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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순 기증 특별전에 부쳐

하계훈

장성순 기증 특별전에 부쳐

하계훈(미술평론가)

우리가 역사를 다시 살피다 보면 이전에 미처 관심 갖지 못했던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서 뒤늦게 조명을 하거나 이전과 다른 해석을 새롭게 가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필자는 우리 미술에 관심을 갖고 오랜 시간 동안 글을 쓰고 연구해왔지만 경기도 안산의 단원미술관에서 열린 장성순의 전시를 보고 새로운 발견을 했다. 뒤늦게 장성순에 대해 자료를 조사해보니 그는 일찍이 1957년 <현대미술가협회>와 1962년 <악뛰엘 그룹>의 창립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시대를 앞서가는 추상미술 작가들 가운데 하나로 족적을 남겼으나 무슨 이유에선지 그의 활동성과에 대한 적절한 조명과 관심을 받지 못하고 최근까지에 이르렀던 것 같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91세의 나이에 이르러서 이제는 실제적인 창작 활동을 중단한 상태이긴 하지만 필자는 단원미술관에서 장성순의 전시를 개최하는 시점을 계기로 작가의 작품에 대한 좀 더 깊은 관찰과 해석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장성순의 작가로서의 이력이나 활동 기간으로 볼 때 우리 미술사의 맥락 속에서 지금까지 받아놨던 관심과 평가를 넘어서는 조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장성순에 대한 학문적 연구나 평론가들의 평가는 이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기존의 연구에서 학자들과 평론가들은 장성순이 작업의 초기부터 일관되게 추상작품을 고수하여 나아감으로써 전통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고자 하는 의지를 시각화한다든지 이성과 논리보다는 직관과 감각에서 출발하여 순수 추상의 결정체에 도달한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장성순에 앞서서 추상 작품을 시도한 작가들이 있기는 하였지만 6.25전쟁 이후 자신들의 경험과 사회적 변동의 에너지를 보다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첫 세대가 바로 장성순과 그의 동료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장성순이 참여한 <현대미술가협회>의 창립전 서문에서는 참여작가들이 당대의 조형이 과거와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가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음을 읽을 수 있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은 아니지만 이러한 맥락에서 1961년 파리 비엔날레에 장성순이 출품했던 작품 가운데 하나인 <0의 지대>는 0이라는 숫자로 상징되는 전통 의존의 탈피의지를 읽을 수 있는 작품으로 평가되며 이러한 작품들은 미술평론가 유재길에 의해서는 '정신적 자유'를 추구하는 행위로, 그리고 원로 미술사학자 이경성에 의해서는 ‘청년의 용기의 소산’으로도 해석되기도 하였다. 
장성순은 일관되게 추상적 표현을 유지하면서 두 가지 관심사를 작품 속에 담아왔다고 할 수 있다. 그중 하나는 질료적 관심에서 시도하는 콜라주나 스크래치 기법 등의 회화 표면의 표정에 관심을 집중하는 시도이며, 또 다른 하나는 표현 형식에 있어서 추상표현주의 혹은 앵포르멜 미술을 연상시키는 창작 행위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두 가지 창작의 축은 한 쪽에 대한 관심이 다른 한 쪽에 대한 관심보다 많아지다가 다시 그 반대로 전환되면서 시계추처럼 교차하여 장성순의 작품 속에 반영되어 오다가 창작의 후반부에는 두 가지 요소가 한 화면 안에서 병렬식으로 결합되고 가독성이 어려운 문자를 통해 추가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듯한 시도가 가미되는 종합적 화면으로 완결되는 성과를 낳는다. 
이번 전시는 시대순으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번 전시에서 장성순의 1960년대 이전의 초기작들은 소개되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몇 가지로 설명될 수 있겠으나 대체적으로 우리나라 초기 미술활동과 작가들에 대한 자료는 체계적으로 보존되어 있지 않아서 부족한 자료를 가지고 작가의 작품과 미학적 태도를 분석하려 시도할 경우 정확한 해석이나 더 나아가 진위 검증이 어려운 상황에까지 처하는 일이 많다. 그런 의미에서도 이번 전시작의 스펙트럼을 1970년대로부터 작가가 사실상 작업을 종료한 2011년에 이르기까지로 설정한 것은 장성순의 반세기에 가까운 예술세계를 좀 더 집약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시도였다고 생각된다.
