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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론│백성혜 / 적멸의 무한 우주가 창출하는 정중동의 파동

김성호

적멸의 무한 우주가 창출하는 정중동의 파동 

김성호(미술평론가)

검푸르거나, 회백색 혹은 갈색 계열의 중간 색조가 바탕을 이룬 가운데 둥글거나 기다란 도형들이 화면 안에 자리한 백성혜의 회화는 우주의 풍경을 떠올리게 만든다. 우주 속 별무리나, 은하수와 같은 형상들을 유추케 만드는 화면 안에는 어두운 색의 바탕을 희뿌옇게 밝히는 우주 속 빛의 존재와 파동과 같은 기운을 감지하게 만든다. 그것은 적멸 혹은 무한대의 우주에 대한 명상으로부터 비롯된 작가 백성혜만의 우주라 할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천의 인연 1314, 90x145cm, Acrylic on Canvas, 2013



I. 카오스 혹은 코스모스 속 코라의 공간    
작가 백성혜가 그리는 우주, 즉 코스모스(kosmos)라는 질서를 전제한 우주는 구약의 창조 신화가 우리에게 전하는 태초에 있었다는 카오스(kaos)를 망각하게 만든다. 그것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창1:2) 세계이다. 창조 신화를 따를 때, 이 짙은 흑암과 혼돈의 세계에 질서를 부여한 것은 빛이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3~4) 
그렇다. 구약의 신화가 전하는 절대자의 창조 행위에는 빛, 궁창, 해, 달, 별과 같은 순서를 노정하고 있듯이, 빛은 혼돈으로부터 코스모스를 창출하는 근원적 핵심이라 할 것이다. 여기서 빛은 결코 태양을 지칭하지 않는다. 우리 현실계가 태양을 빛의 근원으로 삼고 있는 것과 달리 현실 저편의 세계로부터 빛은 보다 실질적인 근원의 존재감을 인류에게 오랫동안 상상케 하기에 족했다. 태양이 아닌 그 빛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피상적으로 마치 은하계(Galaxy) 속 존재이거나 태양계가 포함되어 있는 '우리 은하(our galaxy)' 속 존재로 언급될 수 있겠다. 
그런 면에서 백성혜의 작품이 담고 있는 ‘빛’은 현실로부터 확장하지만 상상 가능한 우주 속에 거주하는 메타포의 존재로 현현(顯現)된다. 신비한 별빛들이 태양의 ‘반사광’이라는 사실을 공유하는 오늘날 현실계에서도 우주의 ‘빛’은 여전히 태양과 같은 모체의 항성(恒星)을 넘어서는 미지의 근원이다. 과학적으로 ‘빛’이란 물체를 비추었을 때 반사, 흡수, 투과, 굴절, 분해 등의 과정을 통해 물체의 특성에 따라 그 시각적 결과물을 ‘색’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양하게 전해주는 근원적 존재이다. 
그러나 우리는 푸른 듯, 붉은 듯, 짙은 색을 빛으로 휘감은 백성혜의 작품에서 이러한 빛과 색의 가시적 결과물보다 빛과 색의 비가시적 내러티브를 읽고자 한다. 그녀가 빛을 형식보다는 내용으로, 실재보다는 상징과 메타포로 간주하는 태도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까닭이다. 그녀의 작품에서 빛이란 과학적인 해석을 가능케 하는 실재이기보다는 우리의 인류가 오랫동안 제사의 측면으로 숭배해 온 전능적인 힘이자 우주 저편의 인지하지 못하는 신비의 세계를 아우르는 그 무엇이라 할 것이다. 
따라서 그녀가 그리는 우주는 과학적 언급으로 지칭되는 ‘카오스’ 또는 ‘코스모스’라 하기보다는 어떠한 상상의 무엇이다. 그것을 우리는 상징적인 원형으로서의 모체(母體), 즉 생성의 자궁인 ‘코라(chora,χώρα)의 공간과 같은 것으로 간주할 필요가 있다.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에 의하면, 이곳은 주체가 생성되는 동시에 부정되는 장소이다. 즉 ‘주체/객체’, ‘자아/타자’라는 ‘생성 과정 중의 주체’가, ‘타자를 욕망하는 주체’가, 경계선을 탈주하는 ‘혼성의 몬스터’가, 위계를 무너뜨리는 ‘비천한 것의 광기적 변주’가, ‘죽음 안에서 생성(genesis)’이 일어나는 장소이다. 따라서 백성혜의 회화가 함유하는 이 코라의 공간은 천체 속 과학과 물리의 방법론으로 추적되는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공간이 아니며 상징과 은유로 존재하는 공간이다. 
백성혜의 회화에서 나타나는 ‘우주’는 형식적으로는 코스모스의 공간이자 내용적으로 코라의 공간을 품는다. 형식적으로는 태양계의 형상과 비슷하거나 은하계를 유추케 하는 은하수들로 가득한 이미지를 선보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시작/끝 혹은 생성/소멸이 가득한 메시지를 품는다. 달리 말해 한편으로는 적멸의 우주이자 한편으로는 무한대의 우주인 것이다. 


