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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평│2018부산비엔날레 / ‘따로 또 같이’라는 분리 혹은 유스토피아

김성호

2018부산비엔날레 - ‘따로 또 같이’라는 분리 혹은 유스토피아


김성호(미술평론가)



들어가는 말 
이 글은 제 9회를 맞이한 2018부산비엔날레를 살펴본다. 크리스티나 리큐페로(Cristina Ricupero) 전시감독과 외르그 하이저(Jörg Heiser) 큐레이터에 의해서 초대를 받은 34개국 66인(팀)의 125점의 출품작들을 선보인 이 국제전은 ‘비록 떨어져 있어도(Divided We Stand)’라는 전시 주제 아래 65일간(2018. 9. 8-11. 11)의 일정으로 부산현대미술관과 구 한국은행 부산 본부에서 펼쳐졌다.  
2019년 봄, 이미 지난 행사들의 무덤 속에서 아카이브로 귀속된 2018부산비엔날레를 되살려 곱씹기 위해서는 모든 자료들을 꺼내 볼 필요가 있겠다. 이를 위해서는 자료를 다시 들추면서 망각 속 기억을 소환해야만 할 뿐만 아니라, 자료들의 출처와 생산된 자료의 선후를 필히 따져 물어야만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좁은 남한의 땅덩어리에 비엔날레라는 이름의 국제아트이벤트는 너무 많아 이 행사와 저 행사 그리고 최근 행사와 이전 행사를 선명하게 구분하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 내 비엔날레는 무려 14개에 이른다. 격년제를 이어달리기하는 많은 비엔날레뿐 아니라 예산 규모가 큰 프로젝트, 아트 페스티벌 등을 합치면 한국 땅에 국제 미술 행사는 그야말로 홍수의 수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매번 ‘그 나물에 그 밥’일 뿐이라며 비엔날레 무용론마저 제기되는 요즈음, 2018부산비엔날레가 여타의 국제 미술 행사와 비교하여 차별화되는 점이 있었다면 과연 무엇이었는지를 행사 전반을 두루 아우르면서 살펴보기로 한다.  


