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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냄새가 나는 풍경

하계훈

바다 냄새가 나는 풍경

하계훈(미술평론가)

홍재호는 전업 작가로서의 활동을 주로 강릉 지역에서 수행해 왔던 작가다. 미술대학을 졸업한 뒤 잠간 동안의 제약회사 외판사원, 몇 년간의 미술교사 등의 이력을 거쳐 오다가 본격적으로 전업 작가의 길에 들어선 이후 홍재호가 주된 관심을 집중 대상은 바다였다. 그리고 홍재호의 바다는 동해가 굽어보이는 강릉에 있었다. 강릉에 터를 잡은 홍재호의 활동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그림을 그리는 일과 어렸을 때부터 수련해 온 검도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홍재호의 바다 풍경은 현장에서 느낀 인상을 최대한 생생하게 담아내기 위하여 빠른 시간 안에 그려진다. 따라서 붓의 움직임은 그만큼 바빠질 수밖에 없다. 19세기 후반 프랑스 파리에서 일어난 인상주의 운동에 참가한 작가들처럼 홍재호는 순간의 인상(impression)을 최대한으로 포착하기 위하여 현장 작업방식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홍재호의 작품을 전적으로 인상주의 양식이라고 볼 수는 없는데, 그 까닭은 홍재호 작가의 관심이 인상주의 작가들과 달리 햇빛이 자연의 대상에 작용하여 생성되는 이미지에 관심을 집중한 것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홍재호의 바다 풍경은 맑고 화창한 날보다는 바람 불고 파도와 구름이 몰려오는 듯한 날의 풍경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러한 날씨이기에 그의 작품 속에서는 바람 소리와 파도가 바위에 부서지는 소리가 나는 듯하다. 시각을 통해 감상하는 그림에서 다른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작가의 능력은 찬사를 받을 자격이 있다.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주로 연구하면서 미술사학자 겸 평론가로 활동하던 존 리워드(John Rewald)는 산업화와 도시화의 현장인 파리를 벗어나 외곽의 농촌 풍경을 평생 동안 그리면서 사실상 인상파 운동을 일관되게 지켜온 카미유 피사로의 작품에서 “흙의 냄새가 난다”는 칭찬의 말을 한 적이 있다. 필자는 이런 의미에서 홍재호의 그림에서는 바다의 냄새가 난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 냄새는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와 바람 소리를 타고 전해진다.

홍재호의 작품이 정적이기보다는 움직임과 소리, 냄새가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작가의 현란한 붓놀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어느 기자는 이러한 홍재호의 붓놀림과 검도 8단의 작가를 연관시켜서 검을 쥔 빠른 손과 눈이 그림을 그릴 때에도 붓을 잡은 민첩한 손과 눈으로 드러난다고 보기도 한다. 아마도 충분한 관찰이 이루어진 후의 빠른 붓놀림이겠지만 즉흥성이 느껴지는 그의 붓놀림은 모든 사물이 깨어나게 한다. 

미술사에서 속필(速筆)의 화가로 우리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작가는 라울 뒤피(Raoul Dufy)와 모리스 드 블라밍크(Maurice de Vlaminck)일 것이다. 거의 비슷한 나이였던 두 작가는 음악적 즉흥성과 자유분방하면서 강렬한 붓놀림을 특징으로 하여 20세기 초 서양미술의 중요한 사조를 이끌었었다. 필자가 홍재호의 작품에서 이러한 작가들을 떠올리는 것은 양쪽 사이의 아무런 연결성이 없으면서도 작품에 있어서 유사성이 발견된다는 흥미로운 현상 때문이다. 홍재호는 이 두 작가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속성이 복합적으로 드러나는 것 같다. 

바다 풍경 다음으로 홍재호가 관심을 가진 대상은 산과 들의 풍경이다. 그리고 이러한 작품들에서도 홍재호 작가의 붓의 속도와 대상의 과감한 묘사는 계속된다. 홍재호의 그림 속에서는 해안에 정박한 배들과 먼 산의 모습, 그리고 그 산 속 계곡의 시냇물을 유도하는 바윗돌과 주변의 나무들까지 정지 상태를 허락받지 못하는 듯하다. 

그런데 이제까지 강조되어 왔던 운동성과는 대조적으로 홍재호의 작품을 한걸음 떨어져 바라보면 역설적이게도 안정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조금 멀리서 볼 때 느껴지는 이러한 안정과 조화는 아마도 작가가 구사하는 화면 속의 색채의 밸런스에서 오는 것일 것이다. 청색과 황색 혹은 녹색과 황색 계열의 색들이 적절한 조화와 대조를 이루는 화면은 바다 풍경뿐 아니라 산과 들의 풍경에서도 지배적으로 드러난다. 여기에 하나 더 붙이자면 홍재호의 풍경 화면이 운동감과 흥분감을 주기도 하지만 커다란 틀에서 바라보았을 때 구도 면에서 지극히 안정적인 구도를 유지한다는 점이 또 다른 작품의 속성을 드러내는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작가들 중에는 자신의 신념과 정서를 적극적으로 화면에 반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를 억제하면서 화가로서의 조형 어법의 테두리 안에서 조심스럽게 자신을 드러내는 작가가 있다. 홍재호의 경우에는 이 두 가지가 동시에 드러나는데, 아마도 작가는 관람객과의 만남에서 자신을 속필(速筆)의 화가로 소개하고 나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균형 잡힌 감각과 사유의 화기임을 전달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격한 운동감과 균형이나 침잠으로 읽을 수 있는 홍재호의 작품은 그가 그림과 함께 몰입하였던 검도 운동의 영향은 아닐까 생각해보도록 우리를 유혹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홍재호는 자신의 창작의 한 순간에 수행하던 검도 운동 도중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남으로써 이러한 해석을 우리의 자율에 맡기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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