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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색 : 순간의 역사성

하계훈

퇴색 : 순간의 역사성


전통과 현대를 조화롭게 아우르거나 하나로 융합하여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일은 예술가뿐만 아니라 미래를 바라보며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 대부분이 소망하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소망하는 것만큼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특히 과거의 전통과 현재의 모습이 시공간적으로 크게 이격되어 있고 그 사이에 단절과 굴곡이 심하게 개입됨으로써 양쪽이 내용이나 형식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를 보일 때에는 더욱 더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은주는 원래 한국에서 서양화를 공부했으나 프랑스로 건너가 사진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조형성과 시간적 상징성에 집중하여 작업을 해왔다. 학창시절부터 재료의 물성과 추상 형식에 관심을 가져온 이은주가 프랑스 체류 기간 동안 사진 공부를 통해 작품 속의 형상 회복을 가져온 것은 대부분의 작가들에게서는 오히려 반대로 이루어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한국의 전통회화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작가에게 서양 도시의 건물과 거리에서 포착되는 이미지로부터 드러나는 상징성과 연상 작용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나아가서 동양과 서양의 접점을 찾아내는 작업으로 작가를 이끌어간 기폭제 역할을 한 것 같다.

지난 몇 년간 이은주는 사진으로 포착한 장면을 흑백 이미지로 환원하고 작가가 개발한 재료와 표현기법을 통해 뚜렷한 형태와 윤곽을 약화시킴으로써 작품 속에 독특한 아우라와 회고적 시간성을 부여하는 작업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작업을 거쳐 작가가 최근에 집중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전통 산수화 속에 펼쳐진 공간에 작가가 직접 촬영한 현대 사회의 다양한 모습을 접합시켜 가상적이면서도 부분적으로 현실적인 공간이며, 결과적으로 과거와 현재가 한 화면에 공존하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기존의 산수화 등의 작품 이미지와 새로 채집된 이미지의 조화와 결합을 통해 전통 산수화의 회화적 특성을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회화공간을 모색하고 있다. 예를 들어 단원 김홍도의 <마상청앵도>에서 가던 길을 멈추고 나무 위에서 노래하는 새를 바라보던 선비와 시동의 자리에는 모터사이클을 타는 사람이 자리 잡고 있고, 그 길옆에는 유명 편의점이 세워져 있다. 그런가 하면 이인문의 <강촌청우도>에서는 산 밑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 대신 그 자리에 고층 아파트가 자리 잡고 있으며 산봉우리 위로 헬기가 나른다. 정선의 <박연폭포>를 재구성한 작품에서는 폭포 아래 정자 부근에서 물구경을 하는 선비들 대신 관광객들이 주변을 서성이며 폭포를 즐기고 있다.

이은주는 전통 산수화 속의 공간을 과거의 세계, 가상의 세계로 상정하고 여기에 자신이 촬영한 사실적인 사진 이미지들을 첨가함으로써 가상과 현실이 빚어내는 제 3의 공간을 창조해내고 있다. 그리고 그 공간에는 과거의 우리 전통의 자연 공간의 모습과 그로부터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전개되어왔음직한 오늘날의 변화된 모습이 관념적 수묵화이기에는 너무 사실적이고, 사진사실주의적이기에는 다분히 도가적인 상상의 공간으로서 느껴지도록 접목되어 한 화면에 담겨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전통산수의 특징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여백의 공간에 현대적인 이미지, 그것도 회화 이미지가 아닌 사진 이미지를 침투시켜 새롭게 관람자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화면을 구성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의 방법으로서 이은주가 채택한 요소 가운데 하나는 화면을 흑백으로 균일화하는 것이다.

이은주는 옛 선비가 있음직한 곳에 오늘날의 우리 이웃의 모습이 배치하고 그들이 마치 우리 이웃같은 모습으로 눈에 익숙한 행동을 보여주고 있는 화면을 통해 관람자들이 작가의 상상력에 동참하도록 유도한다. 이러한 작업의 결과는 놀랍게도 우리의 시각과 인식에 설득력 있게 다가오며 적지 않은 경우에 전통회화에서 다루지 않았던 해학과 유머가 발견된다.

마샬 맥루한(H Marshall Mcluhan)은 1964년 그의 저서 <미디어의 이해: 인간의 확장>에서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 말은 논리학적으로는 완전한 참으로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논리학적 판단을 유보하고 그가 말하고자 한 바를 시각예술의 장르에 대입해보면 결국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은 동일한 내용을 어떠한 미디어에 실어 전달하는가에 따라 그 전달의 효과와 반응이 다를 수 있다는 의미로도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즉 한 시대, 한 사람의 모습을 수묵화로 묘사하여 보여주는 것과 사진으로 찍어서 보여주는 것은 동일한 공간과 동일한 인물을 보여주면서도 그 전달 효과가 다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은주의 작품에서도 마샬 맥루한의 말처럼 작가의 생각을 전달해주는 매체의 성질에 따라 관람객과의 소통과 그들에 대한 설득의 효과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한국의 전통회화에 대한 관심을 가진 이은주는 회화와 사진에 대한 연구의 결과로서 디지털 사진과 사진 기술의 발전을 가능하게 해주는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이미지를 가공, 합성함으로써 사진과 회화의 경계를 해체하고 있는데, 결국 이것은 작가가 관람객에게 다가가는 새로운 소통의 매개방식을 실험하고 있는 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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