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서문│ 최지윤 / 꽃들에게 말 걸기

김성호

꽃들에게 말 걸기


김성호(미술평론가)


자연으로부터, 들꽃으로부터 
각박한 문명의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자연은 치유와 재생의 힘을 북돋아주는 근원적 고향이다. ‘태어나다’라는 의미의 ‘피오마이’로부터 유래한, 자연을 지칭하는 그리스어 ‘피시스(physis)’가 생성(生成)이란 뜻을 지니고 있듯이 자연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자 모든 인간의 근원적 자궁이다. 자연의 품 안에 있었던 인간의 본성은 그런 탓에 자연에 대한 회귀본능에 기초하여 그것을 늘 그리워하고 사모한다.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인공의 현실에 둘러싸인 현대인들은 때로는 사람과의 관계에 지쳐서 때로는 인공 미디어의 범람에 목이 옥죄어서 탈주를 감행할 때 자연으로 향하곤 한다. 누구에게나 자연은 ‘사람의 힘이 더해지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상태’이자 사람들이 본의 아니게 떠나왔던 혹은 잃어버렸던 생명 근원의 원초적 고향이기 때문이다.
작가 최지윤은 이별과 상실의 근원적 모태를 ‘자연으로부터의 상실’로 인식하고 들꽃과 들풀들을 통해서 ‘상실 이전의 자연’을 바라본다. 그런 면에서 작가 최지윤에게 있어 들꽃은 그녀가 떠나오고 잃어버렸던 과거의 아득한 기억들과 향수를 지금의 자리에 되불러오는 영매(靈媒)이자 자연의 본성을 일깨우는 정령(精靈)이나 진배없다. 

  “그 들꽃, 들풀들이 내 눈에 더욱 선명히 다가왔다. / 그것들은 내게 이상한 향수를 불러 일으켰다. / 이젠 기억조차도 희미한, 어렴풋한 추억과 기억들, / 그리고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 문득... 그동안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눈물이 흘렀다. //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이름도 모를 많은 꽃들이 아무런 누구의 보살핌 없이도 얼마나 아름답게 자리하고 있는지...”

작가노트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그녀는 ‘사람의 힘이 더해지지 않고 스스로 생겨나거나 존재한다’는 자연(自然)의 한자적 뜻풀이, ‘스스로 그러하다’의 형용사적 의미를 눈물을 흘리면서 바라보았던 ‘들풀’로부터 되뇌고 그것으로부터 자연의 본성을 추체험한다. ‘스스로 그러하다’는 자연의 본성은 ‘한 것이 혹은 할 것이 없다’는 도가(道家)사상의 ‘무위(無爲)’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우리말의 ‘자연스럽다’라는 형용사처럼 인위와 작위 그리고 꾸밈의 인공세계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다. 인위와 거리 두기하는 자연은 장자(莊子)가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이라고 부른 무한한 자유의 세계이다. 그것은 마치 태생적으로 자유로운 예술의 세계와도 닮아있지 않은가?




꽃들에게 말 걸기
들꽃으로부터 자연의 본성을 발견하고 보살핌과 간섭이 없는 자유로움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 작가 최지윤은 이제 그 꽃들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다.

  “나는 그동안 산이나 바다, 하늘, 땅 등 커다란 자연을 대하며 / 느꼈던 숭고함이나 엄숙함보다 더 큰 감동을 이 작은 들꽃을 대하며 느꼈다. / 바람결에 따라 움직이는 꽃들에게 말을 걸어본다.”

그녀가 대화의 상대로 깊이 잠입하는 꽃들은 사람들에 의해 기르기의 대상으로 전이된 화훼(花卉)로서의 꽃이 아니다. 자연 법칙에 따라 스스로 자유롭게 생성한 야생화(野生花), 자연의 들꽃들이다. 꽃가루를 산포하고 그들의 번식을 바람에 맡겨 자유로운 곳으로 항해하는 들꽃들의 자생력은 재배를 통해 인간에 순응해 온 온실의 화초와는 생성의 근본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 순수하고, 솔직하며, 꾸밈없이 아름다우면서도 / 강인한 자생력을 가진... 그 들꽃의 모습은 바로 오래전 그렇게 살아가자고 나 자신에게 되뇌었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꾸밈없는 아름다움과 자생력을 가진 들꽃은 간섭과 인위가 가득한 이 땅의 현실계에서 여성으로서, 예술가로서 살아가는 그녀에게 있어, 숨을 돌리며 대화를 나눌 대화 상대이자 그녀가 닮고 싶은 역할모델이었으리라. 특히 들꽃은 그녀가 삶의 자리와 분주히 오고가며 끝까지 지켜온 예술의 자리에서 지속적으로 소통하고 싶어 했던 내밀한 상담자였으리라. 한편으로 그것은 자화상 같은 삶의 분신이었을 것이며 그녀의 예술적 삶을 지탱시키는 하나의 상징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작품에 붙어있는 제명들이 ‘들꽃’ 외에도 빛, 소리, 바람과 같은 자연 현상과 더불어 말 걸기, 시간일기, 기억, 흔적, 추억 같은 사유의 내밀한 측면과 자연과의 소통 의지를 드러내고 있듯이, 작가 최지윤은 들꽃에 감성과 사유를 실어 말을 걸면서 그녀만의 회화 언어로 주술을 걸어놓은 화폭에 자연을 담고 자신을 담고 나아가 그 둘을 이야기한다.  






