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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고│자연스럽게展 / '부자연'으로부터 모색하는 ‘자연스러움'

김성호

'부자연'으로부터 모색하는 ‘자연스러움’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I. 프롤로그 
이 글1)은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의 2018년 기획전 《자연스럽게》에 대한 비평적 서문이다. 이 전시는 오늘날 인간 주체를 둘러싸고 있는 ‘부자연’스러운 일련의 환경적 상황을 직면하면서부터 문제를 제기한다. 전시 기획자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이번 전시가 어떠한 문제의식으로부터 촉발되고 있는지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환경 시스템의 변화로 인해 나타나는 부자연스러운 모습을 통해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자연과의 관계를 가지고 나아가야 하는지 생각해 보는 (전시입니다).'2)
자연(自然)이라는 명사 앞에 붙은 ‘아님’을 명확히 하는 부정의 접두사 부(不)는 “사람의 힘이 더해지지 아니하고 세상에 스스로 존재하거나 우주에 저절로 이루어지는 모든 존재나 상태”3)라는 ‘자연’의 의미를 배반한다. 따라서 ‘부자연’이라는 전시의 출발점은 ‘자연의 속성을 오염시키고 인공의 것으로 뒤덮은 오늘의 상황’을 전제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자연은 태초의 신화 세계 혹은 문화인류학적 시발점에서부터 인간을 포함하는 모든 존재의 근원적 모태였다. 자연은 인간, 동물, 식물, 광물을 아우르는 거시적 세계이자, 모든 미시적 존재들의 합집합이었다. 주지하듯이, 인간은 문명을 창출한 이래 스스로의 미시적 존재 범주를 탈주하고 세계의 주체로 우뚝 서게 되면서 인간의 ‘어머니’였던 자연을 구속하고 대상화시키기에 이른다. 그러한 까닭으로 오늘날 자연은 인간에 의해 대립적 관계로 자리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이제 어머니의 품을 떠난 어린이의 입장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연’은 이제 ‘자연 아님’의 ‘부자연’의 존재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4) 
이번 전시 《자연스럽게》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즉 오늘날의 “상처 입고 뒤틀리고 생경해진 자연”으로 ‘나타난’ 현재의 모습을 직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이어서 전시는 이러한 ‘자연의 원래의 모습과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는’ 시간을 통해서 원래의 자연을 회복하려는 노력을 관객과 공유하길 시도한다. 3가지 섹션인 ‘섹션1, 자연스럽게, 나타나다’, ‘섹션2, 자연스럽게, 생각하다’, ‘섹션3. 자연스럽게, 시네마’는 이렇게 등장했다. 전시에는 회화, 사진, 조각, 설치, 영상 등 다양한 장르의 총 12인(팀)의 예술가들이 참여했다. 





II. 나타나다 - 이혼의 문명학, 인간의 욕망  
이번 전시에서, '자연스럽게'라는 전시 주제의 영문 번역은 왜 ‘내츄럴리(Naturally)’가 아니고 ‘오브 네이쳐(Of nature)로 표기되었을까? 이러한 주제어는 부자연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출발한 이번 전시가 궁극적으로 ’자연의 근원적이고 주체적인 속성‘을 지향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즉 ’자연성‘을 통해 오늘날, 오염되고 심지어 상실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부자연‘의 상황들을 비로소 구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21세기의 오늘날에 당면한 ‘부자연’이 낳은 난제들을 ‘자연의(of nature)' 근원적 속성으로 회복하고 치유할 수 있다고 신뢰하는 까닭이라 하겠다. 따라서 자연을 주체적 위상으로 간주하는 오브(of)는 ‘자연권, 지구권, 성스러운 지구의 윤리적 고려, 생태학의 민주화 영향’ 5) 등 다양한 속성을 촉발시켜 왔다.  
이러한 도달점을 위해서 전시는 인간의 ‘종속적 대상’으로 간주되어 왔던 자연을 ‘주체’로 다시 세우고자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동시대에 멸종의 위기에 이르고 만 ‘자연의(of nature), 자연에 의한(by nature)’ ‘자연 주체의 세계’를 다시 소환시키고자 한다. 
주지하듯이, 인간은 자연의 일부분이었던 자신의 존재를 망각하고 문명과 문화라는 이름으로 자연의 품으로부터 벗어나 자연을 구속과 종속의 대상으로 만들어 왔다. 게다가 자연을 문화라는 이름으로 인간 자신과 대립적인 존재로 만들어 왔다. 자연은 그저 가만히 있었는데 말이다.
오늘날, 갈가리 찢어지고 피폐한 형체로 ‘나타나고’ 있는 자연의 모습은, 문화와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무엇인가 끊임없이 욕망하는 인간으로부터 기인한다. 인간은 무엇을 욕망하는가? 편안함과 즐거움, 즉 안락(安樂)을 욕망한다. 보라! 신석기인은 고단한 유목으로부터 정주의 편안함을 취했고, 식물 재배와 동물 사육을 통해서 힘겨운 사냥의 노동으로부터 탈주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자연의 ‘매끈한 공간(espace lisse)’ 위에 정주의 공동체를 위한 벽을 쌓고 수로를 파서 ‘홈이 팬 공간(espace strié)'을 만들면서 인간의 편안함을 성취하고자 했다. 들뢰즈에 따르면, ‘매끈한 공간’은 비식민화된 공간, 열린 공간, 유목의 공간인 반면, ‘홈이 팬 공간’은 매끈한 공간에 반대하는 질서와 계층의 공간이다.6) 매끈한 자연의 바탕 위에 홈을 만들어 씨앗을 뿌리는 순간, 벌판을 뛰놀던 들소를 말뚝에 붙들어 매고, 야생마에 재갈을 물리고 고삐로 욱조여 운송 수단으로 삼게 된 순간, 이미 인간은 자연과 결별의 과정을 밟게 된 것이었다. 
스웨덴의 식물학자 린네(Carl Linnaeus, 1707~1778)가 라틴어로 이름을 붙인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라는 ‘생각하는 사람’7)은 더 이상 자연과 한 몸을 이루지 못하고 이혼에 이르는 결별의 수순을 밟는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 1976~ )의 저작 『사피엔스(Sapiens-a brief history of humankind)』의 마지막 부분에서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의미심장하다. “7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는 아프리카의 한구석에서 자기 앞가림에만 신경을 쓰는 별 중요치 않은 동물이었다. 이후 몇만 년에 걸쳐 이 종은 지구 전체의 주인이자 생태계의 파괴자가 되었다. 오늘날 이들은 신이 되려는 참이다.”8)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Appius Claudius Caecus, 340 BC – 273 BC)로부터 기인하는 ‘호모 파베르(Homo Faber)’라는 ‘도구적 인간’은 인간의 편의를 위해서 도구와 기계를 만들고9) 급기야 인간을 대신하려는 ‘인공 지능’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인간의 노동을 기계로 대신한 1차 산업 혁명의 기계화, 2차 산업 혁명의 대량 생산화는 어느덧 옛말이 되었다. 이제는 인간의 지식을 기계에 위임한 3차 산업 혁명의 정보화를 이어서 오늘날 인간의 사유를 인공지능으로 대신하려는 4차 산업혁명의 ‘정보통신기술(ICT) 융합화’에 이르렀다. 즉 인공 지능, 로봇 기술, 생명 과학의 결합으로 구축하는 사이버 물리 시스템(cyber-physical system)과 사물인터넷(internet of things)의 4차 산업 혁명의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10) 그것은 ‘인간 편의와 안락’을 지향하는 ‘인간의 문명학’이 인간을 세계의 주체로 우뚝 세우지만, 결국 인간 주체가 속했던 옛 고향인 자연과의 영원한 결별, 이혼의 체계를 공고히 한다. ‘인간의 욕망이 야기한 문명학’이 결국 자연을 정복하고 구속하면서부터 자연에게 결별을 통보하고 이혼에 이르게 한 것이라 하겠다.
오늘날 자연은 더 이상 자연의 모습이 아니다. ‘오늘날 자연’은 가히 ‘부자연’이라 할 만하다. 인간의 ‘자연에 대한 정복의 욕망’으로 인해 자연은 홈이 패고, 상처를 입으면서 자연의 본성을 잃은 지 오래이다. 원래 자연의 일부였던 인간이 자연의 ‘자연스러운’ 질서에 쐐기를 박고 ‘부자연’의 귀결점에 이르게 될 줄 모르고 반란을 꾀해 오늘에 이른 셈이라 할 것이다.