천의 인연, 1319_21, 180x100cm, each, Acrylic on Canvas, 2013






II. 동그라미와 적멸의 우주 - 영원의 원형상  
백성혜의 회화 속 우주를 우리는 어떻게 ‘적멸의 무한 우주’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일견 적멸과 무한은 대립하는 듯이 보인다. 양자의 개념은 궁극의 세계에서 영원성이라는 하나의 의미로 만난다. 백성혜의 회화에 빈번히 드러나는 원의 형상은 이러한 적멸과 무한을 영원성 속에서 만나게 하는 세계를 가능하게 한다. 
보라! 작품 〈천의 인연 1314〉이나 3개의 패널이 하나의 작품을 이룬 〈천의 인연 1319〉에는 두 개씩의 원이 화면 양쪽에 위치한다. 표면의 질감이 다른 두 행성이 청회색조를 바탕으로 한 침잠과 심연의 우주 속에서 전자는 좌우로 후자는 위아래로 마주보고 있는 형국이다. 그 사이의 공간에는 작은 동그라미들이 흩뿌려진 채 마치 은하계의 별무리처럼 그려져 있다. 또한 4개의 패널이 모여 하나의 원을 만들고 있는 또 다른 작품 〈천의 인연 1426〉은 어떠한가? 이 작품은 갈색 톤의 바탕 위에 자리한 밝은 금빛 형상의 행성을 연상케 한다. 
그렇다. 그녀의 작품에서 동그라미라는 원형(圓形)은 우주의 행성과 같은 이미지를 만드는 가장 근원적인 도상으로 자리한다. 선종(禪宗)에서 ‘원상(圓相)’은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을 상징하는 원(圓) 모양의 그림”이라는 의미로 지칭된다. 그녀의 그림에서 동그라미가 만드는 원상은 이처럼 어떠한 우주의 행성과 같은 특수자의 입장을 넘어서 우주에 관한 추상화되거나 보편화된 관념을 유형화시키면서 보편적 상징(universal symbol)으로 자리 잡는다. 이러한 까닭으로 동그라미는 그녀의 작품 세계에서 존재의 ‘본바탕’ 또는 ‘보편적 상징’을 의미하는 원형(原型, archétype)이자 그녀의 회화적 언어의 ‘본디 꼴’을 이루는 원형(原形)으로 간주된다. 달리 말해 그녀의 회화에서 동그라미는 우주에 관한 하나의 원형상(原型像, image archétypal)으로 규정된다.
나아가 동그라미는 그녀의 회화 속 주제인 우주가 상기하는 코스모스처럼 어떠한 질서에 대한 순연한 근원적 사유를 우리에게 선보인다. 작가 백성혜의 작업과 진술이 구체적으로 전제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녀의 동그라미 그림은 순환과 윤회의 우주 원리와 같은 동양적 세계관을 떠올리게 만들기에 족하다. 좌우대칭과 더불어 크고 적음의 대비의 방식으로 동그라미의 조형적 균형과 조화를 도모하는 그녀의 회화에서, 우리는 원형으로 만들어진 옛날 윷판의 구성 원리인 29개의 점이 드러내는 우주의 생성 원리를 상기할 수도 있겠다. 그것은 우주를 아키타입으로 삼은 동그라미의 형상 자체가 이미 천부경의 ‘더불어, 하나됨’의 시공간과 화(和)의 세계관을 드러내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살펴볼 수 있다.
그녀의 동그라미의 형상은 무한(無限)과 적멸(寂滅)의 우주를 드러내기에 유효하다. 그런데 이 둘의 개념은 피상적으로는 대조적이다. ‘무한’이 한계가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반면, 적멸(寂滅)이란 ‘사라져 없어짐. 곧 죽음을 이르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적멸이란 용어가 ‘세계를 영원히 벗어나거나 그러한 경지’를 지칭함으로써 현실계 속의 완전 소멸을 의미함과 동시에 ‘미(迷)의 세계를 영원히 이탈한 경계. 곧 해탈(解脫) 또는 열반(涅槃)’을 지칭하고 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겠다. 즉 미혹(迷惑)과 방황을 탈주하는 적멸의 세계란 불교에서 전하는 ‘최고의 이상향’과 같은 현실계의 시공간 속 너머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무한’이 물리적인 시공간의 차원을 넘어서는 경지를 지칭한다면, ‘적멸’은 인간의 현실계를 넘어선 추상적이고도 관념적인 세계의 경지를 지칭한다. 전자가 물리학의 관점에서 바라본 4차원과 같은 세계라고 한다면, 후자는 철학의 관점에서 각(覺)과 이데아의 세계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다른 듯 같은 개념의 양자를 견인하는 것은 ‘영원성’이다. 무한, 적멸은 영원성처럼 현실계 너머의 시공간이다. 그것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세계이며 끊임없이 운동하고 있는 시공간 너머의 세계이다.   


