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작가론│손유진 / 전통의 샘물과 추의 강물에서 모색하는 주체적 자아

김성호

전통의 샘물과 추의 강물에서 모색하는 주체적 자아  
 


김성호(미술평론가, Kim, Sung-Ho) 


신진 작가 손유진에게 떠오르는 화두는 ‘전통과 현대’, ‘주체와 타자’, ‘인간과 사물’의 관계를 회화의 언어로 탐구하는 것이었다. 가히 ‘관계 미학’에 대한 관심의 발현이라 할 만하다. 특히 ‘전통과 현대’의 관계를 탐구하는 ‘통시성(通時性)’에 대한 관심은 그녀로 하여금 전통을 재해석하고 그것을 오늘날의 관점에서 현대화하는 작업에 골몰하게 만드는 계기를 마련했다. 한편 주체와 타자, 인간과 사물에 연관된 관계 탐구 역시 병행되었는데, 최근의 작업은 이러한 사회적 인간 공동체를 둘러싸고 있는 공시적(共時的) 맥락 속에서 주체적 자아가 무엇인지를 탐구해 온 것이라 하겠다.



I. 샘물 위에 띄우는 버들잎  
작가 손유진은 제주도라는 특유의 공간이 잉태했던 구전의 설화(說話), 신화(神話)를 오늘날 재해석하는 작업에 골몰해 왔다. 섬이라는 특수 공간이 야기한 제주만의 독특한 민담(民譚), 우화(寓話), 전설(傳說), 설화, 신화’ 등의 이야기 전승들은 제주를 터전으로 삼고 활동하는 작가에게는 늘 풀어야 할 숙제와 같은 것이었으리라. 그것은 한편으로 작가 스스로 자신만의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풀어 나가기 위한 초심과 같은 것이기도 했다. 세계화가 화두이던 시대에 한국 현대미술의 전통적 테제를 ‘한국성의 현대적 계승’으로 전제하고 그것에 몰입하던 시대를 생각해 보라. 통시적이고 공시적인 차원의 ‘지금, 여기’에 자리한 작가의 삶의 맥락은 ‘자신만의 작업’을 생산케 하는 터전이다. 
특히 한국화를 전공한 작가로서 전통과 그것의 현대적 계승이라는 상투적인 테마는 그녀로서는 스스로에게 화가로서의 정체성을 자문자답하게 만드는 ‘여전히 주요한 화두’였다. 손유진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제주도의 삶의 맥락을 이야기 전승을 통해서 풀어 나가고자 한다. 전통이란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 관습, 행동 따위의 양식”이라는 사전적 의미와 같이, ‘현재에 건네어 주는 이전의 근원적 양태’이다. 따라서 이러한 전통을 현대에 작위적으로 계승하고 이어 나가는 방식은 경계해야만 할 일이다. ‘전통을 오염시키지 않는 현대적 계승’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시대에 맞지 않는 고루한 전통의 무한 답습’ 역시 경계해야 할 일이다. 
그것은 마치 ‘샘물을 담은 바가지 위에 띄운 버들잎’을 입김으로 밀치며 천천히 샘물을 마시곤 했던 조상들의 삶의 지혜를 배우는 일과도 같다. 전통을 현대에 건네어 주되, 전통을 아무런 비판적 성찰 없이 답습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전통을 함부로 훼손하지도 않는 어려운 문제를 천천히 풀어 나가야 할 지혜가 필요하다.  