내 꽃 찾기

“꽃이 내 화면에 다른 형태의 꽃으로 자리할 때 / 그것은 또 다른 나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 또 다시 물어본다. / 내 꽃을 보았니?”

그녀가 들꽃에게 하는, “내 꽃을 보았니?”라는 질문은 단지 그것들에게 흩뿌리듯이 던지는 방백(傍白)이자 창작 중인 작품 앞에서 혹은 완성된 작품 앞에서 화가라는 이름을 껴안고 그녀 스스로 주절거리는 독백일 따름이다. 그것은 작가 스스로 끝까지 붓을 틀어쥐고 찾아 나서야만 하는 근본적으로 외로운 자문자답의 연속이자 하나의 화두이다. 그런 면에서 작가 최지윤이 모색하는 ‘미술하기’란 ‘자신의 꽃’을 끊임없는 찾아나가는 과정 그 자체라 할 것이다. 그것은 또한 미술의 방식으로 찾아나서는, 자연이란 이름 안에 거하던 ‘본연의 인간상’으로, 구체적으로는 그녀의 자화상이며 지속적인 일기쓰기에 다름 아니다.
그런 까닭일까? 
그녀는 창작의 장에서 위와 같은 자문자답의 성찰을 지속하면서 끊임없는 조형실험을 통해서 변모를 지속해 왔다. 자연 속의 암벽을 그렸던 극사실주의 회화 시기로부터 아크릴, 오일파스텔, 스크래치 및 콜라주 기법 등 다양한 재료 탐구를 시도하던 시기, 그리고 이전의 실험들이 정제된 상태로 하나의 화면 안에 조화를 이루고 있는 최근의 캔버스 작업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매체적 한계가 비교적 뚜렷한 한국화의 장에서 무척이나 다양한 조형실험을 거듭해 왔다. 
특히 장지 위에 여러 색의 아크릴 물감을 겹쳐 올려놓고 단숨에 나이프로 밀어내서 마치 마블링 효과처럼 우연히 색을 조합시키기고 다시 이것을 꽃잎이나 잎사귀의 형태로 오려내어 작품의 화면 위에 붙인 종이콜라주 작업은 의미심장하기조차 하다. 혼돈의 바탕색으로부터 형상을 창출시키고 이를 다시 적절한 화면 위에 부착시켜 생생하고도 매혹적인 꽃으로 되살려내기 때문이다. 실제의 꽃 형상과 다른 꽃으로 말이다. 
종이콜라주의 각(角)이 살아있는 예민한 꽃의 형상들은 평면성의 침착한 바탕색 사이로 삐죽이 고개를 내밀면서 화면의 분위기를 긴장감으로 감돌게 한다. 아울러 바람에 사뿐히 흔들리거나 중력에 저항 혹은 순응하면서 생장하고 있는 꽃봉오리들의 제각기 다른 세밀한 몸짓 또한 이러한 긴장감을 극대화시킨다.
게다가 평평한 화면 위로 오고간 스크래치의 아픈 흔적이나 질퍽하게 뒤덮이고 풀어 헤쳐지길 거듭한 물감 층의 대비적 화면 경영은 화면의 두께감과 깊이를 생성시킬 뿐만 아니라 관자의 심리적 진폭을 변주, 전이시켜 화면에 자리한 꽃들의 고고한 자태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고고한 자태의 들꽃들’, 그것은 광활하고 드넓은 자연의 추상성으로부터 추출해내는 자연의 이미저리(imagery)이자 자연의 보편성으로부터 길어 올리는 개별체의 특수한 정체성이기도 하다. 그것은 결국 작가 ‘최지윤의 자연’이자 그녀만의 ‘내 꽃 찾기’인 것이다. 



