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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양승규 전 / 기억의 잔상과 이미지의 소환

김성호

기억의 잔상과 이미지의 소환


김성호 Kim, Sung-Ho (미술평론가)


양승규는 자신의 회화 작업을 통해서 망각의 깊은 심연으로부터 ‘기억의 잔상(Afterimage of Memories)’을 소환한다. 그의 회화에서, 격자 형식으로 분리된 색 패널들은 과거 속 이미지의 잔상이자 소환된 기억의 파편들이다. 시간의 지층 속에 켜켜이 쌓여 있던 기억의 파편과 잔상이 ‘지금, 여기’에 소환되어 이미지로 부활한 셈이다. 우리는 안다. 이러한 기억의 이미지는 퍼즐 조각이 빠진 채 완성되는 불명료한 것들이지만, 매우 강렬했던 과거의 경험이 각인된 것임을 말이다. 자신의 기억을 이미지로 전환한 양승규의 회화가 관객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Afterimage of memories6__Acrylic on canvas_90.9x65.1cm_2016


기억과 '지속으로서의 이미지'
바다를 본다. 또는 하늘과 땅 그리고 산을 본다. ‘그때’의 따사로운 햇볕과 스산한 바람 혹은 비 오는 날의 풍치(風致)를 우리는 기억한다. 당시의 즐겁거나 슬펐던 느낌과 감흥은 어떠한가? 시각, 후각, 촉각과 같은 우리 몸의 모든 감각이 지각(perception)이라는 이름으로 ‘그때, 그곳’을 받아들였고, 다시 인식(recognition)이라는 이름으로 ‘그때, 그곳’의 미적 경험의 기억을 받아들인 것이다.  
양승규의 회화에는 지각의 과정을 통해 망각으로부터 과거의 기억이 현실화되는 생리학적 현상과 더불어 이와 같은 인식의 과정을 통해 과거의 기억이 함유하는 미적 판단의 경험까지 한꺼번에 녹아 있다. 즉 지각론(esthésiologie), 인식론(épistémologie)의 단계로부터 의미론(sémantique)의 단계에 이르는 농밀한 미학의 체계가 그의 작품 안에 한 덩어리로 응축되어 있는 것이다. 작가 양승규가 “기억을 매개로 현재로 소환된 과거의 이미지는 나의 작업에서 색채적인 측면과 형태적인 측면에서 표출된다”고 작가 노트에서 기술하고 있듯이, 그의 회화는 네모반듯한 격자창의 모듈(module)과 그것들을 채우고 있는 단색의 색채들로 구성된다. 전자를 형식적 면에서, ‘기억의 파편화된 편린들’이라 지칭한다면, 우리는 후자를 내용적 면에서 ‘기억의 찰나적 이미지’로 설명할 수 있겠다. 그의 작품에서 색창(色窓)들은 과거에 지각되었던 색채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다. 현재적 경험들에 대한 직관이 함께 오버랩된 것이다. 즉 작가 양승규의 ‘그때, 그곳’의 일상에서 ‘지각된 이미지’가 ‘이때, 이곳’(지금, 여기)의 창작에서 ‘지각되는 이미지’로 현현(顯現)하는 것이라 하겠다.   
과거로부터 발원하는 기억을 현재적 상황에 이미지로 소환하는 그의 작업은 다분히 존재론적이다. 철학자 베르그송(H. Bergson)이 이미지를 곧 물질(matière)로 정의하듯이, 잠재적 상태로부터 현실의 상태로 이동하면서 현현하는 이미지는 이 세상에 현상하는 모든 물질이자 항상 실재(réalité)로 정의된다. 즉 존재론의 문제에 집중되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양승규의 작업에서 이미지는 ‘존재의 본성'을 파악하는 것에 집중되기보다 ‘존재의 양상 혹은 양태'를 성찰하는 것에 집중된다. 마치 베르그송의 철학에서 이미지가 잠재태(virtualité)의 형태로부터 잠을 깨우고 기억을 소환하면서 현실화(actualisation)되는 존재로 설명되고 있듯이 말이다. 그것은 ‘물질=이미지’가 사건을 유발시키는 우발점(point aléatoire)을 만나 변화를 거듭하는 것과 같다. 마치 물이라는 물질이 100℃와 0〬C라는 변환점을 만나 ‘수증기→물→얼음→물→수증기...’로 이미지가 변모하듯이, 양승규의 회화에서 이미지의 존재 양태는 베르그송의 ‘지속(durée)’이라는 개념으로 수렴된다.   

