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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일반│수원미협 50년사 / 수원미협 50년, 궤적과 현황 (상편)

김성호

수원미협 50년, 궤적과 현황 (상편)

김성호(미술평론가, Kim, Sung-Ho) 








I. 들어가는 말 :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이 글1)은 1964년 수원미술협회가 태동하고 2018년 현재까지 50년이 넘는 궤적을 검토하고 그 미래적 전망을 살펴본다. 이러한 궤적의 중심에는 지금은 고인이 된 초대 지부장 안찬주(1964-1996)로부터 김학두(2-5대, 1966-1979), 박기환(6-7대, 1979-1982), 홍승인(8대, 1983-1985), 이길범(9대, 1986-1988), 권대균(10대, 1989-1990), 이종관(11대, 1991-1993), 남부희(12-13대, 1993-1997), 이선열(14대, 1998-2000), 이석기(15대, 2001-2004), 강상중(16대, 2004-2007), 조진식(17대, 2007-2010), 박용국(18대, 2010-2013), 홍형표(19대, 2013-2016), 이영길(20대, 2016-2018)에 이르는 수원미술협회의 지부장들이 있었다. 이들의 헌신과 노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오늘날 발전된 미협의 모든 여건과 상황은 이제 50년이 넘는 시간에서 새로운 도약점을 모색하고 있다. 
이 글은 본론에서 수원미협의 연보를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순차적으로 살펴본다: I. 들어가는 말 :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II. 1920-50년대 : 수원미술협회의 창립 이전 & 미술 단체 활동, III. 1960-70년대 : 수원미술협회의 창립 초기 & 소그룹 미술 운동, IV. 1980-90년대 : 수원미술협회의 전개기 & 고유 위상의 모색, V. 2000년대 : 수원미술협회의 도약기 & 밖으로의 확장, VI. 2010년대 : 수원미술협회의 부흥기 & 안으로의 화합, VII. 나오는 말 : 반백 년의 궤적 이후의 수원미술협회. 
이 글은 이러한 수원미협 50년의 궤적을 통시적(通時的) 시각으로 살펴보고 당시 한국의 미술 현장의 흐름 속에서 오늘날 차별화된 수원미협의 위상을 모색한다. 2018년 현재 500여 명에 이르는 회원을 두고 있는 수원미협이 오늘날 당면한 과제가 무엇인지도 점검하고자 한다. 이 글은 사실에 근거한 채 그것을 의미를 되짚어 보는데 집중하면서 각 지부장들의 업적을 개별적으로 살펴보면서도, 수원미협의 전개사라는 궤적이 어떠한 큰 흐름을 그려왔는지를 추적하는데 집중하고자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글은 앞으로 지속될 수원미협의 역사가 어떻게 전개될 수 있을지를 미리 가늠해 보는 미래적 전망을 조심스럽게 함께 검토한다. 
 

II. 1920-50년대 : 수원미술협회의 창립 이전 & 미술 단체 활동 
미협의 집단적 활동이 있기 전에 수원 미술 현장에서 한국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인 나혜석의 개별적 활동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녀는 1929년 용주사 포교당에서 수원 최초의 개인전을 개최하면서 현대 미술에 관한 수원 미술의 초기 역사에서 매우 주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다. 다만 개인의 활동이 아닌 수원미협의 50년 궤적을 다루는 이 글에서는 미협의 전신 격인 몇몇 미술 연합과 단체의 활동을 짚어보고 미협의 50년 역사의 전후를 이해하기로 한다. 
