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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비평│천광엽 전 / 점들의 파동이 만드는 정중동의 모노크롬

김성호

점들의 파동이 만드는 정중동의 모노크롬


김성호(미술평론가)

파랗다. 마치 물결이 일렁이는 듯한 작품의 표면 위에는 파란 물비늘들로 가득하다. 그것은 푸른 점들이 모여 만들어진 모노크롬이다. 모노크롬의 복고적 미학에 탐닉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천광엽의 회화가 오늘날 컨템포러리 아트의 세계에서 가지는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점의 집적 혹은 점의 변주가 만드는 모노크롬 
천광엽의 작품은 점(點)의 집적이 만드는 모노크롬이다. 가히 점들의 집합으로 만들어진 점들의 세계라 할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그의 작품을 서구 모노크롬의 색면의 집적과는 차별화되게 만드는 지점이다. 즉 단지 색면만으로 2차원 평면성을 강조한 서구의 모노크롬과는 다르게, 천광엽의 모노크롬은 ‘0차원 점의 변주(變奏)가 만든 2차원 형(形)’의 세계들로 가득한 2차원 평면의 세계라는 점이다. 이렇듯 그의 작품에서는 0차원 점이란 물리적 한계가 역으로 2차원 회화를 확장하는 주요한 표현 언어로 변주된다. 
그렇다면 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지극히 작은 존재이다. 그것은 좌표 위에 그저 자신의 위치만을 남기는 가장 기초적인 조형의 단위이다. 그것은 조형예술의 세계에서 분명 가장 하등의 존재자이다. 움직이지 못하니 방향을 갖고 있지 못하고 좌표에서 위치만 지니고 있으니 면적조차 갖고 있지 못하다. 그것은 좌표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생을 연장할 뿐 어디로든 떠나지 못한다. 또 다른 점을 만나 그 사이에 운동하는 흔적인 1차원 존재인 선을 만들지 않는 한 그것은 언제나 혼자로 남아 있는 외로운 정주자(定住者)로서의 존재이다. 그것은 2차원의 면적을 만들지 못하니 태생적으로 다른 무엇을 손님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조차 갖고 있지 못한 외롭고 고독한 존재이다.    
화가 천광엽은 이러한 물리적 한계로 가득한 점을 마치 마술처럼 회화의 세계 안에서 살려낸다. 생각해보라! 천광엽의 페인팅에서 우리가 ‘점’들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엄밀히 말해 이미 ‘0차원 점’들이 아니다. 그것은 2차원 면을 지닌 형(形)이다. 달리 말해 점이라 불린 그것은 실제로 0차원의 점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큰 면적을 지닌 2차원 평면이다. 그것은 실제로 원형(圓形)이라는 형(形)으로 가득한 2차원 면들이다. 원형이란 면이 경계를 만들어 내는 윤곽에 의해서 보이는 2차원의 둥근 모양이다. 그런 점에서 천광엽의 모노크롬이 드러내는 점의 변주는 0차원-1차원-2차원이라는 변화를 함유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페인팅을 심정적으로는 ‘점의 집적이 만드는 모노크롬’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만, 물리적 차원에서는 ‘점의 변주(0차원-1차원-2차원의 변화를 함유한)가 만드는 모노크롬’이라고 부르는 것이 보다 더 정확하겠다. 