천의 인연 1426, Acrylic on Canvas, 224.2x291cm, 2014



III. 정중동의 파동과 우주목 
작가 백성혜의 작품에서 우리는 운동하는 세계를 목도한다. 하나의 동그라미의 행성 이미지에서도 동그라미로부터 반원들의 집적으로 변주한 물결 모양의 이미지 속에서도 우리는 운동성을 발견한다.  
작가는 그 자체로 끝없이 순환하는 운동성을 함유하는 동그라미를 대조적으로 배치하거나 다수로 증식시키고 때로는 물결 모양으로 더러는 나무와 같은 형상으로 변주함으로써 운동성을 드러낸다. 이러한 변주는 마치 원(圓))으로 표상된 일원(一元)으로부터 근간하는 태극(太極)의 변주처럼 해석된다. 생각해 보라. 태극은 동그라미로부터 출발하고 다시 두 개의 상반된 기운인 음양(陰陽)의 두 극(極)을 형성한다. 이 두 극은, 서로의 영역을 상호 밀치고 끌어안듯이 그려진 태극 문양을 통해서 자신의 극을 잃지 않은 상태에서 상대편과 상생조화를 행하며 오행을 형성한다.
다만 백성혜는 태극 문양 대신 원의 병치나 반복적 집적, 그것의 변형인 물결 모양으로의 변주를 통해서 이러한 운동성을 드러낸다. 그것을 우리는 파동(波動)이라 부른다. 파동이란 “공간의 한 점에 생긴 물리적인 상태의 변화가 차차 어떤 속도로 둘레에 퍼져 가는 현상”을 지칭한다. 그 출발점은 점이라는 한 극이지만 이것은 이내 ‘작은 원 → 큰 원’의 변화처럼 끊임없는 원의 변주로 확장한다. 파동을 내보내는 원천을 파원(波源)이라고 할 때, 백성혜의 회화에서 파원은 점이자 동그라미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파동은 진동의 다른 말이다. 달리 말해, 파동이라는 수평적인 확장만이 아니라 공간에서의 수직적인 확장과 수평적인 확장이 시간의 운동성으로 변주(變奏)되는 일련의 운동이 된다. 이러한 운동은 우리의 눈에 쉬이 드러나지 않는다. 결이라는 평정 상태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작품 〈천의 인연 1711〉과 〈천의 인연 1801〉에는 이러한 결의 평정 상태를 드러낸다. 화면 안에는 마치 바다 풍경처럼 보이는 물결 모양이 화면 아래에 위치한다. 유연한 곡선들이 집적된 이미지가 만드는 잔잔한 물결은 일련의 조용한 침묵의 세계를 드러낸다. 결이 ‘규칙적이고 정형적인 상태’를 의미하면서도 결정보다 더 미세한 규칙적 흐름을 의미하듯이, 그녀의 회화 속 결은 젯소의 밑칠을 두텁게 만드는 미디엄의 효과를 통해서 볼록과 오목의 요철을 만들면서 흔히 마티에르(matiere)라고 부르는 일정한 평정 상태를 보다 더 극대화한다.  


