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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류경열 / 유쾌한 생태미학 -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공동의 기억

김성호

유쾌한 생태미학 -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공동의 기억


김성호 Kim, Sung-Ho (미술평론가)


I. 프롤로그
류경열은 1회 개인전에서 일명 ‘틈새 벽화’라는 작업에 천착했다. 그것은 일상 주변에서 틈새의 공간을 발견하고 그것의 존재 자체에 문제의식을 제기하는 조형 탐구였다. 이러한 작업 세계를 풀어 말하면, 주변의 풍경 속에서 발견되는 일률적인 유형론의 범주에서 이탈하는 특이한 조형이 발견될 때, 그것을 ‘틈새’로 규정하고 외려 그것을 도드라지게 만들어 내는 조형 탐구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회색의 일정한 블록들이 이어지는 담벼락에서 다른 색 얼룩의 작은 파편이 발견되었을 때 작가는 그것을 ‘틈새’의 개념으로 규정하고 그 작은 부분을 더욱 더 잘 보이게 만들어내는 일련의 조형 실험을 거쳤던 것이다. 
이와 같은 ‘틈새’를 화두로 삼았던 1회 개인전에 이은 이번의 2회 개인전에서 화가 류경열은 어떠한 미학을 탐구하는가? 그것은 생태주의 미학을 기조로 한 ‘무관심으로부터 관심의 촉구’, ‘거시적, 미시적 관점의 존재론과 의미론 탐구’ 그리고 ‘사라지는 모든 것들에 대한 기억의 소환’과 같은 개념들이다. 그것을 무엇인지 순차적으로 살펴보자. 


바나나를 싫어하는 롤랜드고릴라, 캔버스에 아크릴과 중성펜, 130 x 89 cm, 2017




II. 틈새의 미학 - 보편자의 존재론으로부터 특수자의 의미론으로
보라! ‘틈새’는 도처에 있다. 가뭄으로 메말라 갈라 터진 흙바닥은 물론이고, 갓 쌓아 올린 벽돌들의 이격된 사이 또는 어느덧 익숙하게 자리 잡은 피부 위의 주름에도 ‘틈새’는 있다. 그뿐인가? 그것은 저절로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누군가에 의해 일부러 만들어지기도 한다. 머리카락을 빗질해서 가지런히 갈라놓은 가르마 또는 장롱에 넣기 위해 개어 놓은 담요의 접힌 자국, 그리고 대지 위에 집을 짓기 위해 지면에 파놓은 ‘홈’과 같은 것들이다. ‘틈새’는 때로는 지울 수 없는 흠결(欠缺)처럼 부정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다음처럼 긍정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개체와 개체 사이에 자리한 ‘사이 공간(interspace)’이면서 긴 노동들 사이의 ‘휴식 공간’이자 주체와 타자를 대화하게 만드는 ‘소통의 공간’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틈새’는 미시(micro)의 관점에서 크게 부각되는 것이지만, 거시(macro)의 관점에서는 도저히 알아차릴 수 없는 미미한 존재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다. 거시적 관점에서 틈새(들)은 마티에르(matière) 혹은 텍스튀르(texture)의 일부분으로 흡수되면서 사라지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그런 면에서, 류경열이 잘 지적하고 있듯이, “틈새는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 할 만하다. 즉 틈새는 관점에 따라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 사이를 오간다. 그것은 분명 실체인데 관점에 따라 개념으로만 존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가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듯이, 실제로 “우리 몸을 구성하는 원자 사이에는 틈새가 존재하지만 과학의 힘을 빌리지 않는 이상 우리 눈으로는 발견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 할 것이다. 
작가 류경열은 이렇듯 관점에 따라 달리 나타나는 ‘틈새’의 존재론을 무관심/관심의 영역으로 자리 이동시켜 파악한다. 즉 틈새는 적극적인 의지 속에서 관심을 표명할 때 즉각 파악되는 것이지만, 무관심하다면 틈새는 더 이상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시인 김춘수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고 노래했듯이, 무관심 속에서 무의미했던 미물도 관심 속에서는 유의미한 존재로 거듭난다. 
류경열은 이러한 관심의 영역에 있는 ‘틈새’의 개념으로부터 ‘지구상 멸종 위기의 동물’이라는 실체를 구체화한다. 관심이 촉발시킨 ‘틈새’의 의미론이라 할 것이다. 그렇다. 류경열의 회화가 모색하는 ‘틈새’의 미학이란 ‘보편자(普遍者)’의 존재론(ontology)으로부터 ‘다양한 멸종 위기의 동물들’이라는 특수자(特殊者)의 의미론(semantics)으로 관심이 이동하면서 구체화된다.   


