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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알터에고展 / 되기의 사유와 실천 - 내 안의 또 다른 나

김성호

‘되기’의 사유와 실천 - 내 안의 또 다른 나


김성호(미술평론가, Kim, Sung-Ho)




프롤로그 - ‘알터에고’전의 개요 및 취지  

《2018알터에고(Alter Ego)》전이 펼쳐진다. 이 전시는 2015년부터 매년 이어 온 해움미술관이 기획한 아트 프로젝트이다. 알터에고는 ‘또 다른 자아, 혹은 제2의 자아’로서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는 성찰적 의미’로 제안된 전시명이다. 이 전시의 기획 의도는 “나를 지우고 전혀 다른 나, 내 안의 나를 발견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즉 중진, 중견에 이르는 참여 작가들을 대상으로 기존의 작품 세계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창작 결과물을 요청하는 주문형 프로젝트이다. 

참여 작가들은 이러한 미술관의 기획 취지에 동감하고, 자신이 천착해 왔던 익숙한 조형 언어를 떨치고 새로운 조형 언어를 연구함으로써, 지금까지 선보인 작품과는 전혀 다른 형식의 창작물을 이번 전시에 선보여야만 하는 의무를 다해야만 한다. 미술관은 “지금까지의 작업 형식을 완전히 버리는 것”을 요청했다. 쉽게 말해 “그림만 보아서는 누구의 작품인지 알 수 없는 극단적 작업의 변모”를 요청한 것이다.

신진도 아니고 이미 중진, 중견에 이르는 작가들이 새로운 조형 언어를 실천한다는 것이 쉬운 일인가? 어떤 면에서, 참여 작가들은 자신을 부정하고 낯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어야만 하는 어색함과 부담감을 감내해야만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참여 작가들은 미술관의 기획자(들)과 워크숍 및, 수차례의 미팅과 협의를 통해서 중간 점검의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이러한 과정을 수용한 참여 작가들은 오래전 미술 공부에 전념하던 시절의 상황마저 재연해야만 할 난감한 입장에 처하기도 한다.   

기획자가 새로운 조형 세계를 강력하게 요청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기획자는 그것을 “정체되어 있던 나를 지우고 불친절하고 낯선 작품을 통해 내 안의 나, 새로운 자신을 발명(invention)하는 궁극적인 변신의 전기를 획득하는데 있다”고 밝히고 있다. 기획자는 이 프로젝트를 지속적으로 실시하여 “해마다 변모하는 작가의 실험 정신을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자극하고 독려”하고자 한다. 

이 프로젝트는 최종적으로 전시를 통해 전 과정을 완결하는데, 관객들은 전시를 통해서 참여 작가들의 이전 작업과 변모된 작업을 비교해 보는 흥미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올해의 알터에고전은 김석환, 박근용, 이오연, 최혜정, 황은화 5인의 중진, 중견 작가가 참여했다. 그들의 기존 작품의 특성과 변모된 지점이 무엇인지를 살펴본다. 이 글은 들뢰즈와 가타리(Gilles Deleuze & Félix Guattari) 철학의 메타포인 ‘되기(devenir)’, 더 구체적으로는 ‘타자 되기(devenir-autre)’라는 개념을 통해서 그것을 살펴본다. 여기서 ‘되기’란 간단히 말해 ‘한 주체가 스스로 다른 것으로 되어 가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알터에고》전을 이해하는 하나의 키워드가 될 것이다. 






1. 죽은 자 되기 - 김석환

김석환은 그간 퍼포먼스를 중심으로 그것과 접목된 회화, 조각, 설치 등의 작업을 통해서 인간과 문명, 전통과 현대, 역사와 사회, 예술과 생태 등의 관계를 탐구해 왔다.   

