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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의 개입이 펼쳐주는 시각의 확장

하계훈

미디어의 개입이 펼쳐주는 시각의 확장 


하계훈(미술평론가) 


정화용은 시각적 이미지를 창조하는 데 있어서 전통적으로 사용되어왔던 물감이나 붓을 사용하지 않고 그림을 그려낸다. 엄밀히 말하면 정화용은 그려내기보다는 만들어낸다(manipulate)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캔버스나 종이 대신 디지털 기기의 모니터 화면 안에 기계적 명령어를 전달하여 이미지들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일정한 원리에 의하여 반복과 확산, 그리고 초현실주의 작가들이 사용해왔던 표현 방법 가운데 하나인 데칼코마니 방식의 좌우대칭 화면을 만들어내거나 자기분열적(fractal) 단편의 선형적 움직임 등을 통해 우리가 일상적인 시각적 체험에서는 미처 감지하지 못했던 새로운 이미지들을 만들어서 그것을 우리들이 전시장 공간에서 마주하도록 하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이러한 작품들은 작가의 미감을 바탕으로 상상력과 선별력, 그리고 이러한 창작 과정을 기능하게 해줄 수 있는 하드웨어와 이것을 능숙하게 다루는 기술적 협력자의 도움 및 우연성의 행운 등이 잘 갖추어질 때 뛰어난 작품으로 탄생할 수 있다. 아티언스 대전 17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작가 정화용은 2016년에 이어 2017년에도 2회째 연속 참여자로서 예술과 과학의 협업이 낳을 수 있는 성과의 긍정적인 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올해에 한국기계연구원의 두 연구실인 자기부상연구실, 나노공정연구실의 연구팀과 함께 협업을 진행하여 작품을 제작하고 있다. 

예술가나 과학자들은 역사 속에서 항상 존재해 왔고 그들 가운데 후대에 자신들의 업적을 남겨온 사람들의 공통점은 기법이나 주제 면에서 자신들의 시대를 한발짝 앞서서 창작하고 연구해왔다는 점이다. 이러한 예들 가운데 미술에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대기원근법이나 히에로니무스 보슈의 상상력 넘치는 초현실주의적 제단화, 프란시스데 고야의 상상력과 마네나 피카소 등의 작가가 자신들의 대상과 화면을 바라보는 시각, 잭슨 폴록의 물감 뿌리기 등 여러 사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 선도적인 창작 활동의 전면 대열에 정화용이 실험적인 디지털 이미지를 다루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정화용의 경우 시각적 이미지가 창조되는 방식을 디지털 기술과 결합하고, 그럼으로써 일반적인 시각으로는 포착하기 어려운 방법으로 물질을 합성하고, 조립, 제어하며 혹은 그 성질을 측정, 규명하는 나노기술과 결합하여 우리들이 시각적으로 경험하는 영역의 확장을 가져다주고 있다. 정화용의 작품과 비슷한 기시적(deja vu) 체험을 애써 떠올린다면 아마도 어린 시절 신기하게 들여다보았던 만화경(kaleidoscope) 속의 환상적인 이미지 정도일 것이다.

정화용은 자신이 협업하고 있는 고도의 기술과는 어울리지 않을 것같으면서도 묘하게 균형추(counterbalance)를 만들어내는 우리의 전통무용인 승무에 착안하였다. 작가는 승무의 역동적이고 섬세한 움직임에서 번뇌를 이겨내려는 인간의 정신을 포착하여 그 움직임을 디지털 기술과 결합시켰다고 한다. 그리하여 작가는 “컴퓨터 코드가 우연히 만들어내는 때로는 철저하게 계산된 이미지들은 인간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고유한 아름다움과 기계가 만들어내는 이미지들로써 기계와 인간의 끊임없는 교감을 보여준다”고 언술하고 있다. 이 작업에서 작가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몸의 언어와 소리를 디지털 파노라마 속으로 주입하여 새로운 순환의 미학적 형태를 만들어내고 있다. 

작품 <경계속에서의 표류>(2017)는 움직이는 비디오 설치작업으로, 현미경으로 바라본 물질속의 숨겨진 물질의 구성이 프랙털 원리에서 파생된 디지털 자기 유사성(self-similarity) 이미지로 확장되어 움직이는 파노라마를 표현하고 있다. 작가는 이러한 가상공간(어쩌면 이 공간은 가상공간이 아니라 존재하지만 우리가 맨눈으로는 볼 수 없는 실재의 공간일지도 모른다) 속에서 인간의 표류와 여정을 영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공간에서 “무용가는 비물질과 물질이 만들어낸 이미지의 경계 속에서의 막연함과 두려움을 몸짓으로 표현하고, 가상과 실제, 인간과 기계, 그 끊임없는 상호작용 속에서 재생산되는 오브제들이 공간을 메꾸게 된다”는 것이다.

이 이외에도 정화용의 작품 Hexa(2015), Cosmos(2014), Euphoria(2014) 등은 실험적인 비디오 인스톨레이션 프로젝트로서 코드로 생성된 비주얼 오브젝트, 비디오 스틸이미지, 유기적 이미지들이 결합되어 새로운 형태의 초현실적 풍경화를 묘사한 작업이다. 컴퓨터 코드에 의해 랜덤하게 만들어진 비주얼 이미지들과 프랙털 원리에 의해 탄생한 오브제들이 초현실적 풍경화처럼 표현된다는 점에서 회화적 전통에 접목되어 있으면서도 작가가 화면을 주관하는 지배력을 기계와 공유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새로운 형식의 창작행위로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정화용은 실시간으로 미세먼지 농도와 대기상태 정보량을 시각화한 디스플레이 기반의 설치작업인 에코트론과 움직이는 유기적 조형작업으로서 테크놀로지를 이용하여 거울 프레임 속에 설치된 이미지가 연속적으로 등장함으로써 정지된 오브젝트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새로운 형태의 시각화 작업도 선보였다. 

정화용은 자신의 작업을 위하여 일반적으로 시각예술 작가들이 채택하는 기법이나 모티브와는 거리가 있는 방법과 대상을 선택한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갖는다. 물론 이러한 방법이 첫 만남에서 관람객들에게 신선감과 시각적 충격을 줄 가능성이 높고 어느 정도 환상적인 효과를 수반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러한 창작 방식이 장점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우리 주변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점점 잊혀져가는 본질적인 부분들을 관객들에게 새로운 형태로 체험화하고 자연 속에 인간의 존재성을 주제로 새로운 형태의 미디어로 재현”하는 실험적인 작업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이 기계적 도움으로 보존되고 전송될 수 있다는, 관람자와의 새로운 인터페이스를 강조하고 있지만 미술전시장을 방문하는 관람객의 정서 한구석에는 작품의 텍스쳐나 실재성(substantiality)과 같은 아날로그적 모습이 주는 안도감에 의존하는 면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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