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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작가론│임노아 / 접촉 지대의 블루 블루스

김성호

접촉 지대의 블루 블루스

김성호(미술평론가)

사진 매체의 존재 미학으로부터 

작가 임노아는 지금까지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경계/접촉, 존재/부재, 실재/가상, 개인의 기억/사회적 기억, 주체/타자, 과거의 역사/현재의 기록과 같은 관심사들을 우리에게 선보여 왔다. 

구체적으로 2011-2년 시리즈 작품인 〈귀가하기(Going back home)〉에서 그녀는 부친의 콜렉션이었던 동물 박제를 통해서 ‘주검이 대상화된 엄연한 현실’을 인식하고 그것이 야기하는 아버지의 부재함을 확인하면서 ‘존재와 부재’의 사회적 함의를 떠올린다.

임노아,Home not HOME, Installation,2012


그녀는 2012년의 시리즈 작품인 〈아노미시티(Anomycity)〉에서 아버지와 다른 이들의 앨범 속 사진을 다시 포착하고 변형해 제시하면서, 현실을 포착하고 세상을 기록하는 매체로서의 사진이 지니는 힘이 시간의 흐름과 보기의 주체에 따라 달리 작동하는 상황을 예의 주시한다. 작가는 이 시리즈 작업을 통해서 ‘이미 존재했었음’을 증언하면서 주검의 이미지를 소환하는 사진의 아이러니, 그리고 피사체에 갇혔던 존재의 탈맥락화된 익명성의 현현뿐만 아니라, 디지털 사진이라는 매체가 현실적 외피를 완벽하게 복사하지만 그것이 종국에는 현실을 철저하게 왜곡해 드러내는 시뮬라크르의 위상일 뿐이라는 것을 거듭 재확인한다


Moments of Anotomity,2012

2014년 시리즈 작품인 〈금지된 환상(Forbidden Fantasies)〉은 어떠한가? 그녀는 고다르(Jean Luc Godard)의 〈중국 여인(La Chinoise)〉,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Bernardo Bertolucci)의 〈순응주의자(The Conformist)〉, 이강천의  〈피아골(Piagol)〉과 같은 몇몇 사회주의 영화에서 캡쳐한 스틸 컷들과 인터넷 상의 북한 이미지를 추출하여 마치 필름 스트립(filmstrip)의 방식으로 병렬 배치한 작품을 우리에게 선보인다. 이 작품은 관객에게 미지의 여행지인 북한으로의 시각적 여행을 선물한다. 지상의 유토피아와 같은 환상적인 풍경을 담은 사진 이미지라는 것이 얼마나 현실로부터 유리된 유령과 같은 판타스마(Phantasma)의 허구적 이미지인 것인지를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이다. 이처럼 그간 우리에게 선보여 온 임노아의 작품은 사진 매체의 존재론적 미학을 화두로 삼고 그것의 사회학적 문제의식과 의미를 되묻는 작업들이었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Spider Encounters Pig, Installation View, 2015



압록강 카페 

임노아의 이전 작업이 사진 매체를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면 그녀가 2015년에 개최한 한 전시는 사진, 영상, 조각, 설치뿐 아니라 이미지와 텍스트가 교차하는 탈장르를 지향한다. 전시명인 《압록강 카페》를 통해서 그녀가 우리에게 선보이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이전의 작품들이 최근의 이 전시와 이어지는 맥락은 무엇인가? 
《압록강 카페》는 ‘부재하는 가상의 카페에 관한 존재 가능한 이름’이다. 달리 말해 그것은 ‘실재하지 않는 카페의 실재할 수 있는 카페의 이름’이다. 그것의 가상 장소는 북한과 중국 사이의 경계에 위치한 압록강의 어디쯤으로 설정되었다. 그곳은 북한 주민들의 죽음을 각오한 탈주가 매일처럼 실천되는 공간이다. 더러는 체포되거나 더러는 사살됨으로써 탈북이 좌절되거나 그 시도가 영원히 종결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참혹한 ‘사건들의 공간’이기도 하다. 
작가 임노아는 불특정한 시점을 가상한 어느 날, 그곳에  《압록강 카페》를 짓는다. 이 상상의 카페는 탈북자들이 모여 처절한 탈북 당시의 경험을 서로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 탈북자들에게 남겨진 아픈 상처를 서로 어루만지는 공간, 남한에 새터민으로 자리 잡았으나 이내 소외와 설움을 견디지 못해 결국 타국으로 떠나는 망명자들이 잠시 옛 기억을 떠올리며 과거와 함께 머무는 ‘추억의 공간’이 된다. 그곳에서 그들은 삶과 죽음의 이야기를 나누고 애조 섞인 노랫가락을 나직이 흥얼거린다. 처량함과 애잔함, 그리고 가슴 먹먹함이 그곳에 있다. 작가 임노아가 만들어 놓은 상상 속 공간에서 탈북자들이 모여 마치 실재처럼 나누는 이야기와 노랫가락을 필자는 ‘경계 지대의 블루 블루스(Blue blues)’라 부르기로 한다.  



