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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그랜드투어(Grand Tour)와 박물관

하계훈

영국 그랜드투어(Grand Tour)와 박물관

1585년부터 1604년까지 진행된 영국과 스페인의 전쟁에서 스페인의 무적함대(Armada)를 물리친 영국은 대서양을 비롯한 전세계의 바닷길을 지배하는 강자로 떠올랐고 나라의 살림도 점점 넉넉해지게 되었다. 결국 영국은 아메리카 대륙과 아시아를 포함하는 전세계 곳곳에 진출하여 식민지를 개척함으로써 시장의 규모를 국내에 한정시키지 않고 국외로 크게 확장시켰다. 한 때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별칭을 얻었었는데, 이 말은 세계 곳곳에 있는 영국의 식민지 어느 곳 하나라도 어느 시점에서 해가 떠 있었다는 의미였다.
18세기 중엽부터는 식민지에서 유입되는 자원과 국내 기술이 결합하여 영국에서 처음으로 산업혁명(Industrial Revolution)이 일어났고, 농업 중심사회에서 제조업 중심 사회로 사회 구조가 전환되게 되었다. 산업자본가와 금융자본가들이 사회의 상층을 형성하면서 영국사회에서는 정치와 경제 뿐 아니라 교육, 문화와 일상생활에서도 패러다임의 변화가 요구되고 있었다.  
이에 앞서서 일찍이 17세기 중반부터 시작하여 18세기 영국에서는 귀족 계급을 비롯한 상류 계층의 자녀들이 다년간의 가정교사와의 교육을 마무리하고 사회로 진출하여 경제활동과 사교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마치 오늘날의 졸업여행처럼) 국제적 교양과 문화체험 등을 위하여 옛 고전문화의 본산지인 그리스와 로마의 도시들을 여행하는 것이 유행하였다. 다만 이 시기에 그리스는 이교도인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식민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여행 위험지역으로 분류되어 실제 여행은 대부분 오늘날의 이탈리아 중요 도시들을 최종 목적지로 삼게 되었다. 
이러한 여행은 몇 가지 루트가 있었는데 주로 영국에서 바다를 건너 프랑스를 거쳐 이탈리아로 가는 루트와 북유럽에서 스위스와 오스트리아를 거쳐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가는 루트, 그리고 영국의 해안에서 배를 타고 지중해로 가는 루트 등이 있었다. 이러한 여행은 교통수단이나 일정 때문에 수개월에서 수년의 기간이 소용되었으며 이에 따르는 비용도 적지 않게 발생하였다. 여행자의 능력에 따라 동반 인원의 수도 다양하였으며 소지품과 운송 수단도 다양하였었다. 이러한 대규모의 여행을 ‘그랜드 투어’라고 불렀으며 처음에는 상류층 자제와 가정교사가 동반하는 체험 여행의 성격으로 시작되었으나 점차 여행 가능 계층이 확대되면서 신혼여행이나 일반 관광 여행으로까지 그 성격이 확대되었다. 나중에는 춤을 배운다든지 유명한 사상가를 만난다는 등의 일종의 테마여행도 기획되었으며 많은 인구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까지 그랜드 투어에 참가하게 되었다.
17세기에는 안전하고 편하게 여행을 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았었기 때문에 소수의 그랜드 투어 여행자들과 특수한 목적을 가진 왕실의 관료나 특사가 이탈리아로 향하였었다. 예를 들어 영국 귀족인 필립 시드니(1554-1586)는 옥스퍼드 대학 졸업을 앞두고 다양한 체험을 위해 파리, 비엔나, 베니스 등을 여행하였고, 영국 왕실 악장 겸 화가였던 니콜라스 라니에(1588-1666)는 찰스 1세의 명령으로 이탈리아로 가서 중요한 미술품을 구입해오기도 하였다. 이 당시 유럽의 선진 학문과 문화는 아직 이탈리아에 무게중심이 있었기 때문에 영국과 같이 멀리 떨어진 나라의 귀족과 학자들은 이탈리아의 선진 문화와 학문을 습득하려고 노력하였으며 이러한 분위기가 그랜드투어로 이어지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영국의 외과 의사 윌리엄 하비(1578-1657)는 캠브리지 대학에서 수학한 후 이탈리아 파두아 대학에 유학하고 돌아와 왕실의 주치의가 되었는데, 그는 이탈리아 유학을 통해 해부학적 지식을 높이고 우리 몸에서 심장의 펌프운동을 통해 혈액이 몸과 두뇌로 순환한다는 사실을 입증하였다. 이러한 하비의 의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영국 정부에서는 1973년 하비의 고향 근처에 그의 이름을 딴 병원을 개원하기도 했다.
