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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최수미 / 하얀 숨결과 생각의 말풍선을 나누는 작은 집들

김성호

 하얀 숨결과 생각의 말풍선을 나누는 '작은 집들'



김성호 Kim, Sung-Ho (미술평론가) 




I. 프롤로그
최수미의 작업은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풍경을 만드는 부조형 도조(陶彫) 작품들로 구성된다. 도자(陶磁) 본연의 쓰임새를 버리고 기형을 파괴하는 도조를 통해 순수 조형에 접근하는 그녀의 작품은 ‘집’이 함유하고 있는 다양한 ‘사이(間)의 관계 지형’을 잔잔하게 성찰한다. 이러한 그녀의 성찰은 땅과 하늘, 벽과 벽, 인간과 인간, 나와 너, 우리와 당신들과 같은 ‘사이를 전제하는 만남의 관계’에 다리를 놓으면서 ‘집의 심리학과 사회학’으로 확장된다.   


개인전 전경, 2017



II. 짓기 - 작은 집들
최수미는 집을 짓는다. ‘그녀의 그것’은 유약 시유와 소성을 거친 단단한 자기(磁器)의 재질에, 단순한 구조와 형태, 그리고 흰색이나 중간색 위주의 소박한 옷을 입혀 ‘지은 집’이다. 
이 ‘작은 집’을 짓는데 손이 많이 간다. 집의 형태를 성형한 후 1차 소성이 필요하며, 유약 시유를 한 후 1240도까지의 2차 소성이 필요하다. 여기에 저온 안료를 사용하기 위해서 1050도에 이르는 3차 소성도 요청된다. 2차 시유했던 밑색 위에 올려야 하는 3차 유약 작업을 위해서는, 이전에 시유했던 유약과 대조되게 색을 표현하기 위해 ‘테라시질라타(Terra Sigillata) 기법’이라는 번거로운 과정이 도입되기도 한다. 이 기법은 재벌 이후 삼벌을 할 때 크기 1㎛ 정도로 정제된 고운 입자의 ‘테라 흙물’을 유약 대신 사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법은 높은 소성 온도를 거쳐 탄생한 단단한 도자기 재질 위에 부드러운 중간색 위주의 순박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데 있어 제격이라 할 것이다. 세월의 때를 가득 머금은 잿빛의 벽과 자연의 모진 풍상을 겪은 검푸른 혹은 거무죽죽한 표정의 지붕은 그녀의 ‘작은 집’이 담고 있는 작품의 주제 의식을 잘 드러낸다. 즉 표면 위 침잠되는 중간 색조는 그녀의 ‘작은 집’에 어울리는 조형 효과가 되는 셈이다. 
‘자그마한 체구에 검푸르거나 희뿌연 옷을 입은 작은 집’의 형태와 구조는 어떠한가? 그녀의 ‘작은 집’은 낮은 지붕과 짧은 처마 그리고 숨을 쉴만한 작은 창문을 가지고 있다. 어떤 집은 커다란 담벼락에 쓰러져 가는 자신의 몸을 간신히 기대고 있기도 하고 또 어떤 집은 퇴락한 벽에 간신히 숨을 쉴 수 있는 작은 창문 하나만 내고 있기도 하다. 그런 집은 대개 우울해 보이고 쓸쓸해 보이는 표정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녀가 ‘짓는 집’에는 이러한 우울의 이면에서 싹을 틔우는 정겨운 삶의 소망이 목도된다. 그러한 까닭은 무엇보다 그녀가 짓는 ‘작은 집’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가 ‘짓는 집’은 하나의 단수이기보다 여럿의 복수로 자리한다. 하나보다 둘 혹은 네다섯이다. 덩치도 작은 것들이다. 그것들은 서로가 서로의 키를 재듯이 나란히 자리하거나, 언덕 위에 서로의 몸을 밀착해서 한 덩어리처럼 옹기종기 자리를 잡는다. 
우리는 그것을 딱히 몇 개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것은 수량화하는 시도 자체가 어색할 수 있다. 그것은 2와 1/2 혹은 4와 1/2처럼 확연하게 계량화시키고 범주화하는 시도조차 무의미하게 만드는 ‘모호한 덩어리로서의 복수’이기 때문이다. 최수미가 ‘짓는 집’은 두서넛, 네다섯 혹은 예닐곱처럼 애매모호한 ‘중간 영역’으로 거주하는 ‘퍼지(fuzzy)의 세계 속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그 퍼지의 세계는 혼돈이 아니라 다름을 같음 속에 받아들이는 매개와 관용의 세계이다. 그 세계에서 작가 최수미는 ‘작은 집들’을 지으면서 그것들이 창출하는 삶의 에너지와 작은 집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이(間)의 관계 지형’과 ‘서로의 만남의 관계’를 천천히 성찰한다. 