III. 섹션1. 자연스럽게, 나타나다 - 출품작 분석 
이번 전시 《자연스럽게》는 “억지로 꾸민 듯하여 어색하다”라는 의미의 ‘자연의 오염 상태’인 부자연으로부터 전시의 콘텐츠를 시작한다. 현재 위기에 처한 자연의 현존재적 상황을 ‘고발’의 방식으로 고스란히 드러내고 전시의 서두를 여는 것이다. 이러한 ‘자연의 위기적 상황’을 좀 더 심각하게 인식한다면, 전시는 인간의 욕망과 문명학이 야기한 자연과의 결별 상태, 즉 자연과의 이혼이라는 인류 파국의 상황으로부터 시작하는 셈이라 하겠다. 따라서 전시의 ‘섹션1, 자연스럽게, 나타나다’에서, ‘나타나다’라는 동사의 주체는 ‘자연’이 아니라 ‘부자연’이 된다. 이러한 부자연의 상태로부터 성찰을 거듭하는 섹션1에 참여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을 하나씩 읽어 보자. 섹션1에는 옵티컬 레이스, 박천욱, 이해민선, 강주리 4인(팀)의 미술가들이 참여한다.  
옵티컬 레이스의 작품 <119-HTLTDPRHCC-49/24>(2018)은 인간 문명학이 야기한 자연과의 결별과 이혼 상태를 ‘기후 온난화’라는 징후를 통해 고발한다. 이 작품은 지구가 당면한 생태적 위기의 지표들을 피부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지금, 여기’의 상황에서 시각화하여 우리에게 보여준다. ‘수원종관기상관측소’의 일기를 기록했던 아카이브에 근거해서, 지난 49년 동안의 24절기 날씨를 통계적인 방식으로 시각화해서 우리에게 선보인다. “태양의 위치에 따른 날씨의 변곡점을 1년 24절기로 기준을 정하고 활용하여 패턴화하는 작업”이 그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옵티컬 레이스는 “수원시의 폭염 일수는 21세기 후반기(2071~2100년)에 현재의 7.6일에서 34.9일로 3.6배 증가하고, 열대야 일수는 현재의 3.4일에서 27.8일로 7.2배 증가할 것”11)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담담한 시각의 어조로 지표화해서 우리에게 알려 준다. 이들의 작업은 ‘온실가스 저감 정책’이 어느 정도 실현된다고 할지라도 ‘지구 온난화’로 인한 생태계 파괴의 위협을 피할 길이 없음을 우리에게 경고한다.  
이 작품은 언어적 커뮤니케이션(verbal communication)의 방식을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non-verbal communication)의 방식으로 전환하여 드러냄으로써, 생태적 위기와 관련한 무수한 텍스트적 담론을 명징하게 시각화한다. 최고 기온을 ‘빨간 원’으로 최저 기온을 ‘파란 원’으로 설정하고, 연도순으로 숫자, 그래프 등으로 지표화한 디자인적 이미지는 비언어적 기호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정보의 기호적 시각화를 통한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은 오히려 텍스트로 구체적인 진술을 담은 ‘언어적 커뮤니케이션’보다 막강한 경고의 메시지를 담아 낼 수 있다.12) 마치 “불이야”를 외치는 ‘언어적 진술’에는 유언비어와 같은 허구와 거짓이 개입하지만, 비디오 등을 통해 직접 불을 목도하게 만드는 ‘비언어적 진술’은 우리에게 강력한 시각적 증거를 제공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암에 대한 징후와 개연적 진술보다 암에 걸린 자신의 폐 사진은 막강한 경고가 된다. 수원을 둘러싸고 펼쳐진 이러한 온난화의 시각적 기호들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당면한 ‘지구 생태계 파괴’에 대한 명백한 경고로 작동한다.  