프레스 


I. 주제 - 비록 떨어져 있어도 
(사)부산비엔날레조직위원회는 임동락 시대를 마감하고, 최태만이 위원장을 맡으면서 새로운 혁신을 도모했다. 신임 감독을 추천과 선정의 방식이 아닌 공개 모집의 방식으로 선임한 것이 그것이다. 시기상 2018년 행사를 준비하는데 있어 뒤늦은 감이 있기는 했지만, 2017년 12월에 공개 모집에 들어갔다. ‘국적에 관계없이 새로운 담론을 제시해 줄 기획자’를 공모했다는 점에서, 당시 미술계에선 2018부산비엔날레 감독으로 외국 사람이 선정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소문은 가끔 현실이 된다. 팀을 짜서 응모했던 리큐페로와 하이저가 각각 전시감독, 큐레이터로 선정되기에 이르렀고, 2018년 초입, 채 1년이 되지 않은 기간을 남겨둔 채 비엔날레를 준비하는 작업에 돌입했다.   
이들이 제시한 주제 ‘비록 떨어져 있어도’는 조금은 구식인데다, 릴레이로 광주를 이어받은 느낌이다. 이전의 세계 각국의 비엔날레가 탈국가주의를 천명하면서 이미 사용했던 경계와 분리 등의 주제를 고스란히 계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같은 해 ‘광주비엔날레’가 '상상된 경계들'이라는 주제 아래 ‘국가, 민족, 영토의 경계’뿐 아니라 ‘상상의 경계’를 포섭했던 것처럼, 부산비엔날레 또한 ‘물리적 분리’와 ‘심리적 분리’를 한데 아우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2018부산비엔날레의 주제 의식은 ‘냉전 시대 종식 이후에도 여전히 그 자리에 진화되지 않은 냉전 시대의 불씨가 잔존하고 있음을 천명하는 것이자, 이러한 물리적, 심리적 분리가 지금, 여기에 상흔으로 새겨져 있음을 증언하는 일’과 관계한다. 이 시대를 후기식민주의 혹은 신냉전 시대라 호칭하면서 말이다. 제국의 침탈자나 피식민국의 피해자 모두에게 이러한 주제 의식은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다. 저마다 극도의 트라우마를 지닌 채 후세대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까닭이다. 리큐페로 전시감독과 하이저 큐레이터는 “이번 전시가 낙관적인 미래를 예견하는 전시이기보다, 우리가 처한 현실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전시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분리는 어디에 있었고, 지금 어디에 있으며 또 어디에 존재할 것인가? 2018부산비엔날레는 물리적, 심리적 분리가 어떠한 계기로 생겨나, 어떤 형태로 우리 주변에 존재하고 있는지 또 앞으로는 어떻게 펼쳐질지를 이야기한다. 즉 과거로부터 현재, 미래에 이르는 통시적 시각을 제시하려는 것이다.  
분리의 첫 출발은 어떻게 생겨났는가? 과거사를 되돌아보라. 분리의 최대 동인(動因)은 이데올로기였다. 사회주의, 공산주의, 민주주의와 같은 이데올로기는 인류의 빛나는 미래를 위한 이상이었을 뿐인데, 그것이 국제 정치의 도구로 사용되면서부터 대립과 갈등을 유발하게 되지 않았던가? 과거 역사에서 분리란 이데올로기의 맞부딪힘이 야기한 결과였다. 대립과 전쟁 그것으로 인한 학살, 디아스포라(Diaspora) 그리고 난민이란 과거 속 분리가 낳은 끔찍한 결과이다. 
현재는 어떠한가? 분리는 끝이 났는가? ‘지금, 여기’에도 분리는 지속된다. 보라. 분리의 양상은 도처에 있다. 이데올로기의 잔재와 대립, 경제적 불평등과 갈등, 국제 정치 질서가 야기한 가해자와 피해자, 지배력을 지속하고 강화하려는 보이지 않는 지배 계급의 획책과 그로 인한 다각화된 분리가 현재에도 비일비재하게 펼쳐진다. 비엔날레 기획자들은 영토의 질서를 재편하고 새롭게 썼던 분리의 역사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망령처럼 잔존하고 있는 ‘지금, 여기’를 보여 준다. 피식민 국가들에 남겨진 혼성의 인종과 오염된 문화는 세계화와 다원화의 시대에서 용인될 수 있다고 치자. 피식민 국가들이 자국어를 망실한 채 마치 모어(母語)인 양 사용하고 있는 제국의 언어와 그것이 야기한 망령은 제 3세계의 영토 위에 새로운 문화식민지를 일구어 낸다. 후기식민 시대에, 인지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이 들어와 얼룩처럼 자리한 제국의 언어는 피식민국에게는 제거할 수 없는 종양이다. 
분리가 노정하는 미래는 자명하다. 장밋빛 미래는 쓰레기 더미 위에서 그려진다. 미래적 인류는 부정적 현실의 지평을 뻔히 내다보면서도 희망을 결코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기획자들이 차용하는 소설가 마가렛 애트우드(Margaret Atwood)의 용어 ‘디스토피아적 유토피아’ 혹은 ‘유토피아적 디스토피아’는 그렇게 그려진다. 
예견할 수 있으면 예견해 보라! 이전의 분리는 치유될 것이다. 제국이 점령했던 피식민국의 지형도가 제국의 문화유산을 수혈 받아 변모되던 시대로부터 피식민국 스스로 분열과 혼성을 거듭하는 시대로 전이되면서 말이다. 아서라. 이전의 분리가 어설프게 치유될 테지만, 또 다른 분리는 언제나 일어날 것이다. 분명코 우리의 미래에는 또 다른 의미의 연합적 지배 세력이 등장해서 새로운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만들어낼 테지만, 인류는 언제나 상상 속 유토피아를 혹은 유사한 또 다른 세계를 염원한다. 그것이 우리가 예견하는 미래이다.  

