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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김진남 / 물의 경계, 그 안팎에서 탐색하는 심리적 인간 존재

김성호

물의 경계, 그 안팎에서 탐색하는 심리적 인간 존재


김성호 Kim, Sung-Ho (미술평론가)



I. 인물화 아닌 인물화
김진남의 인물화는 여타의 인물화와 결을 달리 한다. 손의 기술이 뛰어난 정밀한 재현 언어를 구사하고 있음에도, 인체를 미적 탐구의 궁극적 대상으로 삼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인물의 외양보다 내면에 보다 더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히 전통적 의미에서의 ‘인물화 아닌 인물화’라 할 것이다. 화가 김진남은 이번 전시에서 “인간의 의식과 감정을 작업의 주요 테마로 설정하고 인체와 외부의 어떤 것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심리 과정을 표현하고자 한다.” 즉 ‘인물의 외적 관계’를 통해서 ‘인물의 내적 심리’를 탐구하려는 것이다. 
작가의 언술을 빌려 구체적으로 언급하면, “인간 내부의 심리와 감정이 외부 세계(빛, 식물, 물 등)와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여러 표정”을 담아냄으로써 “관람자로 하여금 색다른 현대미술의 인물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제는 세 범주의 소주제들로 구성된다. 먼저 한 부분은 ‘인체-물-빛’의 관계 속에서 생성되는 심리의 문제를 다루는 〈신호〉, 〈호흡〉, 〈불안한 휴식〉 시리즈들로 구성되고, 다른 한 부분은 ‘인체-물-식물’의 관계 속에서 생성되는 심리의 문제를 다루는 〈미스터리〉, 〈우울〉, 〈공허〉 시리즈로 구성된다. 그리고 가장 최근작들로 구성된 또 다른 부분은 ‘회화-사진’의 〈경계〉 시리즈로 구성된다.   
인물 외부의 세계와 관계 맺기의 유형에 따라 탐구되는 인간 심리의 문제는, 작품명 등에서 나타나듯이, 대개 불안, 우울, 공허와 같은 동요하는 심리와 부정의 감정들로 드러난다. 이러한 감정들이 그의 조형 세계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그가 제기하는 ‘빛, 식물, 물, 경계’와 같은 인체의 외부 세계가 이합집산하면서 생성하는 여러 의미들을 ‘물의 경계’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세세히 읽어보고자 한다. 

호흡1, 91.0 x 91.0cm, 캔버스에 유화, 2016




II. 물의 비늘 : 중첩, 연접되는 물의 표층
김진남의 ‘인물화 아닌 인물화’에서, ‘물(水)’은 인물을 둘러싸고 있는 바탕이자, 존재의 근원을 은유한다. 그것은 자궁 속의 양수(羊水)와 같다. 양수가 태아를 둘러싸서 존재의 바탕을 만들 뿐만 아니라 출산 시에 아기를 둘러싸서 분만을 용이하게 만드는 매개 물질이듯이, 물은 존재를 둘러싼 생명의 바탕이자, ‘죽음/삶’처럼 대립하는 것들을 화해시키고 이어 줌으로써 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 물질이다. 생각해 보라! 인체의 70%, 어류의 80%, 그리고 수중 미생물의 95%를 구성하는 것이 바로 ‘물’임을 말이다. 그렇다. 물은 존재의 바탕이자, 존재의 근원에 대한 메타포이다. 
여기 물속에 부유하는 인물이 있다. 그(녀)는 작가 김진남이 만든 역할극의 주인공들로 작가 스스로이거나 그의 아내이다. 우리가 보는 그(녀)의 모습은, 실내 풀장에서 연출, 촬영된 것들로, 대개 물속에서 물의 표층 가까이로 부유할 때 상반신으로 포착된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대개는 물속에서 물의 표층 가까이 접근한 상태에서 포착된 사진들을 참조해 그린 것들이지만, 때로는 몸이 깊은 물속에 잠겨 있거나 어떤 경우에는 얼굴의 일부분이 물 밖에 나와 있기도 하다. 그러니까, ‘회화의 모델이 된 인물(들)’은 촬영을 위해 실제로 깊은 물속에 있었음에도, ‘그의 회화에 나타난 인물’은 표층이라는 얇은 물속에 부유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얇은 물속의 존재’ 즉 ‘물의 표층 아래의 존재들’은 ‘물의 비늘’로 출렁인다. 그런데 왜 ‘물비늘’이 아니고 ‘물의 비늘’인가? 물비늘은 사전적 정의로 “잔잔한 물결이 햇살 따위에 비추는 모양을 이르는 말”이다. 즉 물비늘은 ‘윤슬’처럼 물이 잔잔한 ‘결’(골과 마루를 형성하는 파동의 지속)을 만드는 가운데 빛과 반응하는 양상을 지칭한다. 김진남의 회화에서 빛과 반응하는 물결이 이처럼 ‘잔잔한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인물의 꿈틀거리는 움직임에 의해 공기의 층이 갑작스럽게 물속에서 뒤섞이면서 예상치 못한 불규칙한 결들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실제와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물비늘’이라는 사전적 용어 대신 ‘물의 비늘’이란 용어를 취한다. 
그의 작품에서, 기포(氣泡)가 자리하면서 크기를 달리하는 ‘불규칙의 결(파동)’은 물의 비늘로 중첩된 채 수면의 표층 아래 가까이 한 얼굴의 외양을 뒤덮고 감춘다. 그러면서 공기의 층과 물의 층을 연접시킨다. 생각해 보라! 이 모든 것은 경계 안팎의 범주에서 작동하는 것들이다. 