박천욱의 작품 <직각 풍경>(2018)은 ‘데카르트적 원근법(Descartes' Perspective)’이라고 하는 근대적 시각적 조망이 야기한 ‘인간 중심적 사유’ 방식에 대해 설치의 조형 언어를 통해서 매우 개념적인 비판 의식을 드러낸다. 그것은 한편으로 사각의 프레임 안에 자연을 가두어 분절과 구별의 구조적 질서를 창출해 온 인간 욕망의 문명학이 야기한 혁신이자 또 한편으로 멸망의 징표이다. 보라! 르네상스 시대 이래, 원근법이 창출한 환영과 마술적 효과의 회화적 기술들을 말이다. 그것은 자연을 분절하고 프레임 안에 가두어 자연을 대상화시켜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허구의 극대화를 창출했지만, 자연의 본성을 담는 일에는 소홀했다. 아니 그것에 대해 무지했다. 
박천욱은 인간 밖으로 떨어진 자연을 ‘인공 정원’이라는 이름으로 인간 문명의 세계에 가져온 근대적 프레임의 욕망을 비판한다. 벽과 바닥을 잇는 3차원의 공간에 데카르트적 원근법을 적용하여 직각의 사진적인 프레임을 구축한 박천욱의 설치 작업 안에는 인공의 하늘, 나무, 풀들로 가득하다. 생각해 보라! 그것은 우리의 집 마당에 가져온 인공 정원에 대한 비판적 메타포와 다르지 않다. 자연스러움을 배반한 부자연의 극점 말이다. 자연을 종속화하고 지배함으로써 인류가 번성할 수 있으리라 자신했던 인간 주체가 도달한 그 극점에는 자연의 환영만이 일렁일 따름이다. 설치 작업 안으로 관객이 움직이는 장면을 폐쇄 카메라로 촬영하여 실시간으로 벽면에 투사하고 있는 부가적인 설치 방식을 통해서 작가는 이러한 비판적 메시지를 여실히 드러낸다. 실제의 자연을 거닐고 자연과 소통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미지는 한낱 인간이 만든 ‘직각의 인공 풍경’뿐일 따름이며, 그 속에서 산책하고 있는 인간 주체는 유령과 같은 환영의 자연 이미지를 실제의 자연인 것으로 받아들이며, 살고 있는 어리석은 존재임을 비판하는 것이다. 




이해민선은 7점의 회화 출품작을 통해서 환경 속에 들어와 있는 자연을 새롭게 재구조화하려는 인간의 욕망과 연민을 중첩시킨다. 작품 〈직립 식물〉(2010)은 생명체로 호흡을 다한 ‘부러진 채 말라 가는 한 나뭇가지’를 위한 장례 의식처럼 보인다. 중력에 직립하지 못하고 생을 다한 ‘한 자연체 미물의 주검’에 대한 애도를 위해서 얼기설기 만들어 낸 ‘관 아닌 관’은 이미 소생시킬 수 없는 자연에 대한 안타까움이 묻어 있다. 꺾인 꽃송이들을 ‘부목(副木)’처럼 묶은 나무 장치들은 상처를 입은 자연을 소생시키기 위한 ‘보철구(補綴具)’로 보이지만, 그것이 끝내 소생하지 못함을 우리는 안다. 또 다른 작품 〈절정 없는 곳 - 포즈〉(2017)가 전하는 메시지도 유사하다. 공사 현장의 환경 속에서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감싼 것처럼 보이는 포장막 또한 이미 파괴한 자연을 응급 처치로 구제하려는 임시 장치일 뿐 부질없는 노력으로 보인다. 그 자연은 작가의 말대로 “서 있으나 하늘에 포함되지 않는” 숨만 쉬고 있는 ‘시신’이다. 이러한 주검 위에 치유의 손길을 내미는 허망한 제스처는 오늘날 우리가 실천을 뒷전에 둔 채 자연의 위기를 입과 글로만 논하는 무수한 생태 담론과 같이 허망하다. 
인간의 편의와 안락을 실현하기 위해 자연을 파헤치고 구획하는 인간의 욕망 앞에서 느끼는 좌절과 연민은 또 다른 작품 〈덩어리입니다〉(2017)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이 작품의 원래 제목은 ‘매일 휘발되는 나는 묵직한 덩어리입니다’이다. 붉은 봉우리 앞에서 엎드려 있는 인물을 표현하고 있는 이 작품은 땅덩어리 한 평을 제대로 소유하지 못해서 좌절하는 오늘날 젊은 도시인의 애환을 다음처럼 담는다. “나이가 들면 외로워진다고 아이를 낳으라고 합니다. 동네에 전철이 들어설 때보다 들어선다고 소문이 돌 때가 가장 땅값이 높다고 합니다. 가정법으로 현재를 사는 곳, 불안은 높은 봉우리에 육신을 던져 놓고 풍장하게 살고 있는 땅엔 발뒤꿈치가 없습니다.” 자연을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해 좌절하는 자본주의 사회 속 현대인의 비뚤어진 욕망을 가시화하는 작가의 작업은 인간 주체가 ‘자연’을 ‘부자연’으로 만든 범인이자 ‘불온한 주범’의 존재임을 가감 없이 증언한다.  




