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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옥문 / 눈으로 담고, 손끝으로 느끼며, 마음에 새긴 제주의 풍경

하계훈



이옥문 / 눈으로 담고, 손끝으로 느끼며, 마음에 새긴 제주의 풍경


 
하계훈 | 미술평론가

 
이옥문은 유화기법으로 사실주의적 작품들을 통해 주로 제주의 풍경을 담아내는 작가다. 풍경화가 지금은 중요한 회화의 형식 가운데 하나지만 역사적으로 풍경화에 대한 예술적, 사회적 평가는 시대에 따라, 동서양의 관점과 태도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이를 묘사하는 풍경화는 동양과 서양을 망라하고 오래 전부터 폭넓게 제작되어 왔다. 산수화(山水畵)로 불리는 동양의 회화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의 모습을 그려내는 사생(寫生)보다는 사물의 형태 대신 그 정신과 의미를 강조한다는 사의(寫意)를 앞세우면서 대상의 재현성은 부차적인 것이 되고 점차 그림의 형식화가 이루어진 측면이 있다. 그리고 붓을 다루는 방법이 몇 가지로 정형화되면서 사실주의적 재현과는 거리를 두고 화법(畫法)과 준법(峻法)에 의거하여 작품의 화격(畫格)을 논하면서 풍경화의 전통이 이어져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가 우리나라의 조선시대 후기에 와서 겸재 정선의 작품 등에서 보이는 것처럼 사실주의적인 재현성에 초점을 둔 실경산수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사실주의적인 재현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사용하는 붓과 재료의 속성으로 인해 재현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비하여 서양화는 풍경 표현에 있어서 관념으로부터 사실적 재현으로 진화하는 속도를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회화에 대한 태도, 재료의 개발과 변화 등이 동양의 회화에 비하여 사실성에의 접근을 더 수월하게 해준 측면이 있다. 풍경과 인물이나 사물을 닮게 그리는 것이 작가의 능력을 측정하는 중요한 덕목이 됨으로써 르네상스 이후의 미술에서 재현성은 미술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가 되어왔었다.

그런데 서양 풍경화는 장르의 성격상 크게 두 가지 역사적인 특징을 드러낸다. 우선 유럽에서 역사화나 종교화의 배경으로서의 풍경화가 독립적으로 장르를 개척하게 된 데에는 17세기 이후 그랜드 투어(Grand Tour)라는 문화교양 충전과 호기심 충족을 위한 원거리 여행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지금이라면 여행 기간 동안 인상 깊었던 광경을 사진에 담아 와서 여행의 추억을 쉽게 다시 반추해볼 수 있겠지만, 그 당시로서는 그러한 기억을 글로 남기거나 스케치 풍의 풍경화로 만들어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이 거의 유일한 방법이며 일반적으로 여행자들이 채택하는 여행과정이었다. 여행자가 많아지면서 일부 주요 루트에서는 그들을 따라가며 그림을 그려주고 대가를 받는 화가들도 있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잘 알려진 카날레토(Canaletto)와 같은 일부 인기 화가들은 여행자들의 밀려드는 주문에 대비해서 인기 있는 장소의 풍경과 인물을 미리 배치해 놓고 주문에 따라 인물의 얼굴만 그때그때 그려 넣어주는 장사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즉 17-8 세기 유럽에서 시작된 풍경화에는 새로운 곳에 대한 호기심과 여행의 추억을 소환하는 도구로서 회화가 동원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그러한 풍경화는 사실주의를 바탕으로 하지만 처음 가본 곳에서의 놀라운 장면들이 개인적인 인상에 따라 강조되거나 주문자의 과시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다소 과장되어 낭만주의적인 감동과 놀라움을 실제 이상으로 담고 있는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또 다른 풍경화의 역할은 17세기 전반의 네덜란드와 19세기 전반에 주로 활동한 미국 허드슨강파(Hudson River School) 화가들의 작품에서 보이는 것처럼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의 아름다움과 위대함, 그리고 그 공간을 누리는 자신들의 자부심과 기쁨을 표현하는 방법으로서의 풍경화가 동원되는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풍경화에는 화가가 대상을 우호적으로 공감하는 상황이 전제되는 가운데 그 대상을 좀 더 깊숙하게 이해하고 있으며 단순히 눈으로 바라보는 정도 이상의 교감이 풍경 안에 담기게 되고, 애국적이거나 애향적인 정서가 직, 간접적으로 작품에 스며들게 된다. 예를 들어 17세기 네덜란드 작가들의 화면에 등장하는 거대한 풍차는 단순한 조형적 모티브가 아니라 당시 네덜란드인의 애국심과 자부심이 가시화된 랜드마크적 상징으로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유럽의 각 나라에서는 작품을 감상하는 관람자의 입장에서도 작가들의 이러한 태도와 정서를 높이 사며 공감하는 방식으로 풍경화를 즐겨온 사례도 적지 않았다.