그의 이번 출품작 〈죽음에 대한 기억〉은 자신을 돌아보는 것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작가적 자아를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개인 주체의 탄생, 성장의 과정 속에서 성찰한다. 출품작에서 바닥에 무수히 깔아 놓은 날계란으로 상징되는 ‘알’은 그런 의미에서 세계를 대면하고 있는 작가적 자아에 대한 은유이다. “한때 나는 갇혀 있었다. / 그리고 꿈을 꾸었다. / 햇살도 하나 없는 둥근 원 안에서 / 얼마의 수분과 붉은 핏줄로 엉켜진 채로 /오직 보이는 건 침묵 같은 어둠, /오직 나만의 공간, 그건 알이었다.”

‘작가적 자아’의 은유를 실천하는 수천 개의 날계란이 바닥에 설치되어 있는 그의 출품작은 폐기된 차(車)의 거대한 차축과 옛 선박으로부터 가져온 거대한 프로펠러 등의 오브제가 중심을 형성한다. 차축 안에 설치된 작은 모니터 안에는 움직이는 세계가 자리하고, 배경처럼 자리한 벽면에는 철판을 오려 내고 와이어를 용접해서 만든 산수의 풍경이 펼쳐진다. 그것은 작가 김석환의 작가적 자아가 알을 깨고 난 후 맞닥뜨린 ‘생(生)’이 만개한 ‘차안(此岸)’의 세계이다. 알을 깨고 나온 후 만난 “세상의 공간은 상상할 수 없을 수 정도로 컸고 / 눈을 황홀하게 하는 햇살과 부드러운 바람이 / 어루만지는 천국 같은 곳이었다.” 그곳은 또 다른 알들로 상징되는 또 다른 주체, 즉 타자들이 무수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자유로운 세계’ 혹은 “자유로울 줄 알았던” 세상이었다. 어느덧 이순(耳順)에 도달한 작가는, 죽음 뒤의 ‘피안(彼岸)’의 세계를 늘 인식하면서, 이제 “세상이 내 것인 줄” 알고 지냈던 자신의 만용과 거만을 내려놓기로 한다. 

김석환의 출품작은, 그가 알을 깨고 나온 세상은 이미 또 다른 알, 즉 “거대한 알”이었음을 토로한다. 자신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고 골몰했던 자신의 창작물이란 세상에 이미 존재했던(하고 있는) 역사의 예술 선배들이 이미 구축한 세계의 부산물이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나는 너였고, 너는 나였다”라는 작가적 진술은 이번 《알터에고》전을 대면하는 작가적 입장을 여실히 드러낸다. 어떤 차원에서 그것은 작가가 전혀 다른 형식의 예술을 실험하는 일조차 ‘내가 알지 못하는 너’로 변신하는 것이라고 하기보다 ‘내가 알지 못했던(못하는) 나’로 변신하는 것임을 작품을 통해서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너는 (이미) 나였기(이기)” 때문이다.







2. 엄마 되기 - 박근용

박근용의 작품 세계는 그동안 조각을 근간으로 한 설치, 영상, 퍼포먼스 등의 장르를 통해 인간의 근원적 욕망과 사회적 문제 등에 관해서 발언해 왔다.     

그의 이번 출품작 〈엄마는 돌아가시기 이틀 전에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는 온전하게 미디어 작품에 집중한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최근 서랍 속에서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던 병원에서 촬영한 어머니의 마지막 '뇌 MRI 필름‘을 발견하고 그것을 작품으로 선보인다. 암실의 전시 공간에는 이 MRI 필름을 내장한 여러 개의 검은 큐브들이 관객의 눈높이에 맞추어 도열해 있는데, 그 필름의 이미지는 각 아크릴 박스 안의 작은 조명 빛에 의해서 비로소 큐브의 표면 위로 희미하게 떠오른다. 

그의 출품작은 삶을 먼저 살다 간 인생 선배에게 바치는 헌사(獻詞)이다. 고인이 된 지 십년이 다 된 작가의 어머니를 생각하며 만든 고인에 대한 ‘생전의 최후 기록’이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자신의 어머니가 되어 보는 작가의 첫 노력이다. 제목처럼 ‘엄마의 당시 생각’을 궁금해 하고 고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엄마’를 이해해 보려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첫 시도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그의 출품작은 “앗! 내가 이 작업을 하면서 엄마와 화해하고 있었구나!”라고 깨닫게 된, 고인과의 진실한 화해를 도모하는 사건이 된다. 