강주리는 두 개의 거대한 설치 작품 〈삶의 패턴(pattern of Life)〉(2017-18)과 〈카오스(Chaos)〉(2018)를 통해서 인간의 욕망으로 점철되었던 문명학이 야기한 ‘부자연’의 현재, 즉 생태계 파괴의 현 상황을 미술의 언어로 고발한다. 거기에는 인간의 편의로 개발된 유전자 변형 동식물과 인간의 편의가 초래한 부작용의 산물들인 ‘방사능 노출로 태어난 돌연변이’와 같은 변형 동식물 그리고 유기견과 로드킬(roadkill)과 같은 오늘날 상처 입은 동식물에 대한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작품 〈삶의 패턴〉에서, 마치 벽지로 도배된 듯한 ‘방 혹은 터널’에는 이러한 변종의 동식물들이 프랙털 무늬처럼 반복되면서 만든 붉은색 꽃문양으로 가득하다. 마치 파충류나 연체동물처럼 꽈리를 틀면서 자란 오이, 두 개가 하나처럼 붙은 변형 복숭아, 지느러미 다리의 개구리, 하나의 꼬리와 두 개의 머리를 가진 개구리, 거미처럼 무수한 다리를 가진 강아지 혹은 강아지 얼굴을 가진 기이한 곤충, 그 모든 변종의 생물들은 오늘날의 이종(異種) 이식과 변형이 고스란히 투영된 ‘삶의 패턴’과 닮아 있다. 작품 〈카오스〉에서는, 이러한 변종의 동식물들이 정상의 것들과 ‘사이좋은 듯’ 공존한다. 아서라! 그들이 사이좋을 리 없다. 그들 사이에는 서로 이익이 되는 상리공생(mutualism)이든 한쪽만 이익이 되는 편리공생(commensalism)이든 익히 우리에게 알려진 ‘공생 관계(symbiotic relationship)’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혼돈의 상태로 뒤섞여 힘겨운 호흡을 할 따름이다. 인간의 태아인지 과일인지 모호한 둥그런 모양의 괴 생물체, 비틀리며 자라난 유전자 변형의 채소와 과일, 환경 오염으로 변형된 머리가 붙은 새와 멧돼지를 연상케 하는 동물의 잘려진 머리들은 건강하게 자란 가지나 오이, 흐드러지게 핀 건강한 꽃들과 함께 이웃하지만, 그것은 제명처럼 혼돈의 불편한 공존을 이룬다. 
두 개의 대규모 설치 작품은 모두 작가 강주리의 ‘매우 세밀한 볼펜 드로잉’으로부터 반복, 변형되어 재생산된 것들이다. 이른바 ‘식물 정밀화’로 불리는 보태니컬 아트(Botanical Art)처럼 세밀한 드로잉이 종이 위에 실제로 그려진 원화(original)와 그것이 잉크젯 프린트의 방식으로 종이와 시트지에 반복적으로 복제, 재생산된 사본(copy)이 뒤섞인 그것은 카오스라는 주제를 효율적으로 드러내는 기제가 된다. 강주리의 작업은 인간의 문명학이 구조와 분별의 언어로 자연을 황폐화시킨 오늘날의 반생태적인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은유를 감행한다. 그녀의 작품에서 원본/사본 그리고 변형체/정상체의 ‘기인한 공존’은 무서운 속도로 스멀스멀 자라나 혼돈으로 가득한 몸집을 불리어 간다.

  