부산 만덕동 레고마을
116×62×11.5cm (each) Ceramic 2014



1. 교회옆 17×18×8.5(좌), 33×27.5(우)cm Ceramic 2014 160만원 1,400usd
2. 비비정 머무는집 35×31×8cm Ceramic 2014 160만원 1,400usd
3. 즐거운집 42×23.5×10cm Ceramic 2014 160만원 1,400usd
4. 수다쟁이집 45×16×10cm Ceramic 2014 160만원 1,400usd
5. 비비정 - 지나가는집 45×21×11cm Ceramic 2014 160만원 1,400usd
6. 정미소 51×23×8cm Ceramic 2014 160만원 1,400usd




III. 성찰하기 - 집의 심리학
최수미의 작품에 드러난 집은 대개 단층이나 복층으로 구성된 ‘키가 작은 집’이다. 겉보기에도 그녀가 ‘짓는 집’은 “현대 도시에서 볼 수 있는 빌딩이 아닌 서민들이 거주하는 일상의 집”이다. 낮은 지붕과 작은 창문을 가지고 한 두 개의 방을 가진 ‘작은 집’이자 서로가 서로를 연결한 채 자리한 ‘작은 집들’이다. ‘집’에 관한 한, 가장 기본적인 자신의 정체성에 충실한 그러한  공간이라 할 것이다.  
생각해 보자! 작가의 언급대로 집이란 “바쁘고 지친 일상을 보내며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쉴 수 있는 곳”, “마음의 편안함을 주며 재충전할 수 있는 곳”이다. 이러한 이해는 무엇보다 집이 견지하고 있는 내밀한 고유의 기능을 떠올리게 만든다. 즉 집이란 타자로부터 이격된 채 비밀스러운 자신만의 사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는 자유의 공간이다. 즉 벽과 벽 사이의 경계를 통해 이웃이라는 타자와 분리와 단절을 실행하고 ‘자신만의 세계에 거주할 자격’을 자가 취득하고 보장받는 내밀한 은폐의 공간이다. 집과 관련한 가장 일차적인 심리학이다. 
이러한 집의 공간은 예술의 세계와도 맞물린다. 즉 집이란 예술가의 아틀리에와 마찬가지로 일차적으로 자기표현, 자기만족과 같은 자아의 본능적 욕구 속에 거주하는 타자와 별리된 ‘자기 보존’의 닫힌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식으로 말하면 '요나 콤플렉스'(Jonah Complex)가 작동하는 공간이다. 즉 그곳은 ‘요나가 거주했던 고래 뱃속’처럼 안온함과 평화로움으로 둘러싸인 어떠한 공간이다. 바슐라르가 서랍, 상자, 장롱, 구석과 같은 공간도 거론하고 있지만 무엇보다 ‘집’은 가장 기본적인 자기 보존의 ‘내밀한 공간’이다. 마치 우리가 태아로 있었던 어머니의 자궁 속 모습처럼 말이다. 
우리는 안다. 아틀리에서 생산된 예술 작품들이 결국 미술가의 손을 떠나 예술계(Art world)라는 좀 더 넓은 공간으로 이주하고 있듯이, 집의 공간은 편안한 쉼과 자유를 보장하는 닫힘의 공간이면서도 이내 타자의 왕래와 타자의 세계로 열리는 열림의 공간이 된다는 것을 말이다. 바슐라르(Gaston Bashelard)가 언급하듯이 ‘집이란 우리들의 최초의 세계이자 그것은 정녕 하나의 우주’가 된다. 
달리 말해 어머니 속 ‘태아를 둘러싸고 있는 자궁’이 우리의 ‘인지할 수 없는’ 내밀한 공간과 열려진 공간 사이의 최초의 경계라고 한다면 집은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두 공간 사이의 최초의 경계일 것이다. 즉 집은 ‘벽과 문’의 경계를 통해  자아 보존의 공간이 됨과 동시에 ‘문과 창문의 열림’을 통해서 타자와의 교류를 수시로 감행하는 외교의 공간이 된다. 마치 프로이트(Sigmund Freud)가 유아의 성장 과정을 아버지, 어머니와의 삼자 관계에서 발생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로 설명하고 있듯이 말이다. 이것이 바로 집과 관련한 이차적인 심리학이다. 
결국 최수미의 집이 드러내는 예술 심리학의 지평은 ‘요나 컴플렉스’와 같은 인간 내부의 문제의식과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와 같은 인간 밖의 문제의식을 예술과 함께 아우르는 가운데서 전개되는 것이라 하겠다. 

