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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창작스튜디오 - 자작성과展 / 사회 공동체와 미술 창작

김성호

사회 공동체와 미술 창작 - 문명, 인간, 문화


김성호(미술평론가, Kim, Sung-Ho)


프롤로그
창원문화재단의 〈창작스튜디오 - 자작(自作)〉의 상주 작가 1기(윤현미, 김민정, 이성륙)의 창작 활동의 성과 보고를 겸하고, 이들의 작업을 대외적으로 소개하는 한 첫 전시, 《자작성과전》(진해문화센터 야외공연장전시실, 2018. 12. 20. ~ 2019. 1. 20.)이 열린다. 
이 전시가 성과전임을 지향하고 있고, 참여 작가 3인이 각기 다른 작품 세계를 천착해 왔음을  상기할 때, 이 전시는 하나의 주제로 묶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3인 3색(色)전’이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전시 속에서 작가 3인의 작품 세계는 ‘미묘한 공유 지점’을 횡단한다. 필자는 그것을 ‘사회 공동체의 미술하기 - 문명, 인간, 문화’를 살펴본다. 즉 3인의 작가들의 작업 세계를 3개의 키워드로 대별시켜 문명(윤현미), 인간(김민정), 문화(이성륙)의 키워드로 살펴본다. 이 세 개의 키워드는 ‘사회 공동체’라는 커다란 공통망 속에서 움직이는 것들이다. 이 글은 아래와 같은 소제목 아래 세 작가의 작품을 따로 분석한다: 윤현미 - 문명 도시의 이면과 공존의 담론, 김민정 - 환경 속에 직립한 인간 실존, 이성륙 - 혼성 문화 속에서 변주하는 전승 원형.


윤현미 - 문명 도시의 이면과 공존의 담론 
작가 윤현미는 ‘도시’를 화두로 삼고 ‘문명’의 담론을 시각화한다. 즉 문명이 낳은 도시의 이미지를 ‘익숙함과 낯섦이 공존하는 삶의 공간’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시각화한다. “창원에서 대부분의 학창 시절을 보냈다. 계획도시라는 이름으로 주변의 다른 오래된 도시들과는 다른 계획적이고 획일화된 곳으로 회색의 도시 풍경에 대하여 환멸을 느끼면서도 그 거대한 공간 속에 소속된다는 안정감 또한 동시에 얻었다.” 그녀가 언급하고 있는 ‘도시 속 양면성’의 공존은 대개 도시의 말끔하게 세련된 외형적 이미지와 더불어 도시의 이면에서 드러나는 사건, 사고, 범죄 등 비루한 사회의 문제들이 뒤섞이면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문명 도시와 그 이면이 함유하는 양면성, 즉 긍정적 차원과 부정적 차원은 그녀의 작업 안에서 병치, 공존된다. 전자는 섬유 위에 깔끔하게 염색된 패턴 이미지를 담은 캔버스 작업을 통해서, 후자는 나무판 위에 녹슨 금속판과 같은 효과를 낸 나무 패널 작업을 통해서 발현된다. 즉 그녀의 작업에는 ‘직조와 실크스크린, 타피스트리와 같은 부드러운 섬유 작업’과 ‘철의 부식과 같은 거친 표현’이 공존함으로써 도시의 이면에서 제기되는 도시의 양면성을 선보인다. 
작가 윤현미가 〈직조 공장(Weaving Factory)〉으로 호명하는 자신의 작업에서 일명 ‘섬유 캔버스 작품들’은, 그녀가 일일이 컴퓨터 앞에서 만들어낸 패턴 이미지들을 천 위에 염색하는 방식으로 생산된다. 그것은 자연물에서 발견되는 프랙털(fractal) 이미지나 인공의 도시 풍경에서 확인되는 기하학적 패턴을 변형하거나, 작가 스스로 무에서 창출하는 추상 이미지의 다양한 변주를 통해서 태어난다. 또한 〈직조 공장〉의 또 한 축인 ‘철판이 녹슨 듯한 이미지의 나무 패널’ 역시 실제의 철분과 허구의 녹 이미지들이 혼성되는 다양한 실험을 거쳐 생산된 것이다. 도시라는 것이, 입방체 블록이나 프레임의 증식으로 개별 건물이 되고, 그것이 시가의 블록으로 확장하면서 형성되듯이, 그녀의 패턴화된 이미지를 담은 ‘섬유 캔버스 작품’과 ‘녹슨 이미지의 나무 패널’은 그녀가 그리는(그리고자 하는) 도시의 훌륭한 두 축의 모듈(module)로 자리 잡는다. 