장성순이 반세기 가까이 추구해 온 추상의 궤적을 살펴보면 그의 작품에 일관되게 흐르는 서예적 전통을 읽을 수 있으며 황색과 청색 계열의 색채를 중심으로 그 색들의 혼합과 응용이 작품의 기저에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장성순의 경우 청년시절까지 아직 서구의 문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되지 않고 서예의 전통이 학습과 자아형성의 중요한 과정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작품에 서예적 기법을 도입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書)와 화(畵)가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고, 특히 서구의 경우와 달리 문학과 시각예술의 표현수단이 분리되지 않은 서예를 통해 서화 훈련을 받은 세대가 추상미술이라는 서구적 조형어법을 수용함에 있어서 가장 잔솔하게 자신을 표현하기 위하여 동원하는 방법으로서의 서예적 표현은 가장 자연스러우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장성순의 작품에서 읽을 수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표현성에 있어서 화면의 표정과 질감을 다양하게 추구해왔다는 점이다. 1976년작 두 점은 캔버스 위에 거즈(gauze)의 느낌이 나는 직물을 부착하고 단색 계열의 채색을 가한 화면을 구성하는 작품들인데 이러한 작품에서는 작가가 물성에 대한 탐구에 집중한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시기적으로 1967년 이탈리아의 첼란트(Germano Celant)가 시작한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의 활동을 장성순이 직,간접적으로 접한 것은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볼 수도 있다. 다만 장성순이 아르테 포베라에서 천명하는 사회적 급진성에 공감한다고 볼 직접적인 언급이 없어서 작가의 작품과 아르테 포베라의 연관성을 추적한다면 그것은 형식상의 유사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거나 그 시대를 살아가던 작가로서 물적 결핍이라는 상황이 공유되거나 전통에 대한 종속성을 거부하는 태도가 공유되는 면을 고려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아르테 포베라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언급한 기록은 없는 반면에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장성순은 안토니오 타피에스(Antonio Tapies)와 피에르 술라주(Pierre Soulage)에 대한 관심을 명시적으로 밝힌 바가 있다. 타피에스가 비이성적이고 충동적 표현을 근간으로 하여 새로운 도구와 물질들로 부터 형태를 찾아내고자 하는 실험에 몰두한 것을 보면 장성순의 작품과 접점을 이루는 지점이 발견되기도 하며, 술라주의 경우는 주로 검은색 붓자국이 지배하는 작품을 제작함으로써 의미를 전달하기보다는 회면에 도입된 재료의 흔적과 진동을 통해 공간과의 관계를 이루고 그로부터 울려나오는 리듬을 표현하려 했다는 점에서 장성순의 작품과 직접적으로 연관성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이 두 작가들은 앞에서 언급한 장성순의 두 가지 관심사라고 할 수 있는 물성과 행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가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장성순은 화폭의 표면 질감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한 흔적이 엿보인다. 그의 화면에는 직물이 부착되기도 하지만 채색된 회면을 긁어내서 바탕의 모습이 드러나면서 새로운 표정을 읽을 수 있게 해주는 작품들도 찾아볼 수 있다. 1976년도 작품들과 1987년도 작품들에서 보이는 이러한 제작기법들은 서양미술사에서 이미 피카소와 그 동료 입체파 작가들이 시도한 바 있으며 초현실주의 작가들도 그들을 이어받아 즐겨 시용하기는 하였지만 장성순의 경우에는 입체파 화가들이 관심을 가졌던 공간의 분석과 다시 분석된 공간을 종합하는 의미에서의 콜라쥬나 스크래치 기법보다는 작가 스스로가 언급한 적이 있는 것처럼 대상에 대한 관찰로부터 떠오르는 생각의 내면화를 이루어가는 작가 자신의 고유한 조형 방법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작품의 표정과 함께 표면의 질감과 물성에 대한 관심은 1990년대의 작품들에서도 상당부분 발견된다. 