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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성병희 전 / 내 안의 공포

김성호

내 안의 공포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온몸에 타투가 가득한 회색과 검정색 톤의 칙칙한 화면의 채도를 높이는 것은 붉은색! 그래, 핏빛이 낭자한 화면이다. 붉은 머리, 피부가 벗겨진 채 내팽개쳐진 머리, 혹은 피부가 벗겨진 듯 온통 빨간색으로 뒤덮인 손, 핏발이 선 충혈된 눈, 하얀 뼈를 드러낸 채 배가 갈라진 아기, 그 주검에서 쏟아져 나온 심장과 내장과 같은 각종 장기들, 절단된 팔다리, 손에 가득 묻힌 피가 관객의 몸을 잔뜩 움츠리게 만든다.  

 좌) 성병희, 질식(Suffocated), 162x131cm, acrylic on canvas, 2017
 우) 성병희, 직면(confrontation), 53x65cm, acrylic on canvas, 2017.



I. ‘공포 기억’과 타자로부터의 폭력  
불편한 대면! 왜 작가 성병희는 이러한 그림을 그릴까? “내가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어둠 때문”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녀는 말한다. “누구에게나 자기 안에서 자기 자신을 갉아먹는 것이 하나씩은 있겠지만, 내게는 이미 들어내거나 없앨 수 없는 마음 한가운데 심연의 우물이 있고, 그것이 이미 내 자신이 돼 버렸다. 내게 그린다는 것은 그것에 완전히 잠식당하지 않으려 발버둥 치며 살아남는 과정이고, 그것을 마주 보고 꺼내서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행위이다.”
작가 성병희는 “점차 심화되고 커져만 가는” ‘체험적인 어둠의 세계’를 어둠 속에 그대로 묻어 둘 수 없는 강렬한 욕망으로부터 ‘회화’를 시작한다. 그것은 타자의 폭압으로부터 얻은 마음의 상처와 그것으로 얼룩진 불편한 진실이다. 그 상처는 좌절, 분노, 증오와 같은 끝내 분출되지 못한 감정의 찌꺼기로 냄새를 피우는 불쾌한 무엇이며 그 진실은 기억하기 싫은 데도 자꾸 스멀스멀 자라나는 추악한 괴물과 같은 무엇이다. 그 둘은 공포에 대한 끔찍한 기억 즉 ‘공포 기억’으로부터 유발한다.  
아서라! ‘공포 기억’은 작가 성병희의 것만이 아니다. 우리에게도 그러한 기억은 있다. 냉혹할 뿐만 아니라 비열하고 잔인하기까지 한 누군가로부터 받은 상처 혹은 ‘공포 기억’이 굳이 아니더라도 우리에겐 ‘나와 끝내 합치할 수 없었던 타자’로 인한 자잘한 상처로부터 심대한 상처에 이르는 ‘공포 기억’을 저마다 흔적처럼 갖고 산다. 화해와 용서를 미처 거칠 틈 없이 세월 속에 묻어 둔 쓰라린 심연의 상처와 공포에 대한 기억을 말이다. 그것은 친밀했던 타자이거나 제도 속 타자와 같은 무수한 타자들로부터 ‘거저 얻은’ 유쾌하지 못한 선물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망각이란 이름으로 그것을 머리에서 지우고 가슴 한쪽에 묻어 둔 채 살고 있지만, 그것은 불현듯 현실로 튀어나와 우리를 괴롭히기도 한다. 
작가 성병희는 제도를 포함한 모든 타자로부터의 폭력과 폭압이 야기한 상처와 ‘공포 기억'을 안고 사는 우리 모두에게 이야기한다. 묵은 상처가 딱지를 만든 무감각해진 기억의 무덤과 치유하지 못한 상처가 빠뜨린 체념과 허무의 늪으로부터 탈주하라고 말이다. 그녀가 제시하는 탈주의 길은 기억 속 직접적인 가해자에 대해서 용서와 화해를 도모하는데 있지 않다. 증오와 분노를 표출하되, 그 대상을 ‘직접적인 가해자’로부터 ‘보편적인 가해자 일반’으로 향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모든 대상을 적으로 만들고자 함인가? 그렇지 않다. 제도와 타자가 만든 폭압과 폭력으로부터 야기된 상처를 치유하고 더 이상의 공포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것이다. 내 안에 공포가 살고 있기 때문이며 그것을 궁극적으로 제거해야 하기 때문이다.  


