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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채성필展 / 불의 땅에서 흙의 땅을 사유하다.

김성호

불의 땅에서 흙의 땅을 사유하다.

김성호(미술평론가, Kim, Sung-Ho)
 
화가 채성필은 서구에서 만물의 본질로 간주하는 4대 원소인 ‘불, 물, 흙, 공기’와 동양 철학에서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오행인, ‘물(水), 불(火), 나무(木), 쇠(金), 토(土)’를 자신의 작품 세계의 바탕으로 삼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연의 근원적 의미를 자신의 작품 속에 드러내고자 한다. 그는 말한다. “스스로 그러하게 하는 것, 과정으로서의 창작(poïétique), 즉, 원래 그러했던 것처럼,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익명의 땅’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화가 채성필의 개인전을 소개하는 이 글은 그의 작품 세계를 분석하기 위해서 상기의 오행을 ‘화수목금토’의 순으로 재배열하고 다음처럼 구성하여 그 내용을 순차적으로 살펴본다: 1. 불(火) - 지금, 여기, 2. 흙(土) - 통섭의 근원, 중간 세계, 3. 물(水) - 중력에 순응하는 놀이 &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의 명상, 4. 나무(木)와 쇠(金) - 상징 역사, 5. 익명의 땅(土) - 연금술의 미학.    



1. 불(火) - 지금, 여기
‘불의 땅’이 여기에 있다. 불이 야기한 문명과 문화는, 인간을 다른 동물들과 차별화되고 세계의 중심이 되게 만든 가장 주요한 근원이다. 불은 인간 세계의 출발이자, 첨단의 물질문명에 이른 ‘지금, 여기’의 현존재에 이르게 한 원동력이다. 불이 금(金)을 만나 오늘날의 인간 세계를 정교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긍정적으로 때로는 부정적으로 말이다. 그래! 불을 찾지 말 것을 그랬다. 불로부터 모든 악이 진행되었다고 하니 말이다. ‘지금, 여기’의 현실계는 인류가 발견했던 불로 시작된 문명의 이기들이 창궐하는 시대를 지나는 한편, 그것으로 인한 패악들로 허덕인다. 아서라! 그렇다고 세상의 근원인 불을 어찌 버리겠는가? 불로 말미암은 패악이라는 것이 인간의 과욕 때문인 것을 어찌 불을 탓할 것인가? 불이 오늘에 이르는 문화뿐 아니라 예술의 세계를 구축했으니 말이다.
생각해 보자! 불은 애초에 신의 영역이었다. 불로 현현한 헤브라이즘 신화 속 야훼,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광야 속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던 야훼, 천상에 간직한 제우스의 번개로부터 탈취한 불씨를 인간에게 전한 그리스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접목취화(接木取火)로 불을 인간에게 전한 중국 고대 신화의 삼황(三皇)이었던 수인씨(燧人氏), 그들의 마음은 따뜻했다. 다만 불을 건네받은 인간의 마음이 점차 사악해졌을 뿐이다. 아니다. 신의 세계도 그러했듯이, 인간의 세계도 선과 악이 함께 존재할 따름이다. ‘불’의 세계란 그야말로 ‘너와 나의 삶’의 맥락(context)이자 ‘지금, 여기’라는 복잡다기한 현실의 지평(Horizont)인 것이다.  