한편 그것은 고인을 작가의 마음으로부터 진정으로 놓아드리는 추모와 제의(祭儀)가 되기도 한다. 고인을 기리는 추모 혹은 제의란 ‘살아있는 자들’의 ‘고인’에 대한 후회와 그리움이 교차하는 사건이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저 세상으로 가기 전에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라는 작가의 이어지는 질문은 의미심장하다. 이 질문은 죽음을 대면하는 작가의 관점을 읽게 하는 지점이다. 어느 누구나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는 ‘죽음의 세계’에 막연한 두려움과 공포를 그는 관객에 대한 유쾌한 질문으로 전환한다. “그대, 그대는 저 세상으로 가시기 이틀 전에, 어떤 생각을 하실 건가요?” 물론 그것은 그가 ‘엄마 되기’라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자신 안의 새로운 ‘작가적 자아’를 발견하기 위한 답을 찾고자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3. 노동자 되기 - 이오연

이오연의 지금까지의 작품 세계는, 비판적 리얼리즘에 근간한 회화를 바탕으로 한 채 줄곧 삶, 민중, 사회, 정치 등을 화두로 ‘예술가의 사회 참여’를 고민하고 지향해 온 것이었다. 

그는 이번 출품작 〈결코 평온한 공간〉에서 그간 자신의 회화가 천착했던 상기의 주제를 아예 자신의 창작 과정 속에 가져오고자 했다. 즉 ‘노동자 되기’를 자처한 것이다. 달리 말해, 노동자와 민중의 노동적 삶을 ‘그림 그리기’로 옮기던 그의 회화 속에 그들의 ‘노동 행위 자체’를 가져오려고 시도한 것이다. “켜고, 자르고, 붙이고, 다시 칠하고, 가다듬고 한나절 새참을 먹고 다시 칠하고 고쳐 칠하고, 덧붙이고를 반복한다. 나는 이내 조선소 골리앗에 서 있고, 굴뚝봉우리에 서 있다.” 직접 자신의 창작 속에서 노동자가 되어 노동자의 삶을 실천해 보고자 한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노동자의 노동을 이해하고자 한 작가는 그것이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세련된 기호처럼 자르고 붙이고 조형화하였다. 이것이 나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쉽지 않다. 회화하기의 ‘예술적 노동’은 생계를 위한 노동의 차원과는 다른 것이다. 하기 싫어도 생존을 위해서 해야만 하는 ‘삶의 노동’과 달리, ‘예술 노동’이란 창작의 기쁨과 자발성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러한 ‘의도적 변화의 창작’을 거치면서 ‘나로부터의 탈주가 어쩔 수 없는 나로 귀결된다는 경험적 사실’을 토로한다. 기획자의 의도에 부합하는 출품작을 제작하기 위해 조형적으로도 이전의 형상을 중시하던 재현 회화의 틀을 벗고 표현주의적이고도 추상적인 화면 구성을 도모했음에도, 결과는 기존의 자신의 창작 방식을 어느 정도 버리지 않고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다만, 그는 일정 부분 실패를 예견했음에도, 이번 《알터에고》전의 출품작을 위해서, 노동자의 삶을 재현적 회화로 담아내던 이전의 창작 방식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창작 자체를 노동자의 노동으로 대치하려는 시도를 밀어붙였다. 화면을 푸른 단색으로 가득 채우고, 그 안의 형상도 최소한의 제스처로 표현하면서, ‘칠하고, 지우는 등, 질료 탐구를 통한 물화된 화면 만들기라는 회화적 노동 자체’에 골몰해 본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출품작에 나타난 ‘푸른 회화’처럼 이 사회에 ‘평온’과 ‘희망’의 메시지가 가득 담기기를 기대한다. 