성병희, 유폐(confinment), 162x131cm, acrylic on canvas, 2018.

좌) 성병희, 질식(Suffocated), 162x131cm, acrylic on canvas, 2017.
우) 성병희, 나의 아름다운 도살장(my wonderful slaughter house), 131X162cm, acrylic on canvas, 2017.


좌) 성병희, 조류공포증(ornithophobia), 91x117cm, acrylic on canvas, 2016
우) 성병희 희생양(scapegoat), 162x131cm, acrylic on canvas, 2018



II. ‘내 안의 공포’와 은유의 잔혹 동화 
작가 성병희는 ‘거대한 공포’로부터 벗어나고자 자신 안에 선잠을 자고 있는 ‘작은(작지만 때로는 큰)’ 공포를 깨워 소환하고 ‘이야기하기 싫은 공포’를 이야기한다. 그것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작가 스스로도 토악질이 날 만큼 거북하고 죽을 만큼 싫은 일이다. 그러한 까닭일까? ‘자신 안의 공포’를 불러 치유하고 타자 일반의 ‘공포스러운 거대한 폭력’에 맞서는 그녀의 작업은 그래서 은유의 전략을 취한다. 때로는 인간과 동물, 식물, 사물을 동일화하는 방식으로 화면을 구성하거나 자신의 개인의 체험과 더불어 제도 일반에 만연한 폭력과 폭압으로 점철된 일련의 사회적 사건들을 중첩시켜 화면을 재구성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 그것이다. 
보라! 그녀의 작품들에서 석류의 흘러넘치는 생생한 과즙은 잔혹한 인간 살해로 말미암은 처연한 핏빛으로 은유되며, 찬란한 붉은색 옷을 입은 금붕어들의 자유로운 유영은 선혈이 낭자했던 트라우마로 두려움에 떨고 있는 불안한 방황으로 은유되기도 한다. 또한 붉은 사과를 갉아먹는 붉은 개미의 건강한 생명력은 한 순간에 생명을 처참하게 유린하는 특정 집단의 불온한 욕망이 야기한 무서운 폭력으로 은유되며, 하늘을 유유히 나는 평화로운 비둘기들은 ‘적국의 야만적인 스파이들’로 은유되기도 한다. 하물며 생선과 동물의 절단된 사체는 어떠한가? 그것은 자연스럽게 인간의 주검을 떠올리게 만든다. 작품 속 동식물들과 인간을 연결한 붉은 실은 서로가 궁극적으로 같은 존재임을 피력한다. 
작가 성병희의 작업에서 과일, 곤충, 생선, 동물과 같은 존재는 인간의 은유임과 동시에 인간의 ‘동화적 내러티브’와 같은 관성적 인식에 제동을 걸고 ‘인간 폭력’을 은유한다. 따라서 그녀의 동식물 은유는 ‘어린이를 위한 동화’보다 ‘성인을 위한 잔혹 동화’와 같은 색채를 드러낸다. 그녀가 어두운 폭력과 살벌한 공포의 이미지 속에 ‘블랙 유머’를 천연덕스럽게 담아내면서 잔인한 사회에 대한 풍자적 비판을 수시로 감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 〈새·인간〉(2017)은 쇠사슬로 손발이 묶여 있는 새의 얼굴을 한 인간을 통해서 잔혹 동화와 같은 내러티브를 드러낸다. 집단 사회에서의 다름에 대한 따돌림, 이주민과 소수자에 대한 냉대와 같은 이 시대의 억압적 현실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것이다. 날 생선을 토막 내면서 식사를 하고 있는 장면을 그린 〈화려한 식사〉(2013)는 또한 어떠한가? 작가는 가장 일상적이고 평화로운 식사 장면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폭력적인 상황을 발견하고 고발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일상에서 예사롭게 벌어지는 ‘평화를 가장한 폭력’을 곱씹어 보게 만든다. 


좌) 성병희, 두 가지의 다른 나, 130 × 194cm, acrylic on canvas (34 × 87 ×17cm, acrylic on papermache), 2013. 

우) 성병희, 화려한 식사, 130 × 194cm, acrylic on canvas, 2013. 

 


좌) 성병희, 맨-홀(Man-hole), 162 × 131cm, acrylic on canvas, 2016. 
우) 성병희, 위험한 놀이, 117 × 91cm(2ea), acrylic on canvas, 2013. 