 
이옥문이 제주의 풍경을 자신의 화폭에 담아내는 태도와 배경을 앞의 두 가지 경우 가운데 하나로 설명하자면 후자의 경우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옥문은 제주에서 태어나고 자라면서 이제까지 제주를 크게 벗어난 적이 없다. 학교도 직장도 제주도에서 다녔고 가족들도 모두 제주에 살며 즐거운 시간과 어려운 시간, 보람찬 시간과 힘들고 안타까운 시간을 두루두루 보내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제주도라는 지리적인 공간이 작가 이문옥에게는 보통 이상의 의미와 상징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제주의 풍경은 관광객에게 여행의 추억을 불러다주고 일상의 피로와 긴장감을 해소해주는 도구적 기능을 가진 공간이라면, 이옥문 작가에게는 이들 방문객들과는 다른 심도를 가진 추억이고 치유이며 기억의 장소로서의 풍경인 것이다. 작가와 동행한 제주 둘러보기에서 이옥문은 자신의 어린 시절에 물놀이도 하고 보말(고동)을 잡거나 고망(구멍) 낚시를 하던 해변과, 아버지와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나갔던 그곳의 기억 등을 술술 풀어놓기도 했다. 작가의 기억과 향수의 깊이나 층위는 외부에서 일시적으로 유입된 이들의 감상적인 정서와 비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옥문 작가와 같은 사람을 토박이라고 부른다. 대대로 그 땅에서 나서 오래도록 살아 대를 이어오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토박이에게서는 그 지역의 냄새가 나고, 그 지역의 말투가 들리고,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그 지역의 정취가 빈틈없이 담겨진 분위기가 느껴진다.

예전과 달리 신속하고 조밀한 네트워크로 연결된 세계화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정보의 유통과 물류가 훨씬 손쉬워져서 이제 더 이상 문화적 측면에 있어서 장소적 고유성을 보존하기 어렵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미술 분야에서는 이러한 주장이 반은 맞고 또 반은 틀리다고 할 수 있다. 즉 통신과 디지털 기기의 발달로 정보 전달 수단이 수도권 뿐 아니라 세계 미술계에서 일어나는 소식들을 제주에 바로바로 전해주고, 새롭게 개발된 미술 재료와 기법이 빠르게 전파되고, 작가에 대한 중앙정부나 미술 관련 공공기관들의 정책적 배려가 골고루 배분되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지역의 작가가 다른 작가들과 빠르게 동질화되고 자신만의 고유한 특성을 쉽게 흘려버리는 것은 아니다. 작가의 작품은 재료나 정보에서 나오기보다는 그가 쉰 들숨과 날숨, 현장 답사를 통해 작가의 발바닥에 전해지는 땅의 촉감, 시시각각 변하는 날씨와 바람을 피부로 느끼는 감각의 미묘함 등을 직, 간접적으로 자신의 작품에 담아내는 능력을 배제하고 이야기할 수 없다. 즉 아무리 세계화 시대를 산다고 하더라도 지역적 문화 배경의 특수성이 완전히 배제되는 것은 불가능하며 오히려 역설적으로 정보화, 세계화의 시대에는 그것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날 가능성이 더 높다.

