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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일반│융합예술의 개념

김성호

융합예술의 개념

김성호(미술평론가)

본인이 한국예술문화비평가협회의 계간 『예술문화비평』에서 발표했던 융복합 연구는 「융합예술의 개념」1)이었다.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해체로부터 융합_데리다의 차연(differance) 
아이러니하게도, 융합(convergence, fusion)의 개념은 데리다의 해체(deconstruction)와 같은 상반되어 보이는 개념들로부터 일정부분 빚지고 있다. 데리다에게서 해체란 자기 동일성을 지니지 않은 복수성(multiplicte)의 상태로, 어떤 중심을 만들지 않으며, 설령 중심이 있더라도 그 중심은 고정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차연(differance)만이 적용되는 일종의 비위치 상태로 존재한다. 그것은 “스스로 해체되는(ca se deconstruit)”것이자 저절로 생기는 것이다. 그것은 개념과 담론들 안에서 의미가 아직 미정인 상태로 남아 끊임없이 이동하는 운동, 즉 '탈-전유(ex-apprioriation)'의 운동들이다. 해체란 차연의 결과이듯이, 데리다식(式)으로 말하면 융합 역시 차연의 결과에 다름 아닌 셈이다. 이 세계에는 하나의 텍스트가 생성하는 동시에 또 다른 텍스트가 소멸하기를 거듭하는 일련의 사건, 즉 상호텍스트성으로 가득하다. 즉 융합과 해체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다. 따라서 융합이란 이와 같은 해체적 개념을 이미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2. 해체/융합_들뢰즈의 차이(difference)  
들뢰즈에게서 해체와 융합은 차이(difference)의 개념을 통해서 하나로 묶여있다. 가타리(F. Guattari)와의 공저에서 나타난 리좀(rhizome)과 알(œuf), 그리고 정신분열증은 차이의 복수성이 만드는 융합이자 탈주의 운동을 지속하는 해체이다. 즉 융합/해체의 존재이다. 리좀이란 출발도 도달도 없이 언제나 사물들 사이에 있는 사이 존재(inter-etre) 또는 인터메쪼(intermezzo)이면서도 파열(rupture)과 탈주의 선(ligne de fuite)을 종국까지 밀고 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리좀이란 ‘-이다(etre)’의 존재이기 보다는 ‘-되다(devnir)’의 존재, 즉 운동체의 존재인 것이다. 또한 그에게 알이란 “유기적이지 않은 생명 전체'이며 “비생산적이고 비소비적이지만, 욕망 생성의 모든 과정을 등록하기 위한 표면을 제공”하는 미분화 단계의 장이다. 이처럼 데리다의 해체나 들뢰즈의 정신분열증 그리고 우리의 논의인 융합예술의 공통점이란 차이들이 생성시키는 무한한 운동으로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3. 예술과 일상의 융합_아서 단토의 ‘예술의 종말’ 
아서 단토는 와홀의 브릴로박스(넓게는 팝아트)의 시대를 기점으로 예술종말을 선언하고 팝아트 이후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시대를 이제 '역사 후기의 시기'로 상정한다. 그러니까 그의 예술의 종말이란 일상과 별리되었던 예술을 설명할 수 있었던 거시적 내러티브가 일상과 예술이 한 덩어리가 된 팝아트의 시대에 이르러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음을 선언한 것이다. 이 시대에 남은 것은 거시적 내러티브로 설명할 수 없는 다원주의 미술이다. 일상과 예술이 융합된 종말 이후의 시대에 위치한 지금의 컨템포러리 시대에는 더 이상의 진보적 행진이 없지만, 그것은 비관론이기 보다는 새로운 시대의 희망을 이야기한다. 종말을 통해 열리는 역사 후기 시대란 마치 기독교의 종착 지점인 '천국', 막시즘의 종착지인 '계급 차별이 없는 평등의 시대'와 다를 바 없다. 즉 단토는 우리에게 '목적론적 종결점(a teleological end-point)에 이미 도달했음을 거듭 상기시킨다. 따라서 이 시대에는 모든 것이 가치를 지니며 모든 것들이 동등하게 자격을 부여받는다. 단토의 예술종말론이 우리에게 부여하고 있는 희망이란 이와 같이 모든 스타일이 가능한 다원주의적 양상의 풍부한 가능성과 정당성을 활짝 열어두고 있다는 점이다. 