IV  생각하다 - 재혼의 생태학, 자연의 숨, 인간의 쉼     
전시에서 ‘섹션1. 자연스럽게, 나타나다’가 선보이는 작품들과 그것들이 품은 사유는 인간의 욕망에 근원하는 문명학이 야기한 ‘부자연스러움’에 관한 고발과 비판적 성찰이었다. 인간의 ‘자연에 대한 정복의 욕망’으로 인해 자연은 홈이 패고, 상처를 입으면서 자연의 본성을 잃고, ‘자연스러운’ 질서의 맥에 쐐기를 박은 채, ‘부자연’의 귀결점에 이르게 되었다. 모더니즘적 사유가 극점으로 치달은 부자연의 귀결점에는 자연뿐 아니라 인간의 욕망 또한 병들고 있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학을 파국과 이혼으로 이끌고 만 ‘인간 문명학’ 때문이다. 이제 오늘날의 ‘자연’은 더 이상 자연의 모습이 아닌 ‘부자연’ 그 자체라 할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하나? 전시에서 ‘섹션2. 자연스럽게, 생각하다’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 회복에 대해 성찰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먼저는 원래 자신과 한 몸이었던 자연을 인간으로부터 별리시키고 종속의 대상으로 치환한 ‘인간 주체’의 탐욕스러운 만용에 제동을 걸고 인간 스스로 변화하는 일이다. 즉 ‘재혼의 생태학’을 위해서 먼저 도모할 일은, 무엇보다 자연을 피폐하게 만든 주범인 인간 주체가 자연을 구속했던 ‘못된 인간’을 벗고 자연과 한 몸이었던 ‘착한 인간’으로 거듭나는 일이다. 그것은 인간(人間)의 한자어 중 ‘사이(間)’가 내포한 동등한 관계적 의미를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회복하는 일이기도 하다. 자연적 질서를 회복하는 생태미학이란 인간이 주체가 되고 자연이 대상이 되는 식의 “주체와 객체의 관계가 아니라 동등한 항(項)들의 상호 관계”13)를 전제한다. 
다음으로는 인간 문명학에 상처를 입고 ‘부자연으로 변질된 자연’에 이르게 된 ‘이혼의 문명학’으로부터 자연을 위한 ‘재혼의 생태학’으로 ‘자리바꿈’을 도모하는 것이다. 일반론의 입장에서, 인간에게 재혼이란 이혼한 사람과 다시 결합하기보다 다른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듯이, 자연과 인간의 재혼이란 이혼한 ‘이전의 자연이 아닌 다른 자연’과 만나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과 한 몸이었던 태고의 자연을 ‘지금, 여기’에 소환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은 변질되지 않은 현재의 자연과 재혼하거나, 이미 분절되고, 별리되어 피폐해진 자연을 치유하고 소생시켜 새로워진 자연과 재혼하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의 재혼 방식은 인간 제도의 순차적인 재혼 방식과 달리 양자의 방식을 병행하면서 횟수도 무수히 거듭되는 재결합의 방식을 도모한다. 즉 미미하지만 자연의 본성을 여전히 간직한 자연과 재혼하는 일이며, 상처를 가득 입은 자연을 치유하고 소생시켜 재혼하는 일을 무수히 거듭하는 것이다. 이처럼 ‘지금, 여기’의 여러 유형의 다수의 자연과 재혼하는 일과 무수히 거듭되는 반복적 재혼을 도모하는 일은 다음의 예상 목표를 설정한다. 하나는 인간 주체를 섹터의 중심축으로 설정하는 일련의 힘으로부터 탈주시켜 인간의 원(原) 고향인 자연으로 인간을 되돌려 주는 일이며, 자연의 본성을 인간 주체에 가져오기 위해 권력과 힘을 분산하여 민주적이고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일과 관계한다.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스스로 그러한” 자연에게 ‘자연의 숨(呼吸)’을 되돌려 주고 인간 역시 ‘쉼(休)’의 공간을 자연 속에서 혹은, 쉼의 한자어처럼, 나무(자연) 옆에서 얻는 일이라 하겠다.  
유념할 것은, ‘지금, 여기’의 여러 유형의 다수의 자연과 재혼하는 일과 무수히 거듭되는 반복적 재혼을 도모하는 일은 현대의 생태학과 생태미학이 견지하는 방향성과 맥을 같이 한다는 것이다. 이론가들에 따르면, 생태학, 생태미학은 “다양성의 복합적 연관성(a complex interrelationship of diversities)”14)으로서의 생물학적, 사회/문화적 다양성의 생태학적 가치를 주목한다. 그것은 ‘학제간 통섭으로서의 생태학, 생태미학과 관련한 연구’15)들과 연결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생태학, 생태미학은 미술뿐 아니라, 도시 디자인에서도 예술가의 상상력을 받아들이고 환경을 생태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기 위해 학제적 만남을 도모한다. 16)
생태학에서 학문 발전을 위한 교육을 위해서도 학제간 연구의 필요성이 거듭 강조되고 있듯이17), 생태미학에서도 창의적인 에듀케이터나 실천가들과의 협조를 통해서 보다 교육적이고 사회참여적인 효과를 이끌어 내는데 관심’을 기울일 필요성18)이 과제처럼 주어진다. 생태학은 물론 생태미학은 ‘재귀적, 환경적, 사회적 활동을 도모’19)하는 모든 것들과 연계된다. 그것은 포용의 생태정치학까지 이르는 학제간 만남으로 확장되는 드넓은 범주를 지향한다.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성찰하는 이번 전시에서도 이러한 생태학 관점에서의 다른 장르와의 학제간 만남은 여전히 주요한 화두가 된다. 북극의 빙산이 녹아나는 작금의 생태적 위기를 대처하는 공학적 탐구, 인공의 환경에 들어온 자연을 대면하는 동양 철학적 사유와 대중 실천의 담론은 물론이고, 전시에서 자연을 대면하는 다수의 대중들을 연구하는 수용미학 관점에서의 관람객 연구와 같은 학제간 연구가 전제되는 것이다. 실제로 이번 전시는 과학적 방법론으로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성찰하는 작가들을 참여 작가로 섭외하거나, 관객들의 자연에 대한 색상이 어떠한 것인지를 질문하는 앙케이트 과정을 통해서 수용론 혹은 수용미학을 실천하기도 했다.   