토템-불사불멸, 장지에 채색, 140x45cmx2ea, 2017



II. 전승의 설화를 현대에 되살리는 전통의 재해석 
작가 손유진의 작품에서 구전되는 이야기들은 어떻게 형상화되고 있는가? 장지에 채색된 그녀의 작품 〈토템-불사불멸〉(2017)은 한 폭의 불교의 탱화(幀畫) 혹은 힌두교의 주요 세 신인 브라흐마, 비슈누, 시바가 세 개의 형상(Three Forms)으로 통합된 트리무르티(Trimurti)의 양상을 선보인다. 흥미롭게도 그 힌두신은 작가 자신의 익살스러운 모습으로 형상화되어 있고, 시바신의 형상을 한 작가 자신은 무수한 팔과 손으로 총, 핸드폰, 금과 귀금속 등 현대적 사물들을 움켜쥐고 있다. 인간의 ‘근원적 욕망’을 ‘사물 소유욕’으로 치환하고 민간의 토템 전승을 동양 전통의 종교화에 나타난 이콘의 형식에 빗대어 성찰함으로써 전통의 현대적 계승이라는 화두를 익살스럽게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한편 손유진의 작품 〈그슨새〉(2017)는 전승되는 이야기로부터 자신의 ‘전통의 현대화’라는 화제를 실천한다. 장지와 비단에 채색한 이 작품은 ‘제주도에서 구전되는 요괴(妖怪)’인 ‘그슨새’를 형상화한다. 사람들을 자살하게 만드는 신묘를 부리는 이 ‘그슨새’라는 전설의 요괴는 공포의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인간의 삶 속에 간섭하는 또 다른 인간의 존재로 간주한다. 그녀의 작품 속에서, 이 요괴는 마치 순수하지만 변덕스럽고 그래서 나약하고도 외로운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기다란 화폭 위에 ‘볏짚으로 만든 옷’을 입고 걷고 있는 아이의 뒷모습으로 ‘그슨새’를 형상화한 것이 그것이다. 외로운 아이의 뒷모습 위로 까마귀 떼가 날고 있는 모습은 공포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으스스한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까마귀들을 이 외로운 아이의 수호신들처럼 보이게 만들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그녀가 표현하는 요괴 ‘그슨새’는 모든 인간 안에 살고 있는 외로운 인간의 심리 자체를 언급하는 다른 용어인지도 모를 일이다. 
손유진의 또 다른 작품 〈그슨대〉((2017) 역시 구전의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그슨대’는 제주도뿐 아니라 육지에서도 민간 설화로 전래되고 있는 요괴이다. ‘그슨새’가 낮에 활동하는 요괴인 반면, ‘그슨대’는 밤에 활동하는 음흉한 그림자 귀신으로 간주된다. 평소에 아이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 자신의 그림자 형상을 거대하게 키우면서 사람을 공포에 떨게 한 후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 악귀에 가까운 요괴로 전해진다. 손유진은 이러한 구전으로부터 ‘외로운 어른 아이’를 떠올리고 기다란 화폭 위로 점점 자라나는 아이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이처럼 손유진의 전통에 대한 재해석은 구전의 설화를 ‘지금, 여기’에 체화(體化)하는 것이다. 즉 기이한 ‘요괴’와 무서운 ‘귀신’으로부터 외로운 인간 존재를 투사함으로써 구전의 민간 설화를 그녀의 화폭 위에서 심장이 뛰고 피가 흐르는 무엇으로 재창출해 내고 있는 것이다. 




(좌)그슨새, 장지와 비단에 채색, 72.7x30cm, 2017
(우)그슨대, 장지와 비단에 채색, 72.7x30cm, 2017


 
III. 추의 강물 위에 투영하는 자화상  
손유진이 2017년까지 민간 설화라는 전통의 재해석을 통해 ‘통시적 의미’에서의 인간관계와 인간 본질에 대한 조형적 탐구를 시도해 왔다면, 2018년부터는 ‘공시적 의미’에서의 그것을 탐구해 왔다고 할 수 있겠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최근 전통의 해석과 계승의 문제보다 자신의 자화상을 통한 인간관계와 인간 본질 탐구에 보다 더 골몰하고 있는 중이다. 전자가 종교적 아이콘이나 공포의 민간 설화로부터 인간관계와 인간 욕망을 탐구해 왔다면, 후자는 자신의 자화상과 뒤섞이는 타자와의 만남의 관계학을 통해 인간의 본질과 욕망을 탐구하는 것이라 하겠다. 
어떤 면에서 전자는, 필자가 비유한 ‘샘물 위에 띄우는 버들잎’이란 소제목처럼, 느린 시간을 통한 탐구가 필요한 작업이라 하겠다. 생계와 작업을 병행하는 작가가 전통이 무엇인가를 묻는 작업을 성취하기 위해 지속적인 리서칭과 꾸준한 연구를 하기에는 여건이 어려웠을 수도 있겠다. 그런 면에서 2018년부터 시작한 자화상에 기초한 ‘추(醜)의 미학 탐구’는 비교적 자유로운 표현 의지와 조형 탐구를 가능하게 만드는 지점이다. 이 새로운 작업에서는, 리서칭과 연구에 필요한 시간 투여가 이전보다 많이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녀의 최근작을 한마디로 다음처럼 작명한다. ‘추의 강물 위에 투영하는 자화상’. 여기서 ‘추의 강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버들잎을 띄운 한 바가지의 샘물’처럼 천천히 물을 마셔야 하는 시간의 깊이와 삶의 지혜보다 ‘욕망이 흐르는 강물의 표면 위에 투영된 자신의 자화상’을 들여다보는 즉발적 이미지 인식과 지각적 성찰 자체가 무엇보다 주요하다. 그것은 숙고의 성찰이기보다 즉발적이고 체험적 인식을 요청한다. 또한 인간의 본질 탐구와 같은 쉬이 풀리지 않는 문제의식 자체를 조형화하는데 있어 제격이다. 
보라! 작품 〈The first P〉(2017)는 2018년의 작품들을 여는 단초이다. 장지와 비단에 분채로 표현된 이 작품은 ‘화관을 쓴 여인상’을 선보이고 있는데, 그 배면에는 이를 드러내며 냉소적인 웃음을 짓고 있는 남성의 얼굴이 중첩된 채 그려져 있다. 한국의 근대적인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 여성 작가로서 살고 있는 손유진의 작가적 정체성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이 작품은 사회적 공동체 속에서 자신이 작업을 지속해야 할 당위성을 찾고 있는 상징처럼 보인다. 그녀는 말한다. “작업을 하는 과정은 작가 스스로를 해체하는 과정이다. 분리하고 해체하고 깊이 도려내고 깎아 내고 다시 조립하여 연결하는 과정에서 나의 뿌리를 찾아낸다. 나는 이 과정을 마치 유체이탈과 같다고 표현하고 싶다. 육체는 내 스스로 인식하는 ‘나’이며, 영혼은 내가 바라보지 못하는 깊숙한 곳에 위치한 ‘그 무엇’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언술처럼, 이 작품 안에는, 창작을 지속하기 쉽지 않은 ‘척박한 현실’에 위치한 자신의 근원적 자아의 뿌리 찾기를 통해 ‘주체적 자아’를 재구축하려는 결단마저 엿보인다. 
또 다른 작품을 보자. 작품 〈手연화〉(2018)는 장지에 먹으로 그려진 흑백의 작품이다. 연못 위에 자리한 연꽃은 여러 인간의 손(手)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주지하듯이, 연꽃은 ‘처렴상정(處染常淨)’이라는 말처럼, 오염된 물에서 살면서도 아름다운 자태와 깨끗함으로 자신을 가꾼다. 또한 그것은 ‘화과동시(花果同時)’의 꽃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꽃이 진 후 열매를 맺는 여타의 식물과 달리, 연꽃은 꽃과 열매를 동시에 잉태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민간 설화에 대한 리서칭을 거듭하여 도달한 연구 결과를 조형화하던 이전의 작업이 ‘꽃이 진 후 열매를 맺는 작업’이었다고 한다면, ‘지금, 여기’서 회화적 결과물을 맞닥뜨리는 최근의 작업은 ‘화과동시’의 작업이라 비유할 만하다. 
보라! 그녀의 작품에서 꽃잎처럼 벌어진 여러 손들이 꽃받침(花托) 속 씨앗을 보호하려는 듯 화심(花心)을 감싸 안고 있는 모습을 말이다. 중앙을 위해 모아진 손들, 손 안의 주름들, 이 모두는 ‘인간의 삶’이라는 존재적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즉 그녀의 이 작품은 대승(大乘) 경전의 하나인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즉 ‘연꽃의 묘법’이라 지칭되는 법화경(法華經) 속 부처의 가르침을 실천하려는 의지와도 맞닿아 있다. 
결론적으로 연꽃이 함유하고 있는 ‘화과동시’는 물론이고 더러움으로부터 자신을 청초하게 피어 올리는 ‘처렴상정’과 같은 존재론적 미학을 성찰하는 손유진의 최근 작품은 ‘추의 강물 위에 투영하는 자화상’과 다를 바 없다고 할 것이다. 


