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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희 / 생명과 아름다움을 담은 작가의 혼(魂)을 본다

하계훈



김은희 | 생명과 아름다움을 담은 작가의 혼(魂)을 본다


하계훈 | 미술평론가


김은희 작가는 우리 나라가 6.25 전쟁의 폐허를 수습하면서 교육을 포함한 사회 전반의 전열을 정비해 나아가던 1958년에 이화여대 미술대학에 진학하였으나 재학중 결혼을 하게 되면서 창작에 대한 열정을 당분간 유보하였었다. (작가는 2002년 뒤늦게 모교에 복교하여 후배 학생들과 함께 학위과정을 마쳤다) 하지만 배우자의 해외근무에 따른 동반 체류를 계기로 외국의 유명 미술관들을 방문하는 기회를 통해 작가의 창작 욕구는 다시 불붙어서 주체할 수 없이 분출되게 된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김은희 작가의 창작 행위는 평범한 일상의 반복처럼 장소와 계절, 그리고 그 밖의 다른 모든 상황에 관계없이 전방위적으로 전개되면서 작가의 창작 생활을 시각적으로 기록하는 도큐먼트이자 작가 김은희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가 되어왔다. 학창시절 스승들의 가르침에 더해서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의 주요 미술관에서 목격한 유명 작가들의 작품들, 그리고 이들이 작가를 부추긴 창작의 열정은 작가가 창작 현장에서 느낀 감성의 응축과 숙성에 더해져 셀 수 없이 많은 작품들을 창작해낸 작가의 에너지의 원천이 되었다. 

작가는 우리 미술사에서 서양화의 선구자적 위치에 있던 김인승, 심형구, 류경채, 김원 등 기라성 같은 작가들로부터 조형 훈련을 받았으며, 특히 작가 김원이 반복해서 강조한, ‘현장성’과 ‘대상에 대한 교감’의 중요성을 충실하게 지켜오면서 작가로서의 예술적 사명감과 정체성을 유지해 나갔다. 작가의 작품들 가운데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풍경화의 경우 현장 사진을 바탕으로 나중에 작업실에서 작업을 하는 일은 자연과의 진정한 교감의 순간을 놓치는 것이라는 스승의 가르침이 작가 활동 내내 김은희의 예술철학으로 굳게 자리잡고 있었다. 따라서 작가의 거의 모든 풍경화 작품들은 대상과 작가 사이의 교감의 순간이 현장에서 기록되어야 했고, 그렇기 때문에 김은희의 작품에서는 현장 제작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던 유럽의 인상파적인 붓놀림의 속도감과 경쾌함이 가식없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젊은 시절 한동안 서울에서 미술 교습소를 운영했던 김은희는 미술 교사들로 구성된 신기회(新紀會) 회원으로서 야외 사생활동에 참여하기도 하고 그룹전에도 참가하였었으며, 유명 정치인을 포함한 아마추어 화가들과 전업작가들이 함께 어울려 활동했던 일요화가회에도 참여하였다. 이러한 회원 활동은 김은희의 작품 성격과 잘 맞는 것이었으며 작가의 창작 역량을 증진시켜주는데 일정 부분 기여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함양된 작가의 창작 역량에 대한 간접적인 평가는 창작 과정에서 작가가 다수의 공모전에서 수상을 하고 국내외의 주요 미술행사에 초대를 받는 기회를 통해 이루어졌다. 

수많은 전시회와 수상 내역 가운데 작가는 가장 인상 깊게 기억하는 전시로 1992년 서울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을 꼽는다. 지금은 재개발로 없어졌지만 신문사에서 운영하던 서울갤러리는 당시 미술계에서 작가라면 누구나 한번쯤 전시를 열고싶어 하는 장소였으며 이곳에서의 전시는 곧 작가로서의 주류에 진입한 것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었으므로 김은희 작가로서도 그러한 기억과 인상을 오래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마도 작가는 이 전시를 통해 작가로서의 자신감을 더욱 더 충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후에도 작가는 일일이 거론하기 어려울 만큼 국내외에서 수많은 전시회에 참여하면서 창작의 열정을 발휘해왔다.

김은희 작가의 긴 창작 활동 기간을 살펴보면, 1960년대의 척박한 미술문화의 환경에서부터 1970년대와 1980년대의 경제성장 및 민주화에 대한 요구 속에 모더니즘과 민중미술의 대립적 구도를 형성하던 시기를 지나 1990년대 이후 개방화와 국제화의 흐름을 모두 목격하면서 작업을 이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와 혼돈, 그리고 진통의 연속선에서도 작가는 시대의 흐름에 휩싸이기보다는 자신의 예술적 신념과 작가로서의 예술적 철학을 흐트러짐 없이 일관되게 유지해 온 점도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회화에 있어서 작가가 화폭에 이미지를 담는 방식은 매우 다양하고 작가에 따라서는 작업 기간이 길어지면서 작업 스타일의 주기적 변화나 주제의 전환을 선택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김은희의 경우에는 자연과 인물 등의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그 시각을 통해 사유하고 대상과 서로 교감하는 방식과 태도를 크게 바꾸지 않는 일관성을 창작생활 내내 지켜왔다.

이제 팔순을 넘은 작가는 국내외의 수많은 예술적 순례지들을 방문하여 창작과 사유를 해온 결과물로서의 회화 작품들 가운데 200점에 가까운 작품들을 작가의 고향인 여수의 대표적 문화재단인 GS칼텍스 예울마루에 기증하여 여수 지역의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하고 후진들의 귀감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전시회를 갖게 되었다. 