   
Small Breathing - story home 가변크기 Ceramic 2013






IV. 소통하기 - 집의 사회학
최수미의 작업에서 ‘집’이란, 인간 주체가 ‘닫힘/열림의 공간’에서 생성되고 자라나 자리 잡는 사회화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거꾸로 말해 최수미가 작업을 통해서 우리에게 선보이는 ‘집의 사회학’이란 기본적으로 한 인간 주체가 자기 성찰을 도모하는 곳이자, 가족이라는 이름의 타자들과 끊임없이 관계하는 곳, 더 나아가 가족이라는 이름의 복수 주체가 방문객과 같은 타자들과 소통하는 곳이란 사실을 드러낸다. 즉 ‘나(우리)/안 - 너(그들)/밖’ 사이의 확장되는 관계와 소통의 문제의식을 제기하는 것이다. 최수미도 진술하고 있듯이, 그녀에게 있어 집은 “내가 되기도 하고 네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풍경이 되고, 도시가 된다. 그래서 집은 사람이 되고, 삶이며 우리의 삶을 짓고 언어의 공간이기도 한다.”
실제로 그녀의 작품들에는, ‘확장되는 인간관계’와 ‘더불어 사는 사회적 인간’에 관한 조형적 진술이 곳곳에 드러나 있다. 이러한 주제의식을 반영하듯 〈모이고 모여서〉, 〈복잡한 집〉, 〈성냥개비 집〉과 같은 제목을 달고 있는 작품들은 물론이고, 하얀색, 중간색, 짙은 색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품들(고요하게, 그 집, 기다리다, 은행나무집, 교회 옆, 정미소, 비비정 머무는 집, 즐거운 집)이나 키 재기를 하듯이 여러 집들이 늘어서 있는 작품들(Black House, Her House, Stay)들에는 이러한 ‘집의 사회학’에 관한 문제의식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그 뿐인가? 성냥갑들이 모여 있는 것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작품 〈부산 만덕동 레고마을〉이나 〈삼례집〉, 〈삼례길에서〉처럼 실명을 달고 있는 작품들은 ‘사회학의 실제’에 대한 연구에 다름 아니다. 실제의 지명을 담고 있는 작품뿐 아니라 모든 작품들은 그녀가 직접 거리에 나가 사진으로 기록하면서 찾아 나선 소재로부터 기인한다. 
따라서 그녀의 작품에서 ‘집의 사회학’이란, 따지고 보면, 실제의 공간에 대한 그녀만의 기억 혹은 추억으로부터 출발하는 셈이다. 바슐라르의 사유도 집에 대한 인식을 추억에서 찾고 있다. ‘닫혀 있는 어떤 것이 추억들을 간직하고 있어서, 그 추억들에 이미지의 가치를 부여한다’는 사유가 그것이다. 닫힌 서랍, 문, 집으로부터 추억을 꺼내 이미지로 전환하는 이러한 과정은 ‘이미지’에 대한 해석을 ‘잠재적 기억(mémoire virtuelle)이 현실화된 물질적 존재’로 보는  베르그송(Henri Bergson)의 철학적 사유와도 맞물린다. 
작가 최수미의 진술을 들어보자. 그녀는 자신의 작업 노트에서 “도시 근대화 과정에서의 주거 공동체의 모습을 묘사하였다”고 진술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그녀의 작업은 대략 1970년대 이후를 배경으로 하는 도시 근대화의 시공간을 배경으로 한 ‘집의 안팎’에서 ‘거주자’로서의 인간 주체가 맞이하는 타자와의 관계, 즉 집의 사회학을 담아낸다고 할 수 있겠다. 그것은 작가가 어린 시절로부터 성장하면서 경험한 집에 대한 기억뿐 아니라,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어 살게 되면서 ‘집’의 안팎에서 겪었던 희로애락의 모든 경험과 기억들이 절절하게 녹아 있다: “(내 작업은) 일반적으로 뚝딱 만들어진 집이 아닌 1200도가 넘는 온도에서 뜨거움을 이겨낸 집이다. 나의 고난의 시간이며 인내로 이겨낸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는 집이다. (...) 즉, 집은 우리들의 이야기이며 소통하는 공간으로 언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 집은 소통의 공간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이야기나 언어와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녀의 작업에서 볼 수 있듯이, 집 마당 혹은 집 뒤편에서 자라는 말풍선들은 거주자들의 정겹고도 행복에 가득한 대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부부간 갈등을 유발하는 엇갈리는 대화와 논쟁이, 며느리를 꾸짖는 시어머니의 한숨 어린 질책이, 자신을 이해 못한다고 아버지에게 대드는 아들의 눈물 섞인 항변이 함께 절절하게 뒤섞인다. 그것이 그녀가 체험한 집의 사회학인 때문이다.  