2. 흙(土) - 통섭의 근원, 중간 세계 
화가 채성필은 ‘지금, 여기’의 ‘불의 땅’에서 ‘흙’을 사유한다. ‘흙 그림’을 그리는 그에게 흙은 오행(五行) 중에서 가장 근원적인 요소로 인식된다. 즉 흙을 ‘불, 물, 목, 금’을 모두 품는 존재로 수렴하는 것이다. 
그의 작품 세계에서 이러한 흙의 역할은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흙은 그에게 개인적으로 어린 시절 함께 하던 놀이의 재료이자, 고향으로서의 장(場)이며, 현재까지 그가 미술 창작의 눈으로 세계를 대면하고 이해하게 만드는 근원이다. 아울러 흙은 인간이 떠나온 자연으로서의 원시향(源始鄕)이자, ‘지금 여기’에 소환되는 근원의 세계이다. 한편, 흙은 인간이 ‘주검’의 상태로 다시 회귀(回歸)하는 운명을 예정한 인간의 중간 기착지(寄着地)이다. 즉 ‘흙’이란 인간이 발을 디디고 서 있는 ‘지금, 이곳’의 차안(此岸)이라는 리얼리티의 세계이자, ‘나중, 그곳’을 상정하는 피안(彼岸)이라는 상징의 세계이기도 하다. 엄밀히 말해, 죽음이란 누구에게나 ‘간접 경험’으로 인식되는 세계라는 점에서, 이 ‘흙’의 세계는 차안을 포함하되 차안과 피안을 잇는 기착지로서의 ‘중간계’, 혹은 ‘현실계’와 ‘현실계 이후’를 연결하는 ‘중간계’라는 말이 더욱 부합하겠다. 
그의 실제 작품 안에는 이처럼 많은 요소들을 하나로 함유하는 통합과 통섭이라는 흙의 근원적 위상이 잘 드러나고 있다. 먼저 그는 자신의 ‘흙 그림’을 위해서 눕혀 놓은 종이나 캔버스 위에 엷은 '펄 안료(pearl pigment)'을 4-5회 펴 바른다. 그것은 진주와 같은 광택을 내는 안료로, 작가가 직접 선별한 천연 안료이다. 그것은 반짝이는 은빛을 내면서 금(金)의 세계를 가시화하는 재료이다. 주지하듯이, 안료란 아라비아고무, 합성수지액 등의 전색제(展色劑), 또는 접착제에 섞어서 도포하는 분말상(粉末狀)의 착색제를 가리킨다. 여기에 유성의 용매를 섞으면 유화가 되고, 수성의 용매를 섞으면 아크릴 등의 수성화가 되는 것이다. 천연 안료는 광물(金)을 주원료로 한, ‘자연으로부터 온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흙(土)’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는 일차적으로 눕혀 놓은 종이나 캔버스(木) 위에 흙(土)으로부터 온 천연의 ‘펄 안료(火, 水, 金, 土)’를 발라 자신만의 회화의 밑바탕을 삼는다. 이후 작가는 그 위에 고운 거름망으로 수차례 거른 황토(水, 土)를 천연 안료(火, 水, 金, 土)와 섞어 캔버스에 뿌리듯 도포한다. 수수나 풀로 엮어 만든 붓(木)에 흙물 혹은 ‘안료가 섞인 흙물’을 가득 적셔 추상표현주의의 드리핑 기법과 유사한 흩뿌리기 방식을 구사한다. 그는 이러한 액션 페인팅을 거치면서 캔버스의 표면을 흙물로 도포한다. 여기에 먹물(金)을 추가적으로 뿌리는 것도 그는 잊지 않는다. 이처럼, 캔버스 위에 물과 안료를 한 몸으로 안고 있는 채성필의 ‘통섭의 흙의 회화(火, 水, 木, 金, 土)’의 중심에는 ‘흙(土)’의 세계가 자리한다. 




