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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이홍원 전 / 문신회화 - 풍자적 비판으로서의 또 다른 회화

김성호


이홍원의 문신회화 - 풍자적 비판으로서의 또 다른 회화 
 

김성호(미술평론가) 

이홍원의 최근작은 문신(文身)을 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채워졌다. 여인의 등에 가득 채운 십이지신상, 마릴린 먼로의 빰 위에 그려진 신윤복의 미인상, 부처의 얼굴에 새겨진 예수상 등 문신의 종교적, 주술적, 사회적 지표가 각기 다른 문신의 주체들 사이를 오간다. 화가 이홍원에게 있어 문신은 익명의 화가들이 그린 ‘또 다른 회화’이다. 그것은 마치 회화 주체가 불분명한 한국의 민화와 같은 속성과 미학을 공유한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살펴보자. 




살아있는 '문신회화' - 그림에 그림을 더한 회화 위의 회화
문신은 “피부나 피하 조직에 상처를 내고 물감으로 글씨, 무늬, 그림 등을 새긴 것”이다. 뜻풀이 그대로 문자이자 그림인 것이다, 종교, 주술적 예식 혹은 형벌로 새겨 넣은 문자이거나 무형의 사랑을 유형의 증표로 남기려는 약속의 문자이며, 때로는 위계적 상징 혹은 그저 미적 장식으로서 남긴 그림이기도 한 것이다. 신체변공(身體變工)을 꾀하는 과도한 장식으로 인해 근대 문명 이래 하위문화의 소산처럼 간주되어 왔던 문신은 이제 더 이상 비주류의 문화로 치부되지 않는다. 그것은 성형과 몸 가꾸기의 문화가 일상이 된 이래 그저 한낱 기호와 취미를 가늠하는 장식과 표상 정도의 의미로 대중화가 된지 오래이다.   
이홍원이 이러한 문신을 자신의 회화 속에 주제화하려는 계기는 20여 년 전, 목욕탕에서 만난 한 건달의 상반신에 새긴 문신을 대면하면서 느꼈던 낯선 감흥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꿈틀거리는 몸을 따라서 움직이는 문신, 그것은 분명 ‘살아있는 그림’이며 문신을 한 개별 주체가 죽기까지 자신의 생을 함께 ‘살아가는 그림’이다. 그 때 그는 그것을 ‘멋진 그림’으로 인식했다. 예술가가 아닌 무명의 타투이스트가 만든 문신 자체를 예술 작품으로 인식한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그의 작가노트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명화를 보면 감동이 있어 좋고 모던한 그림을 보면 철학이 되는 것 같아서 좋습니다. 원로 작품을 보면 농익어서 좋고 젊은 작품을 보면 신선해서 좋습니다. 이래 좋고 저래 좋으니 예술이란 놈은 참으로 신통방통한 것 같습니다. 난 그림을 재미있게 그리려 합니다. 재미있는 것도 예술의 한 부분이지요.” 
이홍원은 타자의 그림에 고개를 끄덕이고 감화를 받으면서 예술의 다양한 지향성과 상대적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독자적인 예술을 도모한다. 자신의 예술을 ‘재미있게 그리는 것’에 두려는 그의 작품관은 풍자와 해학에 기조를 둔 일련의 작품들로부터 최근 문신에 대한 관심사로 초점이 맞추어졌다. 그것은 분명 익명의 ‘예술가 아닌 타투이스트’의 그림이지만 그는 거기서 예술을 목도한다. 문신이라는 그림을 자신의 그림 안에 가져 온 이홍원의 최근작은 가히 ‘문신회화’라 부를만하다. 풀어 보면 그것은 ‘그림에 그림을 더한 것’으로 ‘그림 위의 그림’, ‘그림 안의 그림’ 혹은 ‘회화 위의 회화’, ‘또 다른 회화’인 것이다. 그것도 살아 있는 그림으로서 말이다. 




계승하는 '민화 전통' - 해학과 풍자적 비판 
풍자적 비판은 이성에 근간한 정합하고도 논리적인 비판이 아닌 감성에 근간한 촌철살인(寸鐵殺人)의 위트와 해학이 일렁이는 비판이다. 그것은 마당놀이에서 한바탕 벌이는 걸쭉한 농담과 우화, 냉소가 어우러진 블랙 유머이자 뼈있는 농담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비판이란 늘 유희와 놀이와 같은 속성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라서 화가 이홍원이 추구하는 ‘재미있는 그림’과 맥을 같이 한다.  
최근작에 이르기까지의 그의 해학과 풍자적 비판은 80년대부터 추구했던 민중미술 계열의 회화적 참여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의 암울한 정치 현실에 대한 미술가의 비판적 발언은 명징한 정치적 메시지를 실어 나르기도 했으나 교조적이거나 계몽적인 정치성을 떨쳐내기 위해서는 풍자나 해학과 같은 은유의 미학이 필수적이었다. 놀이와 유희 그리고 풍자와 해학이 유발하는 사실(fact)에 대한 비틀기의 변조 방식이 요청된 것이었다. 그것은 다분히 조선 후기 이래 기층 민중의 염원과 생활상을 담은 풍속화, 민화와 같은 조형 언어와 맞물려 있는 것이었다. 당시의 문인화를 ‘전통을 중국에 두는 배화사상(排貨思想)’에 근간한 사대부의 그림이라 한다면 민화는 ‘전통을 한국의 기층 민중의 삶과 신앙’에 둔 민중을 위한 민중화(民衆畵), 즉 민중의 그림이라고 할 수 있겠다. 피지배자의 삶을 고스란히 드러내되 풍자와 해학으로 이겨내려는 민초들의 사유와 인식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그림으로서 말이다. 