소소하게 숨쉬기 가변크기 Ceramic 2013




V. 에필로그
최수미의 ‘작은 집들로 밀집한 비좁은 공간’에는 좌절과 희망이 함께 숨을 쉰다. 사람 한 명도 보이지 않는 그곳에서 우리는 ‘인간 존재론’과 같은 무거운 철학과 더불어 땀 냄새 가득한 ‘사람 사는 이야기’를 함께 듣는다. 이러한 점은 그녀의 작업이 가진 힘이다. 게다가 ‘도조’의 한계 속에서 회화의 언어, 삽화적 여백, 동화적 메시지, 문인화적 명상마저 풍부하게 실험되고 있다는 점은 최수미의 작업이 지닌 특장점이라 할 것이다.
수많은 답사와 스케치 그리고 3차 소성에 이르는 지난한 노동의 시간과 테라시질라타와 같은 세밀한 공정을 통해서 작가 최수미가 짓는 ‘작은 집(들)’은 단단한 자기의 재질만큼이나 자신의 조형 언어로 단단하게 구축되어 가고 있는 중이다. 뿐만 아니라 와이어에 매달리거나 벽에 못질로 고정이 되거나 혹은 바닥이나 좌대에 놓이는 방식으로 설치 언어에 대한 다양한 실험 역시 진행 중이다. 집의 밖만 보여주던 그녀의 ‘작은 집’이 언젠가 내부의 모습을 보여줄 지도 모를 일이며, 한명도 보지 못했던 그녀의 작은 집의 거주자를 어느 날 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현재 우리가 명확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하얀 숨결과 생각의 말풍선’을 나누면서 ‘도자 조형’의 언어로 쓰고 있는 작가 최수미의 ‘집의 심리학’과 ‘집의 사회학’이 다양한 성찰과 실험 속에서 오늘도 ‘현재 진행 중’이라는 사실이다. ●


출전 /
김성호, 「하얀 숨결과 생각의 말풍선을 나누는 작은 집들」, 전시 카탈로그 (최수미전, 201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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