수원미술협회가 결성된 1964년 이전에 있었던 최초의 협회 차원의 단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1929년 4월에 결성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수원 지부였다. 1930년 3월 26일 수원동맹지부에서 ‘제1회 프로미전’을 수원극장과 근처에서 개최하였다. 이 전시는 당시 130여 점이 출품되었는데 회화, 판화, 만화, 현수막, 벽보 등을 망라하는 것이었다. 이 중 70여 점이 검열로 강제 철거를 당했을 뿐만 아니라 개막 3일 만에 전시회가 폐쇄되었다. 아울러 전시 주최자가 체포되는 등 수난을 겪게 되는데 당시의 암담한 시절을 되돌아볼 수 있는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이 전시는 수천 명의 관객이 방문하는 등 성황을 기록하였다. 전 수원미협 지부장 이석기에 따르면, ‘제1회 프로미전’이 수원에서 열리게 된 까닭이 “1925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주도적 역할을 했던 김복진, 안석주, 윤희순과 함께 활동했던 수원 출신 미술평론가 홍득순의 영향”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1930년대 당시에는 미술평론가 홍득순의 활동이 활발했다. 그는 서구의 미술을 답습하는 중심의 화단 경향을 비판하면서 ‘조선의 현실에 적합한 예술’ 창조를 주장했다. 당시 조선의 현실, 자연, 환경을 테마로 한 한국성에 근간한 미술을 정착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는 동경미술학교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한 ‘동미전’을 결성하여 그것을 중심으로 활동했는데, 당시 동미전의 주요 작가로는 ‘홍득순, 이종우, 임학선, 김용준, 길진섭, 이마동, 황술조’가 있었다. 당시 이 단체와 별개로 활동하던 수원 출신 작가들은 한재남과 장윤천 등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선전’에 입선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1940년대에 수원 출신의 화가 이영일이 창설한 ‘조선미술가협회’도 빼놓을 수 없는 단체라 할 것이다. 당시 회원으로 심형구, 김인승, 배운성, 이종우, 장발(이상 서양화부), 김은호, 이상범(이상 일본화부), 김경승(조각부) 등 69인이 창립에 참여하였다. 수원의 이영일은 당시 진채 위주의 한국화에 천착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III. 1960-70년대 : 수원미술협회의 창립 초기 & 소그룹 미술 운동  
1964년 3월 22일 ‘미술협회 수원지구회’가 결성된다.
이러한 협회의 창설에는 수원을 터전으로 활동해 온 소수 작가의 활동이 자산이 되었다. 1960년대 당시 한국화가 이승영을 비롯해서 김학두, 이영일, 이수덕, 안찬주, 박기환, 류선하, 권대균, 김교선, 홍승인, 윤재상, 김인겸, 이필윤, 오인환 등이 활동했다. 이들은 대부분 교육의 현장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안정된 자리에서 창작 활동을 병행하는 입장이었다. 김학두는 1958년 ‘수원여자중고등학교’ 미술교사로 부임한 이래 1992년 ‘동성여자중학교’ 교장직을 마지막으로 퇴임하기까지 수원에서의 미술 교육의 일선에 있었다. 이승영은 1962년 ‘한국농아공민학교(현 서광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활동을 펼쳐왔다. 위에 언급된 초창기 수원 미술인들은 후학 양성과 더불어 지역 미술의 자생적 발전을 통해 수원 화단의 기초를 다지는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1964년 3월 22일 ‘미술협회 수원지구회’가 결성되고, 이듬해인 1965년 5월 23일 ‘미협 수원 지부’로 인준된다. 
제 1대 지부장은 안찬주(1964-1966 임기)였다. 부회장은 김학두, 간사는 윤재상이었다. 
당시 안찬주는 재임 기간 중 미술협회 수원지구회를 결성하고, 향토미술 발전을 도모하는 사업을 구상하였다. 그는 동경대에서 조각을 전공하고, 당시 수원중, 고등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하면서 창작 활동에 전념하던 중이었다. 수원에 전시 공간이 없던 당시에는 금강산다방과 봉선화다방 등이 주요 전시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1964년 10월 ‘제1회 수원미협회원전’이 수원문화원에서 개최된다. 1965년에는 ‘미술협회 수원지구회 인준’을 거치고 1966년에는 ‘예총 수원지구회’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당시의 열악한 환경을 고려하면, 협회의 결성 자체만으로도 미협의 소임을 다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제 2-5대 지부장에 김학두(1966-1979)가 취임했다. 부회장 조성국, 간사 윤재상이 선출되었다. 3대-5대 사이에 이필윤이 부지부장을 맡았고, 3대 간사는 윤재상, 4대-5대는 총무에 이준구가 실무를 맡았다.  