4. 초심자 되기 - 최혜정 

최혜정의 작업은 사진, 오브제, 미디어, 설치 등의 다양한 장르와 형식을 통해서 사회적 언어의 의미, 개념의 전환, 일상의 예술화 등을 탐구해 왔다. 

그녀는 《알터에고》전의 출품작으로, 〈호흡(inhale exhale)〉이란 큰 제목 아래 여러 제목의 작품들, 즉 〈속땀〉, 〈Holiday〉, 〈불쑥 나와 줄 거라 믿는 글〉, 〈미스터 탕거도래의 노래〉, 〈어찌 불리우든〉, 〈지금하고 싶은 말〉, 〈Head standing〉이라는 제목의 작품들을 선보인다. 그것은 개별 작품을 지칭하는 것이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각 제목들을 따로 부르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그 모든 것들은 이번 전시에서 하나의 작품으로 간주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그녀는 이번 출품작을 위해서 자신이 수련하고 습득했던 ‘예술을 위한 기술’을 버리기로 했다. 예술의 초보자, 초심자가 되기로 한 것이다. 즉 자신의 조형의 근간을 이루었던 조형 어법을 버리고 가장 기초적인 예술 욕구를 찾고자 했다. 처음으로 시도했던 물구나무서기를 기록한 사진, 어린 아이의 드로잉, 기술을 배제한 바느질, 자유로운 연상의 사유를 기록하는 타자에게 주문한 대필, 그림으로 간주하고 쓰기를 연습한 한자, 항아리에 꽂아 놓은 삽, 뜯어 온 낡은 보안창틀이 그것이다. 

그 중에서 가장 주요한 의미를 담은 작품은 물구나무서기의 과정을 담은 사진 작품 〈Head standing〉이라 할 것이다. “새롭게 변신하라”는 이번 전시의 명령과 같은 과제를 위해서 그녀가 난생 처음으로 시도한 것이, 요가에서 ‘머리 서기(시르사아사나)’라 불리는, ‘물구나무서기’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상에서 벌인 퍼포먼스였다. 기획자의 “새롭게 변신하라”는 주문을 “안 해본 것을 해보라”는 의미로 수용한 그녀는 평소에 해볼 생각조차 못했던 물구나무서기를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그 결과, 작가는, 전시 개막 시점에 근접했을 때 비로소 물구나무서기에 성공한 ‘자신’을 발견한다.  

최혜정은 이번 출품작을 준비하면서, ‘새로운 변신’을 ‘새로움을 위한 도전’으로 인식한다. 그리고 그녀는 분명 그것이 ‘첫 만남, 첫 경험’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지만, ‘부단한 연습’으로 가능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새로움이란 ‘첫사랑’처럼 ‘첫 만남’과 ‘첫 경험’ 속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것은 새롭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것은 관성과 타성에 젖게 되어 익숙하거나 식상한 것이 되고 만다. 따라서 모든 것은 ‘초심자의 첫 일’로부터 시작되지만, ‘내 안에서의 새로운 것’은 단번에 찾아지는 것이라기보다 ‘부단한 연습’을 통해서 ‘점차 새로워지는 것’이 아닌지를 반문한다. ‘물구나무서기’가 처음부터 쉽지 않으나 연습을 통해서 점차 ‘새로운 것의 완성’이 가능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5 복수의 타자 되기 - 황은화

황은화는 그간 회화를 중심으로 한 조각, 설치 등의 장르를 통해 시점(視點)을 통한 현대적 의미의 아나모포시스(Anamorphosis)를 구현하고 시각, 시각성에 기초한 새로운 일루전을 창출하는 작업에 천착해 왔다. 그녀의 작품은 그동안 ‘또 다른 시각(Another View)’이라는 일관된 제목과 주제 의식으로 가시화되어 온 셈이다. 

