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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정복수 / 아포리즘으로서의 몸의 회화

김성호

아포리즘으로서의 몸의 회화


김성호 (미술평론가, Kim, Sung-Ho)



정복수의 갤러리 세인에서의 이번 개인전은 ‘몸의 극장’이라는 화두를 던진다. 발표를 하지 않았던 구작들과 올해의 신작들을 대거 선보이는 이번 전시에도 몸은 어김없이 등장한다. 아니 몸만 등장한다. 그가 그리는 그림 속 인간의 몸은 무엇인가? 



1. 그것은 덩어리로서의 몸이다. 
정복수의 회화 속에서 팔다리가 잘린 몸은 해체를 통해 재구축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의 작품 〈마음의 일기〉(2003)를 보라. 정복수가 그린 신체는 팔다리가 잘린 채 그저 덩그러니 얼굴과 몸만 남긴 ‘덩어리로서의 몸’이다. 또는 팔다리가 몸 안으로 잠입해서 소멸한 덩어리로서의 몸이다. 따라서 ‘몸은 고상한 정신, 영혼을 가두는 감옥이며, 그저 껍데기일 뿐’이라는 플라톤적 사유와 그것을 계승하는 서구의 구조적 사유와 그 모든 배후를 파괴한다. 정복수의 회화 속 몸은 외려 정신과 몸을 하나로 아우르는 동양의 몸관을 끌어안는다. 
이러한 인식은 철학자 니체(F. W. Nietzsche, 1844-1900)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언급한 몸관을 닮아 있다. “나는 전적으로 몸일 뿐, 그 밖의 아무것도 아니며, 영혼이란 것도 몸에 깃들어 있는 그 어떤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 정복수의 회화 속 몸은 니체의 몸관을 평가한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의 다음의 언급, 즉 “삶의 생성적 주체는 자아가 아니라 몸이다”라는 사유를 그림으로 실천하는 셈이다. 작품 제목인 ‘마음의 일기’에서도 보듯이 정복수의 회화 속 몸은 정신과 나눠 생각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몸은 정신이자, 마음이다 이성, 정신, 영혼, 몸을 모두 ‘한 덩어리로서 안은 몸’이자 주체와 타자가 상호작용하는 몸이다.   


정복수, 마음의 일기, 110.5 × 121cm, 판넬에 유채, 2003




2. 그것은 욕망하는 몸이다. 
정복수의 몸, 즉 그가 그리는 몸은 이성, 정신, 영혼뿐 아니라 욕망을 가득 안은 몸이다. 인간의 실존을 확인하고 인간의 존재 이유가 체화(embodiment)가 된 욕망으로서의 몸이다. 그것은 억압으로 인한 결핍과 충족의 좌절로부터 오는 프로이트(S. Freud, 1856-1939)식의 욕망(Wunsch)이 아니라 결코 충족될 수 없음에도 그 자체의 지속적인 생산을 끊임없이 지속하는 라캉(J. Lacan, 1901-1981)식의 욕망(désir)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대타자(Other, 大他者)의 욕망’이다. 즉 ‘다른 누군가’라는 타자가 욕망한(했던, 하고 있는) 대상에 대한 욕망이자 무의식에서 발원하는 욕망이다. 욕망이란 개인 주체의 특정한 대상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을 지각하고 그것들과 관계하면서 형성되는 사회적 구성물이기 때문이다. 
보라! 정복수의 작품 〈배설의 법칙〉(1992)에서 ‘나체의 여성’은 발기한 음경을 가지고 있는 ‘나의 욕망의 대상’이기 이전에 발기된 음경을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이, 즉 ‘타자의 욕망’의 대상이다. 욕망은 욕구와 달리 결코 충족될 수 없기에, 욕망의 대상은 계속 연기되고 욕망은 지속적으로 재생산된다. 그런 의미에서 남성의 시지각에 의해 포섭되는 ‘나체의 여성’은 특정한 타자이기보다 궁극적으로 대타자로서의 어머니를 지향하는 것이라 하겠다. 남성에게 있어 ‘대타자의 욕망, 혹은 대타자를 위한 욕망’이란 결국 근원적 대타자인 어머니에 대한 근친상간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물론 근원적 대타자인 어머니를 대상으로 욕망하는 주체는 남성뿐 아니라 여성을 구별하지 않는다. 아울러 그 욕망이란 무의식 속에서 끊임없이 작동시키는 ‘계획 없는 생산’이다. 그것은 윤리적 공동체 속 금욕주의적 도덕도 허하지 않는다. “신이 죽었다”는 니체의 극단적인 사유가 불러온 ‘니힐리즘(nihilism)’은 패배적 허무주의로부터 자유주의적인 긍정적 니힐리즘을 모색한다. 우리가 유념할 것은 정복수 또한 이러한 ‘긍정적 니힐리즘과 긍정적 자유주의’를 요청한다는 것이다. 


