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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비평│정복수 / 가출한 화가의 '출속의 예술'

김성호

가출한 화가의 '출속의 예술'


김성호 Kim, Sung-Ho (미술평론가)


화가 정복수는 이번 개인전을 위해서 청년기의 부산 시절의 그림들과 함께 화구 박스, 이젤 그리고 기다란 캔버스 천 롤과 몇 개의 빈 캔버스들을 주섬주섬 함께 꾸렸다. 그것들은 ‘가출한 화가’라는 부제에 어울릴 만한 것들이다. 
‘가출한 화가’라는 부제로 그의 개인전이 사전부터 ‘너무 잘’ 준비되었던 까닭일까? 이번의 그의 개인전은 실제로 한 화가의 갑작스러운 가출처럼 ‘실감 날 정도로’ 느닷없어 보이고 무엇인가 숭숭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전시장 공간을 현관과 방으로 구분한 나무 프레임의 가벽 그리고 장판처럼 바닥에 깔아 놓은 빈 캔버스 천들은 가출한 화가가 이십 여일을 살기 위해 임시로 만들어 놓은 것들이다. 그런 면에서 전시장 안에 새로이 만들어진 공간은 화가 정복수의 ‘임시의 이주 공간’인 셈이다. 







주지하듯이, 미술가의 작업실을 전시 공간으로 옮겨 놓은 듯한 방식의 전시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전시장 안에 작업 공간을 만들어 놓고 가로, 세로 각기 3×3인치의 작업을 계속 생산해 내던 강익중의 개인전이나, 작가의 아틀리에의 풍경 일부를 전시의 일환으로 구현한 권진규, 천경자 등 여러 상설 유작전이나 작업실을 통째로 옮겨 오는 방식으로 관객을 맞이하던 이윤엽을 비롯한 여러 작가들의 개인전들도 유념할 만하다. 이러한 전시의 유형은 관객과의 소통을 전제로 작업실의 풍경을 전시장으로 연결하는 것이자, 작가로부터 떠난 ‘완성된 결과물’ 자체보다 작가가 지속적으로 개입하는 ‘창작되는 과정’ 자체에 방점을 찍고자 하는 시도이기도 하다. 
정복수는 전시 기간 중 ‘전시장 안 작업실’이라는 ‘임시의 이주 공간’을 만들고, 전시 내용을 매일처럼 변형시키는 이러한 전시를 2014년 나무화랑에서 이미 구현한 바 있다. 관객이 밟고 들어오는 전시장 바닥 가득 캔버스 천을 장판처럼 깔아 놓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 일련의 ‘과정형 전시’를 구현했던 것이다. 그것은 올해에도 마찬가지로, 그가 바닥에 깔아 놓은 캔버스천 위에서 자라난다. 그 이미지들은 마치 그것의 작품명 〈번식하는 초상〉(2017)처럼 모두 변형되고 자라나는 것이다. 






보라!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번식, 자라남이라는 생성의 기제에는 해체가 먼저 자리한다. 한 몸에 한 얼굴을 가진 구조적 연결체는 와해되고 해체된다. 이어서 생성이 뒤따른다. 해체된 팔다리로부터 다수의 머리가 자라나거나 마치 파괴의 신(神)인 시바(Śiva)의 형상처럼 한 몸에 여러 팔다리가 연결되면서 해체로부터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는 ‘변형의 생성’을 주도하는 것이다. 그의 회화에서 인체들은 목이 잘린 머리들 혹은 팔다리를 잃은 토르소로 나타나거나 해체된 자리에서 자라나는 과장된 근육과 내장으로 나타난다. 굴러다니는 머리, 제3의 눈과 같은 여러 눈들, 기다란 혀와 팔다리, 강조된 성기들은 해부학적 근거를 갖고 있지 못한 것들이다. 
그의 해체된 신체, 해체된 채 비정상적으로 자라는 신체는 ‘언캐니(uncanny)’ 그 자체이다. 사전적 의미로 ‘기인한 느낌’을 지칭하는 언캐니는 특히 ‘친밀한 대상에게서 느끼는 낯설고 섬뜩한 심리적 공포’를 가리킨다. 친밀한 가족의 싸늘한 주검이나 꿈속에서 보게 된 자신의 영혼 등 ‘친밀한 자(들)의 낯선 등장’에서 기인한 언캐니는 억압된 심리적 욕망, 성적 욕망, 거세의 공포, 배설과 죽음의 충동과 같은 무섭고 음울한 그림자들과 연동된다. 바타유(Georges Bataille)가 지적하고 ‘금기에 대한 위반의 욕망’과 더불어 ‘인지적 불확실성’이 야기한 극도의 불안이 정복수 회화가 견지한 언캐니의 미학 도처에서 꿈틀대는 것이다.   
금기를 위반하려는 욕망과 언캐니의 미학은 ‘해체되고 있으나 동시에 자라는’ 신체 안에서 스멀스멀 펼쳐진다. 물론 해체/생성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그의 ‘파편적 신체 놀이’는 순전히 언캐니의 조형을 실천하는 작가의 상상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다. 1983년 '젊은 의식전' 당시 작가 노트에서 그는 다음처럼 말한다: “그림이라는 것은 살아서 움직여야 한다. 춤도 추고, 고함도 지르고, 말도 하고, 사랑도 하고, 증오도 하고, 술도 마시고, 미워도 하고, 사람이 살아가듯 살아 있어야 그림이다. 그리기란 잘 포장된 도로 위를 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없는 길을 다시 만드는 것이다. 그것도 맨몸으로.” 