장성순은 어린 시절 중이염을 앓고 난 후 왼쪽 귀의 청력을 잃어버림으로써 청각을 대체할 시각이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려는 태도가 자라난 것과 이 무렵 돌의 질감과 표정에 각별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였다. 따라서 화면의 질감에 대한 관심은 작가의 이러한 개인적 이력과 연관되어 해석될 수 있으며 이제까지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이점을 강조한 바가 있다. 작가는 돌의 표면 질감에서 물성에 대한 감성적 공감을 느끼는 데 그치지 않고 돌 표면의 표정에서 서예의 획과 유사한 이미지를 발견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점은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포인트를 형성한다고 볼 수 있으며 장성순의 작품과 추상표현주의나 앵포르멜 등의 작품들이 유사성의 수준에서 동시적인 표현으로 보아야할 지 아니면 상호 영향관계를 살펴야 할지를 좀 더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성을 제기해준다. 1950년대 말 작가가 서울에 있는 미국문화원에서 타피에스나 술라주의 화집을 발견하였다고 하지만 당시의 인쇄 상태나 편집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 수 없고, 1993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작가의 회고전을 계기로 인터뷰를 했던 술라주 자신도 자신의 작품과 서예와의 연관성을 부정하는 인터뷰를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장성순의 작품들은 작가의 작품 주기로 볼 때 한 차원 도약을 위해 필요한 새로운 방향을 다방면으로 모색해가던 시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장성순이 이 기간 동안 두 차례의 개인전을 갖는데 그쳤다는 사실로도 간접적으로 뒷받침될 수도 있을 것이다. 1990년대는 정치적으로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 등의 변동이 시작되었으며, 이어서 각종 비엔날레의 출범, 미술시장의 활기 등이 전개되던 시기였다. 그러나 국내 미술계에서는 소위 민중미술 계열과 모더니즘 계열의 대립이 마무리 되어가면서 새로운 방향성을 모색하는 시기를 거쳐 ‘세계화’라는 모호한 개념을 쫓아서 정부가 앞장서서 문화예술을 지휘해 나아가던 시기였고, 국제적인 미술계에서는 영국의 yBA나 미국과 일본의 팝 아트가 주류를 이루며 미술계와 시장을 이끌어가던 시기였던 만큼 장성순의 추상 작품과 같은 양식의 작품들은 (물론 장성순이 원하는 바도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미술계의 전면에 나아가 자리를 잡을 정황이라고 보기 어려운 시기였다. 
1990년대 작품에서 장성순은 기존의 표현과 더불어 전통 서예에서의 갈필(渴筆)의 느낌과 그로부터 나타나는 비백(飛白)의 효과나 그라피티적인 긁어내기 효과, 드리핑 기법, 그리고 서양미술에서 초현실주의 작가들이 도입했던 프로타주 기법을 떠올리는 표현 등으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음이 발견된다. 장성순이 표현 기법의 다양성을 모색하였다는 것은 그가 2003년 인터뷰에서 밝힌 적이 있는 것처럼 작가 활동 초기에 화면에 테레핀 기름을 뿌리고 불을 붙여 그을음을 만들었었다고 이야기 한 것이나 1980년대에 한지를 화면에 붙이는 방식으로 작업해 온 사실 등을 볼 때 창작의 초기부터 이러한 관심이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이와 함께 색채에 있어서도 이전의 시기보다 다양성을 확보하고자 하였으며 시각적으로 화면의 분할과 프레임 속에 다시 작은 프레임을 구획하는 등의 시도를 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러한 화면의 분할과 구획은 비슷한 시기에 미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데이빗 샐리(David Salle)와 같은 신표현주의 작가들이 즐겨 사용하던 대표적인 방법들 가운데 하나인 점도 살펴보아야 한다. 다만 이들의 작품들은 오히려 이전의 추상에 대한 반작용에서 시작된 것인 만큼 기본적으로 반추상적이라는 점에서 장성순의 추상 작품들과의 공통점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며 무엇보다도 양자간의 직접적인 교류나 접촉이 확인되지는 않고 있다.