   
포스터



II. 장소 - 미술로 짓는 유스토피아 
2018부산비엔날레의 장소는 ‘비록 떨어져 있어도’라는 주제와 상응한다. ‘부산현대미술관’ ‘구 한국은행 부산 본부’ 두 곳의 장소가 그렇다. 분리된 장소! 두 곳의 장소는 현재 ‘비록 떨어져 있어도’ 원래는 하나였던 장소인 것처럼 우리에게 각인된다. 
그런데, 두 장소는 실제로는 하나의 공간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상호간 반대편에 있는 장소처럼 보인다. 하나는 새로 만들어진 오늘날 현장이고 또 하나는 오래전의 상흔을 간직한 옛 현장이니까 말이다. 그것은 마치 기획자들이 차용하는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세계인 것처럼 극과 극에서 대치하는 듯이 보인다.  
우리는 안다. 가장 완벽한 상상의 세계인 유토피아와 그것의 반대에 위치한 디스토피아는 서로 극과 극을 이룬 반대항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언제나 그것은 함께 자리한다. 기획자들이 차용하는 소설가 애트우드의 용어, ‘디스토피아적 유토피아’ 혹은 ‘유토피아적 디스토피아’는 실상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를 합성한 새로운 용어 유스토피아(Ustopia)에서 실현되는 것이다. 그것은 현실계의 모습이기보다 정신 상태(a state of mind)의 것으로 문학이나 예술의 장에서 상상으로 그려지는 세계이다. 
2018부산비엔날레의 두 장소는 이러한 유스토피아의 세계를 쌍으로 실현하기에 제격이다. 첫 번째 장소인 부산현대미술관은 애초부터 부산비엔날레 전용관으로 계획되고 2018년 6월 개관한 것이니 만큼, 비엔날레의 몸에 딱 맞춘 새 옷이다. 물론 그것이 건축적으로 완벽한 맞춤옷인지를 따져 물었던 과거의 무성했던 비판적 논의는 여기서 논외로 하자. 부산비엔날레를 위한 이 공간은 몇 가지 의미가 있다. 이전에 부산비엔날레가 대관의 형식으로 사용하던 부산 동부에 위치한 부산시립미술관의 공간 대신 부산 서부에 새롭게 부산비엔날레를 위한 전용관을 지어서 독립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부산비엔날레가 셋방에 얹혀 있다가 비로소 생애 최초로 자신의 주택을 마련한 셈이라 하겠다. 또한 이것은 부산의 대표적 관광 휴양지인 해운대와 연접하고 있는 동쪽의 부산시립미술관으로부터 부산 서쪽의 낙동강 하구의 을숙도로 비엔날레 현장을 이전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니는 것이기도 하다. 문화적 수혜를 잔뜩 받고 있는 동부로부터 그동안 문화 수혜의 차원에서 소외되었던 서부로 권역을 이동한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장소인 ‘구 한국은행 부산 본부’는 어떠한가? 한국은행의 부산 지점이었던 이 곳은 한국 건축가 1세대인 이천승의 설계로 1963년에 완공된 근대적 조형과 기능성이 돋보이는 건축물이다. 한국전쟁 중 두 차례의 화폐 개혁이 이곳에서 시행되었던 과거의 역사와 2013년 부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70호로 지정된 최근의 역사적 평가가 맞물리는 공간이다. 2018부산비엔날레의 기획자들은 ‘디스토피아적 유토피아’ 혹은 ‘유토피아적 디스토피아’를 구현하기에 완벽한 장소로 구 한국은행 부산본부를 꼽았다. 우리의 논의대로 소설가 애트우드가 언급했던 ‘유스토피아’를 실현하기에 안성맞춤인 공간인 셈이다. 
위의 두 곳의 전시 공간은 2018부산비엔날레의 주제 ‘비록 떨어져 있어도’를 동시에 선보이되 내러티브의 순차적 섹션을 담당한다. 즉 부산현대미술관에서는 ‘전형적 냉전기의 고찰’과 ‘유동적 경량의 시대와 냉전 풍조로의 회귀’로 대별되는 과거-현재를 탐구하고, 구 한국은행 부산 본부에서는 공상과학적 분위기를 담은 현재-미래를 조망한다. 물론 우리의 삶 속에서의 과거-현재-미래에 관한 시간의 순차적 내러티브가 그렇듯이, 두 곳의 전시 공간에서의 그것 역시 딱 떨어지듯이 분절되는 것은 아니다. 물리적인 장소성의 차원에서 두 장소가 ‘비록 떨어져 있어도’, 이 장소를 연결하는 통시적 내러티브는 겹쳐져 있거나 붙어 있는 것이기도 하다. 게다가 비엔날레의 관객, 즉 ‘지금, 여기를 사는 사회 구성원들’의 기억 속에서 소환되는 과거의 시간망은 부지기수로 겹쳐져 있고 붙어 있는 것이지 않던가? 현실의 공간 속에서 불가능해 보이는 애트우드의 유스토피아는 두 곳의 예술적 공간에서 과거-현재-미래가 뒤섞이며 실감나게 펼쳐진다. 