‘꽃이름 짓기’로부터 ‘꽃이름 지우기’로
작가 최지윤이 던지는 질문 아닌 질문, “내 꽃을 보았니?”라는 선문답은 자신의 작업을 지탱하는 하나의 화두이다. 그녀에게서 ‘그리기’란 스스로 찾아나서는 ‘내 꽃 찾기’의 과정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모든 사람이 자신의 것이라는 소유권을 획득할 때, 늘 ‘이름 짓기’에 직면하고 있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애인이 된 내 남자, 남편이 된 내 남자, 내게서 태어난 내 아이, 그리고 새로운 식구가 된 나의 애완견에 내(우리)가 이름을 짓듯이, 작가 최지윤 또한 그녀가 찾은 그녀의 꽃에 이름을 지을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우리의 이러한 기대와 달리, 그녀가 야생의 자연으로부터 자신의 거실로, 화병 안으로 가져온 꽃(들)에 부여한 꽃이름을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단지 다른 ‘이(들)의 이름 지어주기’로부터 전승된 ‘꽃’ 혹은 ‘들꽃’이라는 보편자로서의 이름만 등장할 뿐이다. 
야생의 자연을 인공의 환경 속에 가두어 둠이 미안해서일까? 이름 짓기로 구속하고 싶지 않은 까닭일까? 그것은 마치 개별자에게 이름을 지어 그 개별자의 운명을 결정짓게 하는 성명학(姓名學)의 운명론을 작가가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실상 자연을 ‘기르기’나 ‘돌보기’의 과정 속에 편입시켜 자연에 이름 짓고 그것을 구속하는 우리의 관성에 작가가 제동을 걸고 있는데서 유발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녀가 삶의 역할 모델에 있어 이상형으로 그리는 들꽃을 ‘화훼’와 같은 관상용 화초로 자리매김 되지 않도록 하는 배려의 차원이기도 하다. 그녀 스스로 들꽃처럼 살리라 했으면서도 온실의 화초로 살아왔던 작가 최지윤만의 회한(悔恨)을 그녀가 여직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녀는 ‘이름 모를 들꽃’을 자체의 존재 그대로 바라보고자 한다. 그래서 감정이입된 자신의 꽃에 꽃이름 짓기를 마다하고 이미 존재하고 있는 꽃이름도 부르지 않으며 나아가 이미 있는 혹은 있을지도 모를 꽃이름마저 지우려 한다. 그것은 그녀가 창작 과정 속에서 ‘내 꽃 찾기’의 해답을 구하고 안착하기 보다는 그 모색의 과정을 끊임없이 지속하려는 결단처럼 보인다. 고되고 지속적인 모색 과정 속에서 그녀는 다음과 같은 질문만을 화두처럼 던질 뿐이다.

  “내 꽃을 보았니?”

의미 있는 창작 태도와는 달리 이제 그녀의 실제 창작에서 남은 관건은, 무수한 조형실험의 과정이 막 안착하려는 듯이 자리를 잡고 세련된 장식화처럼 패턴화되어 가는 창작 결과물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오려 붙이기라는 종이 콜라주 기법이 화면의 전면으로 확대되어 가는 최근작에서 부득이하게 형성된 결과일 터이지만 때로 그것은 일본화나 그래픽 디자인처럼 화사하고 공예품의 자개 장식처럼 건조해 보이기도 한다. 화면의 깊이를 주고 지층(紙層)의 배면으로 공간의 확장을 도모하던 스크래치는 관성화되어 때로는 힘을 잃고 있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역으로 그것은 표피 속에 감추어진 무한한 지속의 가능태이다. 자연의 유기물을  각(角)이 있는 자신만의 자연으로 창출하는 종이 콜라주의 존재는 민화의 정신을 계승하는 현대적 정물화의 한 장을 여는 차원마저 없지 않다. ‘각’이 있는 그녀의 꽃은 이미지는 단순하지만 고흐의 ‘해바라기’만큼이나 강렬하고 보나르의 정물들처럼 부드럽기까지 하다. 
‘꽃이름 짓기’로부터 거리 둔 ‘꽃이름 지우기’의 작업 태도가 언제나 지속형이듯이 그녀의 작업이 완결형의 것이 아닌 지속형의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우리가 예견치 못할 새로운 모색으로 가득할 작가 최지윤의  ‘꽃들에게 말 걸기’의 후속 향연에 또 다시 초대받기를 고대한다. ●


출전 /
김성호, '꽃들에게 말걸기”, 전시 카탈로그, (최지윤 전,  2008. 6.4-14, 아트다갤러리)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