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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안재홍 전 / 탈주하는 선과 덩어리 몸으로서의 ‘나’

김성호


탈주하는 선과 덩어리 몸으로서의 '나'


김성호 Kim, Sung-Ho (미술평론가) 
 


I. 나를 본다 - 실존적 자아
모든 것이 ‘나’로부터 시작된다. 내적 투사의 대상으로서의 사물도, 소통 주체로서의 타자도, 존재 확인을 위한 지평으로서의 세계도 나로부터 시작된다. 내가 없으면 사랑도, 예술도, 세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나로부터 시작되지 않는 것이란 이 세계 속에서 아무 것도 없다고 할 것이다. 살아 있음을 확인케 하는 이러한 ‘실존적 자아 인식’은 안재홍의 작업에서 가장 기본적인 출발 지점이다. 

“나에게 있어 작업은 ‘나를 본다’에서 출발한다. 존재론적인 나의 삶, 현실 속에서 자의나 타의로의 속박, 그 속에서 꿈꾸고 있는 나 자신을 작품화한다.” 

그렇다. 안재홍의 작품 〈나를 본다〉에 드러난 주체적 인식은 자신의 현실 속 개별적 존재라는‘실존적 자아’에 집중한다는 뜻이다. 그녀는 누구의 아내로서, 엄마로서, 며느리로서, 선생으로서 끊임없이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규정되는 주체로 살아가는 ‘사회적 자아’의 존재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안재홍’이라는 단독자로서 살아가는 ‘본래적 자아’라는 실존적 주체이다. 
단독자, 혹은 개별자라고 하는 ‘타자와 대치될 수 없는 실존’에 대한 인식은 현실 속으로부터 나온다. 이러한 실존 인식은 대개 소외, 낙망, 절망들로 점철되어 있는 현실로부터 생명력을 얻는다. 그곳에서 꿈과 희망 그리고 생의 의지와 같은 ‘절망적인 현실을 타계하고자 하는 욕망’이 꿈틀대는 까닭이다. 
안재홍에게서도 다를 바 없다. 조각을 전공하고 대학을 졸업한 안재홍은 결혼과 육아로 작업의 공백기를 가지게 되면서 단독자로서의 실존적 주체에 대한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끼게 된다. 즉 잠시 망각했던 예술가라는 단독자로서의 안재홍을 떠올리게 된 것이다. 그녀는 한 인터뷰에서, 작가로서의 삶을 잠시 접고 육아에 전념하던 한 때를 떠올린다. 어린 아이를 등에 업은 채, 바람 부는 날의 풍경을 창문 밖으로 바라보다가, 갑자기 온몸으로 바람을 막아가며 떨며 서 있는 한 그루의 느티나무로부터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예술 창작을 지속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비루한 현실, “이러다가는 아예 작업 자체를 못하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이르는 좌절의 끝에서 비장한 삶의 의지와 욕망이 다시 살아나게 된 것이다.    
안재홍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간상(像)은, 그러한 면에서 비유적으로 말해, 소외, 낙망으로 가득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면서 흘렸던 눈물과 함께 벼랑으로 추락했던 절망의 이슬을 먹고 자라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우리는 그것을 가히 내적 주체에 대해 성찰하고(나를 보다) 어둠과 낙망으로부터 성장하는(자라다) ‘단독자로서의 실존적 주체’라 부를 수 있겠다. 
그것은 어둡고 음습한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밝고 희망찬 미래를 향하여 탈주하려고 시도하면서도 끝내 벗어나지 못한 상황에서 주절거리는 독백과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푸념이기보다 작은 희망에 가깝다.  