1966년 10월 15일 미협 수원지구회 현판식을 하기에 이른다. 창립기 회원은 8인 정도였으며 이들의 전시는 금강산다방 등에서 이루어졌고 회원전은 문화원 전시실 등에서 진행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당시 장기간 지부장의 역할을 맡았던 김학두는 수원에 미술인을 위한 전용 전시장 건립을 추진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실현을 보지는 못했으나, 그의 노력은 일상의 공간을 전시장화하고 시민의 미술에 관한 관심을 촉발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수원역 광장, 남문거리, 백화점, 문화원, 진흥청 등에서 이어지는 미협 전시가 그러한 예라고 할 수 있겠다. 당시 공모전은 대개 학생들이 주 대상이었으나 저변 확대를 위해 학부모도 참여했다는 것이 특기할 만하다. 
그러나 대개 협회의 행사는 소규모의 것이었다. 협회 회원전을 위시하여 야외스케치, 국전 입선 축하회,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서양미술 감상법, 미술세미나, 탁본 실기, 사군자, 동양화, 조각 연수회, 초중고 사생대회 등과 같은 소규모 행사에 그치는 것들이었다. 그런데도 기타 미술 활동이 거의 없던 시기에 미협이 주도하는 행사가 수원의 미술, 문화를 살찌게 하는 근간이 되어 왔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었다. 
1970년도에는 ‘한국미술협회 경기도지회’와 혼용되어 사용해 오던 명칭을 ‘한국미술협회 수원 지부’로 변경 신청하였다. 한편 ‘일요화가회’를 결성하여 구성원에게 준회원의 자격을 부여하여 향후 협회 회원으로 영입하거나, 미술대회의 3회 입상을 통하여 정회원이 될 수 있게 한 제도적 방침을 마련했다.  
제 6-7대 지부장에 박기환(1979-1982)이 취임한다. 당시 부지부장으로 류선하, 사무국장으로 윤재상이 취임했다. 
이 시기에는 미술협회에서 하는 대표적인 지원 사업인 학생들의 ‘미술 실기 대회’가 빈번하게 치러졌다. 미술 실기 대회는 또 다른 미술 교육의 지속적인 진행 상황에서 논의될 만하다. 그것은 미래의 잠재적 예술가를 육성한다는 차원에서 게을리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이러한 미술 실기 대회를 통해서 향후 수원 미술 인구의 확산을 도모하고, 먼 미래에 예술 도시로 성장하는 희망을 싹틔운 것이다. 아울러 미술전시장의 필요성은 점차 증대하였고 90년대까지 지속하는 미협의 소명처럼 간주하기에 이른다. 당시 전시관 건립 기금 마련을 위한 미협 회원전이 소라백화점에서 열린 것도 그러한 취지에서였다. 
특기할 만한 사항은 미협 내부에서 이길범을 주축으로 한 한국화 분과 내에 새로운 그룹 ‘성묵회’가 결성되었다는 것이다. 박기환 당시 지부장으로서는 미협의 활동 확산이라는 차원에서 소기의 성과를 달성한 셈이다. 이후 70년대에 들어서 점차 외양을 갖춰 가던 미협은 1970년대 후반부터 지역에서의 자생적인 미술 운동을 촉발하는 중심축이 되기에 이른다. 그것은 대개 70년대 중반 이후 미술대학을 졸업한 수원 출신 작가들이 등장하게 되면서 시작된 것이기도 하지만, 당시의 미협이 이들의 창작과 발표의 순환을 끌어낸 점이 없지 않다. 
수원에서의 첫 미술 단체의 등장은 1977년에 이루어졌다. 1977년 12월에 창립전을 가진 ‘S.S전’이 그것이었다. 이 전시는 수원의 고등학교를 1977년 졸업하고 전국의 미술대학에 진학한 1학년 재학생들로 구성된 이들의 첫 그룹전이었다. 전시에 참여했던 이들은 김석환, 차진복, 이석기, 김동기(이상 수성고등학교 졸), 백종광, 장영국(이상 수원고등학교), 김현숙, 권미경, 김정은, 김옥경(이상 수원여고), 김창의, 문용수, 조지숙(이상 영복여고) 등이었다. 구성원의 특성상 이 단체는 실상 친목 모임의 성격이 강한 그룹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단체의 활동은 창립전을 끝으로 결국 해체되고 말았다.