정복수, 배설의 법칙, 130.3 × 193.9cm, 캔버스에 유채, 1992




3. 그것은 디오니소스적인 몸이다.
정복수의 회화 속 몸은 이성적이기보다 감성적임을 표방한다. 합리적 이성보다 뜨거운 감성을 배태한 존재이다. 니체가 저작 『비극의 탄생』에서 언급했던 아폴론적 충동(Apollonian impulse)과 디오니소스적 충동(Dionysus impulse)을 빌어 말하면 정복수의 회화 속 몸은 가히 '디오니소스적(Dionysian) 몸'이라 할 것이다. 아폴론적’인 것이 ‘개별화의 원리, 질서, 척도, 조화, 이성, 합리성’을 상징하는 반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란 ‘무매개의 원리, 파괴, 자유분방함, 도취, 격정, 황홀, 하나로서의 일체’ 등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니체는 두 예술 충동이 대립적이지만 서로를 요청한다고 말하고 있듯이, 정복수의 회화 속에서도 양자는 서로의 위치를 점하면서도 전반적으로 디오니소스적 충동이 가득하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살펴볼 수 있다. 
정복수의 작품 〈생존학습〉(1994)에는 팔이 아예 없는 인간들이 속박을 당한 듯한 제스처로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몸을 잔뜩 구부리고 있거나 그 상태에서 걷기를 시도하고 있다. 뱀이나 악어와 같은 파충류의 피부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거나 알 수 없는 벌레들이 몸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몸은 추악하다. 작품 속 불구의 몸은 보는 이에게 각기 다른 감정들을 전한다. 그러나 대개 그것은 불편하거나 더럽고, 추악하며 공포스러운 것이다. 미학과 오랫동안 별리되었던 ‘추(醜)의 미’이거나 바로크 시대 이래로 중심 담론의 변방으로 밀려났던 ‘기묘한 공포(Uncanny Fear)’, ‘그로테스크 표현주의(Grotesque Expressionism)’와 같은 것들이다. 
정복수는 인간의 몸을 왜 이리 끔찍하게 표현해 내고 있는 것인가? 인간을 부정적인 악의 형상으로 보려는 것인가? 아니다. 그의 회화 속에서 추악한 몰골을 하고 있는 인간의 몸이란 긍정을 발현하는 장(場)이다.  “끔찍하고도 의문스러운 것들을 표현해낸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예술가의 힘과 훌륭함이다 : 그는 그것들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염세적 예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예술은 긍정한다.” 이러한 니체의 언급은 어떠한가? 마치 화가 정복수를 가리키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니체에 따르면 비극은 체념을 가르치지 않는다. 예술 작품은 예술 창조의 상태를, 도취의 상태를 자극하는 작용을 한다. 그래서 이러한 비극적 예술은 본질적으로 삶에 대한 긍정이며 축복이다. 니체의 관점이 이러하듯이 정복수의 그로테스크적인 회화는 삶에 대한 긍정으로 충만한 것이라 평가할 수 있겠다. 니체가 비극적 예술을 “삶을 신격화하는 경지”라고 불렀듯이, 우리는 정복수의 회화를, 그가 작가노트에서 진술한 대로, 가히 ‘몸의 종교학’이라 할 만하다: “나의 그림은 몸에 대한 연구(몸의 종교학, 몸의 추억, 몸의 실존주의, 몸의 현상학)이다. 내가 그린 몸은 밥이고, 사랑이고, 종교고, 전쟁터고, 희망이고, 세상이고, 우주다.”