Afterimage of memories1__Acrylic on canvas_72.7x90.9cm_2016



Afterimage of memories4__Acrylic on canvas_72.7x90.9cm_2016




기억의 잔상과 '운동하는 이미지'
베르그송에게서 세계란 ‘지속’의 시공간이다. 그곳에는 늘 '이질적인 새로움(nouveauté hétérogène)', 진화(évolution) 그리고 ‘삶의 약동(elan vital)’의 연속이 가득한 세계이다. 세계를 표상하는 이미지란 결국 인간의 존재 방식뿐 아니라, 심리적, 질적으로 변화하고 진화하는 우리의 몸과 기억, 지각의 양태로 관계를 맺으면서 ‘새로운 것들’을 지속적으로 생성시키고 전개시킨다. 
흥미롭게도, 양승규의 회화에는 이러한 ‘새로운 것들’, 즉 질적인 변화들로 가득하다. 그의 회화에서 정방형의 격자창들은 모두 같은 길이와 넓이를 가진 ‘동일한 형식’으로 정의되지만, 각 격차창을 채우고 있는 색들은 각기 다른 명도, 채도, 색상과 톤을 가진 ‘상이한 내용’을 드러낸다. 즉, 그의 회화 속의 개별 격자창들은 강렬한 색의 대비로 질적 다양함을 극대화하고 있기도 하지만, 때로는 ‘같은 듯 다른’ 미세한 변화를 우리에게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마치 형식적으로는 올해의 첫날이 작년의 첫날과 유사하지만 내용적으로는 분명히 다른 것처럼 말이다. 특히 격자창들 사이의 하얀색의 띠는 각 격자 이미지들의 동일한 형식을 공고히 하면서도 그것들의 상이한 내용을 동시에 극명하게 드러내는 장치가 된다.   
그렇다. 양승규의 회화에서 이 모든 격자창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작가의 기억이 남긴 잔상이자 그것으로부터 건져 올린 ‘같은 듯 다른’ 파편적 기억들이다. 이것들이 모여 ‘지속’으로서의 전체상을 만든다.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의 시공간에는 항상 새로운 것들이 생성되는 ‘지속적인 질적 변화’의 이미지로 가득하다. 아울러 기억이 떠올리는 이러한 개별 격자창의 파편적 이미지는 한 작품을 구성하는 무수한 모듈들로 자리하는 까닭에, 그의 회화는 전체적 이미지 안에서 음악적 리듬과 문학적 운율을 선사한다. 마치 베르그송이 삶의 시간인 ‘지속’을 음악의 ‘멜로디’(mélodie)로 비유했듯이, 과거-현재-미래의 시간적 흐름은 멜로디와 같은 하나의 자연스러운 전체상을 그린다. 
보라! 관객이 그의 작품 앞에 가까이 서게 되면 그 이미지의 전체상보다 개별 격자의 파편적 이미지, 즉 추상적 화면만 덩그러니 남게 되지만, 작품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전체를 관조할 때에 비로소 어떤 풍경을 연상하게 되는 전체상인 구상적 이미지를 목도하게 된다. 가까이서 알 수 없는 실체를 멀리서 알게 되는 아이러니, 그것은 작가의 의도적 전략이다. 기억의 파편이 추상적이지만, 그 파편들이 모여 하나의 구체적 상(像)을 드러내곤 하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그의 회화가 표방하는 조형 언어는 그다지 어렵지 않게 이해된다.    


Afterimage of memories9__Acrylic on canvas_45.5x53cm_2016


Afterimage of memories11__Acrylic on canvas_45.5x53cm_2016

우리가 주목할 것은, 양승규의 회화는 정지된 이미지를 시각적 효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옵아트가 결코 아님에도, ‘움직이는 이미지’로 전체상을 선보인다는 것이다. 즉 들뢰즈가 현실계의 시공간을 ‘운동-이미지(image-mouvement)’로 정의했던 것처럼 양승규 역시 자신의 회화를 ‘움직이는 이미지’로 정의한다. 실제로 움직이지 않는 2차원 평면의 회화이지만, 제각기 다른 무수한 격자창들이 “전체 속에서의 질적 변화(changement qualitatif dans un tout)'의 사건들로 연속되고 있는 까닭에 그의 회화는 ‘운동-이미지’로 정의된다. 따라서 개별 격자창은 물리적으로 정지체이지만, 심미적으로는 이미 운동체의 존재로 우리에게 드러난다. 
양승규의 회화에서 ‘심미적 운동체 이미지’는 작가의 기억으로부터 소환되는 것이지만, 관객의 내밀한 기억들과 소통하면서 주체와 타자 간의 공동의 집단 기억을 되살린다. 그것은 작가가 이미지를 매개로 타자(들) 사이에서 벌이는 소통의 행위가 된다. ‘곡선이 배제된 격자형의 구성’은 단절로부터 연결의 의미를 이끌어내는 소통의 본질적 의미를 드러내기에 유효한 방식이 된다. 그러한 까닭은, 작가 양승규가 지극히 단순해 보이는 정방형 격자의 색창을 다양하게 구성함으로써, 그것들이 함유하는 ‘심미적 운동성’의 의미를 관객들이 곱씹고 성찰할 수 있는 소통의 장치를 마련해 두었기 때문이다. ●

출전/ 
김성호, '기억의 잔상과 이미지의 소환', 카탈로그 서문, (양승규전, 2016. 12. 23- 2017. 1. 5. 갤러리 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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