(좌)부산현대미술관 & (우)구
 한국은행 부산 본부



III. 지향점 - 탈메가비엔날레 
2018부산비엔날레는 ‘탈메가비엔날레’라는 구호를 선택했다. 기자회견장에서 마이크를 잡은 큐레이터 하이저의 다음의 언술을 되새겨 보자: “우리는, 많은 작품들과 방문객이 동반되고 전문가 관람객조차 지치게 만드는 거대 전시(meg-exhibition)의 시대는 끝났다고 확신한다.”탈메가비엔날레라는 구호에 걸맞게 2018부산비엔날레는 참여 작가 수를 이전 비엔날레보다 대폭 줄였다. 그런 까닭은 실상 따로 있다. 작년 말, 전임 집행위원장이 비리, 전횡 의혹을 받고 자진 사퇴한 이래, 신임 집행위원장의 선임이 늦어진 만큼, 감독 선임도 늦어졌고, 촉박한 전시 준비 일정에 화답하듯, 규모가 축소된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탈메가비엔날레’는 이전의 비엔날레의 규모를 준비할 만큼의 여력이 없을 때 내려야만 했던 ‘문화 정치적 선언’처럼 간주된다. 두 전시기획자의 ‘탈메가비엔날레 선언’이 “비엔날레를 제대로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는 항변처럼 들리는 까닭이다.  
그런데 위기가 오히려 약(藥)이 되었다. 비엔날레 준비의 절대 부족의 시간을 메우기 위해 ‘양보다 질로 승부’하려는 대안을 찾으면서 비롯된 결과였다. 2018부산비엔날레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2018광주비엔날레보다 상대적으로 관람의 집중도를 높였다는데 집중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광주는 다수의 감독을 선정한 것은 물론, 이전보다 전시 장소도 늘리고 출품 작가 수도 늘리면서 복잡다기한 메가비엔날레의 극을 달리면서 여기저기 빈틈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광주의 과욕과 그로 인한 복잡다기함이 오히려 부산의 단순하고 소박한 규모를 상대적으로 돋보기에 만들어 준 셈이다.  
전시 준비 기간이 짧은 것도 원인이었지만, 두 명의 외국 전시기획자가 국내 체류 기간도 극히 짧은 상황 속에서 부산비엔날레를 이전 규모처럼 되살릴 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일 수도 있겠다. 다행이라면 짧은 준비 일정으로 외국 감독과 큐레이터를 선정한 무리수를 두었음에도 게스트 큐레이터 박가희, 자문위원 박만우, 백지숙, 이영욱, 임민욱과 같은 외국 기획자의 능력 밖에서 도움을 줄 새로운 인적 조직을 구축한 것이다. 그들이 감독을 도와 얼마나 발로 뛰었는지를 가늠하기는 쉽지 않지만, 적어도 전체 65명(팀)의 출품 작가 중 11명(팀)의 국내 작가 선정을 포함해서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주최 측의 변명 또는 항변은 여기에 있다. ‘출품 작가의 절대적인 수치는 예년에 비해 다소 줄어들었으나 국가 수는 작가 수에 비례하여 상대적으로 높은 34개국’이라는 것! ‘비록 떨어져 있어도’라는 주제의 핵심어로 간주되는 ‘분리’에 대한 다양한 스펙트럼을 다양한 국적의 미술가들의 작품들을 통해서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 것이다. 이러한 항변은 타당하고 정당하다. 동기와 이유가 어떠하든, 2018부산비엔날레는 규모의 외적 확장을 지양하고, 주제 의식을 심화시킨 전시를 선보이고자 했기 때문이다. 관건이 있다면, 분리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지형도를 전시를 통해 얼마나 설득력 있게 만들어내고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관람 중인 문재인 대통령 내외 



