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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론│사석원 / 날것으로 살아 있는 모든 것들

김성호

사석원 작가론 

날것으로 살아 있는 모든 것들


김성호(미술평론가)




I. 프롤로그
화가 사석원에게 있어 화두(話頭)는 ‘생명을 입어 꿈틀거리는 세상의 모든 것들에 대한 관심’이다. 그에게 있어 ‘모든 것들’은 식물로부터 동물에 이르기까지 실존하고 있는 존재, 신화로부터 우화에 이르기까지 가상 속에 거주하는 허구적 존재들을 모두 아우른다. 바람에 흔들리는 잡초들이나 땅에 구멍을 뚫고 사는 개미들과 같은 미물(微物)들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에게는 생명이 내재한다. 한낱 거짓의 전승으로 간주되는 ‘우화’와 ‘신화’는 또 어떠한가? 그것은 본질적으로는 허구의 존재이지만, 마치 사물 속에 정령(精靈)을 살게 하는 애니미즘(animism)의 세계와 애니메이션의 동화(動畫)처럼 내러티브로 꿈틀거리는 생명의 존재이기도 하다. 
사석원의 작품에는 실재하는 모든 것들이 서로 만나고, 우화와 신화라는 이름으로 허구를 초대하기도 한다. 질펀한 물감이 화면 가득한 그의 작품이 드러내는 신명의 생명력이란 무엇인지 여러 작품들을 분석해 가면서 살펴보기로 하자.   

사석원,부엉이 백 마리 (부분),53x45.5cmx100ea,Mixed media on canvas,2012



II. 동물의 왕국
뭐니 뭐니 해도 그가 잘 하는 것은 동물 그리기이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아프리카로 떠나 동물들을 또 그려봐야죠. 동물 그림은 제 전공과목(?)이니까요”라면서 ‘동물 그림’을 자신의 “전공과목”이라고 너스레를 떤 바 있다. 아프리카에서 보는 동물들이란 코끼리, 물소, 얼룩말, 치타, 사자와 같은 야생 동물들이다. 뛰어다니는 야생 동물을 보면서 지속했던 크로키와 사생의 훈련 덕분일 터, 그는 화면 위에 특징을 잘 포착해 놓은 각종 동물들을 턱턱 쉬이 올려놓는다. 
그런데 그의 작품 안에는, 근엄한 표정으로 관객을 주시하는 호랑이도 있고 촐랑이며 하늘 높이 뛰어다니는 꽃사슴도 있고, 눈을 끔뻑거리며 졸듯이 앉아 있는 부엉이도 있지만, 이러한 야생의 들짐승, 날짐승과 함께 인간 주변에 존재하는 동물들이 눈에 자주 보인다. 그것들은 수탉, 당나귀, 황소처럼 인간의 거주지 주변에서 인간과 함께 지내고 있어 인간에게 친근한 동물들이다.
이 동물들은 먼저 작가 자신과 비유하는 대상이다. 그의 작품 〈산을 뚫고 나온 소〉를 두고 사석원이 자신의 작가 노트에서 언급한 진술을 보면 이러한 관점이 잘 드러나 있다.

“눈을 부릅뜬 근육질의 황소가 
폭풍 같은 기세로 산을 뚫고 나왔다. 
시뻘건 볏을 높이 세운 채 
온몸으로 뭔가 말을 던지는 수탉.
나는 그놈들처럼 돌진해 본 적이 있던가. 
하고 싶은 말을 당당하게 내뱉으며 살고 있나.“
(사석원, ‘꽃을 씹는 당나귀‘에서) 
   
