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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女/旅行)

하계훈

여행(女/旅行)


하계훈(미술평론가)


작가 이선주의 작업은 일관되게 ‘여행’이라는 주제를 유지하고 있다. 다만 여기서의 여행은 중의적인 표현으로서, 흔히 공간을 이동하는 행동으로서의 여행이면서 동시에 여성으로서 삶을 살아가며 느끼고 사고하는 과정으로서의 여행이란 의미로서 동음이의어인 ‘女行’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에서 이선주가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는 이러한 여행 과정을 동반한 사물들 가운데 일반적으로는 크게 중요한 의미를 갖지 못할지 모르지만 작가 자신에게는 특별하고 소중한 의미를 갖는 물건을 통해 자신의 인생 투어를 돌아보는 것이다. 이러한 물건들은 특정한 사람들에게는 그 물건들의 사회적, 경제적 가치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귀중한 가치와 의미를 주는 것들로서 그것들을 바라보기만 하여도 특정한 시간과 장소의 기억과 그로부터 풀려나오는 수많은 이야기 거리를 떠올리게 해준다.

이선주는 젊은 시절 외국생활에서 그곳 중산층 가정의 식기류 가운데 흔히 일상의 식탁에 놓이는 밀크 글라스(Milk Glass)를 꾸준히 수집하여 왔다. 밀크 글라스는 1869년 영국에서 처음 사용되었다고 전해진다. 1920년경에는 미국의 중산층 가정에서 널리 사용되었고, 지금은 적은 돈으로 구매하여 일상의 식기로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다. 하지만 이 물건이 만들어진 초기에는 귀족들이나 사업가들의 식탁에서 주로 사용되었고 식기 뿐 아니라 샹들리에와 같은 가구에도 사용된 재료를 밀크 글라스라는 이름으로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이선주에게 밀크 글라스는 이러한 역사의 회고를 위한 자료가 아니라 낯선 이국땅에서 이방인처럼 살아가는 가정의 안주인으로서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용기 가운데 하나였으며 마치 그 시절의 가족들의 모습을 기록한 가족사진 같은 일종의 상징적 기념품(memorabilia)이었다. 작가는 이러한 밀크 글라스를 자신의 삶의 궤적과 거기에 수반되는  소소한 일상의 이러저러한 추억을 떠올리게 해주며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다리’라고 표현하고 있다. 

심리학자 프로이트에 의하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떠올리는 생각이나 꿈속에서 일어나는 상황은 아무리 소소한 것일지라도 그것이 아무 이유 없이 일어나는 법은 없다고 한다. 이선주의 밀크 글라스처럼 연상 작용의 단초를 제공하는 오브제가 있는 경우도 있고, 짧은 순간 스쳐가는 향기나 소리 등 미미하다 하더라도 그 무언가가 우리의 무의식과 잠재의식으로부터 추억의 불씨를 당겨준다고 한다. 그리고 생각과 연상의 과정에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아픔과 트라우마의 기억을 회피하거나 억제하고, 그 반대의 기억, 즉 아름답고 따뜻한 기억은 현재로 불러들이는 과정을 적극적으로 시도하는데, 그때 우리의 의식작용은 이 과정을 방해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이선주는 이처럼 젊은 시절 외국에 머무는 이방인으로서의 자신이 그 사회에 접목하는 상징적 의미로서 하나하나 수집해 온 밀크 글래스를 카메라 앵글 안에서 새롭게 바라보는 기회를 갖는다. 작가에게 밀크 글라스는 그저 하나의 식탁 기물로서의 오브제가 아니라 자신의 과거 경험과 추억이 투사된 상징적 자아이며 작가의 삶과 동일한 비중을 갖는 심리적 흔적으로서 그것은 곧 작가의 삶과 등가물이라고 할 수도 있다. 

작가는 이러한 밀크 글라스에서 낯선 곳과 내가 살던 익숙한 곳 사이의 서로 다른 느낌이면서도 동시에 묘한 공통점을 갖는 그 무언가를 감지한다. 작가는 이러한 밀크 글라스에서 느끼는 미묘한 공감을 있는 그대로 사진 작품 속에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으로 화면 속에 스며들어 거의 그 모습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극단적인 형태 증발을 시킨다. 그렇게 함으로써 작가는 상징적 기물로서의 그릇이 그 자체의 물성을 잃어간다는 것을 소유자의 기억을 증발시킨다는 은유적 상황으로 제시한다. 또 다른 작품에서 작가는 이러한 밀크 글라스를 검은 화면에 배치함으로써 소멸되어가는 기억, 즉 점점 희미해져가는 망각의 상태를 은유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번 출품작 가운데 또 다른 memorabilia는 작가가 오랜 기간 동안 수집해 온 포장지다. 포장지의 의미는 내용물을 보호하거나 그 내용물을 보다 정갈하고 성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포장지의 조형성과 상징성에 관심을 가지고 오랜 동안 자료를 수집해온 작가가 이번에 제시하는 작품들은 이러한 포장지의 부분 부분을 여성 지인의 얼굴과 몸에 모자이크식으로 부착함으로써 작가의 삶의 여정이 파노라마처럼 전개되는 시각적 효과와 여성으로 대표되는 작가의 자아를 기억의 증표들로 감싸게 됨으로써 발생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동시에 표현하고자 하였다. 소중하므로 포장되어야하고 포장됨으로써 보호되고 보존되기도 하지만, 이선주의 작품 속의 인물은 앞을 볼 수 없도록 얼굴 전면이 포장지에 덮여짐으로써 소중하게 지켜지지만 앞을 볼 수 없게 불안해지는 존재, 작가 자신일 수도 있고 우리 모두일 수도 있는 존재의 불안도 함께 담아내고 있다. 

이번에 출품된 이선주의 작품들은 지난번 전시에서 보여준 작품들에 비하여 사유의 깊이를 더하며 물리적으로 좀 더 대상에 다가가고 있다. 그리고 그 접근은 물리적인 접근만이 아니라 내적인 혹은 심리적인 접근에서도 거리를 좁혀가고 있다. 이러한 과정은 필연적으로 기억과 연상, 그리고 회고와 같은 자아를 향한 내향(內向)으로 나아가는 경향을 보이며, 작품의 이미지 표현에 있어서도 재현적이기보다는 은유적이고 상징적인 형태의 표현으로 나타나게 된다. 사진 작업을 통해 삶의 ‘여행’을 지속하고 있는 작가에게 이번 전시는 또 다른 차원에서의 자아를 향한 내향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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