉이다. 미국의 시사 잡지 타임의 제목 폰트를 천에 인쇄해서 깃발처럼 벽에 건 작품이다. 사건, 사고가 벌어지는 현 시대의 뉴스가 실상 시간의 흐름에 따른 기록임을 되뇌게 하는 간명한 작품이다. 
과거 파트로 구성된 세 작품은 시간을 유용하게 사용하는가에 대한 그간의 실천과 시간에 대한 성찰을 시각화한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을 잘 사용했는가?”, “혹시 시간이 만든 덫 속에서 세월을 허비하지는 않았는가”와 같은 질문에 대한 반성석 성찰을 관객과 함께 도모하는 작업이라 하겠다. 즉 과거를 성찰함으로써 현재적 시간의 의미를 되묻는 작품이라고 하겠다. 
현재의 범주에서 선보이는 작품들은 보다 단순하다.   
작품 〈NON-PLACE〉은 시간과 한 덩어리처럼 붙어 있는 현실의 공간을 비트는 작업이다. 작품 제목처럼 그것은 전통적인 공간에 반하는 ‘비공간’이다. 그곳에는 이동, 소비, 소통과 같은 자연스러운 사회적 행위가 오염된 공간이다. 여기에는 사회 공동체 안에서 사회의 질서를 위해 필요한 ‘마땅히, 그래야 할 행동’ 대신 다른 질서의 규범들이 제기된다. ‘잠시 머무시오, 익명으로 하시오, 통과하시오, 소외되시오, 계약하시오, 고독하시오, 소통만 하시오, 따로 또 같이 살아가시오“라는 지침은 작가가 언급하는 비공간, 오늘날의 오염된 현실의 공간 속에서 일방적으로 부과되는 새로운 아포리즘(aphorism)로 기능한다.  
미래의 범주에서 은숙이 선보이는 작업은 5작품으로 구성된다. 
첫 작품 〈라플라스의 도깨비(laplace's demon)〉는 이 섹션에서 대표되는 작품 중 하나로 보인다. 이것은 프랑스의 수학자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P. S. Laplace)가 상상한 가상의 존재를 재해석한다. 이것은 ‘지금까지 알고 있는 모든 현재적 정보를 통해 미래를 유추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한다.  전 세계에 구축되었고 구축될 건축물들의 형상을 병풍 형식의 구조물 위에 음각으로 도열시킨 작품에서 우리는 라플라스의 도깨비를 상상한다. 현재까지의 건축물을 모은 많은 양의 정보는 분명 미래를 예견하는 눈이 될 것이다. 특히 오늘날처럼 빅데이터가 작동하는 현재적 정보의 수합이 무한정 가능한 상황에서 미래는 예측 가능한 현실이 되었다. 
또 하나의 작품 〈there is none. but see the unseen〉은 이 섹션에서 또 다른 대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카스파 프리드리히(C. D. Friedrich)의 유명한 회화 작품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속 인물 형상을 검은 실루엣으로 가져와 하얀 벽면에 양쪽으로 설치하고 그 위에 하나의 팩맨(pac-man) 도상을 함께 배치한 작품이다. 그것은 아랫면에 배치된 프리드리히의 작품 이미지들이 두 개의 팩맨의 역할을 담당하게 됨으로써 3개의 팩맨이 만드는 ‘카니자 삼각형(Kanizsa Triangle)’ 도상을 만들어 낸다. 우리는 이 작품에서 물리적인 윤곽선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흰색의 바탕 속에서 하얗게 떠오르는 삼각형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니까 관자가 몰입할 때 비로소 드러나는 삼각형이다. 그런 면에서 그것은 우리의 시선 속에,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가상공간이다. 이 도상의 비유는 이 공간은 어떠한 면에서 엄연한 현실 속 공간이 될 수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비실재가 더 강력한 실재를 만드는 ‘카니자 삼각형’을 구성하는 이 작은 팩맨은 유도인자(誘導因子)로 명명된다. 만약 팩맨의 입의 각도를 조금만 달리하면 이 카니자 삼각형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런 면에서 작고 보잘 것 없는 팩맨의 역할은 지대하다. 프리드리히의 작품 이미지와 팩맨의 카니자 삼각형 도상을 통합하여 선보이고 있는 이 작품은 메시지는 무엇인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라’라는 해석되는 작품의 영문 제목은 시간을 사유하는 작가의 자문자답이자 하나의 제안이다. 그것은 현실과 미래 사이의 상호 관계에 대한 역할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이 메시지는 명징하다. 현재의 사소한 인자(factor)에 의해 더 강렬한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카니자 삼각형의 비유와 더불어 인생의 망망대해를 불굴의 의지로 바라보고 개척해 나가려는 프리드리히의 회화의 메시지가 한데 어우러진 것이다. 지금의 현재가 사소한 것이지만, 개척의 시작점으로 살펴볼 수 있다는 긍정적인 메시지인 셈이다.  