문자대로의 의미라면, ‘눈을 부릅뜬 황소’나 ‘볏을 높이 세운 수탉’들은 사석원이 결여하고 있는 ‘기세’와 ‘당당함’을 갖추고 있는 존재들이다. 그가 스스로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당당하게 내뱉으며 살고 있는지’를 자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물상은 사석원에게 있어 자신의 모습을 반추하고 재성찰하는 모델링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아는 사람들은 다 안다. 그가 누구보다 더 기개가 있고 호탕하며 누구보다 더 세상을 낙천적으로 보고 있음을 말이다. 이처럼 그의 진술에 근거할 때, 그가 그리는 동물들은 자신이 닮고 싶은 면모들을 지니고 있는 존재들이다.  
그의 동물들은 한결같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알록달록한 산길을 뚝심 있게 뚜벅뚜벅 걷고 있는 한 마리의 당나귀를 보라! 사석원은 당나귀를 두고 ‘그 고집과 심성에 반했다’고 말한다. 진득함과 묵묵함을 가슴에 품은 당나귀의 등 위에는 붉은 꽃이 한 가득 실려 있다. 물건들이 가득한 등짐도 마다하지 않고 짊어지고 가는 당나귀가 ‘꽃 무더기 짐’을 마다하랴? 고단한 짐꾼의 의무를 다하면서도 당나귀가 신명나게 콧노래를 부르며 산길을 걸을 수 있는 것도 ‘꽃 무더기 짐’ 때문이다.   
당나귀뿐인가? 도도한 표정으로 노래하는 호랑이, 날개를 파닥이며 요란스럽게 울어대는 수탉, 심술이 난 듯이 사시(斜視)를 한 채 자리를 지키고 있는 황소, 새들과 친구가 된 염소 등, 이 모든 동물들은 사람의 인격을 뒤집어 쓴 의인화의 산물이자, 우화의 주인공들이다. 여기에는 천도복숭아의 설화와 한데 얽힌 원숭이의 운명과, 제왕으로서의 위상을 견지하려던 수탉의 우화가 뒤섞여 있다. 이처럼 그들은 복잡다기한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 군상들을 하나하나 비유하는 대상이 된다. 
이렇듯 많은 동물들이 그의 화폭 속에 살아서 꿈틀거리는 곳을 우리는 무엇이라 부를까? 신화와 설화, 상징과 의인화의 존재로서의 동물들이 집단적으로 서식하는 이미지 속 가상 서식지로서의 ‘동물의 왕국’이라 부르면 어떠할까?  