이번 《알테에고》전을 위해서 그녀는 〈초록 상자〉라는 제명의 커뮤니티 아트의 유형에 도전한다. 결과는 ‘조각적 설치’로 나왔지만, 그 창작의 과정에 ‘수용자의 참여를 통한 작품의 완성’이라는 도전적 과제를 통해 그녀 스스로 ‘복수의 타자 되기’를 실천한 셈이다. 

그녀는 이번 출품작을 위해서 사람들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감정의 문제에 주목했다. 만남에서 형성되는 친밀감, 즐거움보다 사람들이 저마다 주고받는 상처, 억울함, 슬픔, 분노 등 앙금을 남긴 무거운 감정들을 꺼내는 것을 수용자들에게 주문, 요청하고 그들의 참여 자체를 작업으로 끌고 간 것이다. 작가 황은화의 ‘예술 수용자’이자 그녀가 주도하는 예술 생산에 있어 ‘공동 참여자’인 익명의 불특정 다수는 저마다 자신의 무거운 비밀들을 가슴 속에서 꺼내 그녀의 ‘초록 상자’에 담는다. 

구체적으로 그녀는 종이로 된 정육면체의 전개도를 미리 준비하고 참여자들에게 6면 중 윗면과 아랫면을 제외한 4면에 초록색 계열의 색상으로 색칠하게 한 후 아랫면을 닫고 그 안에 글을 쓸 것을 요청한다. 이후 참여자들이 상자 속에 써 넣은 비밀에 가까운 내용들이 누설될까 노심초사하지 않도록 그녀는 상자를 접착제로 밀봉하고 전시 이후에도 개봉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초록 상자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마음속에서 꺼내지 못한 생각, 감정, 사건들을 상자 속에 직접 글을 쓰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참여자들에게 마지막으로 그들이 좋아하는 색으로 상자 위에 직선을 그려줄 것을 요청하고 전시 참여에 관한 소감을 한 줄의 단평으로 써 줄 것을 요청한다. 이 단평은 전시를 통해 유일하게 공개되는 참여자들의 생각인 셈이다. 

이후 작가는 이들이 공동으로 참여해서 만든 ‘초록 상자’들을 전시장 벽면에 설치한다. 이 때 개개의 ‘초록 상자’ 위에 그려진 선은 설치를 위한 기본 출발점이다. 개별 상자들을 ‘그어진 선’에 맞추어 벽면에 멀티플의 형식으로 붙여 가는 작업을 통해서 작가는 참여자들의 각기 다른 존재들을 하나의 ‘심정적 공동체’로 구축한다. 

이 작업은 인간관계에서 유발되는 부정적인 감정의 앙금들을 상자 안에 밀봉시켜 거두어 감으로써 참여자들에게는 일정 부분 마음의 짐을 더는 치유의 효과를 유발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작품 자체의 형식적 면모보다 보이지 않는 창작의 내용 자체가 보다 더 주요해지는 작업이 된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작가 황은화가 ‘시각성과 아나모포시스 효과에 주목해 왔던 그 동안의 작품들’에서 잘 선보이지 않았던 다양한 콘텐츠들을 견인하고 있다고 평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복수의 타자 되기’를 실천하는 황은화의 이번 커뮤니티 아트의 유형은 어떤 면에서 미술 치료의 한 방식이 되기도 하고, 개념 미술의 한 단면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에필로그 - ‘알터에고’전에서의 ‘되기’의 과제  

5인의 작가가 참여한 《2018알터에고》전은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는 성찰적 의미의 또 다른 작가적 자아’를 찾는 일을 시도한다. 생각해 보자.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 성경의 오래된 아포리즘처럼 이 땅 아래 더 이상의 오리지널리티는 존재하지 않는다. 원본성, 단품성(單品性)의 개념에 경도되었던 시대의 ‘독창성(originality)’은 이제 작품을 대면하는 작가의 창의적 태도에 주목하는 ‘창의성(creativity)’으로 변모된 지 오래이다. 새것을 찾아 달려왔던 20세기의 미술과 달리, 21세기에는 더 이상 찾을 새로운 것이 고갈된 시점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인 의미에서 새것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나올 것이 다 나온 작금의 미술 현장에서 획기적인 형식의 새로움은 더이상 없다. 다만 개별 작가들의 미시적 세계에서 찾는 새로움이 있을 따름이다. 그런 면에서 전시명 ‘알터에고’는 참여 작가들 스스로 ‘미시적 세계에서 찾는 새로움’에 대한 언명(言明)임과 동시에 '내 안에 관성화된 채로 잠들고 있는 작품 세계를 몰아내고, 나를 흔들어 깨워서 새로운 창의성의 세계로 잠입하는 길’을 찾겠다는 의지의 표명이 된다.  