나를 본다,200(H)cm,구리선,2009





 II. 녹슨 구리선과 드로잉 조각
안재홍의 조각은 구리선에서 자라난다. 작가는 피복을 벗겨낸 가느다란 구리선 다발을 사서 몇 가닥으로 뭉치고 휘어서 인체의 형상을 빚어내거나, 굵은 구리선으로 화이트 큐브의 벽면에 선묘와 같은 인물 형상을 만들어 낸다. 우리는 어떤 면에서 그녀의 조각들을 ‘구리선으로 그린 조각적 회화’라 할 수 있겠다. 그녀의 조각이 3차원의 볼륨과 매스를 명확히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벽면에 들러붙거나 최소한의 볼륨으로 서 있는 납작한 것들이 거의 대부분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표현 자체가 무리한 것은 아니다.  
다만 매체적 특성에 근거한 명확한 표현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조각적 회화’라는 말 대신에 의당 ‘회화적 조각’이라는 말을 사용해야만 할 것이다. 그녀의 작품이 조각이라는 물리적 속성을 분명히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그녀의 조각이 드러내는 ‘회화적 평면’의 가능성에 주목하면서 그녀의 작품에 ‘드로잉 조각’이라 이름을 붙이고자 한다. 
안재홍의 조각은 구리선으로 시작하고 구리선으로부터 자라는 ‘드로잉 조각’이다. 그녀가 작가 노트에서, “나의 작업은 선을 통해 흐르고, 자란다”고 표현하고 있듯이, 그녀의 작업은 유기적인 ‘선(線)’들이 여러 번 겹쳐지고 반복되면서 하나의 덩어리를 만들어내는 ‘드로잉 조각’인 것이다. 동선 외에도 다양한 굵기의 동파이프를 함께 사용한 까닭에 ‘철제 덩어리’로 인식되는 몇몇 조각 작품에서도, 작가는 ‘선’의 매력을 놓치지 않는다. 덩어리의 조각체(體) 안에서도 ‘한 올 한 올이 생생히 살아 있는 선’의 움직임들을 만들어 놓고 있는 까닭이다. 그 선들은 때로는 스멀스멀 자라나 몸체 밖으로 벗어나면서 배경으로 확산되기도 하고, 때로는 수차례 몸체를 뚫고 횡단하기도 한다. 
이처럼, 안재홍은 동선과 동파이프를 함께 사용하면서 선과 면을, 얇음과 두꺼움을 대비시키고 나아가 연성(軟性)과 경성(硬性)을 겹쳐지게 함으로써 인물 형상의 다양성과 풍요로움을 도모한다. 그렇지만 생각보다 실제로 인물 형상 자체가 다양하지는 않다. 그의 인물상이 언제나 내면적 자아를 응시하는 웅크리고 있는 형상들로부터 출몰하고 있기 때문이다. 
머리와 팔이 없는 불구의 인체상인 그것들은 아예 한 ‘덩어리로서의 몸’에 가깝다. 머리에서도 눈, 코, 입을 찾을 수는 없다. 그녀가 인체상을 ‘덩어리로서의 몸’으로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덩어리로서의 몸’이란 들뢰즈(G. Deleuze)의 진술대로 ‘기관 없는 신체’(le corps sans organes)에 비할 만하다. 그것은 뇌라는 기관의 우위성을 내세우지 않는다. 눈, 코, 입의 기관들이 존재한다고 해도 실제로 그것들은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것들이다. 그녀의 인간상이 인체(기관 있는)가 아닌 인간(기관 없는)을 지향하고, 인간의 외적 형상보다 전인(全人)으로서의 내적 본성 자체를 더욱 주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라! 그녀가 만든 인간상은 전인상을 지향하지만 그다지 건강해 보이지 않는다. 고개를 파묻고 움츠린 외형, 피부가 제거된 동물의 사체(死體)처럼 검게 변한 구릿빛, 이 모든 것들은 좌절, 낙망의 몸뚱이가 조용하게 읊조리는 애가(哀歌)이다. 그녀의 얇은 구리선 뭉치나 제법 두터운 구리선 파이프의 집적체는 이처럼 붉은 ‘구리(Cu)’가 검은색의 ‘산화 구리(CuO)’가 되어가는 과정을 작품 속에 오버랩시키면서 인간 존재론이 견지하는 생로병사(生老病死)를 시각적으로 은유화한다.  
그렇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산다. 대다수의 좌절과 낙망 속에서 순간의 기쁨을 위한 작은 희망의 불꽃을 지피면서 말이다. 녹슨 구리선은 그런 면에서 하나의 상징이다. 구리가 공기 중의 산소와 만나 녹슬어 가면서 쇠락하고 소멸해 가지만 스스로 푸르고 검은 꽃을 피우면서 생성의 무엇인가를 기대한다. 그 뿐인가? 인물상의 가슴 안에 키우고 있는 ‘작은 파랑새’나 인물상의 가슴으로부터 자라나게 만드는 심장(심장으로 간주되는)은 작고 보잘 것 없지만 비애(悲哀)적 삶 속에서 꿈꾸는 긍정적인 희망을 이야기한다. 

