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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로그 서문┃손몽주 전 / 표류에서 표류로

김성호

손몽주 개인전 서문 

표류에서 표류로  

김성호(미술평론가)


손몽주, 〈표류로〉, 2014. 표류목, 합성고무밴드, 와이어, 타카, 2000 x 1100 x 800cm






표류의 풍경 
홍티아트센터의 전시장에는 6m에 육박하는 높이의 천장으로부터 흰색의 막이 여럿 드리워져 있다. 그것은 작가 손몽주가 흰색의 합성고무밴드를 무수히 잇대어 중첩시켜 천장과 벽을 잇는 거대한 막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이 거대한 막들 사이로 길을 내고 있는 것은 그녀가 올해 9월부터 한 달간의 기간 동안 부산의 사하구 홍티포로부터 다대포해수욕장을 다니며 채집한 7조각의 표류목들이다. 적게는 1m에서 크게는 4m에 이르는 그것들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출애굽을 감행하는 모세가 기적을 일으킨 홍해의 물길처럼 보인다. 어떻게 보면, 높낮이가 다르게 공중에 매달린 까닭에 천상으로 오르는 길에 놓인 디딤돌이거나 거꾸로 신의 강림을 예비한 구름다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인간과 신이 지상계와 천상계를 오르내리는 신비의 여행길인지도 모른다. 

아뿔싸! 그러나 그것은 목적지 자체가 설정되지 않은 ‘여행+길’이자, 표류 자체가 목적인 ‘표류로(漂流路)’이다. 손몽주가 물속에서 갈 목적지를 읽고 부유하다가 떠밀려온 표류목을 채집하여 그것의 표류에 대한 기억을 재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분석적인 공간으로부터 감각장의 공간과 운동의 장소로 
손몽주는 지금까지 800km가 넘는 합성고무밴드로 ‘공간 속 공간 짓기’를 통해서 변형, 확장되는 공간의 의미를 탐구해왔다. 주로 실내의 공간에, 더러는 야외의 공간에 라인을 통한 ‘공간 드로잉’의 방식으로 ‘새로운 공간’을 축조해냄으로써 기존의 공간을 변형하고 확장해온 것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시지각으로 인식되는 새로운 감각장(sensory field)으로서의 공간 탐구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다만 이러한 감각장으로서의 공감 탐구의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서, 그녀는 분석적인 공간 탐구의 과정을 필연적으로 거쳐야만 했다. 즉 실내의 큐브 공간 안에 작품의 구조를 짓기 위해서 천장과 벽이라는 연결점으로부터 순차적으로 합성고무밴드를 이어나가는 공간 구조의 설계를 반복적으로 지속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주어와 술어를 항상 염두에 두고, 목적어와 형용사구, 부사구의 장치를 운용해야 하는 언어 구사의 분석적(analytical) 태도와 닮아있다. 따라서 복잡다기한 언어적 수사의 고리를 연결하여 관객에게 감각장이라는 전체적(integral) 시지각의 쾌(快)를 선사하는 일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전시장을 점유하는 효율적인 감각장을 만들기 위해서 그녀의 작업은 공간을 설계하는 지난한 분석적 태도와 더불어 공간 연출과 설치라는 고단한 노동의 과정을 필수적으로 거쳐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창작 과정에는 ‘특이한 시간’이 개입하면서 그녀의 감각장을 ‘행동하는 장소(acting place)’로 정초시킨다. 그 ‘특이한 시간’이란 무엇보다 ‘변형의 공간’을 만드는 작가 손몽주의 신체가 운용하는 ‘운동의 시간’임은 물론이다. 그녀가 선택한 전시 장소라는 물리적 공간에 구축하는 또 다른 공간은, 창작의 과정에서 자신을 신체적 위치를 부단히 이동시키는 작가의 시간적 개입을 통해서, 변형에 변형을 거친다. 그런 면에서 3차원 좌표(x, y, z) 상에서 점, 선, 면, 입체의 관계를 끊임없이 이동시키면서 기존의 공간을 변형체로 만드는 손몽주의 공간 위상학(topology)은 그녀가 공간에 말을 건네고 그것과 이야기를 나누는 ‘특이한 운동의 시간’을 부여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전시 공간 속 또 다른 공간’은 비로소 ‘의미 있는 장소’로 거듭나는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특이한 운동의 시간’과 ‘위치 관계의 공간 변이’는, 완성된 그녀의 작품 앞에서 또는 작품 속에서 관람을 이어가는 관객의 신체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연장된다.    