우리가 오늘날 살아가는 세상은 정보통신의 혁신적인 발달을 넘어 가상현실로 현실을 대체하는 단계까지 이행되고 있지만 이옥문이 미술대학에 진학했던 1980년대에는 지금과는 상황이 조금 달랐었다. 예술 교육과 창작 활동에 있어서 제주라는 지역적 열세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수도권으로 집중되고 있었으며, 그것은 지금도 어느 정도는 진행되고 있는 현상이지만, 그 당시의 장소적 차별성은 지금보다 더 큰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작가가 자신의 대학시절을 회고한 것처럼 이옥문은 대학생 시절에 자신이 다니던 학교로 부임한 신임교수가 구사하는 회화기법과 채색 등에서 이전에 보지 못한 놀라움을 느끼기도 했다고 언술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에피소드는 개인적인 상황의 특수성이 있을 수 있지만 우리 미술계에서 1980년대의 미술교육은 아직 국제적 흐름의 변화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고 이전에 부여된 관학적 가치를 중심으로 다소 폐쇄적인 상태를 답습하는 상황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었다. 따라서 외부에서의 자극은 지금보다 더 크게 작가들의 창작활동에 영향을 주게 되었을 것이다. 이옥문이 받았던 충격은 이러한 괴리감에 의한 것이었고, 그것은 작가에게 새로운 자극제가 되고 분발의 촉진제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촉발된 창작의 의지는 고향 제주에 대한 애착 및 정서적 교감과 결합하여 이옥문을 제주의 대표적 화가로 남게 만들었던 것이다.

 
창작 의욕은 창작 여건을 충족하면 극대화된다. 작가가 창작의욕을 자극받는 적절한 모티브를 마주하게 되고 그것을 깊숙하게 파고들 수 있는 여건이 충족된다면 좋은 작품은 필연적으로 태어날 수밖에 없다. 마치 세잔이 아버지의 유산에 도움을 받아서 파리의 배타적 미술계를 벗어나 고향에서 작업 공간을 마련하고 안정적인 창작활동을 해나가면서 자신의 신념과 예술세계를 굳건히 해나갈 수 있었던 것처럼, 이옥문도 제주도를 반복적으로 살피고 그 모습과 느낌을 화폭에 담아가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결심으로 수십년간 작업을 해오고 있다. 비록 안정적인 생활기반이 완벽하게 확보되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하루하루 작가는 제주의 도시화되지 않은 자연의 다양한 모습을 눈으로 담고 마음에 새겨 화면에 옮겨놓는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지나온 시간에 대해 그의 고향 제주는 작품의 성장과 작가 의식의 축적으로 답을 하는 것이다.

작가가 자신의 고향을 바라보는 시각은 소박하고 격이 없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예민하면서 독특하다. 작가는 모진 바람과 오랜 시간의 흐름이 일구어 놓아서, 다른 지역에서는 흉내낼 수 없는 제주만의 고유한 질감과 빛깔을 담은 풍경을 찾기 위하여 설레임으로 자신의 주변 곳곳을 돌아다닌다고 말한다. 그가 찾고자 하는 것은 단순한 주변 풍경을 사진에 담듯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고 있는 제주의 자연이 주는 포근함과 정겨움을 눈으로 보는 것을 넘어서서 손끝의 감각을 거쳐 가슴으로 느껴보고 싶은 것이다.

이렇게 이옥문의 제주풍경에는 오랜 시간 숙성된 감정의 서정성이 담겨있으며 그것을 담아내는 형식에 있어서 정규 규격의 캔버스보다 파노라며 형식이나 정방형의 캔버스가 더 많이 사용되는 것이 눈에 띤다. 색채의 표현에 있어서도 화려한 원색의 돌출보다는 흙의 색과 들풀의 색이 묵묵하게 스스로를 드러내는 형식을 채택하고 있다. 그 화폭 안에서는 동일한 장소가 계절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기록되거나 한라산과 성산 일출봉 주변의 이곳저곳과 제주의 특징적인 모습인 오름과 같은 특유의 지형에 대한 연속적인 묘사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초기작 가운데 일부 인물화나 정물화를 제외하면 이문옥의 대부분의 작품들은 풍경화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초기의 정물화에 등장하는 기물들 역시 단순히 화면을 구성하기 위한 모티브의 배치가 아니라 작가의 부모, 그리고 작가 자신이 생활에서 사용하며 이야기를 담아놓은 물건들로 구성되어 있다.