(좌)The first P, 34.8cmX27.3cm, 장지와 비단에 채색, 2017
(우)手연화, 장지에 먹, 51cmx36cm, 2018




IV. 에필로그 
손유진은 2018년 7월에 가진 자신의 개인전의 주제를 ‘추:기록’으로 명명했다. 담담한 시선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현 자화상〉(2018)은 자신에 내재한 선과 악의 양면적 자아를 탐구하는 출발점이다. 자신을 교황의 모습으로 분장한 〈교황의 자화상〉(2018)은 인간의 지배적 욕망이 야기한 ‘파시즘적 전체주의’와 ‘가톨릭의 숭고주의’를 한 덩어리 안에서 탐구한다. 익명의 노인을 종교적 지도자로 치환한 작품 〈교주의 초상〉(2018)는 어떠한가? 이 작품은 ‘종교적 절대주의’와 ‘사이비 믿음을 독려하는 교주’라는 엇갈린 메시지를 한 덩어리로 성찰한다. 인간의 믿음으로부터 출발한 보편적 가치인 ‘절대선’과 믿음을 훼손하고 오염시키는 ‘절대악’이 실제로는 결코 다르지 않은 인간 욕망으로부터 귀결된 것임을 토로하는 것이다. 
작가 손유진은 극도의 환경 속에서도 생존하는 능력을 가진 ‘곰벌레’, 혹은 ‘완보동물’로 지칭되는 미생물 ‘타디그레이드(Tardigrade)’를 자신의 작업을 위한 새로운 화두로 가져온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이다. 신비의 불로초를 찾아 헤매던 진시황의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욕망’처럼 곰벌레를 불사(不死)의 존재로 추앙하면서 생존을 도모하는 오늘날 현대인의 욕망은 끝이 없다. 손유진은 이러한 인간의 욕망을 추적하면서 인간의 존재론적 근원을 찾고자 한다. 우리로서는 ‘전통의 샘물’과 ‘추의 강물’로부터 자신의 주체적 자아를 모색하던 손유진의 ‘인간 존재에 대한 회화적 탐구’가, 이러한 새로운 화두 안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전개되어 나갈지를 관심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지켜볼 일이다.  ●


출전 /
김성호, 「전통의 샘물과 추의 강물에서 모색하는 주체적 자아」, 『제주문화재단 멘토링』, 손유진 작가 비평 매칭 비평문, 자료집, 2018.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