IV. 출품작 - 따로 또 같이 
2018부산비엔날레는 ‘비록 떨어져 있어도’라는 주제에 부과된 물리적, 심리적 ‘분리’에 대한 주제 의식과 탈메가비에날레의 지향점을 위해서 부산현대미술관과 구 한국은행 부산 본부를 유스토피아의 실험장으로 삼아 공간 연출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 두 곳의 전시장은 따로 또 같이 ‘비록 떨어져 있어도’를 이야기한다. 
부산현대미술관은 면적 7,300m2에 이르는 지하 1층, 1, 2층을 전시장으로 사용했고, 구 한국은행 부산 본부의 경우는 총 2,150m2에 이르는 면적인 1층부터 1.5, 2, 3층을 사용했다. 전자의 공간은 개막전을 통해서 비엔날레를 가동하기 위한 실험을 이미 거쳤다고 하지만, 후자는 본격적인 비엔날레 설치를 위해서 전시 공간으로 변용하는 작업을 짧은 시간 안에 거쳐야 하는 쉽지 않은 과업에 돌입했다. 결국 후자의 공간은 한국은행 부산본부가 사무실을 이전한 후, 4개의 층을 전시장으로 활용하여 대중에게 공개하는 최초의 사례로 남게 되었다. 전체 65명(팀)의 출품작들은 각 전시장의 각 층마다 나란히 마주 보거나 저마다의 문맥 속에서 구획되어진 공간 안에서 회화, 조각, 설치, 영상 등 다양한 방식의 조형 언어를 구사하면서 펼쳐졌다. 
특기할 만한 것은 다국적의 작가로 구성된 공동 작업이 유난히 눈길을 끌었다는 점이다. “물리적, 이념적 거리를 초월하고 팀을 형성한 이들의 작업은 ‘분리된 영토’를 넘어 찾을 수 있었던 의식의 연대를 보여줄 것”으로 기대되기에 족했다. 우선 같은 국적으로 형성된 콜라보 작업이 대거 참여했다. 한국의 이민휘와 최윤, 레바논의 조아나 하지토마스(Joana Hadjithomas)와 칼릴 요레이(Khalil Joreige), 브라질의 라우라 리마(Laura Lima)와 제 카를로스 가르시아(Zé Carlos Garcia), 리투아니아의 노메다(Nomeda), 게디미나스 우르보나스(Gediminas Urbonas), 그리고 영국의 제인(Jane)과 루이스 윌슨(Louise Wilson)이 그들이다. 아울러 다국적 조합으로 참여하고 있는 콜라보 작업이나 그룹의 작업 또한 눈에 띄었다. 린(Lin, 미국) & 람(Lam, 캐나다), 바젤 압바스(Basel Abbas, 키프로스) & 루안 아부라암(Ruanne Abou-Rahme, 미국), 마우리시오 디아스(Mauricio Dias, 브라질) & 발터 리드베그(Walter Riedweg, 스위스), 라민(Ramin, 이란) & 로크니 헤라지디(Rokni Haerizadeh, 이란) & Hesam Rahmanian(헤삼 라흐마니안, 미국) 그리고 프로펠라 그룹(The Propeller Group)(베트남, 미국)이 그들이다. 
이 중 부산현대미술관에 출품한 바젤 압바스(브라질) & 루안 아부라암(미국)의 작품 〈사랑 받는 자만이 우리의 비밀을 지킨다〉(2016)는 분리가 낳은 참담한 현실을 가감 없이 선보인다. 5년 넘게 팔레스타인에서 군대의 야간 투시경으로 촬영된 영상을 복합적으로 중첩시킨 이 작품에서 그들은 건물을 철거하는 불도저, 폐허가 된 집, 그 속에서 자라고 있는 식물들, 구름이 흐르는 하늘, 식물을 손에 들고 이동하는 사람, 집단적으로 손뼉을 치고 있는 군중 등의 영상을 교차시키면서, 분리가 야기한 깊은 상처를 잔잔한 영상 언어로 헤집는다. 여기에는 아쿱이라는 식물을 따기 위해 국경선을 넘은 14세 팔레스타인 소년이 매복한 이스라엘 군인들에 의해 총살되었던 미시적 서사가 핏물처럼 배어 있다. 