영국의 아룬델 백작(1586-1646)은 부인을 동반하고 여러 차례 이탈리아를 여행하여 700점이 넘는 그림과 조각, 그리고 서적, 드로잉, 보석 등 다양한 자료들을 수집하였고 그의 사후에는 이 가운데 상당부분이 지금의 옥스퍼드 애쉬몰 박물관에 기증되었다. 애쉬몰 박물관은 버밍엄 출신 수집가 앨리어스 애쉬몰(1617-92)이 평생 수집한 예술품과 자료들을 옥스퍼드 대학 본부에 기증하여 1683년에 개관한 유럽 최초의 박물관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러한 수집행위는 그랜드투어와 같은 광범위한 여행의 결과로서 이루어졌다. 
아룬델 백작은 이탈리아 여행의 안내자로 유명한 건축가 이니고 존스(1573-1652)를 동반하였다. 이처럼 귀족 자제의 가정교사나 상류층 인사들의 안내자로서 여행에 동반하는 사람들을 cicerone(관광안내원)이라고 불렀는데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영국 철학자 토마스 홉스(1588-1679)나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1723-1790) 등과 같은 사람들도 cicerone의 역할을 하였다.
초창기에 귀족 자제를 동반한 가정교사들은 학부모의 당부로 학생을 엄하게 통제하며 여행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제간의 여행 모습은 마치 중세의 서커스단에서 조련사가 재주부리는 곰을 끌고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여행하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하여 곰을 이끌고 다니는 사람(Bear Leader)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여행자가 많아지고 사제지간의 여행 뿐 아니라 지인을 동반한 여행과 친구들 사이의 여행 등이 많아지면서 일부 젊은 여행자들은 부모의 통제에서 멀리 떨어진 틈을 이용하여 문화적 경험을 쌓기보다는 이탈리아의 향락문화에 빠지는 경우도 적지 않게 발생하였다. 이들은 이탈리아의 패션이나 사교생활 등에 빠졌다 돌아와 영국 사회에서 눈총을 받기도 하였는데 당시 이러한 여행 경험자들을(마치 우리나라에서 조기유학에서 돌아와 무려한 행동을 하던 우리나라 젊은이를 ‘오렌지족’이라고 불렀던 것처럼) 이탈리아의 대표 음식재료인 ‘마카로니(Macaroni)’에 비유하여 별명을 부르기도 하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영국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식품이 이름을 붙인 이들 마카로니족들의 눈에 띠는 행동과 복장은 영국사회의 조롱거리가 되어 풍자 판화가 제작되어 판매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상점을 Macaroni Print Shop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물론 부작용이 있기는 하였지만 영국인들의 이탈리아 그랜드투어는 미술과 음악, 건축 등의 분야에서 사회 상류층들의 지식과 교양을 넓혀주는데 기여하였다. 특히 영국에서는 이 무렵부터 이탈리아를 다녀오거나 다녀온 사람의 영향을 받아 건축 부문에서 신고전주의 양식인 팔라디오양식이 크게 유행하였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영국 증권거래소 건물이나 내셔날갤러리, 테이트브리튼 미술관, 세인트폴 성당 등이 모두 이 양식에 기반을 두고 있다.