이 전시에서 기획자의 메시지는 간단하다. 이 전시는 개별 작가 안에서의 관성과 타성에 젖은 독자성을 떨치고 ‘내 안의 새로운 또 다른 나’를 찾기를 주문하고 요청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참여 작가들이 그동안 시도하지 않았던 전혀 다른 형식의 작업을 출품하길 요청하는 것이다. 

한편, 기획 취지에 동의하고 전시 참여를 결정했음에도 전시에 참여하는 작가들의 수용의 메시지는 간단하지 않다. ‘내가 죽고 내 안의 다른 나를 살게 하는 일’ 자체가 말처럼 쉽지 않은 까닭이다. 타성에 찌든 나를 분명히 죽였는데도 그동안 익숙했던 예술적 태도가 어느새 살아서 스멀스멀 자신의 새로운 작업 안으로 기어들어 오기 때문이다.  

변화의 과제 앞에서 참여 작가들은 이번 전시에서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발견하기 위해 ‘타자 되기(devenir-autre)’에 관련한 일련의 실험’을 거친 것으로 보인다. 죽은 자 되기(김석환), 엄마 되기(박근용), 노동자 되기(이오연), 초심자 되기(최혜정), 복수의 타자들 되기(황은화)가 그것이다. ‘타자 되기’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철학적 메타포인 '되기(devenir)'를 구체화하는 실천이다. 그것은 새로운 자아를 찾기 위해 주체의 경계를 넘는 일이자, 자신의 모든 중심으로부터 탈주하여 주체를 분자화(devenir-moléculaire), 소수화(devenir-minoritaire)하여 결국 탈영토화(déterritorialisation)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그것은 되기의 대상과 더불어 상호 변용되는 과정이다. 죽음의 문턱 앞까지 가서 죽음을 이해하게 되었고(김석환), 엄마와 비로소 화해하게 되었으며(박근용), 노동자의 삶을 체험으로 이해하게 되었고(이오연), 초심으로 돌아가 새로운 것과의 만남이라는 변화의 본질을 체득하게 되었으며(최혜정), 성향이 제 각기 다른 복수의 타자를 가슴으로 이해하게 되었던 것(황은화)처럼 말이다.  

《알터에고》전에서의 ‘되기’의 과제란 ‘자기중심을 탈주하고 잠재된 상태의 새로운 작가적 자아’를 발견하는 일이다. 처음부터 ‘새로운 작가적 자아 되기’를 최종 목표 지점으로 삼았던 만큼, 이 전시는 이미 절반의 성공이다. 세세한 비평적 성찰 이전에 ‘기획자와 참여 작가들의 변화에 대한 뜨거운 실천 의지와 노력’ 자체가 무엇보다 값지고 주요하기 때문이다. 자! 이제 이 전시에 대한 세세한 평가는 관객의 몫으로 남았다. 여러 미술인들의 다양한 의견과 평가를 토대로 삼고, 앞으로의 《알터에고》전이 발전적으로 지속되길 기대한다. ●



출전 /

김성호, 「되기의 사유와 실천 - 내 안의 또 다른 나」, 『알터에고展』, 전시 카탈로그, 2018, (알터에고 전, 해움미술관, 2018. 11. 15- 2019. 12. 27 * 참여 작가: 김석환, 박근용, 이오연, 최혜정, 황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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