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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이유미展 / 타자의 죽음과 비극을 대면하는 방법

김성호

타자의 죽음과 비극을 대면하는 방법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I. 전시 풍경과 주제 
조각가 이유미는 제주로부터 ‘무거운 삶의 문제’를 안고 서울에 왔다. 그간, 우리 시대의 전승 동화나 설화의 내러티브를 가득 안은 ‘가볍고 경쾌한 조각’을 통해 따뜻한 동심의 세계를 펼쳐 오던 작가가 나이를 먹은 탓일까? 변했다. 사실 이러한 변화는 예견된 것이었다. 그녀가 제주로 이주한 이후부터, 이전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가벼운 조각 안에 ‘죽음과 서사’라는 무거운 주제를 담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가벼운 와이어로 만든 형상의 틀 위에 먹물을 먹은 종이죽을 입혀 만든 ‘종이 조각’이라는 재료와 형식은 그대로인데, 삶과 죽음 사이의 서사와 같은 진중한 주제가 같은 형식의 조형 안에 담기기 시작한 것이다.  
제주에서 열렸던 2015년 개인전과 올해 4월에 열렸던 ‘제주현대미술관’에서의 개인전에서 선보였던 작품들은 이전의 작업으로부터 새로운 변화를 예감케 하기에 족하다. 그런 면에서, 올해, 제주의 개인전에 출품된 일부의 작품들과 더불어 다수의 신작이 포함된 이번 전시는, 제주에서 선보였던 작품들을 잇는 연장선상의 전시라 하겠다. 
전시 풍경을 둘러보자. 하얀 벽면에는 짙은 회색의 인간상들이 도열하듯이 걸려 있고 더러는 바닥에 고즈넉이 서 있기도 하다. 보기에 따라 그것은 검정의 그늘을 안고 침묵하거나 깊은 시름에 빠진 사람이다. 고개를 숙이고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벽에 걸려 있는 인물상은 깊은 명상과 기도를 하고 있는 기독교의 이콘(Icon)이나 성물(聖物)처럼 보이기도 한다. 두 개의 얼굴을 가진 현무암 위의 입상은 두려움과 공포로 번민하는 인물상, 혹은 그것으로부터 초탈한 현대적 시바(Śiva)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편 눈을 감은 채 깊은 명상에 빠져 있는 하얀 두상은 마치 불교의 부처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지가 절단된 채 몸통만 남아있는 토르소(torso)의 형상을 하고 있는 조각상은 어떠한가? 정면성을 주요 특징으로 하고 있는 그것은 침잠과 고요의 세계 속에 한국의 비극적 현대사를 숨겨둔 주검을 체현(embodiment)한다. ‘소스라치는 역사’를 트라우마(trauma)로 간직한 조각가 이유미의 ‘몸들 아닌 몸들’은 아픈 기억을 더듬어 자신만의 ‘미시적 서사’를 ‘지금, 여기’에 소환함으로써 비로소 ‘거시적 서사’를 이야기한다. 이제야 ‘참담한 집단의 기억’과 ‘우리의 비극의 역사’를 허허롭게라도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이야기가 무엇인가? 이번 개인전의 주제인 ‘그럼에도...’는 이러한 질문을 풀어보는 작가의 자문자답이 된다. 