V. 섹션 2. 자연스럽게, 생각하다 - 출품작 분석 
이번 전시 《자연스럽게》의 ‘섹션 2. 자연스럽게, 생각하다’는 ‘지금, 여기’의 자연과 인간의 관계성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 생태학 관점의 미래를 새롭게 정립해 나가고자 한다. 인간의 ‘문명학’에 의해 상처를 입고 피폐해진 자연과 탐욕의 인간 사이에서 어떻게 ‘양자의 재혼’을 도모하는 생태학을 노정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과제 역시 성찰한다.
흥미로운 것은, ‘섹션 2’의 참여 작가들이 오늘날 생태학의 주요한 두 쟁점을 두루 탐색하고 있다는 것이다. 생태학에 관한 두 쟁점은 다음처럼 요약된다.20) 하나는 인간 중심주의를 벗은 자연과 환경을 테제(thesis)로 삼는 경향의 ‘심층생태론 또는 심층생태학(Deep Ecology)’21)이고 또 하나는 인간이 주체가 되어 적극적인 사회문제로 생태를 탐구하는 ‘사회생태주의 또는 사회생태학(Social Ecology)’22)이다. 전자는 사회 생태주의자로부터 '생태심리학과 생태철학으로서의 기초적 이해를 결여하고 있다'고 비판을 받았고,23) 후자는 '인간 정주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한 협력 관계보다는 경쟁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24)는 점에서 비판을 받았을 뿐 아니라, 공간에만 중점을 둘 뿐 시간의 중요성을 별반 고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25)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심층생태학과 사회생태학의 양 관점은 자연 본성이 남겨진 자연을 보존하고, 파괴된 자연을 회복하고 치유하는 것을 성찰하는 오늘날 실천적 생태학을 위해서 모두 주요하다. 특히, 이러한 양 쟁점은 이번 전시의 ‘섹션 2’의 내용과도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구체적으로 인간 중심주의를 탈주하는 ‘심층생태학’ 경향은 김승영, 홍나겸, 정희승 작가의 작품 속에서 드러나는 반면, 인간 주체의 입장에서 사회적 문제로 생태를 탐구하는 사회생태학‘ 경향은 전현선, 최병석, 김이박 입장에서 가시화되는 것으로 대별해 볼 수 있겠다. 그것이 어떻게 발현되고 있는지를 실제 작품의 분석을 통해서 고찰해 보자. 
김승영의 작품 〈깃발〉(2018)은 지구상의 남아 있는 태고의 원형적 자연이 무엇인지를 더듬는다. 그가 프로젝트를 위해 남극에 체류하면서 느꼈던 자연의 광대한 풍경 속에서 느꼈던 숭고(sublime)의 감정은 일련의 공포 속에서 느끼는 경외의 감정이다. 그것은 18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미의 범주의 귀속되지 않는 존재였다. 작가 김승영이 목도한 남극의 풍경은 칸트(Immanuel Kant, 1724-1804)가 언급하는 무한한 크기가 불러일으키는 ‘수학적 숭고’와 더불어 공포와 같은 불쾌가 경외할 만한 쾌로 전환되는 ‘역동적 숭고’를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무엇이었다. 칸트가 목도했던 장대한 바다나 해돋이 풍경과 같은 초자연적인 ‘자연의 숭고’를 그 역시 지각한 것이었다. 이러한 숭고의 감정은 그의 표현처럼, “태초의 자연과 우리와의 관계”, 즉 한 몸으로 있던 ‘근원적 자연의 인간의 관계’를 우리로 하여금 성찰하게 만든다. 인간의 지배와 구별 짓기에 의해 남겨진 흔적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광활한 순수 자연의 풍경은 그에게 인간 중심주의를 탈주하는 심층생태학의 입장을 견지하게 만드는 것이다, 얼음으로 가득한 순수 백색의 자연, 그것은 인간의 손때가 묻지 않은 태고의 자연이자, 우리가 오늘날 피폐해진 자연과 인간의 관계적 맥락을 재수립하기 위한 근원적 목표 지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 주체로부터 멀찌감치 탈주한 숭고의 자연을 극적으로 시각화하기 위해서 김승영은 터널과 같은 박스형 파티션을 따로 구획하고 그 안에 하얀 소금을 깔고 푸른빛의 조명을 비춘다. 아울러 원경의 소금 언덕 위에 붉은색의 작은 깃발을 꽂아 놓음으로써 거대 자연을 대면한 인간의 지각의 감정들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을 선택했다. 이러한 그의 설치 언어는 자연의 무한한 크기를 인간과 대비적으로 드러내는 장치인 동시에 자연에 대한 인간 정복을 비판하는 메시지를 매우 상징적으로 시각화한다. 



  
홍나겸의 작품 〈디지털 포레스트〉(2018)는 인간이 떠나온 ‘숲’으로 들어간다. 그곳은 인간이 떠나온 대표적인 ‘자연 원형’이자, 자연의 ‘보편적 존재’이기도 하다. 숲 속은 ‘거대한 자연’이기보다 ‘미미한 자연’이다. 그곳은 강아지풀, 개망초, 민들레와 이름 모를 각종 풀꽃들이 자리하고, 이슬을 머금은 나뭇가지들과 작은 곤충 같은 미물들이 거주하는 미시적 세계이다. 이곳 역시 어떠한 인간의 도움도 없이 야생 상태에서 “스스로 그러한 상태”로 존재하는 ‘근원적 자연’ 혹은 ‘심층생태학’의 세계관을 여실히 드러낸다. 
인간은 이러한 자연의 세계를 종종 망각한다. 곤충과 같은 미물의 입장에서 자연을 보지 않고 듣지 않는 이상, 성인이 된 인간 주체에게 미시적 자연이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러한 자연의 미시적 세계를 디지털 장비를 통해서 촬영과 녹음이라는 방식으로 기록하고 편집한 후, 전시장에 커다란 크기로 확대 재생산함으로써 다수의 현대인이 망각하고 있던 미시적 자연의 세계로 관객을 초대한다. 팬이 일으키는 바람을 통해 하늘거리며 흩날리는 거대한 반투명의 실크 막 위에 맺힌 디지털 영상은 관객에게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도움으로 아날로그의 자연을 다시 만나는 환상적인 체험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인간-자연의 근원적 관계를 재성찰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정희승은 8점의 사진 작품들과 아카이브용 도록 5권을 통해서 자연-인공(인간)의 관계를 관조하듯이 기록한다. 자연은 ‘식물원 속 식물들’처럼 이미 인공의 환경 속에 들어와 있고, 인공은 이미 ‘하늘을 찍은 사진을 다시 찍은 사진’처럼 자연과 뒤섞여 존재한다. 작가의 작업실과 식물원을 교차해 보여 주는 시리즈 작업 <무제>(2013)는 인공의 환경 속에서 무심하게 던져진 사물들과 식물 군상을 프레임 안에 포착해서 단순히 보여 줄 뿐 특별한 메시지를 고려하고 있지 않는 듯 무심하다. 그러한 까닭은 정희승이 자연과 인간의 거시 주제를 함유하는 연출적 사진을 별반 고려하지 않은 채, 카메라 앵글 안에 무작위로 들어오는 피사체를 향해 셔터를 누르는 다큐멘터리형 사진 언어를 아주 담담한 어조로 재현해 내고 있기 때문이다. 텍스트 없는 모든 이미지는 다의성을 지닌 채, 바르트의 언급처럼 “떠도는 사슬고리(Une chaîne flottante)”로 의미의 바다를 떠다닐 뿐이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학은 목표를 설정한 작위적인 계획 속에서는 오작동을 되풀이할 따름이다. 인간이 자연에 끼친 패악을 반성적으로 재성찰하고, 인간 주체의 관점을 자연과 관계하는 방식으로 수정하지 않는 이상 생태학적 방향성은 요원할 수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정희승의 정물과 풍경을 대상으로 한 스냅 사진과 같은 무심한 스트레이트 포토는 인간 중심주의를 탈주한 ‘심층생태학’을 매우 단조롭고도 무심한 방식으로 찾아가고 있다고 할 것이다. 