반면, 당시의 신진 작가로 활동하던 작가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미술 활동이 시작되었는데 그들은 권용택, 김성배, 이선열, 백일현, 이종관, 박용복, 남부희, 김철규 등이었다. 이들 중 권용택, 박용복, 남부희가 주축이 되어 지역 화단과는 거리를 두고 있던 중견 작가 김인겸을 영입하면서 1978년 12월 결성했던 단체가 ‘경기청년작가회’였다. 이 그룹은 수원의 소그룹 미술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대외적으로는 1979년 ‘경기청년작가회 창립전’(4.4-4.8, 크로바백화점 전시실)이 수원의 소그룹 운동을 본격적으로 알리는 출발점이 되었다. 이 전시에는 경화식, 권용택, 김인겸, 김철규, 남부희, 박승남, 배형경, 백일현, 이봉순, 이선열, 이종관, 최용락, 허상이 참여했다. 
그 외 작은 규모의 소그룹 활동과 몇몇 자생적인 미술 활동이 이어졌는데 대표적인 것이 1979년 창립전을 가진 그룹 ‘포인트’였다. 이들은 당시 미술대학에 재학 중인 수원고등학교 미술반 출신으로 구성되었다. 백종광, 장영국, 최춘일(작고) 등이 그들이었다. 이들의 활동은 회원을 영입하면서 덩치를 키우고 1983년부터 ‘시점’이라는 개명을 통해서 활동을 지속했다. 이 당시 개별적인 활동으로 주목할 것은 김성배가 만든 ‘안드로메다 미술연구소’였다. 그는 이 장소를 기점으로 자신의 독자적인 예술 활동을 지속하는 장으로 만들었다. 
이처럼 1960-70년대에는 미협은 지역의 미술 활동을 진작시키는 플랫폼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술평론가 박영택이 지적하듯이 “지역 미술의 실질적인 발전을 위한 모색보다는 관례화된 활동과 인맥을 중심으로 지역미술계의 이권을 둘러싼 다소 정치적인 활동의 전개는 균형 잡힌 미술문화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부정적인 결과를 산출”한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러한 부분은 실상 수원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의 각 단체에서 나타나는 폐해였다는 점에서 부정적 차원보다는 긍정적 면모에 더 높은 평가를 부여할 필요가 있겠다. 당시, 수원에 기초한 예술 활동이 서울을 중심으로 한 중앙으로 확산하거나 교류가 미흡한 상태에서 진행된 지역 미술 활동이었다는 점도 이러한 비판적 시각을 이해할 수 있는 바탕이라는 점도 유념할 필요가 있겠다. 이 지점은 80년대 이후의 미협 활동을 통해서 우여곡절이 있음에도 활발하게 그 개선점이 모색되어 나가게 된다. 


IV. 1980-90년대 : 수원미술협회의 전개기 & 고유 위상의 모색 
수원미협은 1980년대에 이르러 정착을 위한 기초적 뼈대를 다지는 일에 충실을 기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가히 수원미술협회의 전개기라 할 만하다. 
제 8대 지부장에 홍승인(1983-1985 임기)이 취임했다. 부지부장에 권대균이 취임했고, 사무국장에 권용택이 업무를 맡았다. 
당시는 수원미협의 정착을 위한 회원의 확충이 절대 관건이었기에 ‘회원자격 기준 완화’를 한국미협에 제안하였다. 이후 1983년 17회 회원전엔 34명, 1984년 18회 35명, 1985년 19회 43명에 참여하는 등 점차 회원 수가 증가하였다. 그리고 1984년에는 신축된 ‘아주대 도서관 로비’에서 회원전을 개최함으로써 전시 공간의 필요성을 대외적으로 알리는 계기로 삼았다.  또한 ‘크로바미술실기대회’, ‘화홍문화제실기대회’, ‘YMCA실기대회’, ‘수원문화원 공모전’, ‘관내 고등학교 연합전’ 등 다양한 미술 대회를 통해 미래 미술인을 육성하는 일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협회는 회원들의 소품을 관공서와 공공 기관에 전시하고 판매하는 방식을 도모했는데, 이것은 미술가들이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여 예술 창작에 힘을 쏟을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또한 기념조형물 제작 기회를 협회 회원들에게 의뢰하여 작가의 위상을 높이는 사업 등을 도모하였다. 당시 ‘88올림픽 기념 조형물’은 김인겸이, ‘정조대왕 동상’은 안찬주가 제작하였다. 아울러 수원 지부와 경기도 지부 간의 교류를 활성화하는 사업들을 운영함으로써 수원미협의 위상을 높이는 데 중점을 두었던 시기로 평가된다. 