그렇다. 그의 ‘자라는 회화’는 ‘맨몸으로 없는 길을 다시 만드는 살아 있는 움직임’인 까닭에 예측불허의 무엇이다. 마치 그것은 ‘손수레에 화구를 잔뜩 싣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오로지 그림만 그리고 싶다’던 그의 17세 청소년기의 강렬하고 간절했던 꿈처럼, 언제나 작업만 하고픈 그의 그간의 소망을 이번 전시에서 지속해 나가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2017년 부산을 다시 방문했을 때 그린 풍경 작업들을 전시장에 펼쳐 놓고 전시장에서 새로운 작업을 만들어 나가는 유형이 뒤섞이는 이번 전시는 형식적으로는 아니지만 개념상으로는 마치 ‘회고전’과 같은 것이다. 즉 개념적으로 열망으로 가득했던 이전의 청년기와 현재를 살고 있는 작가의 오늘날을 총체적으로 잇는 회고전과 같은 것이라 하겠다. 
새로운 환경 속에서 작업을 이어나가는 화가 정복수에게 전시장을 찾는 관객은 새로운 도전이 된다. 전시 기간 동안 그 스스로 관객에 의해 간섭받고 방해받는 창작을 하겠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관객들은 그의 작품을 상찬하기도 하겠지만 더러는 이러저러한 요청을 하면서 그를 괴롭힐 수도 있을 것이다. 함께 나누던 막걸리나 음식을 바닥에 쏟아 캔버스 바닥을 더럽힐 수 있는 가능성은 보다 더 커졌다. 그는 이 모든 돌발 상황 자체를 열어 두고 작업을 위한 바탕으로 삼는다. 누군가 짓궂은 장난의 일환으로 캔버스 바닥 위에 붙여 놓은 ‘신었던 양말’을 자신의 초상 작업으로 녹여 낸 것은 대표적인 예라 할 것이다.   


이번 개인전 기간 동안 ‘가출(家出)한 화가’ 정복수는 속세를 떠나 오묘한 예술의 공간 속으로 잠입하는 출가(出家) 혹은 출속(出俗)을 감행한다. 우리는 여기서 ‘출가’ 또는 ‘출속’을 불교에서 “번뇌에 얽매인 세속의 인연을 버리고 성자(聖者)의 수행 생활에 들어감”으로 해석하고, 카톨릭에서 “세간을 떠나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일”로 풀이하고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그의 수행 생활의 공간은 전시장이라는 예술의 공간이다. 그는 여기서 예술 아닌 모든 세속적인 것들로부터 탈주하고 예술(만)의 공간으로 깊이 잠입해 들어간다. 23일 동안의 전시 기간 중 그가 행한 예술을 적어도 ‘출가 혹은 출속의 예술’이라 할 만하지 않은가? 나아가 이 ‘출속의 예술’이란 화가 정복수가 유토피아(utopia)란 용어에서 빌려와 자신의 이름을 붙이면서까지 오랫동안 천착해 왔던, 낙원의 예술 즉 ‘복수피아(bocsupia)'의 세계와 다름이 없다고 할 것이다. ●

출전 /
김성호, 「가출한 화가의 출속의 예술」, 2017년 사루비아 전시심층비평, 『자료집』  (정복수 개인전 - 가출한 화가, 2017. 7. 13-8.4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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