4. 일상과 예술의 융합_보드리야르의 ‘예술의 무가치’ 
보드리야르의 평범한 한 미술에세이 ‘예술의 음모(Le complot de l'art)’에는 부정적인 견해들로 가득하다. 그에 따르면 현대예술이란 “진부함, 쓰레기, 보잘 것 없음에 이데올로기와 가치를 부여하고 적용시키는 것”이다. 오늘날 예술은 가장 외설스러운 것과 가장 평범한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미적으로 추구하게 됨으로써 미적이 것이 결국 평범함에 이르게 되어 오늘날 예술은 초미적이 되고 만다. 여기서 초미적이란 미가 너무 많아 더 이상 미가 아닌 지점에 이른 것에 다름 아니다. 즉 한마디로 현대예술이 무가치해졌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예술은 오히려 일상과 하등의 다를 바 없는 존재가 되고 만다. 보르리야르는 예술이 이미 무가치한데도 가치 있다고 설파하는 것은 전문가들이 공모하고 획책하는 ‘예술의 음모(Le Complot de l'art)’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다분히 예술과 일상이 융합하게 된 오늘날의 현상에 대한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시각을 제시한다. 

5. 테크놀로지가 오인하는 통섭(consilience)과 융합예술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주도하는 예술과의 융합(convergence)은 오늘날 맥락이 중심되는 상황 속에서 예술의 융합화가 형성되고 있는 다원주의 예술과는 다른 차원이다. 동시대 맥락에서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예술 유형과 융합한 것들은 대부분 미디어아트라는 협소한 영역으로 귀결되는 것이며 많은 부분 그것은 예술이라고 하기에 주저되는 것들이기 쉽다. 이것은 기술 본위의 환원주의적 융복합 경향이 만들어낸 결과이기 때문이다. 국내에 소개된 통섭이란 용어는 융복합에 관한 이러한 과학 환원주의적 사유의 일단을 드러낸다. 진화생물학자 윌슨(Edward O. Wilson)의 저서『Consilience : The Unity of Knowledge』를 소개했던 최재천의 컨슬리언스(consilience)에 대한 번역어 통섭(統攝)이란 모순적 언어가 그것이다. 이제 통섭은 과학 환원주의적 통섭(統攝)으로부터 수평적 융합인 통섭(通涉)이 되어야 한다. 최근 국내의 통섭에 관한 논쟁들은 예술의 융합과 다원주의예술에 대한 테크놀로지 중심의 논의로부터 탈피해 또 다른 가능성 있는 담론을 재창출해내어야만 한다. 진정한 의미의 통섭, 혹은 융복합이란 낙관적인 기술적 진보의 미래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6. 융합/통섭을 지향하는 예술의 고유 위상과 창발성(emergence)
예술은 대립되는 것으로부터 대립 자체의 통섭을 시도하길 즐겨한다. 전혀 닮아 있지 않음마저 선뜻 공유하는 것이다. 현대 물리학의 이론으로 이런 특징을 살핀다면, 예술은 태생적으로 '복잡계를 지향한다. 복잡계는 외형상으로 질서를 판별하기 어려운 혼돈과 무질서를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복잡계의 실체는 '질서와 무질서 사이의 경계면에서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통해 균형을 이루고 보다 발전적인 새로운 질서를 창출'한다는 점에서 태생적인 예술의 정체성과 닮아있다. 그러나 예술의 통섭은 그다지 해결책을 내놓지 않는다. 예술은 해결책을 내놓기 보다는 끊임없이 미지의 영역을 넘나들며 질문만을 던지는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금기의 영역마저 들어가 대책 없는 질문만을 던지는 속성 또한 없지 않다. 그런 차원에서 융합예술 혹은 예술통섭에 따른 주요한 논의는 창발성(emergence, 創發性)에 주어진다. '불시에 솟아나는 특성'(emergent property)을 의미하는 창발성은 개별 요소에서는 특성이 별반 없던 것이 집단을 이루면서 폭발적으로 어떠한 현상을 발생시키는 것을 주로 지칭한다. 그런데 이것은 집단의 것이지만 다분히 자발적이다. 통제나 조정을 통해 드러나는 현상이 아니다.  구체적 양상에 대한 예측 불가능함에도 그것의 가능성에 대한 기대를 도모한다는 차원에서 그것은 긍정적 불확실성이다. 그런 차원에서 융합예술/예술통섭의 창발성은 예측 불가능한 미래적 역동성과 늘 관계하는 것이다.●


주석 /
1)  김성호, 「융합예술의 개념」, 『계간 예술문화비평』, 특집 융복합예술의 현황과 전망, 한국예술문화비평가협회, 제7호, 겨울호, 2012, pp. 14-41. 
 
출전 / 
김성호, 「융합예술의 개념_통권7호(겨울호)」, 『계간 예술문화비평』, 특집1 융복합예술의 현황과 전망IV -융복합예술의 이론적 준거를 위한 대토론회,  제12호 봄, 2014, pp.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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