작품을 보자. 작가 윤현미는 마치 고층 빌딩의 입방 구조처럼 증식되는 격자의 틀을 뼈대로 삼아, 이 두 유형의 ‘섬유 캔버스’와 ‘나무 패널’을 전시장의 벽면을 가득 채울 만큼 붙여 나간다. 작가가 직접 구성한 패턴화된 천을 덧씌운 사각의 캔버스나 녹이 슨 효과를 내는 나무 패널을 기초 조형 요소로 삼고 그것을 자기 증식하는 그녀의 조형 방법론을 우리는 ‘멀티플 아트(Multiple Art)’의 조형 언어인 ‘멀티플’로 풀이한다. 멀티플이 지닌 ‘많은, 다수의, 복수의, 다양한, 복합적인’이라는 사전적 의미는 실상 ‘복수(複數, plurality)와 혼성’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윤현미의 작업에서 언급되는 멀티플은 군집과 증식의 조형 방식을 실천하는 미니멀아트의 경우처럼, ‘복제(複製, reproduction)의 개념을 강화한다. 이것은 에디션(edition, 한정판)과 같은 복제의 과정을 거치면서, ‘동종, 동형의 지속적인 반복’과 같은 ‘복제에 의한 복수’를 실천한다. 즉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나 도널드 저드(Donald Judd)가 동종 동형의 입방체(혹은 직육면체)를 살짝 비틀고 개체의 증식을 도모함으로써, ‘모듈의 변주와 증식’을 도모했던 것을 떠올리면 되겠다. 더욱이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패턴을 구조화하고 재생산을 위한 ‘원천적 재료(source)’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이 모듈은 언제든 재생산될 수 있는 복제의 위상을 견지한다. 
이 땅 위에 덩치를 키워 나가는 도시의 세련된 구조적 면모는 인간 이성의 승리를 외치던 모더니즘의 시대의 전형적 이미지이다. 이러한 도시의 이면에 자리한 퇴락한 면모들은 인간이 그간 숭상해 왔던 구조적 체계의 불합리와 부조리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요청한다. 섬유를 바탕으로 한 패턴 이미지로 ‘도시와 도시 이면’을 탐구하는 윤현미의 작업은 그런 면에서 종합적이다. 
작가 윤현미의 작업에서 비판적 관건이 있다면, 두 가지이다. 
한 가지는 형식보다 내용에 대한 성찰이 필요해 보인다. 종합적이라는 우리의 진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작업은 아직까지는 섬유 예술의 기법적 변주나, 이미지의 해체와 재구성을 통한 도시 이미지의 재구성과 같은 형식적 차원에 보다 더 집중하고 있는 편이다. 현재 도시를 둘러싸고 펼쳐지는 익숙함과 낯섦, 긍정과 부정이라는 이원 대립적 담론을 주제 면에서 보다 더 심층적으로 접근해 나감으로써, 도시와 관련한 자신만의 새로운 미학을 발전적으로 창출하고 전개해 나가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또 하나의 비판적 관점은 그녀의 작품의 조형 언어의 규칙으로 삼은 멀티플 유형에 관한 것이다. 분리된 캔버스나 이형 캔버스(shaped canvas)를 무한 증식하는 방법론인 이것은 작업의 내밀한 미학 정신을 탐색하기 이전에 “작업상의 수월함, 재료비의 절감, 운송의 편리함, 구체적인 조형 계획 없이 수행될 수 있는 즉자성의 반영, 이미지의 통일성과 다양화를 동시에 시도할 수 있는 편리한 이점들”에 의탁하게 만든다. 즉 그녀의 작업 형식은 현대 미술 현장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조형 방법론에 자신의 작업을 그저 편의적 용도로 의지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또 다른 실험적 모색 없이 전시장에 쌍둥이 같은 격자의 멀티플을 통해 시리즈물을 양산하는 작업을 매번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것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진중한 창작의 고민으로부터 탈주하게 하고, 정형화된 포맷에 몸을 실고 ‘어떻게 보일 것인’에만 집중하게 되는 전시의 전략에만 고민하게 만들기 십상이다. 