바젤 압바스(Basel Abbas, 키프로스) & 루안 아부라암(Ruanne Abou-Rahme, 미국), 

사랑 받는 자만이 우리의 비밀을 지킨다(2016)




V. 출품작 - 과거로부터 
그렇다. 과거로부터 온 분리의 상처는 아물기 전에 지금, 여기에서 또 다른 분리를 낳는다. 부산현대미술관에서 전시하는 또 다른 작가들인 헨리케 나우만(Henrike Naumann, 독일), 유이치로 타무라(Yuichiro Tamura, 일본), 정윤선(한국), 주황(한국)의 작품들은 이러한 과거-현재의 참혹하거나 상처투성이인 내러티브를 더듬고 탐구한다. 
보라! 헨리케 나우만의 작품 〈2000〉(2018)은 1990년대 초반 통독 이후의 동독 지역의 변화된 상황을 이야기한다. 자유민주주의의 등장 후 나타난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는 구 동독민에게 새로운 분리의 경험을 촉발한다. 구 동독민의 거실을 재현한 듯한 설치 작품에서 작가는 자본주의가 낳은 분리의 경험과 그것에 대한 슬픔을 이야기한다. 사회주의 시대의 낡은 가구는 이케아와 같은 모던 브랜드의 가구로 대체되었으나, 그것은 장례식장이나 진배없다. 구 동독민을 휩쓴 자본주의의 테크노와 신나치주의와 같은 새로운 이데올로기에 이르는 폐해가 한 거실 의 풍경 안에서 무덤의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유이치로 타무라의 작품 〈거미줄〉(2018)은 어떠한가? 작가는 ‘스카잔(Sukajyan) 점퍼’들을 붉은 조명, 거울과 함께 설치한 작품을 통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남긴 후유증이 오늘날 일본에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은 아이러니를 추적한다. 스카잔 점퍼는 일본에 주둔했던 미군들이 자국에 귀환하는 것을 자축하기 위해서 입었던 일종의 기념품이었다. 이 점퍼에는 미국이 전쟁에 참가한 동아시를 비롯한 유럽의 군사적 요충지를 표시한 지도들이 그려져 있거나, 동아시아의 전통 상징인 호랑이, 용, 봉황, 관상 잉어, 후지산 등의 문양이 새겨져 있기도 했다. 이후 1970–80년대 이 점퍼는 일본 갱스터인 야쿠자들 사이에서 유행했고, 현재는 젊은 세대들에게 길거리 패션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중이다. 냉전의 산물이 문화의 아이콘으로 자리한 이 역설은 마치 지옥과도 같은 전쟁 속의 삶이 전쟁 영웅담으로 변형되곤 했던 한국의 근대화 세대의 술자리 담화들처럼 재생산된다. 작가에게 스카잔 점퍼는 전쟁이라는 분리의 사건이 낳은 또 다른 분리에 직면하고 있는 현대인의 우울한 초상인 셈이다. 
전쟁이라는 분리의 경험은 한국에도 엄연히 존재한다. 한국의 정윤선은 ‘지금, 여기’의 현재의 이남의 땅에서 한국 전쟁의 흔적을 추적하는 퍼포먼스 〈길 위의 진실〉(2018)을 선보인다. 부산역에서 출발하여 부산현대미술관을 향해 달리는 버스에서 펼쳐 보이는 관광 가이드 형식의 퍼포먼스를 통해서 작가는 부산 곳곳에 남겨진 한국 전쟁의 흔적을 좇고 그 아픔의 역사를 되새긴다. 구체적으로 최대 120만 명의 민간인의 희생이 있었던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과 연관된 장소들을 지나면서, 전쟁이 낳은 과거의 비극을 되짚는다. 
한국 작가 주황은 영상 출품작 〈민요, 저곳에서 이곳에서〉(2018–)을 통해서 중국, 일본, 중앙아시아 곳곳에 살고 있는 한국 동포들이 한국 민요를 부르는 모습을 클로즈업으로 선보인다. 전쟁 전후 한반도를 떠나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썼던 동포들의 육신에 흐르는 한국인의 피는 한국 민요로 구전되어 왔음에도, 여기에는 언제나 변형이 유발된다. 삶의 공동체라는 국가를 떠나있는 시간 동안 그들에게 민요의 원형은 변주된 리듬과 개사된 가사를 통해 서서히 비틀어진다. 이 작품에는 민족 공동체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사건의 전후에서 발생한 단절된 시간과 물리적 거리의 간극 그것으로 인한 이질감을 여실하게 드러낸다. 