4. 삶의 시간 속 보이지 않는 것들 - 과거+현재+미래 
은숙의 시간의 의미를 개념화하고 시각화하는 이번 전시는 인간 존재론의 문제를 진중하게 성찰한다. 시간을 거스르지 못한 상태로 죽음을 목전에 둔 채 ‘삶의 시간(temp de la vie)’을 살고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탐구가 녹아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은숙의 작업은 이러한 ‘인생의 시간’을 지속(Durée)이라는 개념으로 탐구한 베르그송(H. Bergson)의 시간의 철학을 되뇌게 한다. 
베르그송의 ‘지속’이란 삶의 체험적 시간(durée vécue)이다. 즉 지속은 우리들 인식(conscience)이 대면하는 시간이며 내면적 인생(vie intérieure)의 시간이다. 그것은 다양한 우리들 삶의 양태가 지속되기에 매우 역동적(élan vital)이다. 보라! 거기에는 이질적인 새로움(nouveauté hétérogène)과 늘 비반복(non-répétition)적인 변화(évolution)가 연속된다. 지속은 공간과 시간이 완전히 섞여있는 '순수한 시간(durée prurifiée)'이자, 과거로 돌이킬 수 없고 끝없이 미래로만 흘러가는 비가역적(irréversible) 시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속은 측량이 가능한 추상적, 과학적, 수학적 시간이나 캘린더의 순환적 시간과는 달리, 측량이 불가능(immensurable)하고 나뉠 수 없는(indivisible) 시간이다. 
그렇다면, 마치 ‘패키지 디자인’으로 된 상품의 전개도처럼 시간을 과거-현재-미래로 구성하고 분절한 은숙의 작업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좋을까? 시간을 분절해서 드러냄으로써 시간의 본질을 알 수 있다는 제스처인가? 답부터 이야기하면 그렇지 않다. 그녀가 시간을 전개도처럼 구성해서 펼쳐 보인 까닭은 우리가 매년 캘린더를 통해 삶의 시간을 분절하고 이해하는 것과 같은 ‘관성적인 차원의 시간 개념’을 단순히 공유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은숙은 시간을 ‘한 덩어리’로 이해한다. 그녀가 시간을 탐구하는 마지막 범주로 설정한 ‘과거+현재+미래=모든 현재’에 출품된 작품, 〈그러나 돌아서면 그만이다〉는 이러한 시간 이해를 가시화한다. 구멍이 뚫린 자작나무로 만들어진 ‘탑’의 형상은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을 역사와 시간성을 함축한 상징적 구조물이다. 은숙이 만든 탑은 서구의 타워(tower)가 아닌 동양 전통의 탑파(塔婆)의 형식을 차용한 것이다. 원래 석가모니의 사리(奢利)를 봉안하기 위한 축조물에서 비롯된 ‘탑’은 스님의 불신골(佛身骨)과 사리를 봉안하는 묘(墓)로 자리를 잡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은숙의 ‘탑’은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의 차안(此岸)과 미래의 피안(彼岸)에 이르는 시간의 흐름을 한 덩어리로 응축한다. 
그런데 작가 은숙이 이러한 탑의 형상에 ‘돌아서면 그만이다’라는 모호한 언술을 제목으로 붙이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작가는 이 작품에 “깨끗한 일은 하나도 없다”는 의미가 숨겨져 있음을 진술한다. 그것은 ‘더러운 것들이 모든 일에 언제나 존재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혹자는 이러한 일들에 분노하고 저항하지만, 혹자는 체념하거나 포기하거나 아예 그것을 향유하기도 한다. 이처럼 ‘과거+현대+미래=현재’라는 섹션에 등장하는 이 유일한 작품에는 ‘과거로부터 오늘날까지 모든 일에 순수한 것을 보장하지 못하는 세태’를 ‘사회 비판적 사유’로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담겨 있다.  
자신의 전시를 종결시키는 지점에서 성자들의 불도의 세계가 집약된 탑의 형상에 작가 은숙이 “그러나 돌아서면 그만이다”라는 역설적인 제목을 붙이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녀에게 시간이라는 것은 ‘나라는 개인 주체’가 몸담고 있는 ‘삶의 체험적 시간’이면서도 ‘우리라는 사회적 인간 주체’가 대면하고 있는 ‘인생의 시간’으로 이해된다. 순수와 비순수가 공의와 불의가 한 덩어리로 움직이고 있는 시간인 것이다. 그것은 가히 ‘사회학적 시간’이라 할 수 있을 터이다. 그렇다. 그녀의 최종적인 시간 탐구는 ‘철학적 시간’을 바탕에 두고 ‘사회학적 시간’ 속에 서성인다. 이 작품은 시간을 ‘총체적인 삶의 시간’으로 인식하는 작가의 태도를 드러내는 것이자, 삶의 시간 속에 ‘숨겨진 채 보이지 않는 것’에서도 시간의 의미가 담겨져 있음을 피력하는 장치가 된다.  