나를 본다, 동파이프, 구리선, 가변설치, 2015


나를 본다,230cm(h),구리선,2009


III. 탈주하는 선과 자연주의 인간
인간상 위에 겹쳐진 ‘선’들은 배경을 향하여 뻗어 나가며 확산과 팽창을 도모하기도 하고, 몸체를 뚫고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는 환원과 응축의 몸짓을 수차례 반복한다. 안재홍의 조각에서 ‘탈주하는 선’이란 얼마나 신비로운 존재이던가! 얇은 그것들은 피의 순환을 이끌어 주는 혈관들이기도 회고, 뼈대를 움직이게 만드는 근육이기도 하다. 나아가 신체가 움직인 흔적으로서의 보이지 않는 동선(動線)이 되기도 한다. 그녀의 작업에서 핏줄 또는 힘줄이란 이처럼 동선과 동파이프의 분절된 몸체들이 용접을 통해서 다양한 순환계를 구성한다. 그런 면에서 소우주인 인간의 몸을 도는 ‘순환계’란 그녀의 작업에 있어서 대우주인 우주를 향해 교통하고 연접하는 ‘탈주의 선’을 용인한다. 
게다가 생로병사의 문제의식을 조형화하기 위해서 그녀의 작업은 붉은 구리가 푸르거나 검은 산화 구리가 ‘되어 가는' 과정을 작품 속에 끌어들인다. 그것은 다름 아닌 ’되기(devenir, becoming)‘의 과정을 거치는 과정이다. 즉 ’병자/환자/사망자’ 되기를 거쳐 가면서 ‘타자 되기’를 이해하고 실천한다. 나아가 그녀의 ‘인간(상)의 되기’는 ‘동물 되기, 식물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녀의 작업에 있어서 ‘탈주하는 선’은 때로는 식물의 잎맥과 물관이 되지만, 한편으로는 동물의 핏줄과 힘줄이 된다.  
‘나를 본다’는 것은 외적 자아를 포함하여, 내적 자아에 대한 진지한 성찰 혹은 내적 성찰이라는 문제의식을 노정한다. 내적 성찰이란 ‘몸이 기억하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현재까지의 자신을 객관화시켜 되새김질하듯이 여러 번 곱씹어 보는 일이다. 이러한 행위에는 반성을 이끌어낸다. 즉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의 반성적 성찰을 통해서 미래를 향한 궤도를 수정하는 실천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그래서 ‘나를 보다’는 행위에는 ‘되돌아보기, 다시 보기, 여러 번 보기, 살펴보기’를 포함한다. 물론 여기에 앞서의 ‘되기’의 실천, 즉 ‘동물 되기, 식물 되기, 자연 되기, 타자 되기, 소수자 되기’ 등의 실천이 포개진다.  
따라서 안재홍의 조각에서 ‘탈주하는 선’이 그리는 궤는 ‘나를 보기’와 ‘되기’를 한꺼번에 실천하는 자연주의 미학 위에 얹힌다. 김원룡(金元龍)이 한국의 전통미에서 읽어 내는 ‘자연주의’ 미학이나 고유섭(高裕燮)의 ‘비정형성, 비균제성, 무기교의 기교’와 같은 미학적 개념은 인간이라는 나를 식물과 동물과 자연을 하나로 묶어 낸다. 웅크린 인물상은 어류 혹은 원생생물처럼 보이기도 하고, 서있는 인물상들은 나무처럼 보인다. 팔은 가지가 되고, 다리는 줄기가 된다. 집단 인물상은 또 어떠한가? 그녀의 작품에서 인간들은 숲(林, 森)이 되면서 ‘자연주의’와 ‘되기’의 미학을 실천한다.  