사석원,가을 달밤의 수탉,100x100cm,Oil on canvas,2011






III. 만화방창(萬化方暢)
사석원의 2007년 가나아트센터에서 가졌던 개인전의 부제는 ‘만화방창(萬化方暢)’이었다. 원불교에서는 이 만화방창을 ‘따뜻한 봄날 천지 만물이 힘차게 자라나 만든 흐드러진 상태’로 풀이한다.
그의 그림에는 이러한 봄날의 풍경으로 가득하다. 보라! 그의 작품 〈부엉이와 매화〉(2011)에서 우리는 붉은 매화가 활짝 피어 있는 나뭇가지에 앉아 봄밤을 즐기고 있는 화려한 외양의 부엉이 한 마리를 볼 수 있다. 낮에 자고 밤에 활동하는 이 야행성의 새는 밝은 달빛 속에서 매화 향기에 취한 채 꿈틀대는 생명의 기운으로 가득한 봄밤을 만끽하고 있다. 또 다른 작품 〈백두산 부엉이〉(2011)에는 울긋불긋 꽃들의 향연과 야생 동물들의 생생한 펄떡거림이 가득한 총천연색의 봄의 기운이 완연하다. 작품 제목에 ‘봄’이라는 단어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고 할지라도 봄은 그의 작품 도처에서 자라난다. 그의 작품 〈가평 용소 폭포〉(2011)에서 작가 사석원은 무더기로 피어 있는 분홍빛 진달래를 화면 가득 그려 넣고 아예 대놓고 봄을 홍보하는 중이다. 
그런데 사석원의 그림에서 ‘만화방창’은 ‘봄 그림’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인가? 물론 계절이 양춘가절(陽春佳節)이라면 만화방창은 우리 주변에서도 쉬이 모색된다. 그렇다고 만화방창을 꼭 봄이라는 절기에 붙들어 맬 필요는 없다. 이 동양 철학적 개념 안에는 ‘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닌 ‘봄의 기운’으로 ‘우주 만물을 화육(化育)하는 것’ 자체가 보다 더 주요한 것이다. 나뭇잎이 떨어지고 가시적으로는 생을 다한 듯한 겨울에도, 만물이 잠들어 있는 듯한 한밤에도 ‘생동하는 봄의 기운’이라는 천지자연의 이치로 자연을 대할 필요가 요청되는 것이다. 
그의 작품 〈산유화〉(2012)를 보라! 녹색의 식물로 뒤덮인 산릉에 흐드러지게 핀 키 낮은 크기의 붉고 노란 꽃 무더기, 계곡 사이로 힘차게 쏟아지는 폭포 그리고 그 위를 뛰어다니는 하얀 산양이 어우러진 풍경은 분명 ‘봄’의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이 작품의 제목이 ‘산유화’임을 상기할 때 꽃의 생명과 봄의 기운은 특정 계절로서의 봄 외에도 가능함을 유념할 일이다. 
주지하듯이, ‘산유화(山有花)’란 특정 꽃이나 식물을 지칭하는 용어가 아니라, 말 그대로 ‘산에 있는 꽃’을 가리킨다. 이것은 시인 김소월(金素月)이 1925년에 간행된 시집 『진달래꽃』 속에 게재한 시제목인 ‘산유화’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그의 시를 다시 보자.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 갈봄 여름 없이 / 꽃이 피네.” 시인 김소월이 제 1연에서 노래하고 있는 ‘산유화’는 계절과 상관없이 봄에도 여름에도 가을에도 산에 있는 꽃의 존재 자체를 의미한다. 즉 가을, 봄, 여름을 가리지 않고 피어 있는 꽃, 그것은 본질에 있어 언제나 변함없는 ‘산(山)’의 ‘영원한 이미지’(永遠像)이자 ‘보편적 자연’에 관한 하나의 메타포가 된다. 즉 산유화란 봄이 아니라 봄의 기운으로도 가능한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김소월이 그리는 산유화의 세계에는 ‘피다’이라는 생성의 본질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축에는 ‘지다’라는 소멸의 본질이 자리한다. “山에는 꽃 지네 / 꽃이 지네 / 갈 봄 여름 없이 / 꽃이 지네”라는 제 4연의 표현은 생성 너머의 소멸을 자연의 본질로 함께 불러온다. 
사석원의 작품에서 만화방창의 세계는 김소월의 생성/소멸의 자연 미학을 계승한다. 그것은 봄이 아니라 봄의 기운을 추구하는 가운데서 나타난다. 보라! 사석원의 ‘만화방창’이라는 봄은 추운 겨울에도, 그리고 만물이 잠드는 한밤에도 온다. 
앞서 우리가 살펴보았던 ‘동물의 왕국’에서 이러한 만화방창의 세계는 쉽게 간파된다. 그의 작품 〈겨울 한라산 독수리〉(2012)에서 우리는 하얀 눈이 뒤덮은 한라산 언덕에 파릇한 식물의 꿈틀거림과 매서운 눈으로 세상을 조망하는 독수리의 뜨거운 생명 의지를 확인한다. 또 다른 작품 〈함박눈〉(2011)에는 폭설이 내리는 가운데, 따지 않은 감들이 달려 있는 감나무 가지 위에 부엉이가 새끼 부엉이와 함께 다정하게 앉아 있다. 까치밥으로 남겼다고 하기에는 많은 감들이 겨울 감나무에 매달려 눈을 맞으면서 생명의 씨앗을 품은 채 잔잔하게 부엉이 모자에게 속삭인다. 이 겨울을 같이 있자고 말이다. 
그뿐인가? 생명이 소멸한 듯한 혹설의 겨울뿐 아니라 모두 잠이 든 것 같은 한밤에도 자지 않는 생명들이 있다. 또 다른 작품 〈달밤〉(2012)에는 휘영청 떠 있는 달빛을 배경으로 두 마리의 수탉이 잠도 자지 아니하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싸움을 한창 벌이고 있는 중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들의 아침의 승패가 그다지 궁금하지 않다. 한 놈이 패하겠지만, 다른 한 놈은 살아 자신이 원하는 영역 속에서 생을 이어가고, 또 다른 생물들과의 싸움에서 언젠가는 패할 것이기 때문이다. 
생성과 소멸 그것은 분명 반대어이지만, 만화방창을 노래하는 사석원의 작품 속에서는 ‘존재라고 하는 같은 말의 다른 표상’으로 드러난다.     