그녀의 작업이 실험을 거쳐 이러한 조형 언어에 도달하고, 도시의 이미지를 드러내기에 가장 좋은 조형의 방식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할지라도, 비평가의 입장에서 이것은 작가 윤현미가 선보일 수 있는 ‘윤현미의 독창적인 작업’에 천착하는 길을 가로막는 방해물로 보인다. 도시가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집합적, 집적’의 이미지를 넘어 다른 방향에서 도시를 성찰하면서 현재의 조형 언어를 ‘자신의 것’으로 다듬어 나갈 필요가 있어 보인다. 








김민정 - 환경 속에 직립한 인간 실존 
작가 김민정은 인간을 화두로 삼고 다양한 환경 속에서도 지켜 나갈 근원적 인간 실존의 문제를 탐구한다. 김민정은 자신의 작업을 발화시킨 인간 실존과 관련한 문제의식을 다음처럼 기술한다: “인간으로서의 개인은 사회에 속해 살면서 자신이 처한 환경에 동조하여 사회적 가치나 규범 등을 여지없이 받아들이며, 그 사회 속에 존속되어 살아가기도 한다. 그리고 이와는 달리 자신이 속해 살아가는 사회라는 환경의 조건을 자신에게 맞게 변화시키거나 동화시킴으로써 환경을 개조하기도 한다. 이렇듯 사회라는 인간 삶의 환경은 결국 인간의 욕구로 인해 형성되고 변화되며, 그러한 사회라는 환경에서 개인은 수없이 많은 영향을 받으며 삶을 살아간다고 볼 수 있다.” 즉 그녀가 관심을 가지는 인간은 개별적 인간이기보다 인간과 인간이 이룬 ‘공동체적 인간’, 혹은 ‘사회적 인간’이다. 그녀는 사회적 인간이라는 키워드와 집단적 인간들을 형상화한 이미지를 대표적 조형 언어로 삼아 ‘환경 속에 직립한 인간 실존’을 조형화하는 것이다. 
작가 김민정은 ‘사회적 인간’과 ‘환경 속 인간 실존’을 형상화시키는 방식으로, 일련의 ‘볼펜화’를 자신의 작품의 매체적 속성으로 삼는다. 주지하듯이, 연필, 볼펜, 목탄과 같은 매체는 전통적인 미술의 장에서 대개 ‘회화의 기초 소양’을 쌓기 위한 드로잉 혹은 습작의 매체로 간주되어 왔다. 20세기 미술에 이르러 드로잉 자체가 미술 작품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이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연필, 볼펜과 같은 매체는 여전히 회화의 ‘주요 매체 목록’에서 변방에 위치한다. 작가는 스케치, 에스키스(esquisse), 습작의 영역을 담당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온 연필이나 볼펜을 자신의 회화 창작을 위한 주요 매체로 삼고 종이나 천 위에 본격적인 작품 세계를 펼친다. ‘볼펜’이라는 가장 기초적인 매체가, ‘볼펜화’라는 가장 기초적인 드로잉이라는 노동이 회화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실험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차원에서, 그녀의 작품 제목 〈root.route〉(2017~ )는 볼펜과 같은 소묘의 기초적 매체로도 작품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즉 그녀의 볼펜화는 매체에 대한 ‘뿌리, 기원, 근본’에 대한 탐구이자, 그것을 통해서 새로운 미술의 ‘경로’를 찾아 나가는 것임을 반증한다. 물론 이 제목은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 실존’에 대한 탐구를 통해서, 사회 공동체 혹은 사회적 인간이 찾아 나서는 ‘길’을 제시하고자 하는 주제 의식과 맞물리는 것이기도 하다. 