(좌) 어디쯤 종이,현무암 23x118x20cm 2018
(우) 고이 간직하다. 종이 37x160x27cm 2018


그지없이, 종이, 32x38x30cm, 2018


II. 비극의 서사와 죽음 
이번 전시는 ‘비극의 서사’로부터 시작한다. 그것은 제주 이주 이후의 삶으로부터 구체화된 것이다: “제주로 오게 되면서 제주의 비극적인 역사를 통해 내 마음 안에 있던 우리 집안의 가족사이면서 비극적인 역사를 마주하게 되었다. 이번 전시에서도 그 이야기들은 곳곳에 은유적으로 남아 있다.” 제주 체류 이후의 모든 일상은 그간의 그녀의 작업 자체를 새롭게 변화시키는 동인이 되었다. 제주4.3의 비극적 역사와 매년 4월이면 어김없이 그 비극을 되새기는 ‘살아남은 자들’의 무수한 제사와 굿 소리 그리고 비극의 시대를 살다 간 작가의 할아버지와 남겨진 가족들에 대한 기억은 작가로 하여금 삶과 죽음의 문제의식에 천착하게 만들었다. 
작가 이유미는 ‘비극의 역사’로부터 ‘가족의 죽음’이라는 ‘비극적 서사‘를 떠안고 사는 남은 자들 중 한 명이다. 남은 자 모두가 과거의 기억 속에 현재를 묻고 늘 슬픔 속에서만 살 수는 없는 일이다. 역사에 대한 준엄한 평가와 더불어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아 ‘다시 쓰는 일’도 주요하며, 과거의 역사가 남긴 비극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 또한 주요하다. 자, 여기 남은 자들이 있다. 누군가의 부재를 끊임없이 떠올리고 살아야만 하는 살아남은 자들! 그들은 오늘도 부재 옆에서 존재를 사유한다. 얄궂게도 살아남은 자들에게 삶의 의미란 죽음 옆에서 더욱 찬란히 빛나는 까닭이다.  
작가 이유미의 작업은 비극적 역사에 대한 분노, 타자의 죽음이 야기한 절망, 누군가의 부재로 인한 슬픔을 작업 속에 빚어내고 있기도 하지만, 죽은 자들의 영혼에 바치는 제례(祭禮)와 더불어 살아있는 자들의 상처에 대한 위무(慰撫) 또한 잊지 않는다. 작가는 이번 전시를 다음처럼 설명한다: “인간의 삶과 죽음의 의미와 다양한 형태의 삶의 번뇌와 죽음의 허망함 그리고 그럼에도 삶은 끊임없이 지속되고, 고단하고 힘겨운 삶 속에서 스스로 위로하고 살아가게 하는 지탱의 힘 또한 삶 안에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그녀의 이와 같은 진술은 자신의 작업이 ‘죽음’과 ‘죽은 자’뿐 아니라 ‘삶’과 ‘산 자’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그리고 있음을 알려 준다, 
그녀의 개인전 주제인 ‘그럼에도...’는 ‘절망, 좌절, 슬픔’이라는 단어들의 연쇄와 ‘희망, 위로, 기쁨’이라는 단어들의 연쇄 사이를 잇는다. ‘절망 그럼에도 희망을’, ‘슬픔 그럼에도 기쁨을’과 같은 내러티브를 완성하려는 것이다. 실제로 그녀의 작품에서 〈그들의 서사1, II〉, 〈기억과 망각〉, 〈어디쯤〉, 〈그지없이〉, 〈고이 간직하다〉 등, 제목들이 상기시키는 죽음과 비극적 역사뿐 아니라 삶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희망이 함께 엿보이기도 한다. 