나를 본다-자라 200~220cm(h) 가변설치,2007

나를 본다,구리선, 215cm(h),2007

안재홍이 고물상에 버려진 동선 다발이 꼭 자기와 닮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당시 육아로 인해 작업을 하지 못한 채, 번민에 가득했던 자신을 돌아보고 ‘동선 다발 되기’로 감정이입하면서 시작된 그녀의 작업은 이제 얼추 17년이 넘어선다. 좌절과 낙망 속에서 우연히 만났던 동선 다발에 감정이입하는 ‘사물 되기’와 더불어 세찬 바람을 맞이하던 한 느티나무에 감정이입하는 ‘자연 되기’를 실천한 이래, 안재홍은 작업 앞에서 꾸준히 사물과 타자에 감정이입한다. 그녀는 회화적 드로잉으로 에스키스를 하는 한편, 얇은 동선으로 입체적 에스키스를 거치고, 용접으로 작품의 덩치를 키워 나간다. 그런 면에서 작가 안재홍은 작품과 함께 세월을 먹고 작품과 함께 사물과 타자들을 맞이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녀의 다음과 같은 작가노트를 보자. 

 “나의 작업은 선을 통해 흐르고, 자란다. / 한 덩이의 몸에서도 한 올 한 올이 생생히 살아 있기를 바랐고, / 작업이 진행되면서 선적인 요소가 더욱 큰 의미로 작용된다. / 삶의 많은 시도와 시행착오로 그어진 흔적들이 / 무수히 많은 선으로 남아있다. / 마치 여러 갈래의 길이 오가는 발길에 의해 그어지듯 / 의지를 품고 자라 뻗어 나아간다. / 몸의 굴곡을 따라 자라며, / 줄기는 핏줄과도 같고 욕망을 키워주는 강인한 힘줄이기도 하다. / 자연과 벗한 작업 환경 속에서 시선과 온 마음을 사로잡는 나무들이 있다. / 내 속엔 생각의 갈래들이 서서히 자란다. / 선들의 엇갈림과 뒤엉킴 속에서 마음이 자라 나무가 된다. / 나무가 되고 숲이 된다.”

안재홍의 작업에서 인간 조각은 나무가 되고, 숲이 되고 우주가 된다. 작품을 보는 관객에게는 그들의 모습이 된다. 사회 현실 속에서 인간의 존재론을 모색하는 그녀의 작업이 결국은 우리 모두의 자화상처럼 반영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분명코 그녀가 단독자로서의 자신에게 골몰하는 ‘나를 본다’는 행위에 집중해 왔던 힘 때문이었다. 타자를 이해하고 연구하기 이전에 단독자, 개별자로서의 존재를 인식하는 ‘실존적 성찰’이 거듭 전제되었기 때문에 도달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던 것이다. ●


출전/
김성호, 「탈주하는 선과 덩어리 몸으로서의 나」, 『선과 매체의 조응』, 안재홍, 김은주 2인전 카탈로그, 안재홍 전 서문, (안재홍, 김은주 2인전, 2017, 7. 27-9. 27, 해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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