창작하고 있는 그녀를 보자. 그녀는 마치 낙서를 하듯이 종이나 캔버스 천 위에 긁는 방식으로 볼펜 잉크를 올려나간다. 이러한 방식은 분명 힘들고도 어려운 노동의 과정을 처음부터 예견하게 만든다. 볼펜이 만드는 작은 굵기의 선묘를 통해서 화면 위에 효과적인 농담이나 진하기 등의 다양한 변화를 주면서 페인팅의 흔적을 남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김민정은 볼펜화를 본격적으로 자신의 작업의 세계로 견인하기 이전에는 대개 작은 화폭 위에 한 두 사람의 모습을 표현주의적 드로잉으로 남기는 습작의 차원에서 자신의 창작을 실험했다. 볼펜의 긋기 방식을 통한 선묘의 특성을 연구하고, 볼펜의 잉크 덩어리가 선묘 위에 엉키면서 만들어내는 우연의 효과를 검토하고, 얇은 종이 위에 볼펜을 접지시켜 원하는 만큼의 드로잉을 채워나갈 수 있는 행위의 강도와 그것의 효과를 탐구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작가 김민정은 볼펜이라는 매체를 자신의 손에 익게 만들었고, 자신의 회화를 천착할 수 있는 조형적 실험의 단계를 지금까지도 거쳐 나가는 중이다. 
김민정의 작품이 표방하는 ‘사회적 인간’, 즉 ‘사회 속에서 호흡하고 살아가는 인간’, 또는 이 글의 제목처럼 ‘환경 속에 직립한 인간 실존’이란 그의 작품 속에서 과연 어떻게 나타나는가? 그녀의 작품에서 ‘사회적 인간’은 ‘집단화된 인간’ 즉 인간들이 모여 있는 군중의 모습, 즉 ‘인간들’로 나타난다. 그런데 그 모습은 실재로서의 인간과는 매우 이질적이다. 두 다리와 두 팔을 벌리고 있는 픽토그램과 같은 기호의 형태로 보일 따름이다. 게다가 이러한 기호들이 군집의 방식으로 뭉쳐 있을 때 그녀의 ‘인간들’은 마치 한 그루의 거대한 나무처럼 보이게 된다.  또 다른 작품에서 이미 그린 사람들을 잉크를 닦아냄으로써 지워낸 흔적 위에 또 볼펜으로 그려진 인물상들은 지워진 소멸의 존재와 채워진 생성의 존재를 맞바꾸는 세대교체를 지속적으로 이루면서 우리에게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사회적 인간’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되묻는다.
특히 올해 제작한 그녀의 거대한 크기의 작품에서, 인간들이 이룬 거대한 ‘숲의 풍경’, 혹은 다른 말로 ‘인간 숲’은 기다란 팔을 마치 휘어진 가지처럼 늘어뜨리면서 서로와 서로를 연결하려는 소통의 욕망으로 꿈틀대고 있다. 이렇듯 그녀의 ‘사회적 인간’, 또는 ‘환경 속에 직립한 인간 실존’은 드로잉의 분방한 인간 군상과 함께 생성과 소멸의 사이클을 자연의 그것처럼 이어 나간다. 