한편,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서의 나혜석의 위상을 기리기 위해 1984년 ‘나혜석기념비 건립추진을 위한 회원전’을 크로바백화점 전시실에서 개최하였다.  
제 9대 지부장에 이길범(1986-1988)이 취임한다. 부지부장으로는 김교선, 권용택이, 사무국장으로 남부희가 역할을 맡았다. 
이 당시는 경기미협 지부와 수원미협 지부가 지부장을 겸임하던 관행을 없애고 경기미협 제18대 지부장으로 홍승인이 재임하고, 이길범은 수원미술협회로 적을 옮긴다. 경기 지부와 수원 지부의 분권화가 구체화된 지점이라 하겠다. 그러나 당시까지만 해도 자체 사업은 회원 수의 부족으로 인한 사업 추진에 어려움을 겪었다. 다만 이전부터 꾸려졌던 소그룹 운동을 활성화하는데 집중했다. 1982년 결성된 ‘성묵회’는 첫 한국화 그룹이었는데, 이 그룹은 오늘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당시의 역점 사업은 대개 회원전과 같은 자체 사업과 미술 실기 대회와 같은 지원 사업으로 선명하게 구분이 가능할 만큼 단순했다. 관의 지원 자체가 미술 대회 정도에만 국한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개의 사업은 미술 대회와 회원전 정도였지만 소수 회원들의 열정적인 참여로 인해 ‘수원미협 회원전’은 제20회, 21회가 크로바백화점에서, 제22회가 선화랑에게 성공리에 개최되었다. 한편, 교도소 교정 공무원이었던 김영섭 회원의 노력으로 ‘수원교도소’ 내의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실행했던 ‘예술 작품 감상 프로그램’은 특기할 만하다. 
제 10대 지부장으로 권대균(1989-1990)이 선임된다. 1989년 당시 부지부장으로 권용택, 류선하가 취임했고, 사무국장으로 남부희가 업무를 맡았다. 1990년에는 부지부장으로 남부희, 류선하가, 사무국장으로 이경근이 업무를 맡았다. 
이 당시에는 미협의 자체 사업으로 ‘제 1회 수원미술제’가 개최되기에 이른다. 예술제 운영위원으로 권대균, 남부희, 김병학, 김중, 김영기, 나정수, 류선하, 박기환, 박용국, 박태균, 윤재상, 이미혜, 이석기, 이선열, 이주영, 이한산, 장혜홍, 주영광, 최은영, 홍낙기 등이 참여했다. 이 행사는 다양한 단체와 미술인들이 참여한 수원 초유의 대규모 미술 행사로 약 1달 반에 걸친 13개의 기획 전시를 선보였다. ‘제 24회 수원미술협회 회원전’(수원문화원, 정화랑, 장안공원)은 말할 것도 없이 참여 장르로 ‘한국화, 서예전’(수원문화원전시실), ‘서양화, 조각 디자인, 공예전’(정화랑), ‘설치행위전’(장안공원) 등 수원의 거의 모든 전시 공간에서 전시회가 개최되었다.
 또한 수원미협에 소속된 각 분과의 전시회와 아울러 ‘경기현대미술작가회전’, ‘일구팔이일이회전’, ‘미술동인 새벽전’, ‘신인작가전’, ‘수원지역미술학우회전’이 동시에 열렸다. 이 전시를 통해 이후 수원미술계를 이끌어갈 그룹들이 가시화되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이석기에 따르면 ‘미술동인 새벽’과 ‘경기현대미술작가회’가 이러한 선두 그룹 중 하나였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행사의 일환으로 ‘열린 시맥회’가 1989년 결성되고 1991년 ‘창립전’(선화랑)을 갖게 된다. 이 그룹에는 신인 작가들이 대거 참여했는데, 이 시맥회 회원으로 지금은 중견으로 활동하고 있는 박용국을 비롯해서, 김종현, 안기화, 안택근, 유동일, 이득현, 이상달, 이재용, 차진환, 최광천, 최세경, 최원민 등 여러 작가가 참여하여 활동을 이어갔다. 수원미술계의 결집을 통해서 수원 미술인들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수원미술을 활성화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제 11대 지부장으로 이종관(1991-1993)이 취임한다. 1991년 부지부장으로 이한산, 박영복, 남부희, 이정희, 김교선이 취임했고, 사무국장 박영복이 부지부장을 겸임했다. 1992년 부지부장으로 김교선, 박영복, 남부희, 이정희, 이한산이 취임했고 사무국장으로 이선열이 실무를 맡았다. 