콜롬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이후 유럽의 여러 나라 사람들은 배를 타고 멀리 아시아와 아메리카 등으로 항해를 하면서 값지고 신기한 물건들을 수집하여 개인의 콜렉션을 형성하기도 했다. 이러한 수집의 욕구는 왕에서부터 귀족과 학자나 대상인까지 각자의 능력에 따라 수집의 규모를 달리하면서 자신의 권력과 교양을 드러내는 지표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콜렉션들은 항해와 연관된 도시들과 왕이나 대공들이 머무는 도시를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영국의 그랜드 투어 여행자들은 이탈리아를 향해 떠나는 과정에서 이러한 도시를 거쳐갔는데 그들의 단골 목적지로는 프랑스 뿐 아니라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 등도 포함되었다. 그랜드투어 여행자들은 온천이나 유명 관광지를 거쳐가기도 했으며 그 도시의 유명한 사상가나 정치인 등과 만나기 위해 여행의 루트를 조정하기도 했다.
프랑스의 유명한 계몽철학자 볼테르가 말년을 보낸 프랑스 국경 너머 오스트리아의 서부 마을은 세계적인 사상가를 만나기 위해 여행 일정을 조절한 사람들에 의해 중요한 그랜드투어의 코스로 자리 잡기도 하였으며, 유럽 귀족들의 사교 무대에서 왈츠가 유행하게 됨으로써 오스트리아로 왈츠를 배우는 코스가 한때는 그랜드 투어의 중요 요소가 되기도 하였다. 
그랜드 투어는 영국을 포함한 북유럽 상류층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상과 생각을 접하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였으며, 결과적으로는 오늘날의 유럽연합이 지향하는 가치와 마찬가지로 유럽 여러 나라의 문화에 통일성을 부여하는데 기여하였다. 
대부분의 그랜드투어 여행자들의 최종 목적지인 이탈리아의 로마에는 영국을 비롯한 북유럽의 여행자들로 붐비게 되었다. 이들 여행자들은 로마 시내와 외곽에 있는 고대 로마시대의 중요 유적지 등을 방문하여 저마다의 방법으로 여행의 기쁨을 즐겼다. 문학에 재능이 있는 사람은 여행기와 시 등을 남겼으며 화가들은 간략한 풍경 스케치로 자신의 여행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인물들이 이러한 여행과 연관된 에피소드를 많이 남겼는데, 예를 들어 프랑켄슈타인으로 유명한 저자 메리 셸리(1797-1851)는 시인인 남편 셸리와의 이탈리아 여행 도중에 프랑켄슈타인 스토리를 구상하여 소설로 발표하였다. 우리에게 간호사의 상징으로 잘 알려진 플로렌스 나이팅게일(1820-1910)은 그녀의 부모가 이탈리아 여행 도중에 이탈리아 중부 도시 피렌체의 영어 이름인 플로렌스에서 딸을 낳자 그 도시의 이름을 따라서 아기의 이름을 지어준 것이다.
우리가 유명 여행지에서 셀카를 찍는 것처럼 그랜드투어 여행자들은 현지에서 만난 화가들에게 자신들의 초상화를 부탁하면서 배경에 자신들이 다녀온 주요 장소를 넣어주기를 주문하기도 하고, 그곳의 유명 화가들이나 조각가들의 작품들을 구매하기도 하였다. 좀 더 재력이 있는 여행자들은 고대 유적지에서 발굴된 양질의 골동품들을 구입하여 자신들의 고향으로 가져가 개인 컬렉션을 구성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자신이 다녀온 도시의 인상적인 모습을 오래 기억하고 싶어서 화가들에게 풍경화를 주문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비용을 감당하기 힘든 여행자들은 그림 대신 유명 관광지의 풍경을 담은 판화를 구입하여 고향으로 가져가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탈리아의 로마와 피렌체, 베니스 등은 북유럽의 그랜드투어 여행자들을 상대로 그림을 그려주거나 숙소를 제공해주고 관광 안내를 해주는 등의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일부 화가들 중에서는 그랜드투어 여행자들을 따라 여행하며 그림을 그려 파는 작가들도 있었다.
