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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한 손노동으로 이루어내는 인온(絪縕)의 심상

하계훈

성실한 손노동으로 이루어내는 인온(絪縕)의 심상 

하계훈(미술평론가)

오랜 창작 기간을 통하여 추상과 조형의 근원을 사유하고 재료에 대한 실험을 이어 온 박필현이 이번에는 아교가 배합된 호분과 물을 적절히 섞어 장지 위에 쌓아가는 작업으로부터 창작의 단초를 이끌어낸다. 이러한 작업은 작가와 화면 사이의 관계 설정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출발점을 형성한다. 보통의 경우 작가가 작업을 시작하는 화면은 중심 모티브를 위한 배경으로 설정되어 간단한 밑칠을 한 뒤 그 위에 드로잉이 시작되거나, 아니면 드로잉이 생략된 상태에서 직접적으로 이미지의 전개가 이루어지는데 비하여 박필현은 작가로서 자신이 마주하는 출발점으로서의 화면에 좀 더 깊이 있게 다가서는 자세로부터 창작의 과정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렇게 시작되는 작가의 창작의 프로세스에는 사유가 선행하고, 이어서 작업에 착수하면서 화면에 호분을 여러 겹 올리는 반복적 행위가 수행된다. 작가는 이러한 반복 행위를 ‘쌓아가는’ 행위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호분과 물을 매체로 쌓아가는 행위를 통해 화면 속에서는 점점 사라지고 흐려져 없어지는 과정이 이루어지면서도 다시 이것은 새롭게 생성되는 과정으로 이어지는 것을 발견하였다. 
작가가 화면에 물감을 쌓아가는 반복적 작업은 육체적 노동에 그치지 않고 작가의 창작에 수반되는 영감이나 정신적 자세와 방향성을 형성하는데 적지 않게 도움을 준다. 반복은 확신에 대한 접근이며 완성에 대한 지향이다. 그리고 그러한 반복은 주체의 정신을 집중시켜주며 스스로의 기운과 에너지를 발생시키도록 도움을 주기도 한다. 몇몇 종교 의식에서 반복적인 행위와 구호가 의식의 도입부에 배치되는 것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해보면 좀 더 쉽게 설명될 수 있다. 
이처럼 박필현의 작업의 출발은 반복이라는 작업을 통해 서서히 드러나는 모티브에 대한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응시이자 사유다. 작가는 반복을 통해 마음속의 이미지를 구체화해 나아가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심상, 즉 사유와 감성의 실체를 좀 더 자신의 공간으로 다가오게 만들어낸다. 중국 출신의 유명한 화가 자우키(Zao-Wou ki)의 작품 안에서 프랑스의 미술평론가 이브 미쇼는 공간(화면)을 응시하였다. 이 공간은 물리적 화면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는 상상적인 심상으로서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 결과 공간은 곧 정적(silence)이며 거기에 작가의 붓이 개입하는 것을 이브 미쇼는 마치 잔잔한 연못에 작은 충격이 동심원의 파장을 일으키는 것에 비유한 적이 있다.
박필현 역시 호분으로 쌓아 올린 화면을 통해 고요한 상태(공간)로 진입하면서 거기에 작가의 붓을 개입시킴으로써 모종의 파동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 순간 작가는 스스로의 내면을 응시하면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내려는 시도를 한다. 다만 박필현의 경우에는 장지의 특성을 살려 한편으로 물감을 쌓으면서도 동시에 스며드는 복합적인 공간을 창출해냄으로써 좀 더 중층적이고 사유적인 에너지를 창작 행위에 담아낸다. 
기법적인 면에서 박필현이 자신의 화면에 추가하는 것은 호분이 겹겹이 발라진 화면에 붓끝에서 비산되는 물방울을 내려앉게 함으로써 화면의 시각적 텍스처를 보다 풍부하게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최종적으로 형성된 작가의 화면은 형식면에서는 치밀하고 내용면에서는 명상을 유도하며 고요함을 지향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작가는 화면의 개별적 이미지와 분위기를 넘어서는 내적 응시의 상태에 다다르게 되는 것이다.
이번에 출품된 작품들은 첫인상에 있어서 우리의 시선이 안개 낀 공간을 돌아다니면서 실루엣처럼 다가오는 나무의 형상을 마주치며 호흡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마치 짙게 드리운 안개처럼 서서히 퍼져가는 공기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은 마치 미지의 장소에서 모종의 영적(靈的) 조우를 기대하는 듯한 긴장감과 설렘을 불러일으켜준다.   
하지만 다음 단계에서 작품에 한 발 더 다가가면 박필현의 화면은 앞에서 관람자들이 가졌던 시각적 경험을 무효화시키면서 이미지의 형태를 읽어내기 어려운 추상적인 화면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그 화면에는 작가가 시도한 물감 층의 축적과 시간의 경과, 그리고 작가가 공들여 시도한 물방울이 화면에 내려앉으면서 형성된 흔적들이 어우러져 관람자들을 관조와 사유의 장으로 인도한다.
박필현의 이번 작품들은 작가가 지금까지 천착해온 재료와 형식에 대한 탐구의 연장선상에서 아교와 호분이 만들어내는 소멸과 형성이라는 조형성과, 그러한 화면을 통해 창출되는 심상과 정신, 그리고 그것을 관조하며 자신의 내면을 명상하는 장을 펼쳐준다는 의미에서 작가의 창작 과정 가운데 성숙하고 깊이 있는 단계로의 진입을 읽을 수 있는 기회로 생각된다. 형식적인 면에서 작가로서의 성실한 손노동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 주제면에 있어서 작가의 노트에서 발견되는, 하늘과 땅의 기운, 혹은 음과 양의 기운이 흩어지지 않고  한군데 서리어 있는 상태를 말해주는 ‘인온(絪縕)’이 작품을 통해 느껴질 수 있다면 박필현의 작품은 이번 기회를 통해서 다시 한 단계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한 작품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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