사석원,덕유산 칠연폭포,130.3x162.2cm,Oil on canvas,2012

1776년 3월 창덕궁 후원, 2014, oil on canvas, 162.1×227.3cm




 IV. '더불어, 함께'의 조화와 걸쭉한 신명
사석원의 작품에서 봄의 기운과 만화방창을 노래하는 주체는 ‘동물의 왕국’ 속 동물만이 아니다. 푸릇푸릇하게 자라난 초목과 붉게 천지를 덮은 산유화와 같은 식물들 역시 만화방창을 노래하는 주체로서 함께 자리한다. 
그 뿐인가? 콸콸콸 중력의 깊이로 쏟아져 내리는 폭포는 또 어떠한가? 몇 해 동안 전국에 소재한 폭포를 두루 찾아다니며 사생을 하고 사진으로 기록한 폭포의 풍경은 그의 회화 작품에서 새롭게 번안되어 출현한다. 그가 기록하고 그려 온 국내의 폭포는 수없이 많다. ‘함양 지리산 용추폭포’, ‘설악산 대승폭포’, ‘소백산 희백폭포’, ‘계룡산 은천폭포’ 등 명승지를 뚫고 흐르는 폭포들은 물론이고, 국내의 모든 계곡을 흐르는 폭포들을 화제(畵題)로 삼기 위해 그는 국내의 명산들을 사진기를 메고 찾아다녔다. 북한의 금강산마저 자신의 화제를 위해서 기꺼이 담아왔다. ‘양산 홍룡폭포’, ‘주왕산 달기폭포’, ‘포천 비둘기낭폭포’, ‘삼척 연화산 미인폭포’, ‘철원 명성산 삼부연폭포’, ‘영월 용봉산 연하폭포’, ‘가평 명지산 명지폭포’. ‘포항 내연산 연산폭포’, ‘덕유산 칠연폭포’ 등 무수히 많은 폭포들은 대개 2011년과 2012년에 집중적으로 그려졌다. 이러한 실명의 폭포 그림은, 작가 사석원의 해석이 담겼다고 할지라도, 폭포를 중심으로 한 실경 사생이 대부분이다. 
단지 실경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가 즉흥적이고 즉발적으로 그려내는 붓질로 대상을 신명나게 재해석하여 내었다는 것이다. 그는 팔레트에 물감을 짜서 혼색의 과정을 거친 이후에 캔버스에 물감을 올리기보다 캔버스에 직접 물감을 짜서 그 위에 원색의 효과를 최대한 살리는 창작 방식을 선호한다. 현란한 물감 원색의 시각적 향연도 그렇지만, 캔버스 화면 위에서 흡착되지 않고 툭툭 얹혀 있는 유화 물감 자체의 질펀한 질료감이 선사하는 촉각적 감각 역시 그의 작품을 분석하는데 있어서 주요한 원천이다. 사석원은 이러한 질펀한 마티에르의 효과를 선사하기 위해서 ‘유화 물감을 동양화 붓’으로 거칠게 다룬다. 그것은 가히 서양의 질료와 동양의 도구가 만난 융합의 결과라 할 만하다.