고향으로 가져간 이러한 작품과 유물들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적지 않은 관심을 받았다. 이러한 관심은 또 다른 그랜드투어 여행자를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몸소 여행을 다녀오기 어려운 사람들은 남을 시켜 대신 여행하여 자신이 원하는 물건을 가져오거나 필요한 정보를 얻어오도록 주문하기도 하였다. 영국 왕실 소장으로 현재 윈저성에 보관되어 있는 그림 <우피치의 트리뷰나>는 독일 출신으로 영국에서 주로 활동한 화가 요한 조파니가 영국왕 조지 3세의 부인인 샤롯데 왕비로부터 거금 300파운드를 받고 주문받아 우피치 미술관 소장의 명작품들을 그린 그림이다. 당시 조지 3세 부부는 몸소 이탈리아를 방문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탈리아의 그랜드투어 여행자가 전해준 이야기로부터 생겨난 궁금증을 이렇게 해결하려 하였다.
이 그림은 당시의 우피치 미술관을 사실적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우피치 미술관이 소장한 작품 가운데 우수한 작품이라고 생각되는 작품들을 한데 모아둔 형식으로 화면을 꾸몄다. 그림들을 감상하는 화면 속의 인물들 가운데 여러 사람이 영국에서 피렌체를 방문하거나 그랜드투어의 결과로 이탈리아에 정착한 영국인들임을 확인할 수 있다. 작품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림 속에 우피치 미술관의 대표작들이 동원되어 있음을 알 수 있고 가운데 홀에 배치된 조각 작품들의 경우에는 현재에도 거의 변화가 없이 미술관 현장에 배치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 속의 8각형의 공간과 천정은 나중에 영국의 버킹검 궁전에 있는 8각형의 도서관에서 비슷하게 재현되기도 하였다.
18세기 이탈리아 화가 가운데 베니스 출신의 지오반니 안토니오 카날레토(1697-1768)는 특히 영국 그랜드투어 여행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당시 영국 영사로 베니스에 파견된 조셉 스미스는 무역과 금융업으로 부를 획득한 배경으로 카날레토의 작품들을 집중 매입하여 런던에서 화상으로 활동하기도 하였으며 조지 3세에게 카날레토의 작품을 판매하기도 하였다. 스미스는 1746년 카날레토를 런던으로 초청하여 템즈강 풍경을 그릴 기회를 만들어주기도 하였다.
이탈리아 예술품과 고대 그리스 로마의 유물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18세기 영국 상류층들에게 널리 퍼져 있었다. 그 가운데 대형 컬렉터인 찰스 타운리(1737-1805)경과 같은 사람은 3차례의 그랜드투어를 다녀오면서 고대 조각품과 동전, 서류 등을 대량으로 수집하여 자신의 컬렉션을 유지하다가 그가 사망하자 유족에 의해 300 여점이 자신이 1791년부터 이사로 재임하였던 대영박물관에 매각되었다. 현재 대영박물관의 그리스 로마 조각실의 대부분의 작품들은 타운리의 수집품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박물관측은 이 소장품들을 일명 ‘타운리 대리석조각(Townley Marbles)’이라고 부른다. 
타운리의 소장품이 매입된 대영박물관은 의사이며 컬렉터였던 한스 슬론(1660-1753)이 자신이 평생 수집한 자료들을 국가에 기증하면서 개관하게 되었다. 슬론경이 자신의 소장품들을 국가에 (기증에 가깝게) 헐값으로 매각하기로 하자 정부에서는 의회의 승인을 거쳐 1758년 대영박물관을 개관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소장품을 전시할 공간과 제반 비용을 확보하기 위하여 복권을 발행하였다. 지금의 대영박물관은 19세기 중반에 개축한 것이며, 처음에 대영박물관이 있었던 자리는 지금의 남쪽 일부분으로서 몬태규 백작의 저택을 구입하여 첫 박물관 건물로 사용하였다가 그것을 허물고 다시 지었기 때문에 그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 다만 현재의 대영박물관을 바라보고 오른편 담장을 끼고 펼쳐진 도로명이 몬태규로(Montague Street)로 남아있어서 그 흔적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일단 박물관이 설립되자 영국 정부와 왕실에서 보관하고 있던 자료와 서적들이 대영박물관으로 이관되었으며 점차 기증자가 늘어나서 결국 보다 넓은 공간이 필요해졌으며, 인류학적 자료들은 지금의 박물관 남동쪽에 따로 인류학박물관을 만들어 분리하게 되었다. 현재 대영박물관의 주요 소장품 가운데에는 유명한 로제타석(Rosetta Stone)과 그리스 아테네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의 박공(pediment)과 메토프에서 떼어 간 일명 엘긴 대리석 조각(Elgin Marbles) 등이 있다.