작가 김민정의 작업에서 비판적 관건이 있다면, 정작 그녀가 탐구하는 인간의 형상 자체가 지극히 픽토그램(pictogram)처럼 단순한 이미지의 반복적 재생산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녀가 표현하고 있는 인간은 마치 기호처럼 인식될 따름이다. 예를 들어 동그란 머리와 팔 다리를 가지고 있는 인체 형상을 수없이 반복함으로써 인간 형상에 대한 다양한 조형적 실험과 탐구로부터 너무 일찍 떠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형상은 마치 긍정의 표식인 영(〇)이나 부정의 표식인 엑스(×) 그리고 방향을 가리키는 화살표(→↑)와 같은 지표(index)의 시각 기호(visual sign)와 다를 바 없이 인식되는 형상이다. 화장실의 픽토그램과 같은 기호로 인식되는 인간 형상 속에서 인간 존재론을 탐구하는 영역이란 매우 비좁을 수밖에 없다. ‘사회적 인간’이라는 인간 존재를 환경과의 사이에서 고민하는 무거운 주제를 제대로 소화하기 위해서는 인간에 대한 조형적 성찰을 좀 더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성륙 - 혼성의 문화 속에서 변주하는 전승 원형
작가 이성륙은 ‘문화’를 화두로 삼고 그것을 낳게 한 민담(民譚), 우화(寓話), 신화(神話), 전설(傳說)’과 같은 ‘전승 내러티브’를 시각화한다. 다만 구체적인 이야기 전승들을 단편적으로 원용하는 까닭에 그의 회화 안에는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명확히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은 작가가 원하는 바이다. 이야기 전승이란 대개 ‘구전(口傳)-기재(記載)-정착’의 과정을 거치면서 한 지역의 ‘전통적 이야기’로 남게 되지만, 작가 이성륙은 그것을 고스란히 자신의 회화 안에 담는데 관심을 기울이기보다 그 전승의 ‘원형(原型, archetype)’과 같은 것에 관심을 기울일 따름이다. 그 스스로 원형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윤색과 개작을 통해 원형을 비트는 방식, 즉 일관된 내러티브가 없는 방식으로, ‘전통에 대한 현대적인 재해석’을 병행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다 그렇지 않다. 이성륙의 2017년 개인전의 주제는 ‘정병산 드루이드’였다. 창원의 작은 선산이라 알려진 이 산에 얽힌 전설을 탐구한 작품에는 작가가 조사, 연구한 정병산에 관한 전승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회화화(繪畫化)시킨 것이었다. 일명, 점성술, 마술을 행하는 소환술사로 한국의 샤먼(shaman)과 같은 존재인 드루이드(Druid)를 화제(畵題)로 삼고 탐구한 작업으로, 창원에서의 주술적 전승 내러티브와 황소와 호랑이, 호랑이의 탈을 쓴 여우 등으로 보이는 여러 이미지들이 마치 삽화처럼 소개되고 있는 전시였다. 일련의 ‘무제’라는 제목의 작품들에서도 이러한 특정 지역의 전승 이야기를 조명하는 작업들이 선보였다. 종이 위에 드로잉과 같은 작품, ‘아이패드 스케치 앱 드로잉’, 민화와 옛 그림을 재해석하는 다양한 조형 실험들은 거친 그의 작업은 최근 전통적인 캔버스 회화를 선보이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그런데, 유념할 것은 작가 이성륙의 최근 회화에서는 비교적 일관된 맥락을 지녔던 이전의 전승 이야기로부터 탈각한 채 내러티브가 혼성적으로 뒤틀리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최근작에서는 전승의 원형뿐 아니라 그 전형(典型, prototype)마저 뒤틀린다. 즉 “같은 종류의 사물 가운데서, 그것의 본질적이고 일반적인 특성을 가장 많이 지닌, 본보기로 삼을 만한 사물. 또한 제작물의 근본이 되는 본보기, 모범” 등으로 해석되는 ‘내러티브의 전형’이란 우리로 하여금 권선징악(勸善懲惡)과 같은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덕목을 관통하는 이야기들이다. 작가는 이 전형을 비틀고 해체한다. 작가 이성륙의 회화에서 이야기 전승의 주인공처럼 등장하는 호랑이, 말, 토끼, 황소, 곰과 같은 동물뿐만 아니라, 꽃, 소나무, 나무, 숲, 계곡, 폭포와 같은 이야기 전승이 살고 있는 맥락은 이전의 〈정병산 드루이드〉에서보다 더 혼성화의 전략을 시도함으로써 복잡다기해졌다. 즉 이야기 전승의 ‘내러티브의 양식이나 인물 유형 혹은 이미지’ 등이 재맥락화되고 혼성됨으로써 막연하게 이것이 이야기 전승의 무엇으로 유추될 따름이다. 
사실, 작가 이성륙이 이러한 이야기 전승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그것의 내러티브에 대한 관심이기보다 그러한 이야기와 함께 등장하는 ‘어설프지만 아름다운’ 민예풍의 이미지들에 대한 관심이 보다 더 크다고 할 것이다. 그는 말한다. “나는 그림에 자유로움과 생생함에 끌린다. 민화, 틀에 박히지 않은 아이들과 어르신의 그림, 그리고 몇몇의 화가들의 그림에서도 그것을 보았다. 흉내를 내서는 그것을 가질 수 없다. 그것은 소유할 수 없다. 나는 나의 그림을 그려야 하고 결국에 그림은 나의 소유에서도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림 하나하나가 독립적인 생생함을 가지려면 내가 미리 알고 있는 이미지와 양식에서도 자유로워야 한다.”