3. 물(水) - 중력에 순응하는 놀이 &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의 명상 
화가 채성필은 자신의 ‘흙물 회화’의 완성에 이르는 중간 기착지에서 다음과 같은 주요한 창작 과정을 실행한다: ‘캔버스 위에 물과 안료를 머금은 흙’을 바른 후, 그것이 건조한 이후 한 번의 묽은 물감을 다시 도포하고 먹물(金, 水)을 흩뿌린다. 이후 캔버스를 세워 놓고, 물감으로 덮인 캔버스의 표면이 완전히 건조되기 전에 일부의 표면 위에 강력한 수압의 물(水)을 분사시킨다. 물로 표면의 일부를 지우는 과정을 거치거나 캔버스를 세워 안료가 섞인 흙물을 흐르게 놔두면서 자신의 페인팅을 만들어 나간다. 물벼락을 맞은 물감은 이전 단계에 칠해진 먹과 흙을 일부 섞으면서 은빛 바탕 면을 타고 유유히 낙하한다. 중력(重力)을 타고 흐르는 흙물과 물감의 낙하! 그것은 물이 바탕 면의 흙을 깨고 중력의 법칙에 자신의 몸을 의탁한 채 즐기는 잠시 동안의 자유 여행이다. 그것은 물질과 물질 사이에서 창출되는 우연의 효과마저 수용한다. 
채성필이 자신의 회화 창작에 있어서 중력을 끌어들이게 된 계기는 순전히 우연적인 사건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프랑스 유학 초기 그가 좁은 부엌에 화폭을 눕혀 놓고 흙물로 회화 작업을 한창 하던 중 그의 아내가 준비하던 음식을 실수로 바닥에 쏟기에 이른다. 음식이 그림을 망칠까 우려해 그는 순발적으로 화폭을 일으켜 세워 놓고 난장판이 된 부엌 바닥을 정리하게 되었는데 그는 순간 마르지 않은 물감이 중력에 따라 화폭 위로 줄줄 흘러내린 장면을 목도하게 된다. 유레카(Eureka)! 작가의 통제 없이 ‘저절로 그려진 회화’! 그것은 그에게 새로운 발견이었다. 그것은 이 땅의 중력이 만들어낸 필연이었으나 작가에게 그것은 자신이 잠시 부재했던 우연의 순간이었다.  
이 우발적인 사건은 화가 채성필에게 ‘중력에 순응하는 방식으로 필연 속에 우연을 던져두는 새로운 창작의 언어’를 구상하게 만들면서 그의 창작에 있어서의 대전환점을 마련한다. 채성필은 ‘중력’이라는 필연의 세계에 자신의 회화를 던져 ‘예측 가능’과 ‘예측 불가능’ 사이에서 우연적 효과를 건져 올린다. 그도 그럴 것이 중력에 따른 물감의 낙하를 처음부터 끝까지 물감과 중력에만 맡겨둔 채 방임하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그는 흙을 가르면서 낙하하는 물과 물감의 흐름을 지켜보다가 캔버스를 기울이거나 캔버스의 방향을 바꾸어 흐름을 조율하면서 간헐적인 개입을 지속한다. 하지만 그는 낙하하는 물질의 관성을 잠시 다른 방향으로 되돌리면서 중력에 가끔씩 개입할 뿐, 원칙적으로 중력에 순응하는 태도를 지속적으로 관철한다. 그런 면에서 그의 ‘필연 속 우연 만들기’와 ‘중력이 만드는 우연 안으로의 개입’은 중력에 순응하는 가운데서 벌이는 일종의 ‘놀이와 유희’가 된다.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만유인력과 지구의 자전에 따른 원심력이 합해진 중력’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내에서 언제나 작동하고 있는 실재이나 그것이 너무 일상적인 것이어서 ‘보이지 않는 것’이나 다를 바 없음을 말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마치 공기나 바람 또는 그곳을 점유하는 주파수의 파동과 같은 존재이다. 보이지 않는 실재! 따라서 ‘중력을 본다’는 표현은 ‘중력을 인식한다’는 표현과 닮은꼴이다. 실재하고 있으나 일상에 만연해서 차라리 ‘보이지 않는 것’이라 할 만한 것들은 ‘중력’뿐만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공기나 주파수의 파동은 물론이고 시간과 역사의 개념 역시 우리와 늘 함께 하고 있으나 쉬이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채성필의 작품에서 우리 눈에 쉬이 ‘보이지 않는 것’들은 많다. 앞서 살펴본 ‘중력’은 물론이며, 행위, 흐름, 시간, 역사와 같은 개념들이 그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이러한 개념들은 ‘보이는 것들’의 안/옆에서 작동한다. 구체적으로 이러한 개념 안에는 그의 작업에서 ‘물’로 비우고 지운 ‘파괴의 흔적’과 그것으로 인해 남게 되는 ‘부재의 흔적’이 함께 연동된다. 유념할 것은 여기서 ‘파괴의 흔적’은 소멸을 이끌지 않고 오히려 ‘흙물의 흐름이 창출하는 또 다른 생성’을 이끌어 낸다는 것이다. 그것은 혹자에게는 산의 형상으로, 어떤 이에게는 들판의 형상으로, 또 누군가에게는 바다의 형상처럼 인식되는 무엇이다. 
한편 ‘부재의 흔적’은 이 ‘파괴의 흔적(파괴가 아닌 또 다른 생성의 흔적)’ 안에 있지 않고, 그 옆에 존재한다. 은빛을 내고 있는 ‘펄 안료’의 질료로 꾸려진 바탕 면이 바로 그것이다. 이 또한 비워진 공간이지만, 혹자에게는 암벽의 모습으로, 누군가에게는 들판 속 커다란 바위의 형상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이처럼 ‘파괴로부터의 생성’, 그 옆의 ‘남겨진 것의 흔적’을 탐구하는 그의 작업은 ‘보이는 것들의 안/옆’에서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성찰’을 모색한다고 할 수 있겠다. 필자는 그것을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의 명상’으로 부른다.  
이처럼 그에게 있어 ‘물’의 미학이란 ‘지우기의 창작 과정’을 통해서 역으로 ‘회화하기’를 실천하는 것이자, 소멸의 방식으로 생성을 실천하는 것이 된다. 가히 놀이, 유희의 태도와 더불어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의 명상이라 할 것이다. 