작품들 가운데 몇몇 점을 살펴보면 작가의 생각과 미학적 신념의 핵심을 읽을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작가 그려온 작품들은 곧 그 작가가 언제 어디서 어떤 단상과 감흥에 잠겨 있었는가를 잘 알아볼 수 있는, 일종의 여행기이자 일기이며 작가의 시각적 감각의 흐름, 미의식의 전개와 응집을 알아볼 수 있는 개인적 서사의 펼침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한 예로 2000년에 아이리스를 그린 작품 <아이리스의 노래 (합창)>에 대해서 작가는 “나는 살아서 노래하는 생명을 그리고 싶다. 내 그림의 표현은 생명이 꿈틀대는 생명체 표현이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처럼 ‘생명’을 주제로 삼는 작품들은 이후에도 반복해서 등장한다. 

2011년에 제작한 <초대받은 손님(사슴가족)>은 사실적 재현에 바탕을 둔 대부분의 작품들과 다소 결이 다르게 환상적인 요소가 포함된 화면 구성을 보여주며 선묘 표현이 많아서 야수파 활동을 했던 라울 뒤피(Raoul Dufy) 등을 연상시키는데 작가는 이 작품의 제작 동기를 “늦은 밤 운전 중, 사슴의 해맑은 눈과 내 눈이 마주치고, 급브레이크 밟았으나 사슴이 쓰러졌을 때 기억 때문에 미안했고 아팠다. 그래서 나의 집 가든에 초대한 그림 그렸다”며 대상과 나누었던 연민과 정서적 교감의 깊이를 통해 작품이 탄생된 것을 말해주고 있다.

대상을 마주하여 깊이 몰입하며 응시하는 작가에게는 이야기가 들리는가 보다. 작가는 산골의 눈덮인 풍경에서 그 곳에 아들 낳고, 딸 낳고 살아가는 화전민 가족의 이야기를 떠올리고, 설악산 깊은 골짜기에서는 6.25 전쟁 당시 군인들의 전투를 상상하기도 한다. 작가는 한낮의 햇빛 속에서 잠자리의 날갯짓 소리를 듣는가 하면 호텔 창밖으로 바라본 새벽 풍경 속의 나뭇가지에 흰 새가 되어 꿈을 꾸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남한산성에서 본 노목들 사이로는 이곳에서 왕이 거닐던 상상을 이끌어내고, 물가에 핀 나리꽃에는 작가 자신을 그 꽃에 투사하기도 한다. 이러한 작가적 감수성과 상상력이 회화적으로 번역된 작품들이 결국 작가의 삶을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주제를 벗어나 형식적인 면에서 볼 때 김은희의 풍경화의 특징 중 하나는 풍경에 도입되는 햇빛의 효과가 두드러진 것을 들 수 있으며, 특히 백색과 청회색의 양지와 음지의 대비가 확연하게 대비되는 설경에 대해 작가가 관심을 많이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작가는 설경을 화폭에 담기 위하여 설악산, 정선 뿐 아니라 네팔의 히말라야, 유럽의 알프스 등 국내외의 설경 명소를 찾아다니며 현장성을 느낄 수 있게 많은 작품을 제작한 것을 알 수 있다. 햇빛이 비치는 설경에서는 청량함이 넘치는 듯하다. 물론 다른 계절의 꽃과 나무, 계곡의 물과 바위, 그것들이 모여 이루어 내는 자연의 하모니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해서 산과 바다, 들판과 정원들은 작가의 힘찬 붓에 의해 생명을 가득 머금는다.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대한 짧은 설명에서 ‘생명’과 함께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표현 가운데 하나는 ‘아름다움’이다. 예술의 목적 가운데 하나는 아름다움의 표현이며 미술은 시각적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예술 형식인 만큼 그것은 색과 형태를 통해 구현되게 된다. 김은희 작가의 작품을 자세히 응시해보면 이러한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주된 원천이 무엇보다도 작가가 구사하는 색상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작가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세밀히 관찰하지만 적절하게 화면에 구성하여 아름답게 배치된 형태로 표현하고, 그 위에 맑은 자연의 색을 닮은 물감이 때로는 사실적으로 또 때로는 색상대비 효과를 일으키며 형태 위에 적용됨으로써 그림들은 ‘아름다운’ 작품이 되는 것이다.

아프리카를 제외하면 거의 전 세계를 다니며 작품활동의 영감을 흡수하여 온 작가가 이제 고향 여수에서 평생동안 예술적 철학이자 원칙으로서 지켜온, 대상과의 교감과 거기서 우러나오는 예술적 에너지를 고향을 위해 쏟아내려고 새로운 작품을 구상하고 있다고 한다. 1995년 작품 <내 고향 언덕 위에 핀 엉겅퀴>에서 작가는 “내 그림은 나의 혼이 함께한 그림이다”라고 말했다. 팔순을 넘겨 평생동안 그림을 그려온 작가의 말이기에 엄숙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말이다. 우리의 육체와 정신을 다스리는 비물질적이고 초자연적인 에너지인 혼(魂)을 담은 가시적 존재가 곧 작가의 작품들인 것이다.

우리는 여수의 원로 작가 김은희가 고향의로 돌아와 평생의 화업을 정리하는 대작을 어떻게 우리들에게 보여줄 지 몹시 궁금하다. 그리고 그 작품은 아마도 이번 전시에서 보여주는 과거의 작품들에 조금씩 그 힌트를 담아 우리의 기대를 한껏 부풀게 하고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번 전시를 즐기는 관람객들과 함께 김은희 작가의 한평생 창작의 성과를 마주하면서 생명과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동시에 이제 작가가 혼을 담아 제작할 새로운 걸작의 탄생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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