민화와 같은 옛 그림, 아동화와 같은 학습되지 않은 조형의 자유로움과 생생함에서 감동을 받은 작가는 이러한 자유롭고 편안한 회화의 태도를 자신의 작업 안에서 발현되길 원한다. “나는 새 그림을 그리고 생생함을 확인하고 옛 그림들을 기억하고 그것들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고 이 과정을 불규칙하게 반복한다.” 그의 말에서처럼, 그는 옛 그림의 이야기에 대한 관심보다 그것이 표현되는 이미지의 생생함에 보다 더 매료된다. 관습과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방법으로 그림을 그려야한다”는 ‘강박 아닌 강박’은 그래서 그의 회화의 창작 과정 속에 지속적으로 개입한다. 
따라서 그가 탐구하는 이미지들, 회화의 조형 언어는 하나의 ‘혼성의 유형론(類型論, typology)’에 집중된다. 유형론이란 어떠한 대상 내의 자료들을 ‘유형(類型, type)’에 따라 범주화하고 분류(classification)하는 귀납적 방법에 의하여 그 대상의 본질을 이해하려는 입장이다. 그의 이야기 전승의 내러티브가 원형과 전형을 비틀었듯이, 그것을 담는 이미지 역시 원형과 전형을 비틀고 관련한 이미지들을 지속적으로 재배치하는 혼성의 것이 된다. 거기에는 이야기의 과거-현재-미래가 뒤섞이고, 이야기의 등장인물이, 그들의 이야기가 혼성된다. 이미지의 특성으로 보더라도 거기에는 구체적인 동식물의 형상이 있는 풍경화이면서 하나의 시점을 허락하지 않는 까닭에 원경-중경-근경이 뒤섞인 뒤틀린 풍경화가 된다. 이내 그것은 하나의 혼성의 카오스를 형성하는 표현주의적 추상화가 되기에 이른다. 즉 형상을 가지되 전체적으로 일관된 것이 아닌 혼성의 것들로 뭉쳐진 채 커다란 표현주의 추상의 언어 안에 포섭되는 것이다. 
그의 최근에 그려진, 일련의 ‘무제’라는 제목의 흑백의 대작과 화려한 오방색이 뒤섞인 대작을 보라. 그것은 피상적으로 보면 거대한 동양의 산수화 같은 이미지를 드러내고 있지만 실제로 그것은 유화로 그려진 혼성의 풍경화, 아니 표현주의 추상화라 하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거기에는 하늘을 붉게 물들인 노을, 지상으로 내려앉은 구름, 암벽 위에서 자라는 소나무, 푸른 잎으로 가득한 숲과 계곡, 그 사이에서 쏟아져 내리는 폭포, 하늘 위 비조(飛鳥), 날개 달린 비마(飛馬)와 구름 위를 걷고 있는 말 한 필, 웅크린 노란 토끼,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사람이 위치하고 있지만, 그것들 모두는 일관된 내러티브 없이(또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간직한 채) 공중에 유영한다. 
작가 이성륙의 작업에서 비판적 관건이 있다면, 그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그의 오랜 조형적 실험적 결과가 야기한 혼성의 조형 언어를 점검하는 일이다. 혼성적 회화는 중복적 의미를 지녀서 작품을 보는 재미를 배가시킴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명징한 창작 메시지를 방해한다. 그것은 포스트 모더니즘의 다양한 혼성 모방, 패러디(parody)의 이론이 이끄는 긍정적인 담론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차별화된 이성륙의 작업을 이해하는데 방해물이 되기 쉽다. 