로제타석은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1799년 북아프리카 이집트를 침략하여 나일강 하구의 로제타라는 작은 도시를 장악하고 있을 때 그의 부하가 발견한 비석의 일부로서 비석에는 이집트 상형문자와 그리스 문자, 그리고 민중문자라는 3개의 언어로 기록된 고대 이집트 프톨레미 5세 왕의 업적에 관한 내용이 적혀있다. 이 비석은 적혀진 문자 가운데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 것으로 유명하다. 흥미롭게도 프랑스 군대가 발견한 비석은 영국군에 의해 압수되어 현재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비석의 내용을 해독한 사람은 프랑스 언어학자 샹폴리옹으로 알려져 있다. 프랑스 군대는 이 비석을 영국군에게 빼앗기기 전에 탁본을 해놓았으며, 이 자료를 바탕으로 프랑스 학자 샹폴리옹이 연구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엘긴마블은 그리스가 터키(오스만 투르크)의 식민 지배를 받는 시기에 터키 주재 영국 영사였던 엘긴경이 터키의 술탄에게 허가를 얻어 영국으로 반출한 조각 작품들이다. 엘긴경은 조각들을 자신의 저택에 보관하다가 1816년 영국정부에 매각하여 지금의 대영박물관에 소장되게 된 작품들로서 현재까지도 영국과 터키 사이에 반환 문제로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유물이다. 그리스의 배우이자 가수이며 나중에 문화부 장관까지 역임한 멜리나 메르쿠리(1920-1994)는 평생 이 엘긴마블을 그리스로 반환하는 작업에 헌신하였으며 그녀가 사망한 후 남편은 그녀의 이름을 딴 메르쿠리 재단을 설립하여 반환 운동을 지속하고 있다.
지금까지 간략하게 살펴본 것처럼 유럽에서, 특히 영국에서 시작한 그랜드투어라는 장기간의 체험 여행은 유럽인들 사이에서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키우게 만들었으며, 개인 뿐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도 문화적 경쟁력을 키우기 위한 기구로서의 박물관을 설립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영국의 많은 박물관들은 이러한 그랜드투어의 결과물로서 세워진 경우가 많다. 흥미로운 것은 영국에서 대부분의 경우 박물관의 설립이 국가 주도로 이루어지기보다는 개인이나 단체로부터 시작하여 국가에 기증되거나 재단을 만들어 박물관이나 미술관이 운영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오늘날 영국의 대부분의 공공 박물관들이 무료입장 정책을 유지하는 것과도 부분적으로 관련이 있다. 영국 정부는 재정적인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박물관이라는 문화시설을 대중적으로 보급하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유료입장 정책을 검토해보기도 하였지만 그때마다 정부의 소극적인 개입의 역사가 정부의 입장을 위축시켜왔다.
이런 가운데에도 사회적으로 상층에 위치하여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수집품들을 국가에 내어놓음으로써 문화자원이 공공화되는 과정이 지속적으로 진행되어 왔다. 현재 영국은 런던을 중심으로 국제적 수준의 박물관과 미술관들이 적지 않게 포진되어 있으며 그 안에서 제공되는 문화 컨텐츠는 영국 국민들 뿐 아니라 런던을 찾는 국제적인 관람객들에게 양질의 정보와 교양을 제공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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