특기할 만한 사항은 11대 임기가 1991년 총회에서 임기를 1년으로 하는 정관 개정을 거쳐 임기가 1992년까지로 한정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중앙미술협회로부터 ‘임기 3년’의 유권 해석을 받아 1993년까지 연임할 수 있었다. 
협회전을 지속적으로 개최하고 문화 교실 등을 활성화하는 노력들로 일반인에게 미술을 대중화하는 것을 역점 사업으로 삼았다. 지원 사업이었던 미술 대회는 이러한 대중의 관심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수원미술협회가 주최하는 ‘제 1회 미술실기대회’를 경기도청에서 개최하였고, ‘화홍문화제실기대회’를 방화수류정에서 실시하였다. 한편 1991년 제25회 수원미협전을 당시 개관했던 ‘경기도문화예술회관(현 경기도문화의전당)’에서, 26회 수원미협전을 개최했다. 
제 12-13대 지부장에는 남부희(1993-1997)가 직함을 맡았다. 제 12대 기간(1992-1994)에는 부지부장으로 기노철, 이석기가, 사무국장으로는 한기백이 업무를 맡았고, 13대 기간(1995-1997)에는 부지부장으로 이선열, 김주영, 채순홍이 일했고, 사무국장으로 이석기가 실무를 담당했다. 
자체 사업으로는 ‘수원미술협회 회원정기전’을 개최했고, 지원 사업으로는 1996년 나혜석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현대여성미술제’를 개최하였고, 1997년 ‘제1회 수원나혜석미술대전’을 공모전 및 초대전으로 구분하여 처음으로 개최한 것이 특기할 만하다. 이 공모전은 수원 출신으로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인 나혜석을 기리고 전국적인 규모의 위상을 본격화한 행사가 되었다. 이러한 계기는 실상 1996년 ‘수원 축성 200주년 기념 미술 행사’ 주관을 놓고 민예총수원 지부(지부장 권용택)의 마찰을 빚게 되면서 민예총 주관 행사인 ‘흐르는 물전’(경기도 문화예술회관 전시실)을 개최하게 되는 일로부터 시작하였다. 즉 수원시의 주요 행사의 주체적 역할을 맡지 못한 수원미협에게 새로운 예산이 책정된 사업 계획이 요청되었는데, 이때 수원미협이 나혜석을 기리기 위한 전국 공모전을 개최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대상은 여성으로, 동양화, 서양화, 서예, 조각, 디자인으로 나뉘어 공모가 개최되었다. 한편 미술 실기 대회를 다양하게 꾸린 것도 특징으로 꼽힌다. ‘화홍문화제 미술, 휘호대회’, ‘수원성 그리기 대회’, ‘벚꽃축제 기념 미술대회’ 등은 물론이고 ‘홍재미술실기대회’를 처음으로 개최하였다. 
재임 중 역점 사업은 전국 규모의 전시회를 주제별로 나누어 유치하는 것이었다. 1995년 한국현대공예전, 1995년 ‘현대회화전’, 1995년 ‘오늘의 구상회화전’, 1996년 ‘현대여성미술제’나 1997년 ‘제 1회 수원나혜석미술대전’과 같은 것이 대표적이라 할 것이다. 특기할 만한 것으로는 월북 해금 작가 ‘이쾌대유작전’을 특별 기획전으로 주최하였고, ‘대한민국미술대전’ 수원 순회전을 주관하여 개최하였는데, 이 전시와 관련하여 미술관 건립 기금을 위한 부대 행사를 개최하여 360만원의 기금을 조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일련의 행사는 훗날 ‘수원미술전시관’을 개관하는데 있어 큰 동력이 된다. 아울러 ‘올해의 미술인상’을 제정, 시상했던 것은 매우 특기할 만한 일이다.   