4. 나무(木)와 쇠(金) - 상징 역사 
채성필의 ‘흙물 그림’ 안에는 나무와 쇠가 있다. 그것은 자연(木)과 인공(金)의 세계로 대별된다. 마치 우리가 앞에서 ‘지금, 여기의 현실계(火)’와 ‘질료의 근원과 인간 세계의 시원(土)’으로 대별해서 살펴보았던 대립과 같은 차원이다. 이 사이를 흐르고 있는 물길(水)은 역사(歷史)에 대한 숨겨진 상징이다.
보라! 채성필의 그림 속 ‘풍경이자 풍경 아닌 그림’에는 바위(金)를 가르고 물길을 만들어 지나는 곳곳에서 푸르른 풀(木)이 자라난다. 때로는 황토색 가득한 광물질의 무엇처럼 보이는 땅을 가르고 누런 흙길을 만들어 나가거나, 누런 폭포수를 혹은 허연 빗줄기를 지면 위에 한가득 쏟아내기도 한다. 그것은 혹자에게는 푸르른 하늘 위에 쏟아지는 따스한 햇볕처럼 보이거나, 파도가 넘실대는 푸르른 바다의 풍광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 어떤 그림은 짙푸른 카펫 위에서 사람들이 서로의 손을 잡고 군무를 추고 있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이처럼 채성필의 회화는 돌이 가득한 산등성이, 혹은 황량한 벌판에 피어나는 들풀과 바위, 혹은 심연의 바다 혹은 사람들처럼 보이는 이미지를 담고 있기도 하지만, 그것은 관자에 따라 때로는 풍경처럼, 때로는 비형상의 추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특히 최근에 발표했던 그의 블루 시리즈에는 이러한 비정형의 추상처럼 보이는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수직과 수평의 혹은 직선과 곡선의 패턴화된 문양처럼 보이는 이미지는 무엇인지 확증할 수 없는 추상으로 현현된다.  
그의 블루 시리즈 작업은 대개 ‘블루의 역사’라는 제목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색에 관한 역사이기보다 블루로 상징되는 역사를 의미한다. 블루란 희망이자, 우울의 감성을 동시에 함유하는 만큼, 진보와 질곡의 역사를 상징한다. 작가 노트에 나타난 그의 진술을 보라. 

“블루는 멍이고 희망이며, 대지를 감싼 바다이고 역사를 지켜본 하늘이다.”

그렇다. 점점이 떨어진 푸른 점들이 가득 찬 그의 작품은 세월호 특별법을 요청하고 비뚤어진 개인적 욕망으로 국가를 운영했던 한 지도자에 대한 탄핵을 요구하던 한국의 ‘촛불 집회’를 생각하면서 그린 것이다. 굽이치는 바다의 물결들처럼 보이는 이미지 또한 그가 멀리 프랑스에서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역사를 미디어를 통해서 목도했던 시절에 그린 작품이다. 
다분히 추상적 이미지인 그의 작품이 제시하고 있는 ‘역사’라는 제명은 그런 면에서 상징이다. 작가가 특정 역사를 주목하면서 그린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보편적인 역사 자체에 대한 작가의 회화적 진술이 된다. “인류 사회의 변천과 흥망의 과정, 또는 그 기록”이라는 ‘역사’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역사가 ‘과거에 있었던 사실에 대한 기록이자, 해석’임을 우리에게 전한다. 역사가 대개 ‘문자의 발명 이후, 문헌 자료에 의해서 기술되는 역사 시대’를 조명하는 과업임을 생각할 때, 작가 채성필이 이미지로 접근하는 역사는 이 문자의 시대 앞뒤를 모두 포함하는 것이라 하겠다. 생각해 보라. “선사 시대는 인류 역사의 95%를 차지한다”고 전해진다. 이 시기는 고고학이 담당하는 시대이다. 따라서 채성필이 이미지로 진술하는 역사란 선사 시대, 역사 시대를 구분하는 연구 방법론을 넘어서 ‘보편적인 의미에서의 역사’ 자체를 상징한다. 역사철학적 입장에서 원(源)역사, 전(前)역사, 혹은 역사 후기 등의 시기를 모두 아우르는 역사, 즉 특수성을 함유하는 보편성 안에 특수한 역사를 모두 품는 상징, 즉 ‘상징 역사’라 하겠다. 