헨리케 나우만(Henrike Naumann, 독일), 2000(2018)



유이치로 타무라(Yuichiro Tamura, 일본), 거미줄(2018)



정윤선, 길 위의 진실(2018)



주황, 민요, 저곳에서 이곳에서(2018)




VI. 출품작 - 미래를 
구 한국은행 부산 본부에 선보이는 작품들은 현재-미래를 잇는다. 대개는 공상과학의 암울한 상상이 그리는 디스토피아의 세계가 자리를 차지하지만, 그것은 때대로 기획자들이 언급하는 ‘디스토피아적 유토피아’ 혹은 ‘유토피아적 디스토피아’를 그린다. 우리의 논의대로 유스토피아인 셈이다. 특히 한국은행 부산 본부에는 ‘따로 또 같이’ 펼쳐지는 공동 작업이나 개별 작가의 공동 지향성 작업이 눈에 띈다. 관련하여 여기서 우리는 제인 & 루이스 윌슨(Jane and Louise Wilson, 영국), 필 콜린스(Phil Collins, 영국), 밍 웡(Ming Wong, 싱가포르)의 출품작을 살펴보자. 
제인 & 루이스 윌슨 자매는 구작인 〈슈타지 도시〉(1997)라는 4채널 영상 작품을 선보인다. 프로젝트로 선보이는 이 작품은 통독 이전의 동독의 비밀 경찰 조직 ‘슈타지’의 감시 체제의 불안한 삶을 다룬다. 실제로 슈타지의 옛 도청 시설을 촬영한 이 작품에는 모두가 평등하게 살기를 원했던 사회주의의 이상이 낳은 전체주의의 음험하고도 우울한 디스토피아의 세계가 담담하게 그려진다. 여기서 꿈꾸는 미래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필 콜린스의 영상 설치 작업인 〈딜리트 비치〉(2016)에서 영상 작품은 일본의 아니메 스튜디오 ‘스튜디오4°C’ 및 팝 음악 작곡가 미카 레비와의 협업으로 제작된 것이다. 이 영상에는 작금의 자원의 고갈, 환경 오염 그리고 그것이 야기한 생태계의 위기와 인류의 파국을 암울한 어조로 그린다. “반(反)자본주의 투사들이 그릇된 방식으로 저항하다가 시커먼 원유로 된 물질을 담배처럼 피우고 약처럼 몸에 주사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러 끝내 최후의 막대한 자기희생을 치르는 장면”은 충격적이다. 마치 페이크 다큐멘터리의 섬뜩함이 그곳에 있다. 벽면에 투사되는 영상 작품을 둘러싸고 있는 연극적 장치들은 또 어떠한가? 여기에는 공상 과학으로 접근하는 작가의 불온한 상상이 넘실댄다. 한계에 도달한 화석 연료를 둘러싸고 펼쳐진 가상 미래의 풍경-어두운 전시장에 팽개치듯이 버려진 드럼통, 찢겨진 타이어와 고무 조각, 해수욕장의 시설물 등-은 디스토피아의 세계로 가득한 암울한 미래 그 자체이다. 
작가 밍 웡은 자신의 작품 〈대나무 우주선에서 전하는 이야기들(파트 1)〉(2018)에 공상물과 연극 및 영화적 문맥을 겹쳐 올리면서, 싱가포르 출신으로서 대면하는 중국 민족의 미래를 그린다. 전시 공간 안에 중고 사무용 가구들을 배치하고, 그것을 좌대로 삼아 중국의 디아스포라에 관한 영상 작품과 사진 이미지, 오브제, 텍스트 등을 복합적으로 선보인다. 그것은 중국의 역사를 배경으로 펼쳐진 분리와 경계 그리고 디아스포라의 역사에 관한 사회학적 진술이라 할 만하다. 중국과 홍콩의 경계가 낳은 분리, 동아시아와 세계 각지로 흩어진 중국 민족과 중국 정부의 대응 등이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베이징 오페라(경극)에 대비되는 광둥 오페라(월극)가 무대극에서 영화로 옮겨 가던 역사를 탐구하면서 거대 국가 중국의 분리와 경계가 낳은 현재적 문제와 더불어 예측 불가능한 중국의 미래를 상상한다. 정치, 사회, 문화적 창을 통해서 중국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분리와 그것이 낳은 또 다른 분리에 관한 문제의식을 탐구하는 것이다. 