1990년대가 장성순에게 다양한 모색과 실험의 시기였다면 이 시기를 지나온 작가의 작품에서는 이러한 실험들이 종합되는 시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000년 이후의 작품들의 특징을 한마디로 정리할 수는 없지만 장성순의 2000년 이후의 작품에서는 이전의 작품보다 활동적인 에너지의 분출이 많아지고 색채가 정리되면서도 그러한 역동성이 화면 밖으로까지 확산할 듯한 격렬함을 자제시키는 통제력도 동시에 드러난다. 2002년도의 작품들에서 보는 것처럼 이 시기의 작품에서도 이전 시기의 몇몇 작품들처럼 화면의 큰 프레임 속에 작은 프레임을 설정하는 작품들이 많은데 작은 프레임 속에서 붓놀림의 유체성(流體性)이 자유롭게 펼쳐지는 것을 외부의 프레임이 차분하게 진정시키는 듯한 구조의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해석에는 바깥 프레임을 형성하는 화면의 회색 톤이 만들어내는 차분함도 한몫을 한다고 생각된다. 특히 이 시기의 작품들은 외곽의 프레임이 마치 그리스시대의 석비(石碑)를 연상시키면서 장성순이 어린 시절부터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아왔던 돌이라는 오브제가 새로운 형식으로 등장한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해준다.
작은 프레임 속에서 붓놀림의 유체성(流體性)이 조심스럽게 프레임의 경계를 넘어서는 작품들은 2009년의 황색 계열의 작품들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이전보다 더욱 붓의 움직임이 과격해지고 마치 작가의 손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붓의 흔적이 격렬하게 움직이는 화면을 발견할 수 있다. 부분적으로 물감이 뿌려지기도 하고 세련된 쾌속의 붓의 움직임이 느껴지기도 하며, 또 부분적으로는 사군자의 난이나 대나무를 염두에 두고 붓이 움직인 것 같은 형상을 떠올리게 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격렬성 역시 화면의 바깥까지 충분하게 확대되지는 못하고 작은 프레임을 약간 넘어서는 수준에서 그 격렬성의 에너지를 가두어두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시기의 작품들은 기법적으로도 이제까지 장성순이 구사해 온 다양한 기법이 적재적소에 도입되면서 작품의 세련미를 완성시켜 나아간다는 인상을 준다. 여기에 또 하나의 특징을 찾아본다면 이전보다 많은 경우에 작품 속에 문자가 도입된다는 점이다. 다만 이 글자들이 해독 불가능함으로써 모호함을 더해주고 있는데, 우리는 장성순이 젊은 시절 미술대학 진학에 앞서서 문학과 신학에 관심을 가졌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09년작 <추상 14>라는 제목이 붙은 작품에서는 큰 화면 속에 두 개의 작은 화면이 같은 크기로 아래위로 배열되어 있고 윗부분에는 격렬한 붓의 움직임을 담은 그림이, 그리고 아랫부분에는 이와 대조적으로 해독이 가능하지 않은 문자로 추정되는 조각들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작가는 이러한 문자의 배열을 불완전한 청력에서 오는 외부와의 소통을 위한 자신만의 ‘마음의 언어’라고 명명하고 있다. 이것은 작가의 두 가지 관심사인 회화와 문학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일 수도 있으며 감성과 지성, 혹은 디오니소스적 열정과 아폴론적 조화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이번 전시는 2011년에 이르렀던 장성순의 창작 활동에서 사실상의 마지막 작품들로 마무리 되고 있다. 청색과 회색 계열의 붓과 모종의 채색도구를 이용하여 화면에 적당한 운동성과 조화를 구사하면서 드믄 드믄 화면 속에 문자의 조각들을 배치한 작품들은 시각적으로 완성도가 높은 노화가의 호흡을 느끼게 해준다. 직설적으로 이야기해주지 않지만 관객과 함께 공감하기 위한 접점을 찾으려는 시도와 자신이 평생동안 추구해 온 시각예술의 세계가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게 표출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장성순은 말년의 작품을 마주해 온 것 같다. 다시 장성순이 2003년 인터뷰에서 이야기한 내용으로 돌아가 보면 “타피에스도 아니고 술라주의 것도 아닌 장성순의 것”을 추구했던 노화가의 예술세계는 시대의 아픔과 고난의 질곡을 넘어서고, 자신이 추구하는 미학의 완성을 위한 실험을 거듭하여 마침내 이렇게 전시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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