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
“강형구 작품에 나타난 허구적 리얼리즘”
김성호(미술평론가)
한국의 리얼리즘 속 강형구의 회화
미술에서 리얼리즘(realism, réalisme)이 서구로부터 기원하고 쿠르베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전제할 때, 한국적 리얼리즘은 미국적 리얼리즘(사실주의)로부터 유래한 것이되, 유럽적 리얼리즘(현실주의)과 혼성된 것이라고 정의해 볼 수 있겠다. 구체적으로 한국미술사에서 리얼리즘의 양상은 두 방향으로 전개되어 왔다. 하나는 1970년대 ‘극사실주의’에 나타난 ‘포토리얼리즘’의 특성으로, 미국의 팝아트와 그것의 후속인 하이퍼리얼리즘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눈속임(trompe l'oeil) 기법으로 대상을 재현하는 사실주의적 화풍을 유행시켰다. 또 하나는 1980년대 ‘민중미술’에 나타난‘사회적 리얼리즘’의 특성으로, 쿠르베가 촉발시킨 프랑스의 리얼리즘에 뿌리를 둔 채, 러시아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멕시코의 벽화운동에서 영향을 받은 현실주의적 미학을 유행시켰다. 2000년대부터 최근까지는 양자의 영향권 아래 대중주의와 상업주의가 접목되면서 포토리얼리즘과 디지털리얼리즘이 유행하고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강형구가 선보이는 허구적 리얼리즘은 미국적 전통과 유럽적 전통의 양자 사이에 존재하는 무엇이라 하겠다. 형식적으로는 미국적 리얼리즘(사실주의)이되, 내용상으로는 유럽적 리얼리즘(현실주의)과 그만의 허구적 리얼리즘(합성 리얼리즘 혹은 팩션적 리얼리즘)이 접목된 것이라 하겠다.
허구적 리얼리즘의 형식들
'나는 극사실 작가는 결코 아니다'라는 강형구의 진술은 의미심장하다. 외견상 대상과 흡사하게 닮아 있는 그의 회화는 본질적으로 일루저니즘을 창출하려는 서구식의'재현 의지'가 중심에 있지 않다. 그것은 단지 부수적인 역할을 할 뿐이다.
강형구를 닮아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를 본 적이 있는가? 참조할 사진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의 다빈치나 공자의 모습을 극사실의 기법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이미 그것이 허구적 초상임을 드러낸다. 강형구가 그들의 초상을 참조하여 새로운 허구적 초상을 창출한 것이다. 놀란 눈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고흐의 얼굴 역시 현실 그 어디에도 없는 초상이다. 고흐의 자화상과 사진 기록들을 해석하고 그가 새롭게 창출한 이미지인 것이다. 눈물을 흘리고 있는 마를린 먼로의 초상은 사진이나 영화 등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뿐인가? 노년의 존. F 케네디의 초상이나 주름 가득한 노파가 되어 있는 마릴린 먼로의 초상은 그들이 요절한 것을 알고 있는 관객들에게 그 초상들이 완벽한 허구라는 것을 알려준다.
그가 그린 인물들은 재현의 언어로 출발했으면서도 재현에 머물러 있지 않다. 강형구가 그린 인물들은 사실(fact)로부터 출발하되 상상으로 완결되는 허구(fiction)의 인물이다. 그의 ‘해체와 재구성을 통한 극사실적인 표현 기법’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역사 속 인물들을 비현실, 허구, 거짓과 연동시켜 현실계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인물들로 탈바꿈해 놓는다. 그러니까 강형구가 초상 작업을 위해 빌리고 있는 인물의 사진 이미지는 결국 그의 창조적 허구를 실현하기 위한 최소한의 일차적 참조 행위가 될 뿐이다. 그런 차원에서 거대한 초상 위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얼굴 주름, 검버섯, 뾰루지, 피부의 세포질과 머리카락들은 작가가 익숙한 손놀림으로 만들어낸 과장된 허구이자 거짓의 세계임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알게 된다. 그의 작업을 가히 ‘허구적 리얼리즘’으로 부를 만하다.
허구적 리얼리즘의 의미 : 팩션으로서의 시뮬라크르
강형구의 작업은 리얼리티의 뼈대 위에 캐리커처와 같은 왜곡과 변형을 수시로 감행함으로써 '사실' 위에 강력한 '허구'를 창출한다. 그의 하이퍼-몽타주(Hyper-montage)의 조형 언어는 이질적 개체들의 연속적 결합을 시도하거나 사실주의적 환영을 표피적으로 도모하면서 허구를 극대화시킨다. 그의 회화는 창작의 결과물이 허구임을 확증하면서도 끊임없이 픽션과 리얼리티 관계를 건드리는 문학에서의 창작 방법론인 팩션(faction) 혹은 메타픽션(meta-fiction)과 관계한다. 이러한 관점에서필자는 그의 작품을 '시뮬라크르(simulacre)가 창출하는 허구의 리얼리즘'으로 정의한다.