전시 전경


변주와 파동이 만드는 결 
천광엽의 모노크롬에서 점의 변주란 실사 파동(波動)에 다름 아니다. 파동이란 “공간의 한 점에 생긴 물리적인 상태의 변화가 차차 어떤 속도로 둘레에 퍼져 가는 현상”을 지칭한다. 여기서 물리적 상태의 변화를 간단히 말하면 어떠한 진동이다. 그러니 파동에 관한 정의를 달리 말하면, “공간이나 물질의 한 부분에서 생긴 주기적인 진동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주위로 멀리 퍼져나가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울러 우리는 파동을 내보내는 원천을 파원(波源)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천광엽의 회화에서 과연 파원은 무엇인가? 우리가 앞에서 그의 모노크롬을 ‘점의 변주 혹은 파동’이라고 정의했듯이, 그의 회화에서 파원은 분명코 어떠한 ‘한 점(點)’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x, y축에서 그 위치가 특정되지 않는 존재로서의 점이다. 달리 말해 천광엽의 회화에서 파원은 불특정의 모든 점들이다. 특정할 수 없는 모든 점들로부터 진동이 생성되었고 그 진동이 파동으로 꿈틀거리는 회화가 바로 천광엽의 모노크롬인 것이다. 여기서 파원은 하나가 아니라 복수인 셈이다. 뒤집어 말하면, 그의 모노크롬 안에 포진한 모든 점들을 우리는 파원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그 모든 ‘점’들은 크기를 키운 ‘원형’에 다름 아니지만 우리는 그것을 점이라 부르기로 한다.  
보라! 푸른 바탕 위에 올라선 무수한 파원들을. 무수한 점들을 아니 원형이라는 무수한 점의 변주들을. 점 그리고 점과 점 사이의 간격, 그리고 점들의 밀집도에 따라 일정한 패턴이 만들어지면서 저마다 다른 느낌의 모노크롬을 우리에게 선보인다. 어떤 작품은 바다처럼, 어떤 작품은 하늘처럼 어떤 작품은 풀잎처럼 푸르디푸른 균질의 풍경들을 우리에게 선보인다. 
천광엽은 이러한 모노크롬을 구현하기 위해 제일 먼저 점의 군집을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디자인한다. 이후 3밀리미터 정도의 작은 크기로 출력한 점들을 타공된 얇은 플라스틱 시트지로 옮겨 담는다. 시트지에 옮겨진 점들은 캔버스 표면에 부착되면서 나지막한 볼록의 요철 효과를 남긴다. 그 위에 다시 유화 물감을 올리면서 이 볼록의 부조적 효과는 더욱 배가된다. 물감이 마른 후 사포로 일일이 갈아내고 다듬어 내면서 점들의 변주를 담은 그의 모노크롬은 비로소 완성되기에 이른다.  
특히 산포된 점들의 군집적 효과를 미세하게 변화시키는 일정한 ‘결’에 따라 그의 모노크롬의 표정은 다양하게 변주된다. 때로는 격하게 일렁이는 파동의 모노크롬으로, 때로는 반짝이는 결정체들의 빛 무늬 반사광으로 가득한 모노크롬으로, 때로는 잔잔한 숨결의 모노크롬으로 변주된다. 우리가 ‘결’을 “나무, 돌, 살갗 따위에서 조직의 굳고 무른 부분이 모여 일정하게 켜를 지으면서 짜인 바탕의 상태나 무늬”라고 정의할 때, 그의 모노크롬에는 표정이 다른 결들로 가득하다. 어떤 작품은 청량하고, 어떤 작품은 침잠하며, 또 어떤 작품은 우울한, 다양한 표정의 결들로 가득하다. 
결이라는 평정 상태는 사실 대립적 요소들이 끊임없이 수면 아래에서 움직이는 운동성의 존재이다. 마치 ‘물결’이 골과 마루가 만들어내는 무수한 파동(波動)의 형식으로 운동하고, 우리의 ‘마음결’이 희로애락의 상반된 감정들이 끊임없이 생채기내며 싸우는 운동의 과정 속에서 평정의 상태를 찾는 것이듯이 말이다. 천광엽의 모노크롬에는 이처럼 결이라는 평정 상태와 더불어 ‘정중동(靜中動)’이라는 운동성의 미학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옴니(Omni)의 세계 - 한국적 모노크롬을 지향하며 
천광엽의 이번 전시 타이틀은 《옴니(Omni)-파동(波動)》이다. 여기서 옴니는 라틴어 접두사로 ‘모든, 전체의(every, all)’라는 뜻을 갖는다. 우리는 이 주제로부터 ‘점’이라는 가장 기초적인 조형예술 요소가 그의 작품에서 곧 ‘전부’라는 의미를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다. 
이러한 사유 방식은 원효와 의상대사가 실천하는 화엄(華嚴)의 기본 논리, 즉 ‘하나가 곧 전부요, 전부가 곧 하나’라는 사고와 다를 바 없다. 즉 천광엽의 모노크롬은 화엄사상을 축약한 다음과 같은 말, ‘하나 안에 전체, 전체 안에 하나’ 그리고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하나’라는 ‘일중일절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과 ’일즉일절다즉일(一即一切多即一)’을 실천하려고 애쓴다. 아울러 ‘한 티끌 속에 온 세상이 다 들어있다’는 ‘일미진중함십방(一微塵中含十方)’ 역시 실천하고자 한다. 
점 하나에 전체를 담고자 천광엽은 파동의 흔적들을 만든다. 파동으로 하나와 전체를 연결하고자 하는 것이다. 어떤 차원에서는 이 파동이 다른 파동과 만나 일으키는 간섭 현상(干涉現象)까지도 기대한다. 간섭 현상을 “두 개 이상의 파동이 한 점에서 만날 때 중첩되어 진폭이 합해지거나 상쇄되는 현상”이라고 할 때, 이것은 분명코 파동이 만드는 흔적들로부터 근원한다. 파동의 흔적은 삼차원화되는 것이다. 그것은 앞으로 돌출하는 볼록의 ‘점’을 만드는 것이자, 한편으로는 그렇게 돌출된 점들을 다시 오목의 ‘점’으로 깎아 내는 것이기도 하다. 플라스틱 시트지에 올라선 유화 물감이 도드라지게 점의 몸을 만들거나 샌드페이퍼에 의해서 점들이 몸의 일부를 잃어 가는 것이기도 하다. 
이 볼록으로부터 오목으로 이동하는 점들의 변주는 결국 작품 속 옴니의 세계를 구축하는데 일조한다. 자신의 도드라진 몸의 껍질들을 양보하고 바탕과 한 몸처럼 섞여 드는 지점에서 점들은 비로소 점들로 남지 않고 파동의 흔적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피상적으로 그것은 또 다른 손실의 흔적처럼 보이지만, 실제 그것은 모노크롬을 만들기 위해 서로의 몸을 주고받아 비로소 ‘하나의 전체가 된 옴니의 세계’에 다름 아니다. 다름 아닌 한국적 모노크롬의 세계이다. 이러한 세계는 조형적 바탕 위에서 실천되는 존재에 관한 명상에 다름 아니다. 금욕과 절제에 대한 깊은 성찰과 더불어 그것에 관한 실천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세계 말이다. ●

출전 / 
김성호, '점들의 파동이 만드는 정중동의 모노크롬', 카탈로그 서문, (천광엽 전, 2016. 3. 1-3. 30, 갤러리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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