임노아 개인전,<<압록강 카페>>, 익산, 2015



경계와 접촉의 지대   
  
임노아의 전시에서 상상의  《압록강 카페》가 위치하고 있는 압록강은 가상의 경계 지대이자 접촉 지대이다. 북한과 중국 사이에서, 그리고 실재와 허구 사이에 위치한 경계 지대이자, 과거와 현재 사이를 이상과 현실을 잇는 접촉 지대이다. 그것은 임노아의 가상 내러티브를 출발시키는 플랫폼이다. 그곳에 위치한 상상 카페는 그래서 탈주의 현재적 욕망이 거하는 장소이자, 탈주로부터 상처 난 과거의 영혼을 소환(召喚)하는 장소이며 탈주의 욕망이 소멸된 자유로운 미래의 영혼들이 유영하는 장소가 된다. 그 가상의 장소에서 과거-현재-미래의 시간들은 서로의 몸을 섞으면서 한 장소에 모여 이야기를 나눈다. 

 
보라! 그녀의 작품 〈테이블 토크〉는 가상의  《압록강 카페》에 참여하는 가녀린 한 여인의 참혹한 과거를 증언한다. 거기에는 늘 다른 생을 열망했던 한 여인이 비루한 현실적 삶의 장을 떨쳐 내고자 사투를 벌였던 탈주의 욕망이 처참하게 좌초되고 만 현장을 목도한다. 탈북자의 최후임에 분명한 가슴 아린 풍경이 관객의 눈에 가득 들어온다. 위태로운 의자를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밧줄은 참혹의 구덩이로부터 구출하는 한 줄기 삶의 희망이었을까, 아니면 그를 속박했던 결박의 끈이었을까? 그 밧줄 아래 짐승의 사체처럼 쓰러져 있는 여인의 하반신을 덮고 있는 허름한 널빤지와 그 아래 간신히 주검을 받치고 있는 연약한 테이블은 한 생명의 처참한 최후를 기록한다. 



임노아, <테이블 토크>, 부분, 2015
- 누가 나를 이처럼 지독한 인간으로 만들었는가? 구걸, 거짓말, 도둑질

이러한 이미지에 대한 진술은 맞은편 벽을 가득 채운 영문 텍스트로 증언된다. “누가 나를 이처럼 지독한 인간으로 만들었는가?”라는 질문 사이를 흐르고 있는 ‘구걸, 거짓말, 도둑질’이라는 세 단어는 그녀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키워드들이다. 최후의 주검이 외쳤던 처절한 절규처럼 보이는 이 텍스트들은 실상 작가 임노아가 전시 《압록강 카페》를 열면서 되뇌는 물음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인권 유린의 북한 체제에 대한 참담한 분노와 더불어 분단의 상황을 만든 이 땅의 역사 속 위정자들의 실책에 대한 회환(悔恨)마저 뒤섞여 있는 그녀의 복잡다단한 심경을 고스란히 드러낸 질문이다. 또한 그것은, 실제로 그녀가 새터민의 한국 정착을 도와주는 봉사 활동을 하면서 경험했던, 북한에서의 참혹했던 그들의 과거사에 대한 연민과 더불어 한국에서의 처절한 소외에 대한 분노가 뒤섞인, 복잡한 심경과 번민을 한데 담아낸 것이기도 하다. 새터민들에게 있어, 북한에서는 물론 한국에서조차 구걸, 거짓말, 도둑질을 일삼게 만든 지금의 현 상황은 결국 이데올로기와 헤게모니에 따른 ‘편 가르기’와 그것으로 초래한 처절한 경계의 산물이었음을 토로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생각한다. 이제 그것은 접촉의 지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팩션의 비선형 내러티브    

