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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2018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 부대 전시 '자연미술 큐브'展 / 큐브, 자연을 보는 새로운 눈 부

김성호


큐브, 자연을 보는 새로운 눈 

김성호(미술평론가, Kim, Sung-Ho)




특별전인 《자연미술 큐브》는 올해의 비엔날레 주제인 ‘셸터 - 숲 속의 은신처’를 주제전과 다른 방식으로 실천한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거꾸로’의 방식이다. 그도 그럴 것이 주제전이 ‘숲 속이라는 자연에서 인공의 셸터를 구축’하는 것이었다면, 큐브전은 ‘큐브라는 구조의 인공적 셸터 안에 자연을 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큐브전이 비엔날레 주제를 실천할 수 있는 까닭은, ‘자연은 언제나 인간의 셸터’이며, 자연을 향유하는 ‘인간은 자연의 일부’임을 여전히 확인하기 때문이다. 마치 그것은 우리가 나무로부터 펄프와 종이를 취하고, 광물로부터 안료와 물감을 취하며 예술을 펼쳐왔던 것처럼, 인공은 언제나 자연으로부터 온 것임을 상기시킨다. 그렇다. 인간에게 자연이란 ‘언제나 아낌없이 주는 존재’임을 우리로 하여금 곱씹어 보게 만드는 것이다.
《자연미술 큐브》전에서 32개국 121명의 작가들은 ‘인공이라는 개념의 궁극적인 표상인 큐브’라는 환원적 구조 안에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는 자연’을 담는다. 즉, ‘12×12×12+자연'은 이러한 기획의 의미를 담는 명징한 표현이다. 각 변의 길이가 12cm인 작은 큐브 안에 어떤 이는 자연적 재료를, 어떤 작가는 자연의 이미지를, 또 어떤 작가는 자연에 대한 소리를 담는 등, 표현의 방식은 저마다 다르지만, 참여 작가 모두 작은 큐브의 공간 안에 자연을 담고자 한다. 자연의 물질, 자연의 방식, 자연의 본질뿐 아니라 ‘자연에 대한 인간의 성찰과 사유 그리고 자연에 관한 참여 작가들의 개별적인 예술적 메시지’까지도 말이다.
작품들을 보자. 어떤 작가는 인공의 물질로 꽉 찬 큐브를 만들기도 하고, 어떤 작가는 인공의 표면 위에 자연의 이미지를 만들기도 하며, 어떤 작가는 큐브 안에 자연의 물질을 넣기도 하고, 어떤 작가는 큐브 모양으로 실제의 낙엽을 쌓기도 하며, 또 어떤 작가는 투과체의 공간 속에서 자연의 의미를 탐구하기도 한다. 중첩, 분절, 조립, 병치 등 큐브 안에서 변주되는 조형 언어도 매우 다양하다. 









여기서 이러한 질문이 가능하다. 그런데 왜 하필 큐브인가? 큐브는 비평가 마이클 프리드(Michael Fried)의 ‘연극성(theatricality)’, ‘현전성(presence)’이라는 비판 속에서 소멸하여 갔던 1960년대 미니멀아트의 대표적 유형이 아니던가? 물론 더 정확히 말한다면, ‘큐브(정육면체, 입방체)’이기보다는 ‘복수성의 직육면체’, 즉, ‘직육면체들’이 미니멀아트의 대표적 유형이라 하겠으나, 큐브나 미니멀아트 모두 모더니즘의 환원적 구조주의의 세계에 갇혀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한 차원에서 이 전시와 관련하여 우리의 이어지는 질문이 여기에 있다. “어떻게 큐브와 같은 경직된 구조 속에 자연과 같은 유기적인 세계를 담을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그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큐브전의 답은 매우 단순하다: 경직된 큐브에 유기적 자연을 모두 담을 수 있다고 자신하지 않는다. 다만 그렇게 자신했었던 모더니즘 시대의 유산에서 벗어나서, 우리는 큐브 안에 ‘자연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담고자 한 것이다.
그렇다. ‘자연에 대한 미술가의 생각과 메시지를 큐브에 담는 것’이 이 전시의 궁극적 목표이다. 그것은 우리가 피상적으로 보아왔던 ‘자연에 대한 관습적이고 상투적인 인식’에 제동을 걸고 ‘자연의 쉽게 보이지 않는 본질’이 무엇인지를 조형적으로 깊이 성찰하는 하나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취지에서 《자연미술 큐브》전은 큐브라는 ‘모더니즘의 유령이 일렁이는 인공적인 구조’ 안에 ‘모더니즘을 탈주하고 구조를 탈주하는 넓은 자연의 의미와 그것에 대한 참여 미술가들의 생각’을 담고자 한다. 
그렇다면, 자연을 바라보는 관습적이고 상투적인 시선은 무엇인가? 그것은 가시성의 세계에 갖힌 바라봄이다. 메를로 퐁티(M. Merleau-Ponty)에 따르면, 이러한 가시성의 세계에는 “엄밀한 의미에서 가시성이 하나의 특정한 부재로 현존하게 하는 비가시성의 층을 가지고 있다.”  즉, 우리가 사물의 전체를 볼 수 없듯이, 가시성이란 언제나 비가시성을 전제한다. 그런데 이 비가시성은 가시성이 배제시킨 잔여물이기보다 원초적인 것이다. 여기에 《자연미술 큐브》전이 지향하는 또 다른 기획 의도가 담겨 있다. 즉 ‘보이는 자연에 보이지 않는 무엇’이 있는데 그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전시를 통해서 되묻는 것이다. 
퐁티에게서 비가시적인 것의 본질은 ‘깊이(profondeur)’로 언급된다. ‘가장 안쪽’, ‘깊숙한 곳’인 이 ‘깊이’는 “사물들이 순수하게 머물 수 있는, 즉 사물들이 사물들로 머물 수 있는 수단이다. 깊이가 없다면 하나의 세계 혹은 존재는 없을 것”이다. 결국, 깊이란 ‘작품 자체가 내재적으로 지닌 추상적인 공간’인 것이다. 퐁티에 따르면, 주체가 ‘깊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위치를 벗어나야 하고, 세계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포기해야 하며, 자신을 동시에 도처에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즉 ‘보는 것에 대한 관성적 인식’을 탈주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새로운 눈’으로 보려는 노력이 요청되는 것이라 하겠다.
《자연미술 큐브》전에서 ‘새로운 눈’은 큐브라는 작은 물리적 공간 안에 담긴 자연에 대한 생각과 같은 추상적인 공간으로 잠입하게 하는 눈이다. 그것은 퐁티의 ‘깊이’라는 철학적 메타포 속으로 침투하게 만드는 눈이다. 그런 의미에서 ‘비가시적인 본질’인 이 ‘깊이’는, 우리의 논의에서 미적 가치, 미적 의미와 같은 것이며, ‘새로운 눈’이란 그것을 보는 관성적이고 상투적인 시선을 벗는 새로운 지향성이다. 
《자연미술 큐브》전은 자연의 깊이와 자연의 비가시적 본질을 찾는 다양한 시선들을 통해서 ‘새로운 눈’의 의미를 묻는다. 저마다 다른 작가들의 작품 속에서, 퐁티가 우리에게 들려주었던 ‘보이지 않는 무엇’을 작은 큐브 속에서 찾는 재미를 느끼면서 ‘자연의 본질적 의미’를 성찰하는 것은 분명 흥미로운 일임에 틀림이 없다. ●






출전 /

김성호, 「큐브, 자연을 보는 새로운 눈」, 『자연미술-큐브展』, 전시 서문, 2018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 부대 전시, 2018,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 2018. 8. 28 -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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