불안한 휴식1, 116.8 x 80.3cm, 캔버스에 유화, 2016



III. 물의 경계 : 반영의 물거울과 투명의 물유리
물의 표층이 만드는 불규칙한 파동은 그 뒤에 자리한 인물의 형상을 왜곡시킨다. 여기에 물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물리적으로 인물은 물의 ‘안’에 있으나 물의 ‘밖’으로 투영되어 관객에게 지각되는데, 물의 ‘안팎’의 경계에 있는 물의 비늘과 기포들이 뒤섞인 채 다시 뒤덮음으로써 물 ‘안’의 인물을 왜곡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물의 ‘안팎’의 경계면에 존재하는 물의 비늘이 기포들과 뒤섞여 반영(反映)의 ‘거울 효과’와 투영(透映)이라는 ‘유리 효과’를 극적으로 혼재된 상태로 만들어 냄으로써 물 ‘안’의 인물 형상을 일그러뜨리는 것이다. 그래서 인물의 표정 자체를 가늠하는 걸 어렵게 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인물의 심리적 기제를 오히려 강화시키는 것이다. ‘보이는 인물 외면’의 한계치가 ‘보이지 않는 인물 내면’의 심리적 필요성을 증대시키는 셈이다. 
주지하듯이, 물의 경계란 물의 안과 밖, 즉 물의 ‘안팎’의 사이 공간(interspace)이다. 그것은 통상적으로 물의 표면과 같은 납작한 접선(接線, tangent line)의 공간, 즉 접수면(接水面)의 공간을 지칭한다. 한편, 물의 입장이 아닌 물과 맞닿고 있는 공기의 입장에서 언급한다면, 그것은 공기의 표면, 즉 접기면(接氣面)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유념할 것은 물의 경계는 날카로운 칼날처럼 안팎을 나누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직물의 접힘이나 피부의 주름처럼 둥그런 변곡점(變曲點)을 만들면서 안팎의 공간을 만든다. 엄밀하게 말해 그 경계면의 공간은 ‘안이자 밖’이며, ‘안이기도 하고 밖이기도 한’ 공간인 것이다. 그 변곡점을 껴안은 사이의 공간에서 영상이 맺히거나 투과된다. 
김진남의 회화에서 이 변곡의 접점 공간, 사이 공간인 ‘물의 경계’에는 반영과 투영의 언어가 교차한다. 전자는 ‘자기 확인’의 거울 효과로 드러나며, 후자는 ‘자기 부정’의 유리효과로 나타난다. 따라서 비유적으로, 전자는 물거울, 후자는 물유리로 칭해도 족할 것이다.  
주지하듯이, ‘물거울’ 즉 ‘거울 효과의 반영의 언어’는 수면에 반영된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다가 물에 빠져 죽어 수선화가 된 그리스 신화 속 미소년 나르키소스(Narcissos)의 이야기를 드리운다. 프로이트(S. Freud)에 의해 ‘자신이 리비도의 대상’이 되는 것으로 해석된 이 극단의 자기애(自己愛)인 나르시시즘(Narcissism)은 김진남의 회화에서 물의 경계 저편에서 ‘거울 앞 자신’(혹은 관객)을 응시하는 〈미스터리〉 시리즈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자기애 가득한 시선으로 스스로를 바라보는 ‘자기 응시’와 ‘자기 확인’이 재연되는 것이다. 