글을 정리하자. 은숙은 무엇보다 과거-현재-미래를 아우르는 시간의 개념을 베르그송의 지속과 같은 개념의 ‘한 덩어리’로 인식한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삼은 채 ‘사회학적 시간’의 의미를 포개어 올린다. 그녀의 전시에서 ‘패키지 디자인의 전개도’처럼 분절된 전시 구성이나 익히 알려진 기호나 도상을 사용한 이미지들은 시간에 대한 본질적 이해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하기보다, 다양한 시간의 개념과 층위를 이해하기 위해 마련된 장치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작가가 관심을 기울이는 부분은 이러한 전시 구성과 이미지의 이면에 숨겨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관심이다. 예를 들어 작품 〈정해 준 기억〉에 숨겨둔 ‘기존 질서가 강요하는 일률적 관습’, 전시장의 벽면 하단의 걸레받이에 설치되어 잘 보이지 않도록 숨겨진 작품 〈새긴 행동언어〉이 의미하는 ‘보이지 않는 시간의 덫’과 같은 의미, 〈라플라스의 도깨비〉에서 감추어져 있는 ‘카니자 삼각형’과 같은 도상의 의미는 ‘보이지 않는 시간’에 대한 의미를 곱씹게 한다. 그것은 마지막 작품 〈그러나 돌아서면 그만이다〉에서 ‘숨겨진 채 드러나고 있는’ ‘시간 속에 숨겨진 사회적 헤게모니에 대한 비판 의식’마저 아우른다. 
이러한 시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은숙은 오늘도 ‘시간의 유용한 쓰임’에 대해서 성찰하고 고민한다. 시간이란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것’으로 이해되는 까닭이다. 또한 이 시간은 작가 은숙에게 ‘거저 주어진 것’으로서 예술가로 살고 있는 자신에 대한 성찰을 담는 ‘가장 주요하고도 큰 그릇’이기 때문이다. ●



출전 / 

김성호,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에 대한 사유」, 『생생화화(生生化化) 2018 - 헤어날 수 없는: Hard-boiled & Toxic』, 은숙 작가론, 전시카탈로그, 경기도미술관, 2018, pp. 111-119. 


《경기유망작가전 - 생생화화(生生化化) 2018 - 헤어날 수 없는: Hard-boiled & Toxic》(2018. 12. 11 ~ 2019. 03. 10, 경기도미술관) 

참여 작가 : 김나영&그레고리 마스, 김동현, 김은형, 박혜수, 송민철, 윤성지, 은숙, 전혜림, 홍기원, 홍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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