“나는 서양화를 배운 적이 없다. 서양화에서 요구되는 섬세한 테크닉 구사 또한 어렵다. 이런 핸디캡은 오히려 새로운 시도를 가능케 했다. 동양화의 가장 큰 매력은 붓질, 서양화의 가장 큰 매력은 색에서 표현되는 현란함이다. 동양화 붓에 유화물감을 묻혀 그림을 그리고 두 가지 매력을 융합하는 과정 속에서 동서양의 경계는 허물어진다.” 

그렇다. 그가 표현하고 있듯이, 서양화의 전통이 추구해 온 세밀한 재현의 기술을 구사하지 못하는 재현 능력의 결여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핸디캡이다. 그렇지만, 동양화 전공의 사석원에게 있어서 서양식 재현 능력의 부족은 오히려 새로운 생산을 가능케 하는 장점으로 작용했다. 걸쭉한 유화 물감을 동양화의 모필에 담아 휘몰아치면서 캔버스 위에 예상치 못하는 효과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자. 동양화의 매력을 ‘붓질’로 꼽을 수 있는 까닭은 모필이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유연한 재질을 화가의 기운생동으로 운영하면서 만들어내는 변주 때문이다. 때로는 빠른 필치로 모필을 딱딱하게 만들어 날카로운 표현을 드러내고, 때로는 느슨한 필치로 물감의 퍼짐을 풍요롭고 부드럽게 만드는 기술을 구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먹과 안료를 푼 수용성 물감이 제격이다. 그런데 사석원은 모필에 먹과 수용성 물감이 어울리는 애초의 궁합을 버리고 작위적으로 둘의 만남을 추진함으로써 예상할 수 없는 낯선 효과를 창출한다. 즉 부드러운 모필에 걸쭉한 유화 물감이나 아크릴 물감을 묻혀 덕지덕지 캔버스 위에 덩어리로 남기거나, 낙서를 하듯 모필을 질질 끌고 다니며 물감의 잔여물을 캔버스 위에 흔적으로 남기는 것이다. 때로는 물감 때문에 막대기처럼 굳어진 모필을 버리지 않고 화면 위에 툭툭 찍어 올리는 방식으로 자신의 융합의 회화 언어 창출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다원화된 조형 방법을 시도한다. 
그뿐인가? 잭슨폴록의 드리핑 회화처럼 튜브로부터 또는 물감 통으로부터 나온 물감 자체를 용매제와 섞지 않고 캔버스 위에 직접 줄줄 흘리기도 한다. 화면을 엷게 만드는 잔잔한 붓질이 거의 없고, 물감 자체를 흘리거나 점묘식으로 툭툭 얹어 내는 창작 방식을 선호하는 까닭에, 그의 작품은 오일 파스텔로 거칠게 문질러 그려낸 것 같은 원색 자체의 시각적 효과와 더불어 강력한 물질감의 촉각적 효과를 자연스럽게 동반한다.
그런 탓일까? 그의 화면 속 동식물과 자연 풍경은 실경에 기초하고 있음에도, 이러한 시각적, 촉각적 효과 때문에 낯선 인위적 풍경으로 다가온다. 특히 동식물을 치장하는 화려한 원색은 마치 동양의 오방색(五方色)으로 장식된 민화(民畫) 혹은 무속화(巫俗畫)의 특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무명의 화가들이 그렸던 민화의 특성을 공유한다는 차원에서, 그의 그림은 소박함, 해학과 익살 그리고 날것의 생생함으로 가득하다. 그의 작품 안에서는 사의(寫意)로 위장한 사대부의 문인화의 정신보다 이처럼 민초의 삶이 체화된 민화의 몸이 가득하다. 
폭포가 쏟아지는 풍경을 바탕으로 자리한 수탉이나 산의 정상을 밟고 있는 호랑이의 거만한 위상은 벽사진경(辟邪進慶)의 민화로 손색이 없고, 소, 닭, 말들이 화면 가득한 그림들은 십이지신(十二支神)의 민화로 기능할 만하다. 거기에는 날것의 어눌한 몸짓이 있다. 임파스토가 강렬한 마티에르의 효과처럼 거기에는 걸쭉한 신명이 자리한다. 신명은 차라리 그의 작품 도처에서 발견된다. 
신명이란 무엇인가? ‘흥겨운 신이나 멋’이라는 의미의 신명이란 단어에는 단일한 한자적 의미가 없다. 다만 ‘신령스럽고 이치에 밝다’는 의미의 ‘신명(神明)’과 몸과 목숨을 지칭하는 ‘신명(身命)’ 그리고 ‘몸과 명예’를 한데 아우르는 ‘신명(身名)’이 한데 어우러진 채 ‘신, 흥, 감흥’의 의미와 공유할 뿐이다. 이러한 흥으로서의 신명이란 혼자 있을 때보다 ‘더불어, 함께’일 때 보다 더 흥겹게 생성되고 활성화된다. 보라! 사석원의 실경에 기초한 풍경은 단독으로 등장할 때보다 소, 수탉, 부엉이, 사슴 등과 ‘더불어, 함께’ 어우러질 때 더 민화답다. 그때가 더 신명스럽다. 게다가 부엉이나 호랑이도 홀로 등장할 때보다 가족이나 어미와 새끼가 함께 등장할 때 보다 더 신명이 난다.  
그의 작품에서는, 〈금수산 용담폭포와 황소〉(2011-2012)와 〈가을 달밤의 수탉〉(2011) 그리고 〈새벽의 코뿔소〉(2011)의 경우처럼 동식물이 구체화된 공간적, 시간적 배경과 함께 서로 어우러진 채 만날 때 신명이 살아난다. 그의 또 다른 작품인 〈설악산 천불동계곡 오련폭포〉(2012)를 보라! 거기에는 깊은 산속의 계곡을 따라 흐르는 오련폭포의 실경이 흐르고 그곳을 배경으로 나뭇가지 위에서 부엉이가 주변을 살피는 가운데, 한 마리의 사슴이 깡충거리며 뛰놀고 있다. ‘더불어, 함께’라는 화두가 서로가 서로를 만나게 하면서 만들어내는 신명의 풍경이다. 