부분


5. 익명의 땅(土) - 연금술의 미학   
화가 채성필은 ‘지금, 여기’의 ‘불(火)의 시대’에서부터 흙으로 가는 여정을 시각화한다. 흙의 현현(顯現)이란 곧 ‘땅’을 가리킨다. 그것은 제국이 선을 긋고 정복한 소유의 땅이 아니라 태초부터 자유로운 ‘온새미로’의 땅이다. ‘온새미로’란 “가르거나, 쪼개지 않고, 생김새 그대로, 자연 그대로, 언제나 변함없이”라는 뜻의 순우리말이다. 그것은 정복자들이 적국, 이방이라는 이름으로 주체가 타자와의 사이에 벽을 쌓아 만든 ‘홈이 패인 땅’이 아니라 유목의 삶이 지속되는 무경계의 ‘매끈한 땅’이다. 그것은 누군가의 소유로 명명화된 땅이 아니라 인간 모두의 원향(源鄕)인 대자연의 어머니로서의 땅이다. 채성필은 이러한 땅을 ‘익명의 땅’이라 부르고, 자신의 회화 속 ‘흙’의 역사를 ‘익명의 땅’으로 기술한다. 그의 익명의 땅은 홈을 만들어 분별의 틀 속에 가둔 경계의 땅이 아니라 한 덩어리로서 존재하는 모두의 땅이다. 그것은 ‘불, 물, 나무, 쇠, 흙’이라는 오행을 모두 품은 덩어리로서의 존재이다. 따라서 그것(곳)은 많은 것들의 통섭적 만남을 가능케 한다. 가히 ‘연금술(鍊金術)의 미학’을 품은 땅이라 하겠다. 
연금술이란 서구에서 18세기에 이르기까지 ‘금(金)의 정령’을 찾기 위해 이질적인 것들의 변증법적 결합을 지속적으로 모색했던 실험이다. 아니 더 정확히는 찾기를 부단히 노력했으나 끝내 찾지 못했던 물질인 ‘현자의 돌(Philosopher's Stone)’을 지향하는 변증법적 실험이라 할 것이다. 그것은 동양에서 ‘만병통치약, 불사약’이란 다른 이름으로 찾고 헤매었으나 찾을 수 없었던 상상의 물질이기도 하다. 
채성필의 회화 속에는 ‘현자의 돌’을 찾기 위한 이러한 이질적인 것들의 변증법적 결합이 지속된다. 그것들은 수없이 많은 대칭과 만남을 선보인다. 그것들은 ‘안/밖, 수직/수평, 직선/곡선, 형상/비형상, 구상/추상, 정형/비정형’처럼 대비되는 속성들이다. 또한 그것들은 ‘빠름/느림, 채움/비움, 그림/지움, 지움/남김, 드러냄/숨김’과 같은 대비되는 행위들이기도 하다. 그 뿐인가? 그의 회화 속에는 서양의 액션 페인팅, 그리고 동양의 준법(皴法)이 만나고, 인간과 자연이 만난다. 또한 ‘중력에 대한 순응과 저항’이 함께 만나며, ‘중력 위에서의 유희, 놀이’가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의 명상’과 함께 만난다. 이것들은 서로를 만나고 서로를 넘나든다. 
연금술이 ‘현자의 돌’을 찾는 과정에서 성취했던, 화학, 물리학, 약학에서의 성과가 오늘의 현대 문명을 일구었듯이, 화가 채성필은 오늘도 발전적 탐구를 위해 연금술의 미학을 듬뿍 담은 자신의 작업을 실험하고 또 실험해 나가는 중이다. 연금술사들에게 있어 비금속(卑金屬)을 금으로 변화시키는 일은 ‘현자의 돌’을 찾는 과정 중에 제기된 부수적 목표였을 따름이다. 채성필에게 있어서도 이질적인 것들의 변증법적 결합을 통한 ‘가장 이상적인 조형 언어의 발견’과 같은 것은 그의 목적이 아니다. 그에게 더 주요한 것은, 포이에티크(poïétique)라고 하는 ‘과정으로서의 창작’ 자체가 주요할 따름이다. 즉 대비되는 개념들의 변증법적 결합을 통한 지속적인 실험을 통해서 자신이 담고자 하는 주제 의식, 즉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익명의 땅’이라는 주제 의식을 관성에 매몰되는 일 없이 늘 새로운 마음 자세로 탐구해 나가는 것 자체가 유의미할 따름이다. 바슐라르(Gaston Bachelard)가 언급하는 ‘물질적 상상력(imagination matérielle)’ 혹은 그가 말하는 ‘땅의 꿈’을 실현시키는 ‘시(詩)적 상상력’을 발현시키면서 말이다. 이러한 부단한 조형 실험과 노력은 그에게 보다 더 발전적인 예술의 성취를, 관객에게는 보다 더 풍요로운 예술 향유의 체험을 선사하게 될 것이다. 그는 오늘도 불의 땅에서 흙의 땅을 사유하고 있는 중이다.  ●

출전 /
김성호, 「불의 땅에서 흙을 사유하다」, 『채성필』, 개인전 카탈로그 서문, 2018. 
(채성필 전, 갤러리 그림손, 2018. 11. 28-1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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