천의 인연 1701_4, 180 X 100 cm, each Acrylic on Canvas, 2017


전시 전경 


좌) 천의 인연 1713, 227 X 182cm, Acrylic on Canvas, 2017
우) 천의 인연 1712, 227 X 182cm, Acrylic on Canvas, 2017



좌) 천의 인연 1801, 227 X 182cm, Acrylic on Canvas, 2018 
우) 천의 인연 1711, 162x130cm, Acrylic on Canvas, 2017


그러나 우리는 안다. 결이라는 평정 상태는 사실 대립적 요소들이 끊임없이 수면 아래에서 움직이는 운동성의 존재임을 말이다. 마치 ‘물결’이 골과 마루가 만들어내는 무수한 파동(波動)의 형식으로 운동하고, 우리의 ‘마음결’이 희로애락의 상반된 감정들이 끊임없이 생채기내며 싸우는 운동의 과정 속에서 평정의 상태를 찾는 것이듯이 말이다. 이처럼 백성혜의 회화 속 우주 그리고 그 우주 속 이미지가 만드는 결의 평정 상태는 ‘정중동(靜中動)’이라는 운동성의 미학으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은 주체와 주체, 주체와 타자의 만남과 같은 존재론적 미학의 강력한 메타포로 작동한다. 파동은 하나를 또 하나와 연결한다. 이러한 연결과 만남은 결국 하나를 전체와 연결하는 운동을 낳는다. 보라. 그녀의 회화에서 마티에르가 두텁게 확장한 ‘결’의 형상들은 작은 동그라미들을 연결하고 이웃하고 있는 다른 ‘결’의 이미지를 확장하고 연결한다. 또는 엷은 물감의 층을 천천히 여러 번 발라 올려 색을 조율하고 우주의 풍경을 창출한 개별 작업들이 전시장에서 하나의 캔버스처럼 군집하게 되면서 ‘작은 원 → 큰 원’ 또는 ‘하나 → 전체’의 방식으로 확장되는 결의 미학을 목도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우리는 작가 백성혜의 회화 안에서 지금껏 논의한 것과는 다른 또 다른 형상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나무나 강, 혹은 기를 추상화한 것 같은 이미지라 할 것이다. 우주 안에 있는 것들이라는 이유로, 우리는 그것을 ‘우주목(宇宙木)’, ‘우주강(宇宙江)’이라 부르고자 한다. 작품〈천의 인연 1712〉에는 오른쪽 화면을 가로질러 올라가는 한 줄기의 우주강 혹은 한 그루의 우주목이 자리한다. 그것은 다분히 상징적인 존재이다. 
우리는 그것이 ‘나무의 형상을 한 하나의 존재의 상징체’라는 것을 그녀의 2016년 작가노트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녀는 ‘정(靜)’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나무’를 다음처럼 묘사한다. “순수한 영혼의 존재 / 끊임없이 다른 세계를 향해 에너지를 뻗어 올리는 성장하는 존재 / 신령한 기운으로 주변을 정화시키는 존재 / 지식 너머의 삶의 지혜를 가진 경전 같은 침묵의 존재.”
작가는 나무를 고요한 침묵의 존재이지만 지혜를 전하는 세계 속 주체적 존재로 바라본다. 즉 원으로 상징되는 우주라는 커다란 세계 속에 인간-우주, 인간-신을 연결하는 주체적인 매개의 존재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 위에는 아담의 선악과(善惡果)와 환웅의 신단수(神檀樹)의 신화가 겹쳐진다. 물론 그것은 침묵의 우주목 혹은 지혜의 우주강처럼 불현듯 언어로 표상화하고 의미를 고정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는 이미지이다. 
다만 그것을 끝내 정의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안다. 화면 곳곳을 마치 혼령처럼 떠도는 신기(神氣) 혹은 우주의 아우라를 드러내는 숭고한 기운처럼 일렁이는 그것이 우주 속 미물인 인간 주체를 우주라는 커다란 침묵의 세계 그러나 ‘결’이라는 운동의 세계와 지속적으로 연결하는 매개의 상징임을 말이다. 혹은 그것은 그녀가 그리는 예술의 무한 세계로 이끌고 있는 안내자일 수도 있겠다. 우리는 백성혜의 작품을 본다. 화가 고갱이 자신의 작품에서 제기했던 동명 제목의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되뇌면서 말이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

출전 /
김성호, 「적멸의 무한 우주가 창출하는 정중동의 파동」, 백성혜 작가론, 『미술평단』, 한국미술평론가협회, 여름호,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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