경복궁 꽃사슴, 2014, oil on canvas,130.3×193.9cm

1895년 경복궁 향원정 호랑이, 2014,


IV. 에필로그
‘동식물의 자연’과 ‘시간과 공간이라는 맥락’의 만남, 한 동물이 기대하는 ‘또 다른 동식물들’과의 만남, ‘서로 다른 것들’의 만남과 ‘더불어, 함께의 만남’이라는 화두는 신명 나는 유흥과 여행을 좋아하며 새로운 만남을 늘 꿈꾸는 작가 사석원의 천성과 맥을 같이 한다. 
서구의 회화 재료인 유화와 동양의 서화(書畵) 도구인 모필은 그렇게 만났다. 사석원의 작업에서 물질과 물질이, 자연과 대상이 서로를 융합하는 그의 조형 언어는 결국 ‘생명으로 꿈틀대는 살아 있는 모든 날것들에 대한 관심과 그것들의 생짜배기 만남’으로 정의된다.  
따라서 화가 사석원의 화제(畵題)는 생명을 고갱이로 삼은 모든 것들의 만남이 만드는 이야기들이다. 사람의 인격을 뒤집어쓴 동물들이 그의 화폭 위에서 사석원표 우화의 주인공이 되고, 바위나 물, 폭포처럼 생짜배기의 사물들이 그의 그림 속에서 조선의 왕조사와 만난다. 동양적인 정신계와 서양적인 물질계가 마치 동양의 모필과 서양의 물감의 조우(遭遇)처럼 캔버스 위에서 만나고 또 만난다. 그것도 신명스러운 몸짓으로 말이다. ●

출전/ 
김성호, 「날것으로 살아 있는 모든 것들」, 사석원 작가론-표지 작가,『미술평단』, 한국미술평론가협회, 가을호, 2017, pp.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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