임노아는 경계의 지대를 접촉 지대로 변화시킬 《압록강 카페》를 짓기로 한다. 그곳에서 탈북에 실패한 영혼들을 위무하고, 탈북에 성공했으나 영원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이 땅의 새터민들을 위로하기로 한다. 그래서 그녀는 실재를 증언하는 한 인터뷰이를 초대한다. 〈내가 건너야 할 강〉(8’ 20”)이라는 제목의 영상 작업을 통해서 우리에게 들려주는 실제 한 새터민과의 인터뷰가 바로 그것이다. 가상의 압록강에서 진행된 이 인터뷰에는 탈북을 거쳐 새터민이 되었고, 현재 탈북자들을 지원하는 일에 몸을 던진 한 여인의 증언을 통해서 참혹했던 북한에서의 삶과 탈북의 경험 그리고 탈북을 지원해 온 고단한 과정들이 담담히 소개된다. 

작품 제목에서, 인터뷰이가 ‘이미 건넜던 강’이 다시 ‘건너야 할 강’으로 표기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사선(死線)을 넘어 이미 탈북한 그녀가 다시 그 곳을 넘는다는 것인가? 그것은 그녀가 북한 주민의 탈북을 돕는 일에 몸을 던져 일하는 것을 의미하는 중의적인 표현이다. 여기서 ‘내가 건너야 할 강’이란 그녀가 이미 건넜던 압록강일 수도 있을 것이며, 건너야 할 ‘큰 강’처럼 괴리가 큰 탈북자, 새터민 그리고 자신과 남한에 거주하는 주체들 간에 주고받는 불편한 시선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그것은 ‘인터뷰이가 건너야 할 강’이자 ‘우리가 건너야 할 강’이 된다.  




임노아, <내가 건너야 할 강>(8'20')


결코 쉽지 않은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 그녀를 인터뷰이로 불러 증언을 청해 듣는 인터뷰어인 작가는 영상 속에 끝내 나오지 않는다. 이러한 인터뷰 형식은 우리로 하여금 이것이 임노아의 미술 작품의 한 부분임을 잠시 망각하게 만든다. 몰입을 가속화하는 영상 채록이 우리로 하여금 가끔은 공포에 떨게 하고 가끔은 소름 돋게 만들면서, 그것을 철저한 ‘팩트’로 인식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주지하듯이 인터뷰는 다큐의 형식적 면모를 얼추 갖추고 있을 뿐 결코 다큐가 아니다. 그것에는 과장과 왜곡으로 인한 인터뷰이의 ‘픽션’이 언제나 개입함으로써 팩트의 본질을 흐리게 할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부분은 작가 임노아가 의도하는 바이다. 


이처럼 팩트(fact)와 픽션(fiction)이 모호하게 흐르는 장치를 통해 자신의 비판적 메시지를 팩션(faction)의 언어로 표현하려는 작가의 의도는 곳곳에서 감지된다. 가상의 ‘압록강 카페’에 대한 설정이 그러하며, 인터뷰의 앞뒤로 끼어드는 〈압록강 카페〉(5’ 58”)라는 제목의 한 연극배우의 묵극(黙劇) 또는 팬터마임(pantomime)을 담은 영상 작업이 그러하다. 기이하리만치 기다란 손톱을 기른 손, 해학적이면서도 몽환적 분위기의 분장, 장미의 향내를 맡으면서 두리번거리는 불안한 눈빛, 헤드폰을 끼고 무언가를 하염없이 듣고 있는 여배우의 느릿한 행동은 어색한 침묵과 과도한 우스꽝스러움이 한데 뒤섞여 야기되는 극도의 불안과 공포의 분위기마저 담고 있다. 오늘날 피에로(pierrot)가 비극을 연기하는 남성 희극 광대라는 전형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임노아의 영상에 등장하는 이 여배우는 여성 광대 피에레테(pierrette)처럼 희극적 얼굴을 한 채 비극을 연기한다. 허구적 인물이 연기하는 암울한 슬픔, 침묵의 분노, 병적 불안 등이 몽환적인 분위기의 화면 안에 가득하다.    