미스터리2 162.2 x 130.3cm, oil on canvas 2017




경계2 390.9 x 130.3cm, mixed media 2017


그렇다면 그의 회화에서 ‘물유리’ 즉 ‘유리 효과’를 드러내는 ‘투영의 언어’는 어떻게 드러나는가? 그것은 물의 경계면 아래까지 침투한다. 유리 효과를 가로막는 은폐의 ‘물의 기포’ 그리고 반영의 ‘물거울’ 또는 ‘물의 비늘들’이 빛의 투영 자체를 방해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회화는 끝내 투영의 언어를 기술한다. 물의 경계가 그 자체로 거대한 물유리를 만들어 냄으로써 빛을 투과시키고 경계면 반대쪽에 자리한 인물의 형상을 투명하게 건져 올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형상은 ‘자기애의 이미지’의 반대편에 선 ‘자기 부정’과 ‘자기 성찰’의 심리를 드러낸다. 보라! 물속 인물은 모두 눈을 감고 스스로를 성찰한다. 때로는 중생을 품으려는 듯 팔을 벌리고 있거나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양수 속 태아처럼 잔뜩 몸을 웅크린 채 자기 안으로 침투하기도 한다. 때로는 작품명 〈신호〉처럼 불상의 수인(手印)을 연상케 하는 손 모양을 한 채 잠수를 하면서 엄지와 다른 손가락을 동그랗게 만 모양의 ‘아미타구품인(阿彌陀九品印)’을 만들기도 한다. 


신호3, 90.9 x 65.1cm, 캔버스에 유화, 2016



신호1, 90.9 x 60.6cm, 캔버스에 유화, 2015



신호4, 90.9 x 60.6cm, 캔버스에 유화, 2016


IV. 물의 주름: 물의 경계 너머의 심리적 전이
우리가 지금까지 ‘물의 경계’란 개념어를 중심으로 살펴본 김진남의 회화가 지닌 미학과 그 심리적 면모에 대한 탐구를 정리하면 다음의 표와 같다.  



위의 표에서 확인하듯이, 〈미스터리〉 시리즈로 대별되는 ‘물 표면의 반영’과 〈신호〉 시리즈로 대별되는 ‘물속 투영’의 면모는 그가 최근에 천착한 〈경계〉 시리즈에 이르러 물의 경계가 전이되거나 확장한다. 물론 김진남 회화에 나타난 물의 경계란 개념은 물리적인 좌표나 범주의 것이 아니라 여러 비유가 가능한 상징적인 범주의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앞에서 물거울, 물유리, 물비늘, 물주름과 같은 비유들로 고찰한 바와 같이 말이다. 
최소 2개 이상의 캔버스들로 짝을 이룬 그의 최근작인 〈경계〉 시리즈에서는 ‘자기 애착과 자기 긍정’ 그리고 ‘자기 성찰과 자기 부정’이 미분의 덩어리 개념으로 연동된다. ‘물의 비늘’이라는 개념으로부터 ‘물의 주름’이라는 개념으로 전이(轉移)하면서 중첩과 연접의 공간을 보다 더 확장한 까닭이다. 주름은 경계와 경계를 겹치고 덮음으로써 여전히 하나의 경계로 확장한다. 그것은 여럿이 하나의 덩어리로 모인 ‘하나의 복수체’로서 존재하면서 자기 분열을 거듭하는 조현병(調絃病)과 같은 주체 의식을 드러낸다. 물론 그것은 부정이 아니라 긍정의 표상이다. 또한 그것은 대비되는 개념들의 단순한 병치가 아니라 원인과 결과, 원본과 사본, 실재와 가상, 주 정보와 잉여 정보와 같은 영향 관계들이 경계의 안팎에서 재배치된 결과물이다. 따라서 구조화된 외디푸스 신화를 거부하는 앙티-외디푸스를 실천한다. 



경계1 253.2 x 97.0cm, mixed media 2017



경계4 160.5 x 91.0cm, mixed media 2017

화가 김진남의 회화가 어찌 전개될지는 미지수이다. 다만 현재까지 일관된 사실은, 그가 ‘물의 경계’란 화두 속에서 물이라는 생명력의 근원적 물질로부터 기인하고 있는 인간 존재의 다양한 심리적 면모를 회화의 언어를 통해 연구해 오고 있다는 점이다. 달리 말해, 그의 회화란 한마디로 물의 반영과 투영 효과를 둘러싸고 펼쳐지는 ‘자기 긍정’과 ‘자기 부정’에 관한 ‘대비적이지만 한편으론 미묘하게 중첩되고 연접되는 심리적 인간 존재’에 대한 진지한 조형 탐구라 할 것이다. ●

출전 / 

김성호, 「물의 경계, 그 안팎에서 탐색하는 심리적 인간 존재」, 카탈로그 서문, (김진남 전, 11. 1~7, 인사아트스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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