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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으로 발견하는 빛이 그리는 서정적 풍경

하계훈

가슴으로 발견하는 빛이 그리는 서정적 풍경

하계훈(미술평론가)

재현(representation)은 인간이 동물과 차별성을 갖게 해주는 고도의 정신 행위다. 재현에는 시간적인 역진성이 있고 과거를 현재로 끌어올리거나, 더 나아가 이를 통해 미래를 담아내는 예술적 성취가 기대되기도 하다. 고대로부터 중세와 근대 및 현대로 이어지는 시각예술의 주된 관심사 가운데 하나는 이러한 재현의 문제였다.
김창현은 이러한 재현의 수단으로 사진을 선택했다. 역사적으로 재현의 영역은 문학과 함께 주로 화화와 조각 등과 같은 시각예술이 담당하여왔는데, 19세기에 들어서서 이 장르의 생태계에 새로운 진입자로서 사진이 등장한 것은 미술사에 있어서 커다란 전환의 모멘텀을 이루게 된다. 초기의 사진은 화가들에게 치명적인 위협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초상화와 역사화를 주로 그리던 프랑스의 화가 폴 들라로슈( Paul Delaroche 1797-1856)는 어느 날 사진의 등장 소식을 듣고 동료 화가들에게 “이제 우린 끝났다”라고 탄식하기도 했다. 
사실적인 재현에 있어서 아무리 손재주가 뛰어난 작가라 할지라도 카메라 기법을 능가하기란 쉽지 않다. 실제로 데이비드 호크니가 주장하는 것처럼 미술사상의 위대한 작가들 가운데 상당수가 오늘날의 사진기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카메라옵스큐라(camera obscura)를 이용해서 대상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려는 노력을 해온 것으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카메라는 사실적 재현에 있어서 다른 어떤 수단보다 유용한 것이다.
이번에 김창현이 보여주는 사진 작품들은 기본적으로 자연을 재현한 것들이다. 다만 현대 디지털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한 사진의 영역에서 저마다 뽐내듯이 정밀하게 형태와 색채를 재현하고, 더 나아가 사진을 바탕으로 렌티큘러 등을 가미하여 2차원의 평면에 3차원의 이미지들까지 담아내려는 시도들이 쏟아지는 현상과 달리 김창현은 초기 사진의 아날로그적인 분위기를 물씬 품은 고풍스런 흑백사진을 통해 자연의 서정적 모습을 포착하고 있다. 
1년 가까이 제주에 머물면서 제작한 김창현의 작품들은 디지털 시대의 감각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될 수도 있다. 들판과 산길을 거닐다 마주친 순간의 풍경처럼 담긴 화면 속의 이미지를 통해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시대의 정신과 거대 서사도 아니고 뛰어난 재현의 테크닉을 자랑하듯 화려하게 표현하려는 시도도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김창현의 사진 작품 속의 이미지는 대상이 명확하게 드러나기보다는 모호하고 서정적이며 과학적 정밀성보다는 물활론(物活論 hylozoism)적 신비감과 생명감이 화면 가득 담겨있다.
김창현은 모티브를 탐색하고 대상을 결정하여 그것을 작품으로 완성하는 프로세스의 흐름에 있어서 시간의 경과를 물리적 혹은 천문학적 연속성이나 수학적 정렬로 파악하기보다는 작가 자신의 감각과 정서의 흐름을 반영하는 감정 작용으로 받아들인다. 다시 말해 김창현의 창작 과정은 북유럽 낭만주의자들의 자연에 대한 감정의 투사와 공감을 통한 일체감을 이룸으로써 초월적인 정신과의 교감을 이끌어내는 것처럼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는 감각적 순간인 것이다.
작가는 자신이 고안한 유리판에 1851년 영국에서 발명된 콜로디온 습판법(wet collodion)으로 감광제를 바르고 현장에서 촬영된 이미지가 감광된 유리필름에 착상되도록 하는 민감한 프로세스를 진행한다. 작가는 이러한 프로세스를 성공적으로 다루기 위하여 트럭을 개조한 암실을 현장에 몰고 가서 그 자리에서 촬영과 현상을 진행한다. 이미지의 선택과 채집에만도 여러 시간이 소요되고, 다시 이렇게 착상된 유리필름을 감광시키기 위하여 긴 시간을 소비하여야 하는 작업은 현대인의 속도찬양 태도와는 정 반대의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작가는 이 과정에서 감광제를 바른 유리판이 건조되기 전에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를 얻어내서 곧바로 현장에서 현상작업에 들어가야 하는 창작노동을 감수하여야 한다. 
이렇게 현상하는 과정에서 정밀한 광학적 사진기의 작용은 작가가 손으로 유리판 위에 바른 감광제의 농도나 흐름의 방향,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의도하지 않았던 형태상의 미세한 간섭과 왜곡 등이 고스란히 화면에 담겨진다. 이렇게 탄생된 김창현의 작품은 엄밀한 의미에서 단순한 재현적 사진이라기보다는 자연의 대상에 공감하며 투사된 작가의 정서와 그로부터 도출된 이미지가 시간의 흐름과 우연성의 개입으로 서정성과 생명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하나의 기표가 되는 것이다.
김창현이 콜로디온 습판법에 각별한 관심을 갖는 것은 타인의 도움이나 기계 장치의 힘을 최소한으로 빌리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작가가 창작의 과정에서 몸으로 느끼고 몰입하며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유리판과 약품을 직접 마련하고 촬영 후 현상된 네거티브 유리판을 자세히 관찰하는 과정에서 작가와 자연이 거리감 없이 밀착하여 교감하고, 이를 통해 김창현이 발견하는 자연의 세부적인 모습은 괴테식으로 말하자면 “가슴으로 느끼는 자연의 숭고함”인 것이다.
사진작가로서의 김창현은 미국 유학과 귀국 후의 대학 교수직을 거쳐 남들보다 조금 늦은 나이에 본격적인 창작 작업에 몰입해오고 있다. 광물리학과 기계적인 작동을 기반으로 이미지를 포착하는 사진이라는 장르의 속성을 극복하면서 옛 사진의 기법을 통해 ‘자연의 영혼’을 포착해내기 위하여 노력하는 작가의 첫 성과가 이번 전시를 통해 관람객들과 폭넓게 교감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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