좌) 성병희, 생각의 무덤(tomb of thinking), 73 × 52.5cm, acrylic on paper.
우) 성병희, 강요된 기억의 파편(Fragments of forced memory), 162 × 130cm, acrylic on canvas, 2016.



III. ‘내 안의 공포로부터의 탈주’와 그로테스크 세밀화 
물감의 마티에르를 최소화하고 마치 중세나 이슬람의 세밀화(miniature)처럼 형상 하나하나를 정성스럽게 그려나가는 그녀의 회화 작법은 폭력적인 이미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의 하나이다. 세밀화의 라틴어 어원인 미니야르(miniare)는 ‘붉게 칠하다’를 의미하는데 그것은 원래 ‘문자를 장식하는 붉은색 문양’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이후 삽화나 장식에 이용되는 화법으로 통칭되었는데, 이것은 그로테스크(grotesque)가 아라베스크 문양과 상상의 동식물을 혼합한 ‘장식을 위한 그림’으로 출발했던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따라서 이 둘의 맥을 잇고 있는 성병희의 회화는 가히 ‘그로테스크 세밀화(grotesque miniature)’로 부름직하다. 
생각해 보자. 오늘날 그로테스크가 '괴기한 것, 극도로 부자연스러운 것, 흉측하고 우스꽝스러운 것' 등을 가리키는 말로 변주되어 온 것을 상기한다면, 작가 성병희가 세밀화의 방식으로 천착하고 있는 회화에서 이러한 그로테스크 미학을 읽는 것은 어렵지 않다. 즉 그녀의 회화는 꼼꼼하게 묘사하는 역설과 초현실적 장면을 통해서 한편으로는 제도의 폭압과 폭력적 현실 상황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를 가하는 것으로 평가되지만, 또 한편으로는 ‘잔혹 동화 혹은 블랙 유머’와 같은 ‘비틀기의 해학과 풍자적 통찰’마저 담고 있는 것으로 평가될 수 있겠다. 해골만 앙상하게 남은 동물의 처연한 몸짓에서, 권력의 잔혹한 교정 장치를 뒤집어 쓴 인물의 안타까운 표정에서 작가의 블랙 유머 혹은 비틀기의 풍자적 해학을 읽는 것은 필자만의 시각일까? 


성병희, 아무도 모른다(Unknown), 130cm × 162cm cm, acrylic on canvas, 2015.

좌) 성병희, 새·인간(bird·man), acrylic on papermache, 2017.
우) 성병희,  삶-죽음-써커스, 122 × 140 ×7 1cm, acrylic on papermache, 2014.


좌) 성병희, 근시안적 오류의 교정 장치, 91 × 91cm, acrylic on canvas, 2015
중) 성병희, 잠식성 불안(encroaching anxiety), 91×91cm, acrylic on canvas.  
우) 성병희, 중립적 시각의 교정 장치(neutral perspective corrector), 91 × 91cm, acrylic on canvas. 


글을 마무리하자. 동식물과 각종 이미지가 혼합된 세밀화의 방식으로 몸을 가득 채운 타투, 문신은 냉혹한 타자 혹은 패악의 무리가 인간 주체에게 벌인 폭력을 상징하면서도, ‘내/너’가 껴안은 폭력에 대한 기억을 상징한다. “공적, 사적인 권력에 의해 자행된 폭력에 의해 정신적, 육체적 상처를 입은 사람들”에게 침묵과 은폐를 강요하는 권력에 저항하고자 관객에게 손을 내미는 그녀의 회화는 그 폭력을 타계할 방법에 대한 성찰을 함께 하자고 요청한다. 
그것은 강요된 억압을 탈주하고 내 안의 공포를 제거하는 일이다. 그것은 혼자만의 힘으로 불가능하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물론 도움으로 귀결되는 정답은 없다. 작가 성병희는 질문을 던지고 소통의 손길만 내밀 따름이다. 그 처연한 그림 안에서 자신의 기억을 끄집어내고 자신 안의 공포를 거세하는 일은 관객의 몫이다. 그러한 관객의 모습을 가까이 하고 싶고 그들이 자신의 처참한 회화로부터 위로받기를 원하는 것이 작가의 깊은 바람이다. 잔혹하고 비루한 이 현실계에서 아름다움을 빛내는 일이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그녀의 회화가 궁극적으로 희망하는 까닭이다. ●

출전 /
김성호, 「내 안의 공포」, 『성병희』, 카탈로그 서문, 성병희 전(2018. 9. 8-9. 21, 갤러리 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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