전현선은 멀티플형 회화 작품 〈나란히 걷는 낮과 밤〉(2017-2018)을 통해서 이중적이고 대립적인 것들을 한데 아우르는 통합의 세계관을 드러낸다. 그것은 실제의 낮과 밤 풍경뿐 아니라 하나의 시간과 장소에 수렴될 수 없는 무수한 대조적 관계들의 만남을 촉진한다.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존재들의 상봉을 꾀하는 이러한 조형 전략은 이질적이고도 대립적인 요소들의 ‘한 자리 동석’을 요청한다. 작가는 80호 크기의 캔버스 15개를 독립적으로 작업하고 이 작업들을 다시 컴퓨터의 그래픽 작업으로 하나의 작품으로 모아 놓으면서 파편적인 단편의 내러티브가 하나의 “하나의 풍경”과 같은 커다란 장편의 내러티브를 구성하도록 만든 작품이다. 이 작품은 우리에게 마치 “단어와 문장의 관계”를 그려 보게 만든다. 파편적인 단편의 화면들은 작가의 언급처럼, 비교적 지칭하는 대상이 명확하지만, 이내 그것이 멀티플 회화로 몸집을 키우게 되면서 대상이 불명료해진다. 즉, 단어에 “조사가 붙으면서 만들어지는 문장들은, 뭔가 더 구체적인 것이 되어야 할 것 같지만, 오히려 부정확해지고 불명확해지는 상황”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녀의 회화는 화가 주체가 이미 인공 속에 들어온 자연과 불명료해진 관계 맺기를 통해서 ‘자연-인간’의 관계가 어떠한 관계로 설정되어야 할 것인지를 성찰하는 ‘사회생태학’의 문제의식을 고려하는 작업이 된다. 




최병석은 다양한 제목의 시리즈 작품 <숲 속 생활 연구소>(2014-2017)를 통해서 자연 속으로 들어가서 ‘자연-인간’의 관계를 탐구한다. 작가는 드로잉, 프린트, 만들어진 오브제를 통해서 ‘숲 속에서 캠핑 생활을 영유하기 위한 재기발랄한 발명품 아닌 발명품’을 만드는 것에 천착한다. 그러한 까닭에 작가의 작업은 스스로에게 창작의 유희를 만끽하는 것이 되고, 관객에게는 유쾌한 재미를 선사하는 것이 된다. 로우 테크놀로지 혹은 아날로그적 창작 언어로 만들어진 상상 드로잉과 만들어진 오브제들은 자연 속에 들어간 문명인이 자연과의 관계를, 심각하지 않은 방식으로, 어떻게 재설정해야 되는지에 대해 재기발랄하게 천착한다. 
농작물과 동물의 피해를 모두 최소화하기 위한 장치로 고안된 <두더지 퇴치 장치>는 소음 및 진동에 민감한 두더지를 점프 스틱과 나팔 혼을 이용해서 땅에 진동을 가하고 소음을 발생시켜 내쫓는 장치이다. 두더지를 포획하지 않고 본래의 서식지로 되돌려 보내는 장치인 셈이다. 또 다른 작품 <벌레 잡는 도구> 역시 포획과 살상을 철저하게 배제한 채, 벌레를 쫓아내는 ‘발명품 아닌 발명품’이다. 인간이 자연과 대면하는 바람직한 관계 설정을 ‘사회생태학’의 문제의식으로 천착하되 그 창작의 방법론에 있어서 철저하게 해학과 유머로 작동시키는 작업이라 하겠다. 