(좌) 어디쯤2 종이 현무암 28x117x22cm 2018
(우) 그들의 서사II 종이, 금박 52x101x6cm 2018



III. 죽음의 두 개념과 ‘주검 이미지’    
‘죽음’ 자체 안에는 ‘삶’과 대비되는 개념, 즉 절망 대 희망, 슬픔 대 기쁨과 같은 대비의 의미론만 지니고 있는가? 아서라. ‘죽음’과 대비해서 언제나 희망과 기쁨일 것만 같던 ‘삶’에도 절망과 슬픔, 그리고 고통은 넘쳐난다. 삶의 반대편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죽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죽음에는 희망과 기쁨을 함께 아우른다. 생각해 보자. 죽음이란 존재의 현현(顯現)을 정지시키고 속박하는 것임과 동시에 차안(此岸)의 현실계로부터 피안(彼岸)의 현실 너머의 세계로 탈주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생의 의지를 좌초케 하는 새드엔딩임과 동시에 주검을 열반(涅槃)의 세계에 이르게 하는 해피엔딩이기도 한 것이다. 
또 우리가 유념할 것은 ‘죽음’이란 언제나 타자의 죽음을 통해서만 경험되는 ‘간접 체험의 사건’이라는 점이다. 나라는 인간 주체는 스스로의 죽음 자체를 인식할 수 없다. 죽는 순간은 나라는 주체의 인식이 사라지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언제나 간접 경험의 세계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죽음과 관련한 위의 두 가지 개념은 흥미롭게도 ‘이미지(image)'를 낳는 근원이다. 이미지의 라틴어 어원인 이마고(imago)는 이미타리(imitari), 즉 ‘모방하다’라는 말에서 유래하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그것은 고대 로마 시대 장례식 때 주검에 착용시켰던 ‘주검의 마스크(masques mortuaires)’로부터 온 것이다. 즉 어원적으로, ‘이마고’는 죽은 사람의 초상 이미지인 것이다. 따라서 이마고는 일견 부정적으로 보인다. 이 용어가 ‘주검’으로부터 근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음’과 연동되는 이마고는 절망과 부정의 색채로 가득한 것이 아니다. 이마고란 ‘세계와 살아 있는 자의 세계 사이에서 물리적이고 지표적인 끈’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외형적 모방'로부터 촉발된 이마고는 결국 타자의 죽음 앞에서 자신의 죽음을 가상 체험함으로써 자신의 실존을 이해하려는 고대인들의 세계에 대한 인식의 결과물이다. ‘이마고’는 실존이 부재하는 주검의 존재를 표상하고 있음에도 ‘실재의 부재 속에서도 유지하고자 했던 권력과 힘의 상징’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이콘’과 공통점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즉 ‘주검 이미지’라는 이마고 안에는 ‘존재와 부재의 가치’가 혼성되어 있는 것이다. 이마고가 살아 있던 자의 부재를 드러내면서도 한편으로 살아 있던 자의 진짜 존재(préence rélle)를 잘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 이유미의 ‘이마고’, 즉 그녀의 조각이 엄연히 환조이면서도 ‘납작한 조각’, 혹은 ‘껍데기’와 같은 형상을 한 채 벽에 걸려 있다는 것은 이 대목에서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마치 ‘주검의 마스크’처럼 부조적 형식을 빌리고 있는 것처럼 간주되기 때문이다. 