주지하듯이, 시뮬라크르는 플라톤에게서 이데아라는 원본의 동일성을 보장받지 못하는 '판타스마(phantasma)'의 존재일 따름이지만, 들뢰즈에게서 그것은 세상의 운동적 질서를 창출하는 역동적 존재이며 보드리야르에게 그것은 실재보다 더 실재처럼 인식되는 대체적 존재이다.
우리는 강형구의 초상들에서 실재보다 더 실재처럼 인식되는 시뮬라크르의 효과를 경험한다. 그것은 물론 그의 회화의 극사실적 효과로 초래된 것이지만, 더 본질적으로는 '문이라는 객관적 사실을 곰이라는 허구적 리얼리즘으로 바꾸는 것'과 같은 그의 특유의 창작 태도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한글의 '문'이라는 글자를 뒤집으면'곰'이란 글자가 되듯이, 객관적 사실을 시뮬라크르, 또는 허구적 리얼리즘을 통해 접근하는 그의 창작 태도는 왜곡과 변형이 어떻게 리얼리티보다 더 실재적 효과를 창출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효과는 허구적 리얼리즘이 극점에 이른 상태, 즉 왜곡과 변형이 극대화된 캐리커처의 형식이 작품으로 침투된 경우에 보다 더 선명해진다. 캐리커처가 원본의 비율을 의도적으로 배반하고 풍자나 해학을 유도하기 위해서 부분을 해체 혹은 과장한다는 점에서, 그의 캐리커처 혹은 캐리커처와 같은 수준의 왜곡과 변형은 그의 극사실 인물에 내재한 허구를 수면 위까지 꺼내어 올리는 기제가 된다. 관건은 그것이 실재보다 더 실재와 같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강형구가 그린 우디 앨런의 캐리커처는 실재의 우디 앨런보다 더 실재 같다. 캐리커처와 같은 베토벤의 극사실 이미지는 또 어떠한가? 역으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달마(達磨)의 초상을 선화(禪畵)로 형식으로부터 허구적 리얼리즘의 형식으로 정밀하게 안착시킨 강형구의 달마 초상은,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달마의 기괴한 생김새로 인해, 더 이상 리얼리티가 아닌 캐리커처와 같은 왜곡과 변형의 마술적 효과를 드러내기도 한다.
허구적 리얼리즘의 의미 : 되기의 사건
그가 우리에게 선보이는 무수한 초상들은 모두 '작가 강형구의 변형체'에 다름 아니라 할 것이다. 자화상으로부터 예술가, 유명 인사 나아가 불특정 다수의 초상으로 확장되는 그것들은 작가 강형구가 끊임없이 '다른 모습이 되기'를 시도하는 '자아 변형'의 실험 결과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들뢰즈의 수평적 담론인 '~되기(devenir)'를 조형적으로 실천하는 것처럼 보인다. 윤두서, 다빈치, 미켈란젤로, 로댕, 고흐와 같은 예술가의 초상들은 강형구가 이미 예술가이면서 '또 다른 예술가 되기'를 시도하는 변형에 관한 실험이다. 그는 자신의 자아를 투사시킨 예술가들의 초상을 탐구하면서, 한 시대의 뛰어난 예술가들로 살아왔던 그들의 심층적 내면으로 잠입하면서 오늘날 예술가로 사는 자신의 모습을 성찰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그의 되기의 사건은 '나'라는 대명사들을 끊임없이 제시한다. 강형구에게 있어 다빈치가 자신을 투사한 '나'의 변형이었듯이, 마릴린 먼로와 예수 심지어 ‘포효하는 한 마리의 호랑이’ 또한 ‘나'의 변형이 된다. 달리 말해 그것은 '나(강형구)' 아닌 '~되기(또 다른 강형구)'를 실천하는 자화상의 변형이다. 그런 면에서 강형구의 팩션으로서의 초상들은 ‘개인의 표정과 영혼’을 그린 것뿐만 아니라 이 ‘시대의 감정과 영혼’을 탐구하고 담는다. 그는 지금껏 200호 크기의 작품으로 300여 명의 얼굴을 그렸고, 캐리커처 스타일로 700여 명의 얼굴을 그렸다. 그의 말대로 '1000여 명의 얼굴을 그렸다면 그것은 이미 초상의 의미를 떠나 한 사회를 그린 것'이 된다.즉 형식은 초상이되, 그 내용은 끊임없이 초상으로부터 탈주하는 '무엇'이 되는 것이다. 강형구의 ‘허구적 리얼리즘’은 오늘도 ‘~되기’의 여러 가능성들을 실험하고, 실천하는 중이다.●
주석/
1) 김성호,「리얼리즘의 한국적 버전: 월경하는 사실주의와 현실주의의 콜라주」, 『가나콜로키움- 리얼리즘의 한국적 버전은 가능한가』, 가나아트센터 자료집, 2014. 5. 31.
출전 /
김성호, 「강형구 작품에 나타난 허구적 리얼리즘」, (강형구 작가론), 『강형구 북경 개인전 기념 한중 세미나』, 파크뷰 그린(Park View Green), 북경, 12월 5일,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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