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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작가론ㅣ한만영 / 다시 쓰는 비가역적 시간과 탈맥락의 시공간

김성호




김성호(미술평론가)



한만영의 1970년대 초기 작업은 팝아트의 복제적 개념을 일련의 〈공간의 기원〉 연작에 적용하면서 과거의 역사를 현재적 맥락 안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드러내는 작업에 골몰해 왔다. 예를 들어 우리에게 익히 알려져 온 보티첼리, 마네, 고갱, 드가 등의 서구의 미술사 속 거장들의 명화 속 이미지를 부분적으로 차용하고 그것을 지금, 여기의 공간에 재맥락화하는 작업을 펼쳐 왔다. 과거의 명화는 비단 서구의 것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작가 미상의 무용총의 수렵도, 신윤복, 겸재 정선 등 한국의 명화 역시 그의 현재적 작업에 들어와 과거의 시공간을 탈맥락화하고 그것에 대한 재해석을 펼쳐 온 것이다. 1984년부터 시작된 〈시간의 복제〉 연작은 이러한 명화 이미지에 일상의 오브제들이 연동되면서 명화로부터 모든 사물에 이르기까지 그 속에 내재된 역사적 시간들을 재맥락화하는 존재적 질문으로 확장되어 왔다. 최근에는 레이저 커팅의 금속판을 회화 위에 부조의 형식으로 도입하면서 화면에 도입한 오브제의 실재성과 대비되어 온 2차원 평면의 가상성을 실재화하는 전략을 통해 이러한 존재적 질문을 보다 구체화하고 있는 중이다. 즉 오브제를 가상화시키는 그간의 작업을 다시 실재화시키는 실험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최근에 이르기까지의 그의 모든 작업은, ‘다시 쓰고 해석하는 역사’를 통해 ‘시공간을 탈맥락화하는 회화’라고 정의될 만하다. 





Reproduction of time 87-7, Mixed Media in Box(Objects&Mirror), 90x51x9



망각으로부터 소환되는 형상들과 탈맥락화의 시공간  

그가 초기작에서 명화를 자신의 작업에 불러온 계기는 작가의 모친의 죽음이 야기한 상실과 부재로부터 성찰한 형상 복원의 개념이었다. 주지하듯이, 부재를 현재에 되살리는 방식은 망각으로부터 소환하는 기억의 힘이다. 그러나 형상에 대한 기억이란 얼마나 관념적인 것인가? 그것은 언제나 실재로부터 미끄러진다. 증빙할 실재 자체가 지금, 여기에 부재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처럼 기억한다는 것은 증빙할 수 없는 부재에 대한 부분적 소환일 뿐이다. 여기에는 언제나 소소한 해석들이 자리한다. 그래서 역사철학자 헤이든 화이트(Hayden White)는 ‘실재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여러 현실 중 하나의 가능성’이라고 피력하지 않았던가? 그런 면에서 역사란 언제나 해석되는 허구이다. 역사의 지평 위에 올려놓은 일련의 사건들은 완전한 사실(fact)이기보다 역사가의 해석이라는 허구(fiction)이 개입하여 만들어진 팩션(faction)이다.  




Reproduction of time 87-14, 1987, Mixed Media in Box(Objects&Mirror), 36x36x10cm, Private Collection



한만영은 미술사에 박제화되어 있는 명화들을 지금, 여기에 소환해서 자신만의 해석의 지평 위에 올려놓는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사실로서의 과거의 명화를 자신의 현재적 작업 안으로 소환하고, 자신만의 해석을 통해 명화의 존재적 위상을 허구화함으로써 만들어낸 팩션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차원에서, 한만영이 소환하는 명화의 이미지는 시공간을 탈맥락화하는 팩션으로서의 회화를 위한 하나의 매개요, 장치물이 된다. 




Reproduction of time 85-3, Oil on Panel(Objects&Mirror), 62.3x130.3x9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작품 〈Reproduction of time 85-3〉(1985)은 앵그르의 〈발팽송의 목욕녀(Baigneuse de Valpinçon)〉(1808)를 자신의 작업 안에 소환해서 탈맥락화한다. 여인의 뒷모습을 어떠한 기계적 모사 장치 없이 오직 붓을 쥔 손의 감각적 기술로만 재현하면서도, 그는 상상의 허구적 개입을 통해서 그것을 재현(representation)에 머물지 않고 표현(expression)으로 이동하는 탈맥락화의 시공간을 창출한다. 낯선 바다 풍경의 개입을 통해서 인물을 초현실적 공간 속에 위치시킨다든가, 인물 우측면의 희미한 실루엣을 통해 이 명화에 대한 오늘날 사람들의 기억을 망각의 개념과 교차시키는 회화적 전략뿐 아니라, 박스 안에 추가 달린 벽걸이 시계의 태엽 장치를 오브제로 사용해서 병치한 탈회화적 기법은 ‘시공간이 다른 곳에서 발원하는 이미지들의 낯선 만남’을 주선하면서 실재의 시공간을 탈맥락화한다. 심지어 이 오브제는 마치 통일신라시대의 귀걸이의 모양을 닮아 있기조차 하다. 