김이박은 <이사하는 정원> 프로젝트를 통해서 이미 ‘인공 속에 들어와 있는 자연’을 대면하고 있는 인간의 입장과 ‘자연-인간’의 관계에 대해서 탐구한다. 5점의 회화 작품과 1점의 조각적 설치 작품, 1점의 단채널 비디오 영상 작품 그리고 아카이브 자료들을 통해서 천착하는 이 흥미로운 프로젝트는 타자가 기르던 식물을 대신 맡아 기르면서 일어나는 상황을 조형적으로 탐구한다. ‘의뢰자-식물-작가’의 정서적 유대와 의뢰자의 환경이 식물에 미치는 영향을 살피고 있는 엉뚱한 상상력의 작품들은 ‘인공의 환경 속에 들어온 자연’을 어떻게 대면해야 할지에 대한 인간의 문제의식을 ‘진지하지만 결코 무겁지 않은 사유’로 천착해 나간다. 병에 걸린 식물들의 집단 초상을 그린 〈병충해 시리즈〉(2015)는 인간에 의해 파국의 경지에 있는 대자연의 오늘날 초상에 대한 미시적 보고서이다. 소규모의 푸른 녹지를 그린 〈들어가지 마시오〉(2017)와 작은 나뭇잎을 인형처럼 보이는 여러 사람들이 일으켜 세우는 〈세워야 한다〉(2017)는 인공의 환경 속 자연에 대한 돌봄의 문제의식을 해학적으로 탐구한다. 작가가 소유한 정원을 훼손하는 타자들을 관찰하기 위한 세 달 동안의 CCTV로 촬영한 영상 작품인 <서울시 종로구 명륜동 3가 1-987번지>는 ‘지금, 여기’의 ‘인공의 환경에 들어온 자연’을 수호하려는 인간의 비장한 책무마저 느끼게 만드는 작품이다. 조사 연구자(이론가)와 치료사(실천가)의 역할을 두루 탐색하는 작가의 작품은 인간의 이성으로 생태학을 과제를 고민하는 ‘사회생태학’의 또 다른 조형적 실천으로 평가될 수 있겠다.
 




VI. 에필로그 - 자연스럽게 
오늘날 자연은 ‘부자연’스러운 형태로 인간과 ‘공생 아닌 공생’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인간의 욕망과 그것이 야기한 ‘문명학’에 의해서 구별, 절단되었을 뿐 아니라 원래 인간과 ‘한 몸’이었던 자연은 이제 인간과 결별한 모습으로 ‘인간과의 이혼의 위기 상황’에 처한 채 간신히 생을 이어 가고 있는 중이다. 더욱이 인간의 편의와 안락을 위해 변형과 변종의 피폐해진 모습으로 피해를 입은 채, 자연은 우리의 곁에서 소멸 직전의 상황에 처해 있다. 
《자연스럽게》 전의 마지막 섹션인 ‘시네마 존. 자연스럽게, 시네마’의 두 영상 작품은 이러한 과거로부터 오늘날의 자연-인간의 관계학을 선명하게 보여 준다. 시모네 휴이만스(Simone Hooymans)의 작품 <달콤한 미스터리(Sweet Mysterious)>(2015)는 자연이 인간으로부터 어떻게 버림받고 파괴되었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고, 제리 라젠디크(Gerry Lagendyk)의 작품 <녹색의 상처(A Green Gash)>(2017)는 인공 환경 속에 이미 들어온 자연의 판타지 같은 삶을 그린다. 전자가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의 자연-인간’의 관계를 그리고 있다면, 후자는 ‘현재로부터 미래를 향한 자연-인간’의 관계를 그린다. 양자 모두 동화적 내러티브로 자연과 인간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반자의 관계임을 때로는 우울하고 때로는 유쾌한 판타지로 그려내고 있다. 



“예술이란 절대자의 창조 행위와 자연의 생성 행위에 기대고 있는”26) 존재적 유형으로 평가된다. 그러한 차원에서 자연을 테마로 하는 예술에 있어서는 “자연과 인간 사이를 왕복하는 인간의 자연성을 통해 자연과 소통”27)하려는 노력과 더불어 “자연의 자연성과 인간의 자연성이 미술이라는 형식 속에서 직접 만나되, 어느 한쪽으로 기울이지지 않고 서로 작용하는 것”28)과 같은 태도가 매우 주요해지는 셈이 된다. 즉 “자연과 인간의 행위가 서로 맞물린 구조를 가짐으로써 주(主)와 객(客)의 구별 없이 서로가 서로를 새롭게 하는 생성 구조”29)를 지니는 예술이 될 필요성이 제기된다. 
그것은 비단 ‘자연미술’이란 이름 불리는 예술 행위에만 해당되지 않으며, 자연을 테마로 한 미술에 해당되는 것만도 아니다. 자연의 생태학은 모든 예술과 삶의 주요한 화두가 된지 오래이다. 우리의 인간 주체가 자연으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자연과 한 몸이었던 인간 주체가 자신의 편의와 안락을 위해 자연을 구속하고, 통제함으로써 보다 나은 삶을 영위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에 종지부를 찍은 오늘날, 몰락해 가는 자연이 우리에게 던지는 커다란 메시지를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자연의 죽음은 곧 인간의 죽음이 될 수 있다는 커다란 경고의 메시지를 말이다. 
이제, 자연에게 ‘숨’을 이어 주고 동시에 인간 주체 스스로 ‘쉼’의 공간을 찾는 길은 이러한 자연의 ‘부자연스러운 현 상황’으로부터 ‘자연스러움’을 회복하는 일이다. 그 회복을 위한 해결책이란, 인간의 문명학이 야기한 ‘이혼 선고’를 거두고 자연과의 ‘재혼’이라는 생태학적 요청을 인간 주체가 겸허하게 수용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모든 것들과 머리와 가슴을 맞대고 모색해야 할 인류 전체의 화두이자, 오늘을 사는 미술가의 주요한 화두임에 틀림없다고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의 기획전 《자연스럽게》 는 오늘날의 ‘부자연스러운 자연’을 소생시키기 위한 ‘가장 효율적’이고도 ‘가장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커다란 ‘화두’로 자리할 것이다. 이론적이면서 실천 가능한 화두로 말이다. 그래서 참여 작가들과 관객은 전시를 통해서 오늘도 이렇게 되뇌는 중이다. “자연스럽게!” ●


주석)



출전 /
김성호, 「부자연으로부터 모색하는 자연스러움」, 『자연스럽게』, 논고1, 전시 카탈로그, 2018, pp. 153-163
(자연스럽게 전,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2018. 7. 10-11.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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