정복수, 생존 학습, 130.3 × 162.2cm, 캔버스에 유채, 1994



4. 나오는 말 : 아포리즘으로서의 몸의 회화  
정복수의 회화가 아폴론적이기보다 디오니소스적이라고 설명한 주장을 따라갈 때, 우리는 그의 회화가 지닌 특징을 로고스(logos)를 취하기보다 파토스(pathos)를 취하는 무엇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주지하듯이, 전자가 ‘이성, 진리, 논리, 법칙, 비례, 설명’ 등을 가리키는 반면, 후자는 흔히 ‘감성, 정념(情念), 충동, 정열’ 등을 가리킨다. 그래서 정복수의 회화를 두고 ‘추의 회화’, ‘그로테스크 회화’와 같은 평가를 넘어 이성보다는 감성에 충실한 ‘파토스의 회화’라 할 만하다. 
그런 면에서 필자는 그의 회화 앞에서, ‘비논리적인 회화, 말보다 감성에 충실한 회화, 말이 필요 없는 회화, 가슴으로 그리고 가슴으로 느끼는 회화’와 같은 세간의 평가마저 긍정적으로 검토하면서 이번 전시를 위한 하나의 네이밍을 전한다. ‘아포리즘(aphorism)으로서의 몸의 회화’가 그것이다. 아포리즘이란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금언, 격언 등으로 번역되는 “깊은 체험적 진리를 간결하고 압축된 형식으로 나타낸 짧은 글”이다. 그것은 장문의 논리적 진술을 거부하는 단문의 감성적 발화(發話)의 결과물이다. 로고스를 거부하는 파토스의 뜨거운 언어이다. 그렇다. 정복수의 아포리즘으로서의 회화는 뜨겁다. 차가운 이성에 의해서 사유되고 정돈되는 인간상이기보다 그가 체험했고 체험하고 있는 뜨거운 심장을 가진 인간에 대한 감성적 인식에 의한 인간상이기 때문이다. 
정복수의 아포리즘으로서의 회화는 마치 ‘신의 죽음을 선언한 자리에 몰려드는 허무주의’를 대면하면서 초인을 기대했던 니체의 결단처럼, 비장하다. 파괴, 추함, 고통까지 아름다운 삶의 모습으로 받아들이는 긍정적 태도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정복수의 최근작인 〈인생을 찾는 사람〉(2018)에서는 골판지 위에 그려진 ‘옆으로 눕듯이 힘겹게 걷고 있는 인물상’을 볼 수 있는데, 우리는 여기서 ‘지금은 당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황일지라도 그것 역시 아름다운 인생’이라는 작가의 긍정적인 태도를 살펴볼 수 있다.


  
정복수, 인생을 찾는 사람들1, 16.3 × 40.4cm, 골판지에 색연필, 2018
정복수, 인생을 찾는 사람들2, 17.9 × 34.3cm, 골판지에 색연필, 2018
  
글을 마무리하자. 정복수의 아포리즘으로서의 몸은 ‘우리의 삶이 실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제한다. 추, 언캐니, 그로테스크, 디오니소스, 파토스 언어 속에서 결코 부정과 낙망이 아닌 ‘긍정과 희망’의 언어로서 말이다. 우리의 실제적 삶은 이번 전시명인 ‘몸의 극장’과 같다. 여기 극장의 무대에 오른 정복수의 관객을 향한 ‘방백(傍白)’이 있다. 마치 아포리즘과 같은 투로 적힌 정복수의 작가노트가 그것이다. 그것을 아래에 소개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

인간의 껍데기는 그리고 싶지 않다.
나의 그림은 치장하지 않는다.
나의 그림은 의식화되고 단위화되는 서구 문명(미술)에 반발한다.
나의 그림은 몸으로 그리고 투시적으로 세상을 관찰한다.
나의 그림은 밑바닥부터의 저항이다.
나의 그림은 더러운 삶의 현실에 대한 구토와 절망의 조형적 몸부림이다.
나의 그림은 인간 내면에 내재된 폭력적 진실만이 가림 없이 드러낼 뿐이다.
나의 그림은 생존을 위한 인간 번뇌와 육체의 허망함에 대한 기록이다.
나의 그림은 영원히 고독한 인간의 심리지도이다.
나의 그림은 인체(물질)와 인간(정신)의 모든 것을 표현하고자 한다.
나의 그림은 몸에 대한 연구(몸의 종교학, 몸의 추억, 몸의 실존주의, 몸의 현상학)이다.
내가 그린 몸은 밥이고, 사랑이고, 종교고, 전쟁터고, 희망이고, 세상이고, 우주다. 
(정복수, 작가노트, 2018)


출전/
김성호, 「아포리즘으로서의 몸의 회화」, (정복수 개인전 서문,  2018. 10. 12-26, 갤러리 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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