Reproduction of time-Dance, Mixed Media on Pannel, 94x94x3



이러한 경향은 최근작에서도 나타난다. 작품 〈Reproduction of time-Dance〉(2015)에서는 김홍도의 〈무동(舞童)〉을 재해석한다. 악단에 둘러싸여 춤을 추고 있는 장면에서 춤꾼만을 부분적으로 떼어 와 멀티플 이미지로 병렬하여 증식시키고 있는 이 작품은 우리에게 기억 저편에 남아 있는 전통적 한국화의 도상을 ‘지금, 여기’에 소환하여 현대적인 색감과 이미지 실험으로 재맥락화한다. 마치 색판화의 여러 판들을 늘어놓은 것 같은 이미지를 통해서 고전적 도상을 지극히 현대적 아이콘으로 변환하여 재등장시킨 것이라 하겠다. 즉 그의 회화는 동서양의 명화의 이미지를 지금, 여기에 불러오되 단순히 자신의 작품을 위한 질료적 원천으로서 불러오고, 종국에는 그것을 해체, 재구성하는 형질 변이를 통해서 원(原)기호의 위상으로부터 끊임없이 탈주시키는 것이다.   




Reproduction of time -Matisse, Acrylic in Box&Wire, 59x32x6



다시 쓰는 비가역적 시간    

그의 작품 〈시간의 복제〉 연작은 시간이 결코 복제될 수 없다는 철학적 명제를 회화의 언어로 탐구하는 역설적 제목이다. 성 어거스틴(St. Augustin)은 “아무도 내게 그것(시간)을 물어보지 않는다면 나는 알지만, 누군가 내게 그것을 설명해달라고 한다면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모른다”고 진술한다. 시간에 대한 정의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이러한 진술은 시간 복제가 불가능하다는 한만영의 〈시간의 복제〉 연작에도 적용된다. 오늘날 시간은 다분히 그것을 사는 주체인 인간과 관련하여 성찰되는 화용론적 차원의 개념이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초월적 존재자를 증명하려는 존재론적 철학과 감각적 직관으로부터 절대적 인식에 이르는 과정을 고찰하는 현상학의 차원으로 탐구되어 온 지극히 이해하기 어려운 주제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화용론과 현상학의 깊은 간극 속에서도 양자 모두에게 인정되는 항목은 시간의 비가역성(非可逆性)에 관한 것이다. 즉 결코 다시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는 상태나 성질’을 의미하는 비가역성이란 존재론적 시간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정의이다.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는 상태, 그것은 결국 현실을 사는 인간 주체의 ‘예정된 죽음을 향한 시간’을 상정한다.     



Reproduction of time - KumgangsanMount, Acrylic in Box&Wire, 333.3x218


 

그런데 한만영은 〈시간의 복제〉 연작을 통해 시간은 결코 복제될 수 없으나 다시 ‘써질 수 있는 것’임을 선언한다. 그것은 과거를 되돌리거나 과거로 잠입할 수 없는 시간의 비가역성이라는 고전 철학의 사유를 계승하면서도 ‘모든 것이 다시 써질 수 있는 텍스트’라는 데리다와 같은 현대 철학의 성찰을 회화의 언어를 통해서 모색한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Reproduction of time-Fall.1, Acrylic on Panel&Object.-Film-Mirror, 117.5x80.5x6



작가는 시계태엽과 같은 아날로그적 기계 장치에 담긴 시간성에 대한 내재적 모순을 해체적 편집의 화면 구성으로 자유롭게 한다. 즉 결코 조우할 수 없을 것 같은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과 고구려 고분벽화를 만나게 하고, 앤디 워홀과 르네 마그리트 등을 만나게 하는 시공간의 교차적이고 해체적인 편집을 통해서 비선형적인 시간 여행을 떠난다. 그것은 과거와 현재 미래가 뒤섞이고 동양과 서양이 혼재된 시공간을 다시 쓰고 중의적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이다. 그것은 분명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고 부조리한 것이지만, 미술로 행하는 ‘다시 쓰기’의 과정을 통해서 그는 오늘도 철학에서의 무거운 시공간 담론과 존재론을 가볍게 변환시켜 우리에게 산뜻한 회화적 이미지로 선사한다. 보라! 오브제/회화, 동양/서양, 과거/현재, 가상화/실재화의 교차적 만남의 장을, 들어 보라! 바이올린 오브제 위에 담긴 이미지들의 중의적 재구성이 들려주는 흥미로운 선율을! 시간성의 개념 안에서 현실을 비현실로 또는 비현실을 현실로 치환하는 그의 ‘진지한 미학적 성찰’을 담은 ‘댄디(dandy)한 회화적 전략’은 의도된 것이다. 그것은 지속되는 시간성의 개념을 비가역성의 진지한 철학적 사유로 탐구하면서도, 마치 모래시계를 뒤집어 근접한 미래를 예측하면서 무엇인가 산뜻하게 시작하는 ‘긴장된 유의미의 순간’이기도 하다. ● 출전/ 김성호, 「다시 쓰는 비가역적 시간과 탈맥락의 시공간」 , (한만영 작가론), 섹션 special artist,『미술과비평』, 겨울호,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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