한편, 그녀의 작품에 나타난 ‘특이한 운동의 시간’은 합성고무밴드라는 동일 성질의 재료의 ‘위상적 불변성(topological invariant)’을 깨뜨리기조차 한다. 왜냐하면 그녀의 작업은, 벽과 천장을 종횡 및 사선으로 긴장감 있게 오르내리는, 합성고무밴드를 종종 와이어와 같은 강력한 탄성체로 보이게 만들거나, 혹은 반대로 솜처럼 부드러운 질료로 인식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관객의 ‘관람이라는 운동의 시간’이 그들의 심리적 지각(psychological consciousness)의 차원에 관계하면서 작품을 시공간 변환의 장으로 이끌고 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녀의 작품을 가히 ‘분석적인 공간으로부터 감각장의 공간 그리고 행동과 운동의 장소’로 이동하는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표류의 운동과 표류로 
그녀의 작품에서, ‘비어있음’의 공간 속에 합성고무밴드를 통해 ‘선 드로잉’의 형식으로 축조하는 ‘유연한 벽’은 외부와 내부를 분절하고 구획하는 격벽(隔壁)이기보다는 외부/내부를 연결하는 접속체로 기능한다. 그것은 외부를 차단한 채 내부에 거주하는 ‘정주(定住)의 공간’이기보다는 외부와 접속하는 내부로터의 ‘유목(遊牧)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그녀의 ‘공간 속에 짓는 또 다른 공간’은 결코 ‘채움’의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비움’의 공간이다. 그녀의 멀티플 고무밴드가 세우는 ‘유연한 벽’은 언제나 바람이 통하고 빛이 통과하는 틈의 공간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손몽주는 ‘공간 속 띠 드로잉’이자 ‘공간 속 비움의 구조물’인 자신의 작품을 통해 관객에게 다음처럼 말을 건네는 듯하다: 보자! 조명을 받아 자신의 분신을 하얀 벽면에 길게 드리우는 밴드의 장엄한 그림자들과 그 틈 사이를 메우는 찬란한 빛을. 듣자! 출입구와 창문으로 들어오는 가녀린 바람과 미세한 공기의 움직임에 따라 부딪히고 진동하는 밴드들의 ‘사각거리는 소리’ 혹은 ‘소리 없는 아우성’을. 거닐자! 큐브 안에 지어진 또 다른 공간인 밴드 집적체가 만드는 거대한 막 사이를. 이야기하자! 저 위의 표류목이 낙동강을 따라 강의 최남단이자 바다인 다대포까지 어떠한 연유로 유목되어 왔는지를, 혹은 그것이 바다에서 어떠한 표류의 과정을 거치다 밀물을 타고 해변에 떠밀려 왔는지를, 또한 그것이 기억하는 과거의 여정과 그 미래의 여정이 어떠할 것인지를 말이다. 

작가가 제시하는 전시명 ‘표류로(漂流路)’는 표류의 길(road)이라는 현재적 지표의 의미 외에도 다음처럼 이중의 함의를 가진다. ‘표류의 역사’라는 과거로부터의 과정(process)과 ‘표류의 미래’라는 예측 불허의 방향성(direction)이 그것이다. 작가에 의해서 포구에서 발견된 표류목은 합성고무밴드가 만든 휘장에 떠받들어져 마치 신전의 신상처럼 높이 모셔진 채 건조의 과정을 거치면서 새로운 생을 이어간다. 그것(들)은 분명코 손몽주가 마련한 안식의 장에서 현실계의 표류를 마친 것이지만, 또 다른 차원에서 표류의 생을 이어가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녀의 전시명인 ‘표류로’에서 방향 지향성의 용어 ‘~로’는 이러한 차원을 넉넉히 암시한다. 그런 면에서 이번 전시는 작가 손몽주가 만들어내는 사건으로서의 ‘제2의 표류’라 할만하다. 달리 말해 표류의 상태에서 새로운 ‘표류로’를 만들어가는 ‘표류의 표류’라 할 수도 있겠다. 필자의 기대가 틀리지 않다면, 관객들은 작가의 의도대로 이 표류목의 사물성에 내재한 기억들을 상상으로 반추하고 자신의 기억들과 오버랩시킴을 통해서 표류목의 과거완료형 표류가 현재 진행형의 것으로 연장되고, 더 나아가 미래 시제로 확장되는 모습을 지켜볼 것이다. 

어느 누구도 섣부르게 예측할 수 없는 미래라는 것은 어떤 차원에서 표류의 세계에 다름 아니라 할 수 있겠다. 우리도 언제인가 전시장에 설치된 표류목처럼 휘장에 싸여 그들이 축조한 것과 같은 ‘길’을 따라 새로운 차원의 생을 이어갈 것이다. 

손몽주의 이번 전시는 물리적인 공간의 위상학적 변형과 확장이라는 기존의 라인 시리즈를 통한 공간 연구로부터 창작자의 심리적 경험의 차원으로 한 단계 이동시켜 낸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이번 전시는 사물에 내재한 경험과 기억의 공간, 그것에 대한 관자의 과거 기억을 오버랩시키는 전략을 통해 공간에 심리적 거리를 투영함으로써 인간적 생명력을 불어넣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런 면에서 올해 일본에서 표류목을 설치했던 전시를 대규모의 방식으로 새롭게 해석한 이번 전시 ‘표류로’는 그녀가 향후의 전시를 이어나가는데 있어서 분명한 하나의 전환점이 될 것이다. ●

출전/ 
김성호, 「표류에서 표류로」, (손몽주전, 2014. 12. 16~12. 30, 홍티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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