풍경화는 많은 작가들이 즐겨 그려왔으며 특히 미술사에 있어서 19세기 프랑스를 중심으로 하는 인상파 화가들이 즐겨 그린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옥문의 일부 작품에서도 인상파적인 순간의 풍경이 포착되는 것을 읽을 수 있다. 다만 작가의 관심을 끌었던 풍경화는 19세기 프랑스 인상파들이 가지고 있던 빛의 작용에 대한 집중적인 관심이나 파리와 같은 자신들의 활동 공간의 도시화에 대한 아쉬움, 그리고 벨 에포크 시대(Belle  Epoque)의 도시 중산층의 생활 모습을 적극적으로 기록하려는 의도는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에게서는 자신이 익숙하게 보며 살아온 산길과 올레길 밭과 마을 어귀 등의 장소에 대한 기억을 붙잡고 그것들을 화면에 담아내고 다시 그 모습을 화면 밖으로 확장시켜 보다 많은 이야기가 화면으로부터 풀려나오기를 바라는 것 같다. 이런 의미에서 이옥문의 작품 일부에서는 인상파에 선행한 프랑스 작가 쿠르베의 무심한 듯한 고도의 당당함이 드러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캔버스의 규격도 심심치 않게 파노라마 형식을 취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처럼 화가로서의 작가는 한편으로는 제주를 알려주는 이야기꾼이 되어 제주의 특징이 좀 더 심층적으로 발굴되고 기록되어 자신의 고향 특유의 정서가 촘촘하게 관람객들과 공유될 수 있기를 바라는 시각예술 분야의 안내자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제주도는 특히 도시화에 대비되는 자연으로서의 산과 바다 등 풍경화의 주요 모티브를 충분하게 담고 있는 장소이며 생활공간으로서의 자연이 훌륭하게 존재하지만, 그러한 자연의 공간이 일상의 공간인 동시에 관광자원으로서의 자연으로 동원되는 이중적인 역할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그리고 그러한 공간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토박이 작가로서 산과 바다를 화폭에 담는 작업은 좀 더 복잡한 정서적 흐름을 거쳐야하였을 지도 모른다. 따라서 작가는 이러한 자연을 이중적으로 해석하는 과정을 겪어야 했을 것이며 그 과정에서 감각과 정서의 흐름을 따라 자연이 때때로 재해석되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의 과정에서, 마치 텍스트를 쓰고 다시 고쳐 쓰는 소설가나 시인이 한 줄의 글을 붙잡고 반복해서 씨름하듯이, 이옥문도 자신이 살고 있는 공간인 제주의 자연을 그리고 또 다시 그리면서 캔버스 위에서 해석과 재해석을 반복해왔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작품들 속의 한라산, 성산 일출봉과 산방산 등과 같이 모두에게 잘 알려진 대상뿐 아니라 그보다 관람객들에게 덜 알려진 여러 오름들, 그리고 바다와 들판, 그 속에 낮게 앉아 바람과 맞서 싸우지 않겠다고 말하는 듯한 오래된 가옥의 지붕이 돌담 밑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은 그저 평범한 풍경화의 소재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시인과 소설가의 한 문장과 같이 화가로서 고민하며 반복해서 대상을 그려가는 작가의 ‘시각적 문장’이자 끝을 알 수 없는 창작의 과제인 것이 되는 셈이다.

이옥문의 작품이 제주를 방문하는 화가들이나 제주에 거점을 둔 다른 작가들과 차별되는 점은 우선 작품을 제작하는 의도의 순수성과 묘사 대상과 작가 사이에 개입되어 있는 오랜 교감에서 축적된 남모르는 서사적 깊이, 그리고 무엇보다도 재료를 다루는 재주와 표현 기법의 완성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어느 평자가 언급한 것처럼 ‘요령이나 기교 없이 견고하게 쌓아올려 완성된 서정’을 담은 이옥문의 작품이기에 우리는 그의 작품을 통해서 작가의 고향이자 현실적 생활의 터전인 제주에 대한 애정과 깊은 정서의 교감을, 작가처럼 완전하게 느꼈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 일부분이라도 공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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