(좌) 기억과 망각 종이, 금박 35x165x23cm 2018
(우) 기억하다.I 종이,철,금박 32x105x5cm 2015


(좌)기억하다.II 종이,철,금박 37x72x5cm 2015
(우)동.이(同.異)종이,철,금박  110x50x7cm 2013



IV. 비극과 죽음에 대한 기억, 그것의 대면과 탈주  
죽음과 비극을 기억하는 일이 쉬운 일인가? 제주4.3과 같은 비극의 역사는 공동체의 삶을 짓밟는 상흔(傷痕)인 짙은 트라우마로 자리한 탓에, 그들의 삶을 지속적으로 괴롭히는 악몽이 되기 십상이다. 그렇다고 오명의 역사적 유산을 잊을 수는 없는 일이다. 작가 이유미는 세월의 망각 속에 잠자던 집단화된 기억을 꺼내어 ‘지금, 여기’에 소환한다. ‘잊음’으로 현재의 편안함을 도모하는 현대인의 ‘망각의 자유’는 실상 자유가 아니라 딱히 특정하기 어려운 지배 권력이 안정이라는 이름으로 사회를 통제하려는 억압과 구속의 산물이었음을 끊임없이 되뇌면서 말이다. 
작가 이유미는 비극의 역사와 더불어 그것이 야기한 공동체 구성원들의 죽음에 대한 우리의 ‘자유로운 망각’이 지니는 본질을 탐구한다. 그것은 마치 하이데거(M. Heidegger)가 서구 형이상학의 역사를 ‘존재 망각의 역사’로 규정하고 비판함으로써 ‘망각’으로부터 ‘존재’를 부활시키려 했던 일련의 철학적 노력에 대한 작가 이유미의 화답처럼 보인다. 하이데거는 서구 철학사에서 ‘존재’가 너무나 자명한 개념으로 간주되어 왔기에 ‘존재자 지향적 사유’를 진행해 오면서도 ‘존재’ 자체에 대한 사유는 전혀 진행되지 못했다고 진단한다. 하이데거에게 있어 인류에게 그동안 망각되어 온 본질이 ‘존재’ 자체라고 한다면, 이유미에게 있어 그것은 ‘비극의 역사를 기억하는 인간의 몸’이 상기시키는 존재적 본질에 맞닿아 있다. 결국 하이데거의 철학이 ‘사유의 자명한 통속성이 야기하는 망각’으로부터 탈주하는 것이라면, 이유미의 조각은 ‘진실을 왜곡하는 지배 체제의 이데올로기가 야기하는 망각'으로부터 탈주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 ‘망각’은 지배 질서가 개인으로 하여금 과거사를 잊고 불확실한 미래를 장밋빛 희망으로 가득 채우게 만드는 달콤한 미끼이자, 사회 구성원의 현재적 반발을 무너뜨리고자 독려하는 위장의 가짜 덕목이다. 그러니 잊지 말 일이다. 기억해야만 한다. 
그러면 어떻게 기억하는가? 기억함으로써 치유하고 궁극에는 몸이 기억하는 비극으로부터 탈주해야만 한다. 미술의 언어로 할 수 있는 방식은 과연 무엇인가? 그녀가 “그 이야기들(비극적 역사)은 곳곳에 은유적으로 남아 있다”고 진술하고 있듯이, 조각가 이유미에게서 ‘은유’는 비극의 역사와 그것으로 인한 죽음을 기억하는 방법이다. 
굵고 가는 철사로 투과체의 형틀을 만들고 그 위에 부친이 서예 연습을 했던 화선지 등 먹물이 배인 파지를 종이죽으로 만들어 인물상의 살과 피부를 올리는 방식은 은유의 시작이다. 검은 먹과 흰 화선지가 뒤섞인 채 만들어 내는 짙은 회색의 종이죽은 이념이 다른 이들이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손을 맞잡는 효과를 드러내는 까닭이다. 더불어서 가냘픈 외모의 전신상 혹은 머리와 사지가 절단된 토르소 형상은 비극의 역사를 은유하고, 조각체의 납작한 형태와 불특정 다수의 보편적 인물상을 견지함으로써 억눌린 민초의 삶들을 은유한다. 또한 〈그들의 서사II〉, 〈기억하다 I, II〉, 〈기억과 망각〉, 〈그와 같다면〉 등의 작품에서 종이 조각의 피부 위에 박힌 빛나는 ‘얇은 금박’ 또한 하나의 은유이자 동시에 지표(index)가 된다. 그것은 ‘비극의 역사를 기억하는 몸’이라는 개념을 가시화한다. 몸에 군데군데 박힌 금박은 마치 피부를 관통해서 살에 박혀 있는 탄알처럼 아픈 ‘상흔’이다. 그녀는 그 아픈 상흔을 어둠 속에 묻어 두지 않는다. 피부 위로 토악질을 해내고 몸에 새긴다. 그녀로서는 비극의 역사를 망각하지 않고, 기억하며, 그 사건들과 관련한 망자(亡者)들을 마치 영매(靈媒)처럼 날마다 지금, 여기에 불러내서 진혼제를 열고 그들을 위무하는 일이 무엇보다 주요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살아남은 자의 상처 입은 영혼을 치유하는 일 또한 그녀에겐 하나의 화두이다. 
이러한 화두는 죽은 자와 산 자를 매개하는 집단 기억으로부터 구체적 역사를 왜곡되지 않게 투명하게 직조하는 일이 되고, ‘필연적으로 죽음에 이르는 모두 존재들’, ‘죽음을 향해서 걷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메시지가 될 것이다.    
우리에게 ‘비극과 죽음을 기억해야 할 소명’은 자명하다. 좌절, 비탄, 슬픔과 같은 비극의 역사, 그리고 짙은 죽음의 그림자, 종국에는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게 탈주하기 위해서 작가 이유미는 ‘죽음을 향해서 걷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대화를 시도한다. “그럼에도...” ●


(좌) 그와 같다면... 종이,철,금박 80x37x7cm 2013
(우) 그대의 손1 종이 9x25x3cm 2018



출전/
김성호, 「타자의 죽음과 비극을 대면하는 방법」, 서문, 2018. 이유미-그럼에도展(2018. 12. 7-2019. 12. 21, 갤러리 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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