제인 & 루이스 윌슨(Jane and Louise Wilson, 영국), 슈타지 도시(1997)



필 콜린스(Phil Collins, 영국), 딜리트 비치(2016)



밍 웡(Ming Wong, 싱가포르), 대나무 우주선에서 전하는 이야기들(파트 1)(2018)

 



나오는 말   
2018부산비엔날레는 ‘하나의 이야기’를 썼다. ‘비록 떨어져 있어도’라는 주어가 생략된 주제는 언제인가는 복수의 누군가(혹은 무엇이) ‘같이 있을’ 어떠한 상황을 예견하게 만든다. 신과 인간이, 아담과 하와가, 이데올로기의 저편과 이편이, 식민국과 피식민국이,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떨어져 있는 상황’을 말이다. 이와 같은 분리와 대립의 극단에는 디스토피아의 세계가 출현한다. 물론 그것은 상징적이다. 실제로 인류사에 디스토피아처럼 암울한 역사가 있었고 그러한 세계를 극복하고 있는 작금이지만 디스토피아의 그림자는 ‘지금, 여기’에서도 여전히 하나의 상징처럼 어른거린다. 그래서일까? 유토피아가 ‘영원히 존재하지 않았고, 오지도 않을 가상의 세계’이라고 할 때, 차라리 우리는 디스토피아가 어른거리는 또 다른 세계를 상상한다. ‘유스토피아’의 세계! 그 세계는 문학과 예술의 이름으로 그렇게 우리에게 왔다. 2018부산비엔날레는 얼추 그 지점에 서 있다.  
주위를 둘러보자. 전시 주제만 있고 실제로는 아무런 이야기가 없는 콘텐츠를 꾸린 국제행사가 지구상에 부지기수이다. 이야기의 껍질은 있으되 알맹이가 없는 그러한 행사를 우리가 얼마나 많이 보아 왔던가? 그런 면에서 이야기에서 알맹이가 잡히는 2018부산비엔날레는 여타의 비판으로부터 선방(善防)했다. 아울러 우리는 이 글에서 비엔날레 진행 과정 속의 제반 문제는 물론이고 공간 연출, 동선 배분, 부대 행사, 관람객 서비스 차원에 관해서는 대외적으로는 여타 비엔날레와 비교해 ‘고만고만했다’는 점에서 수다스러운 언급 없이 ‘선방’이라는 괄호 안에 묶어 두고자 한다. 
여기서 생각해 보자. 2018부산비엔날레처럼, 국제 미술 행사가 매번 우리가 처한 맥락과 시대를 거시적 서사로 곱씹어야 할 필요가 있겠는가? 예술이란 시대의 거울이니 예술 자체가 이미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말이다. 미시적 서사들로 비엔날레를 만들 수 없는가? 2018년 개최된 ‘머리에 쥐가 나게 했던’ 모 비엔날레와 더불어 2018부산비엔날레를 보고 난 후 느끼는 헛헛함에 대한 단상이다. ● 


출전 /
김성호, 「2018부산비엔날레 - ‘따로 또 같이’라는 분리 혹은 유스토피아」, 『미술평단』, 2019. 봄호 

사진: 부산비엔날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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