이홍원의 회화는 이러한 민화에 기조를 둔 해학과 풍자의 미학을 계승한다. ‘문신회화’라 칭할만한 그의 최근작들은 문신이 담고 있는 비주류, 하위문화의 정신과 그간의 그가 추구해 왔던 민화적 바탕 위에서 펼쳐 온 해학과 풍자적 비판들과 만난다. 문신이 주술적 상징과 더불어 기득권에 대한 저항의 상징과 사회적 지표로 자리했다면, 그의 문신회화는 민화가 펼쳐온 벽사진경(辟邪進慶)의 주술적 신앙과 기복축사(祈福逐邪)라는 민중적 염원 그리고 권선징악(勸善懲惡)이라는 교화의 가치를 한꺼번에 담아낸다. 
보라! 이홍원의 여인들의 등에 새겨진 문신은 십이신장(十二神將)’ 혹은 ‘십이신왕(十二神王)’이라고도 불리는 ‘십이지신(十二神)상’이다. 십이지는 불교로부터 도교(道敎)의 영향을 받아 방위 신앙과 만난 시간신이지 않던가! 12인의 여성의 등에 각각의 십이지신상을 그린 그의 연작은 몸에 밀착한 골반 바지를 입고 머리를 화려하게 물들인 오늘날 젊은 여인의 뒷모습과 대비되면서 커다란 크기와 총천연색의 과도한 문신이 드러내는 풍자적 비판 정신과 만난다. 짙은 화장을 한 오늘날 여성의 뺨 위에 그려진 문신은 전통과 현대가, 벽사의 의미와 장식의 기능이 대립하면서도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소통을 도모한다. 그것은 달리 말해, 민화 혹은 사신도에 나타난 벽사의 주술이 현대인의 신체에 각인되면서 그저 패션이나 장신구와 같은 장식의 개념으로 변용된 현 상황에 대한 ‘고개 끄덕거림’과 그것에 대한 ‘눈 흘김’이라는 비판적 성찰이 함께 작동한다고 하겠다.  
신윤복의 미인도에서 고찰되는 미인의 뺨 위에 문신으로 자리한 마릴린 먼로의 얼굴, 그리고 반대로 마릴린 먼로의 뺨 위에 자리한 한국 미인의 얼굴은 자리바꿈은 문신의 장식적 위상으로의 변모된 상황을 여실히 드러낸다. 반면에 같은 방식으로 쌍을 이룬 그의 또 다른 작품에서 우리는 문신의 이러한 가벼워진 위상 속에서도 진중한 존재론적 성찰을 찾아볼 수 있게 된다. 바로 부처의 뺨 위에 자리한 ‘예수 문신’과 예술의 뺨 위에 자리한 ‘부처 문신’과 같은 이중의 병치가 그것이다. 관객은 기독교적 사랑과 불교적 자비가 같은 의미의 다른 표기라는 의미를 이홍원의 작업에서 어렵지 않게 읽어낸다. 
한편, 이러한 개념을 가시화하기 위해 이홍원은 민화가 같은 그림을 반복적으로 재생하는 복수, 복제화의 개념을 계승하면서 문신을 그린 여인의 모습을 12개까지 연작으로 일부만을 변경하면서 반복 생산한다. 즉 그의 회화의 연작들은 자신만의 독자한 영역을 개척해 나가면서 동시에 민화의 실용성이 요청하는 비일품성(非一品性)을 견지하면서 민화의 본원적 전통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다. 
이홍원의 회화에는 놀이와 유희, 풍자와 해학과 같은 신명이 춤추면서도, 고개 끄덕거림과 눈 흘김, 비틀기와 삐딱하게 보기와 같은 비판적 성찰이 함께 녹아 있다. 그의 회화를 보는 관객들의 눈에 이 모두를 함께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까닭은 그의 작품이 던지는 메시지가 ‘뼈 있는 농담’ 혹은 블랙 유머로 작동하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

출전 / 김성호, '이홍원의 문신회화 - 풍자적 비판으로서의 또 다른 회화', 카탈로그 서문, (이홍원 전, 2016, 11. 23-11. 28, 인사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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