위험한 코끼리, 캔버스에 아크릴과 중성펜, 130.5 x 162 cm, 2017




III. 생태주의 미학: 외연으로부터 함축으로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들’은 우주의 생태계라는 거시적 관점에 있어서는 미미한 존재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거시는 미시의 집적이 이룬 총체라는 점에서 하나하나의 미시적 관점은 거시적 전망을 이해하는 출발점이다. 
작가 류경열이 개별 작품들마다 따로 선보이는 풍자적이고 비판적인 내러티브는 각 동물들의 아기자기한 ‘미시사(microhistory)’ 속에서 다양하게 펼쳐진다. 예를 들어 〈고양이 장난감을 좋아하는 호랑이〉, 〈눈이 부신 부엉이〉 또는 〈바나나를 싫어하는 롤런드고릴라〉라는 작품명처럼 그가 만들어 놓은 자잘한 개별 미시사 속에서 우리는 그 동물들의 외양과 내면 심리를 한꺼번에 두루 살펴볼 수 있게 된다. 특히 〈미세 플라스틱 바다 속의 바다거북〉이나 〈수중핵 실험에 고통 받는 흰긴수염고래〉 혹은 〈총을 두려워하는 회색 늑대〉 그리고 〈밀렵꾼을 피해가는 흰코뿔소〉처럼 개별 내러티브 위에 얹어 놓는 그의 직접적인 생태적 메시지는 사라지는 ‘멸종 위기 동물’들에 대한 우리의 공동체적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류경열은 이번 전시를 위해서 마치 ‘멸종 위기 앞에 선 동물들’의 목록을 만들려는 듯이 작품 한 점마다 다른 한 개체의 동물을 선보인다. ‘외시 혹은 외연(dénotation)’되는 이미지는 피상적으로 다의적이지만, 이내 일련의 공통 함의의 목록을 만들게 되면서 개별 이미지들이 각자 지닌 의미작용을 하나의 생태주의(ecology)의 메시지로 ‘함축(connotation)’하여 전달하기에 이른다.
구체적으로 어떠한 이미지들이 함축의 메시지로 수렴되는 것인가? 먼저 동물의 형상을 이루는 파편적인 화려한 색면들은 마치 ‘틈새’의 이미지를 확장하는 듯이 보인다. 화면 전체를 장식하는 모듈(module)과 기호로서의 반복적인 모나드(monad) 또한 시각적 기표들로서 이러한 틈새의 이미지와 메시지를 고스란히 계승한다. 
보라! 류경열의 ‘멸종 위기 앞에 선 동물들’은 총천연색과 단순한 색면, 간결하고도 두터운 검은 외곽선, 중앙 집중의 구도,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의 팝아트적 변환 속에서 자신의 메시지를 전한다. 그것은 매우 강력하다. ‘핵실험을 하는 심해(深海) 풍경’, ‘미세플라스틱들이 부유하는 바다’, ‘밀렵꾼들에게 뿔이 잘려나간 코뿔소들’, ‘서커스에 동원된 몇 마리 남지 않은 바키타돌고래’ 등 그의 회화는 한편으로 풍자적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직접적인 메시지를 함유하고 있는 익숙한 이미지들이 대거 포진해 있기 때문이다. 
그의 회화에서 이미지들의 위상적인 배치 관계는 강력한 주제 의식과 메시지 전달의 차원에서 이미 마무리되었다. 즉 ‘이미지의 외연’이 침묵하기보다 적극적으로 ‘메시지의 함축’으로 가는 길에 다리를 놓고 안내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그의 작품에 대한 비판적인 논조가 가능해지는 대목이다. 그것은 마치 정치 포스터처럼 잘 짜인 계도(啓導)적 메시지를 효율적으로 드러낸다. 그것은 분명 그의 회화가 포스트팝아트처럼 매우 강력하고도 유쾌하고 명랑한 분위기의 메시지를 전하는 데 있어서 장점이 되지만, 한편으로 회화의 언어가 사는 공간을 비좁게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딜레마가 되기도 한다.  

밀렵꾼을 피해가는 흰코뿔소, 캔버스에 아크릴과 중성펜, 130 x 89.5cm, 2017



몇 마리 남지 않은 바키타돌고래, 캔버스에 아크릴과 중성펜, 90.5  x 73cm, 2017


수중핵 실험에 고통받는 흰수염고래, 캔버스에 아크릴과 중성펜, 115 x 75cm, 2017




IV. 에필로그 - 사라져 가는 모든 것들
‘멸종 위기의 동물들’은 지금도 점점 그 개체 수가 줄어들고 있고 앞으로도 인류가 보호하기 위해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몇 종은 멸종되기도 할 것이다.  인간 주체와 더불어 살았고 현재도 살고 있지만 이내 ‘사라져 가는 모든 것들’의 소생(甦生), 혹은 갱생(更生)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균형을 잃어버린 생태적 질서를 회복하되, 생태주의 위기의 문제의식을 ‘인간 대 자연’의 낡은 이분법적인 대립 구도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사회, 경제, 환경이 하나의 순환을 이루는, 환경운동가 북친(Murray Bookchin)이 주창했던, ‘사회상태주의(Social ecology)’와 같은 총체적 입장에서 모든 것들을 모색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플라스틱 장난감과 함께 하는 펠리칸, 캔버스에 아크릴과 중성펜, 45 x 37.5cm, 2017



이러한 차원에서 류경열의 회화의 언어로 모색하는 생태주의 미학은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관심을 표명하고, 자연의 보편자로부터 특수자를 일일이 호명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라져 가는 모든 것들’ 더 나아가 ‘사라져 버린 모든 것들’에게도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총체적 입장을 견지한다. 생태주의의 무거운 메시지를 유쾌하고도 재기발랄한 포스트팝의 회화 안에 담아 전하는 그의 조형 언어도 그러하지만, 그의 회화는 암울한 과거를 더 이상 암울한 모습으로만 남겨두지 않는다. ‘사라져 가거나 사라져 버린 모든 것들’을 인류 공동의 기억으로부터 ‘지금, 여기’에 소환해서 그것에 대해 되묻고, 되새기는 일을 지속하는 것이다. 이처럼 그의 회화가 생태주의를 총체적인 방식으로 탐구한다고 해서 당장 그 문제들이 실제의 현장에서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일련의 다각도의 노력은 초기에 생태주의 담론에 불씨를 피우고 종국에 생태주의를 공동의 ‘일상과 예술의 현장’에서 지속적으로 유쾌하게 실천해 가는데 있어 주요한 기폭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

 
출전 / 
김성호, 「유쾌한 생태미학 -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공동의 기억」, 카탈로그 서문, (류경열 전, 10. 25~11. 31, 문화공간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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