제 14대 지부장에 이선열(1998-2000)이 부임했다. 부지부장으로 이선옥, 총무로 김철규가 업무를 맡았다. 
자체 사업으로는 1998년 ‘제 34회 수원미협 회원전’을 열었는데 특기할 점은 전시 명칭을 ‘오늘의 수원전’으로 개칭하고, 수원 미술인들의 화합을 위한 새로운 계획들을 수립했다는 점이다. 제 8회(1999), 제 9회(2000) 행사는 ‘수원야외음악당’이나 ‘만석공원 특설무대 행사장’과 같은 야외의 공간에서 개최됨으로써 수원미협의 위상을 대외적으로 알리는  계기를 마련했다. 
지원 사업으로는 유독 나혜석 관련 사업을 많이 개최하였다. ‘나혜석기념사업회’와 협력하고 진행한 사업들로는 나혜석 관련 전시들뿐만 아니라, ‘나혜석 생가터 비(碑) 제막’(1999), ‘나혜석 거리 조성’(1999~2000), ‘나혜석 전집 출간’(2000)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나혜석 관련 전시로 가장 역점을 둔 것은 ‘나혜석미술대전’이었다. 1997년 13대 지부장 시절에 시작된 ‘제 1회 수원나혜석미술대전’은 14대 지부장 시절인 1998년 2회 행사 때부터 ‘나혜석여성미술대전’으로 이름을 바꾸고 회화(동양화, 서양화) 부문만 대상으로 하면서, 공모전 접수처를 서울(인사동), 부산, 대구로 나누어 진행함으로써, 전국 규모의 공모전으로서의 위상을 지니게 되었다. 이 행사는 수원미협이 주관하는 가장 큰 행사 중의 하나로 자리 매김하기에 이른다. 1999년 3회, 2000년 4회에 이르기까지 매년 ‘경기문화예술회관전시실’에서 ‘나혜석미술대전 및 초대작가전’이 진행되었다. 나혜석 관련 또 다른 전시로는 1999년 ‘나혜석 서거 51주기 추모 나혜석 자료전 및 향토여성작가 초대전’이 개최되었고, 2000년 2월 나혜석이 ‘문화 인물’로 선정된 기념으로, ‘나혜석 생애와 그림전’이 개최되었다.
나혜석 관련한 주요한 또 다른 행사는, 1999년 ‘나혜석기념사업회’와 협력했던 ‘나혜석 바로 알기 심포지엄’이었다. 이 행사는 나중에 미협과의 협력을 떨치고 ‘나혜석기념사업회’가 단독으로 주관하는 수원의 대표적인 문화 행사로 자리하기에 이른다. 미협이 공동 주관했던 첫 행사의 이름은 ‘나혜석  탄생 103주년 나혜석 바로알기 국제 심포지엄’이었다. 그 외 대표적인 전시는 1999년 ‘이응노전’이 ‘경기도문화예술회관’ 전시실에서 있었다. 
특히 14대 지부장 시절에 특기할 만한 사건은 1998년 ‘수원미술전시관’의 개관이었다. 1990년대 가구와 가전제품을 재활용하기 위해 건축했던 수원시의 ‘재활용센터’가 IMF로 인해 효용성이 사라지자, 미술협회 건의에 의해 수원시가 미술전시관으로 용도 변경을 함으로써, 수원 미술인들의 숙원이 현실화되는 계기를 마련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상편)

주석 /
1) 이 글은 다음을 참고했다. 이석기, 「수원미술 40년사 정리의 필요성과 시대별 주요 소사」, 『수원미술 40년사 DB 구축을 위한 예술인 포럼』, 2006, pp. 5-13, 박영택, 「3. 경기도 근·현대 소집단 미술활동의 흐름 연구」 수원 편, 경기문화재단, 2018. 그 외 수원미협이 정리하여 제공한 자료. 

출전 / 김성호, 「수원미협 50년, 궤적과 현황」, 『수원미협 50년사』, 한국미술협회 수원지부,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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