영상 〈내가 건너야 할 강〉이 사실적 인물의 눈으로 바라본 팩트에 대한 작가의 진술이라면, 영상 〈압록강 카페〉는 허구적 인물의 눈으로 바라본 픽션에 대한 작가의 진술이다. 두 영상이 순차적으로 묶여 있는 하나의 영상 작업은 그런 면에서 전자와 후자의 내러티브를 선형적 시간관에 꿰기보다는 양자의 시간적 흐름을 해체하고 뒤섞어 비선형의 내러티브로 전환된다.  그럼으로써 팩트와 픽션뿐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를, 북과 남을, 그리고 탈북자와 새터민을 한 자리에 둘러앉게 만드는 것이다.  



임노아, <압록강 카페>(5'58')


블루 블루스  
임노아가 경계의 지대로부터 변화시킨 접촉 지대에는 팩션의 비선형 내러티브로 가득하다. 그 이야기들은 기승전결 식의 서술형의 구조를 탈주하고 주절거리는 1인칭 화자의 팬터마임 혹은 독백이거나 고양된 감정으로 서로 주고받는 정제되지 않은 한바탕의 상호 다성적이고 카니발적인 대화와 혼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내러티브이기보다는 레시(récit)를 지향한다. 아니 그것은 차라리 한 구절의 노랫가락이다. 남한 땅에 거하고자 탈주를 감행하는 탈북자들과 남한 땅으로부터 다시 탈주를 감행하려는 새터민들의 회한(悔恨) 가득한 애가(哀歌) 말이다. 그것은 영원한 이방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들을 타자로 대면하면서 그들의 상황에 자신을 이입한 작가 임노아가 부르는 한 곡조의 노래이다. 그것을 필자는 ‘우울한 노래’의 의미로 ‘블루 블루스(blue blues)’라 부르기로 한다. 
블루스가 19세기 후반 미국 흑인 노예의 후예들이 선조의 고향을 잃고 이방인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애환을 자조 섞인 가사와 섞어 읊조리듯 부르는 노래인 ‘화답가(call and response)’의 형식으로부터 발전했듯이, 탈북자와 새터민들이 서로 주고받는 암울한 이야기들은 임노아의 작업에서 한 편의 우울한 블루스가 된다. 블루스에 아프리카의 리듬과 유럽의 음악이 녹아들었듯이, 임노아가 탈북자와 새터민을 대신해서 부르는 ‘블루 블루스’에는 그들의 북에 대한 이율배반적 향수와 남에서의 애환이 뒤섞여 있다.


임노아의 이번 전시를 두고 필자가 은유하는 ‘블루 블루스’는 그녀의 작품 곳곳에서 읽히는 우울하고 애절한 이야기들의 번안과 같은 것이다. 그것이 상담 치료와 같은 효과를 유발하거나 우리가 기대하는 음악 치료와 같은 효과가 이번 전시에서 발현되었다고 속단하기는 이르다. 미술이란 그와 같은 카타르시스를 원래 목적으로 하고 있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그녀의 작업은 줄곧 남들과는 ‘다른 눈’으로 대상과 현실을 바라보려 시도하고 그것에 대한 비판적 의문을 지속적으로 제기해 왔기에, 사회적 차원의 문제의식을 끊임없이 제기하면서 대안적 성찰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섣불리 답하기 어려운 이러한 질문에 그녀 역시 답하지 않는다. 그녀는 단지 블루스의 원형이었던 화답가와도 같이 우리에게 자신의 ‘끝나지 않은 노래’에 대해서 가슴의 언어로 화답해 주길 바랄 뿐이다. 자신의 가상의 《압록강 카페》가 ‘경계의 지대’로부터 ‘접촉의 지대’를 넘어 이제 ‘화해와 치유의 장’으로 변모되길 기대하면서 말이다. ●

출전  /
김성호, 「접촉 지대의 블루 블루스」, (임노아 작가론), 익산문화재단 비평 매칭, 2015.『익산문화재단 자료집』,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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