 또 하나는 자신의 창작 세계를 언어적 개념으로 정리하는 일이 필요해 보인다. 그는 말한다: “내가 그리는 그림 혹은 회화의 정의와 규정은 뚜렷하게 고정된 것이 아닌 어렴풋한 안개와 같다. 이 안개 속 가장 안쪽에 자리를 잡은, 본질적이라 느껴지는 무엇은 나의 회화 개념의 중심이며, 이것을 말로 표현하는 것은 어렵다. 나는 이것을 개인적인 인식, 신체, 환경의 한계를 통해 그것의 일부를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그의 진술을 십분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그의 작업에 대한 ‘언어적 진술에 대한 어려움 혹은 불필요함’이 필히 개선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수용자의 자유로운 관람과 해석을 용인한다고 하더라도, ‘시각적 메시지(visual message)’ 혹은  ‘비언어적 메시지(non-verbal message)’ 창출의 주체가 바로 ‘작가'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공동의 창작 공간에서 작업하고 미술 현장이라는 제도권에서 자신의 작업을 선보인다는 점에서 이 지점은 검토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에필로그 
창원문화재단의 〈창작스튜디오 - 자작(自作)〉의 스튜디오 이름이 멋지다. ‘자작’이란 특별한 구속과 통제 없이 ‘상주 작가 개인이 스스로 자신의 작업의 주체가 되어 책임을 지되 자유롭게 작업을 하는 공간’이라는 의미를 함유한다. 그리고 필자의 이 글은 1기 상주 작가들의 자유로운 ‘자작’에 비평적 시선을 얹어 그들의 작업들을 타자의 눈으로 점검해 보는 역할을 맡는다. 전시와 맞물려 카탈로그에 수록되는 이 글은 어떤 면에서는 전시의 서문이 되어야 하지만, 일정 부분 ‘서문의 충실한 의무’를 조금 벗어나기로 했다. 서문의 충실한 의무? 그것은, 흔히 서문이 주례사(主禮辭)로 언급되고 있듯이, 전시를 통해서 선보이고 있는 ‘작가의 작업의 방향성과 현재적 의미’를 관객에게 언어로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글의 성격을 유지해야 하는 일이다. 여기에 비평가의 개인적 관점에서의 비판적 발언은 되도록 삼가는 것이 좋다. 독자나 관객이 또한 해당 작가가, 작품에 대한 비평가의 해설과 해석에 집중하기보다는 비판적 논조에 더 집중하는 일이 종종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 비평가의 주관적인 편견일 수도 있는 비판적 논조를 윤현미, 김민정, 이성륙 각 작가의 작품을 해설하는 작가론 말미에 덧붙이기로 했다. 그러한 까닭은 신진 작가에 해당하는 이들의 작업이 ‘창작 스튜디오’라는 ‘제도권’ 혹은 ‘사회 공동체’ 안에서 실험, 창작되고 그 창작의 성과에 대한 자천, 타천의 보고의 형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향후 창작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창원문화재단의 미래적 사업을 계획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며, 해당 작가들의 미래적 비전을 위해서도 요긴한 일이다. 
관건은 신진이라고 하지만 3인의 작가는 이미 전문 예술 현장에서 활동하는 전문가라는 점이다. 제도권의 창작 스튜디오가 이들을 인큐베이터와 같은 역할로 양육하고 통제하기보다 이들의 창작 활동을 진작시켜 한국 미술 현장에 대한 발전과 성장을 고취하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그래서 이 글이 맡은 역할로서 ‘비평적 인도’나 ‘비평적 견인’이라는 이름은 적절하지 못하다. 다만 그들의 창작 활동에 대한 무궁한 발전적 전개를 작가들 스스로 개척해 나갈 수 있도록 최소한으로 개입하는 ‘비평적 견제’로 이해해 주길 기대한다. 마지막으로 해당 작가들의 건승을 기대하며, 이러한 창작과 비평 매칭 프로그램이 앞으로도 활성화되어 2, 3기로 이어지는 창원문화재단의 ‘창작 스튜디오’의 유의미한 역할이 전국으로 확산하는데 일조하길 기대한다. ●

출전/ 
김성호, 「사회 공동체와 미술 창작」, 『창작스튜디오- 자작성과展』, 전시 카탈로그 서문, 창원문화재단 상주작가 지원사업, 2019, 
(자작성과 전, 진해야외공연장 전시실, 2018. 12. 20 ~ 2019. 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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